47. 낡지 아니할 큰일 (1)
노인의 지혜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가, 하면 넋의 나이로 따져 지금 조선 팔도에서 가장 늙은이라 하여도 무방할 귀남조차 쉽게 단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매양 세상일에 임할 때 두어 번쯤 숙고하고서 마음 정하기 마련이니, 철모르는 젊은이보다야 실수는 적을 것이요, 또 사람을 마주함에 있어서는 그 낯의 밝아지고 흐려짐을 얼마쯤은 알아챌 수 있으므로 역시 연소한 이들이 쉬이 따라할 수 없을 것이다.
허나 생판 처음 접하는 일이라면, 결국 나이의 많고 적음보다는 사람의 본바탕 재간이 중하기 마련이니, 귀남이 별 생각 없이 처분 내린 일이 가끔은 엉뚱하게 돌아와 스스로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예컨대 국제 세운 이래 조금 한산해지는가 싶었던 일과가 도로 가득 차게 된 것도, 따져보면 저 한 사람 외에 따로 탓할 사람이 없는 일이었다.
기무회의의 제도를 마련하면서 차대는 절로 사라지고, 그저 육조에서 나아와 회의에서 거론된 것과 그 외 아룀이 가하다 여기는 사안을 보고하는 정도만 남았다. 그렇다고 경연의 횟수를 늘리는 것도 어려웠으니, 말로야 학문 가까이 하시니 나라의 큰 복이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힘들어할 것을 뻔히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명색이 임금인데 어찌 허송세월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대신 윤대(輪對)의 횟수를 늘리고자 하였는데,
“무릇 윤대의 제도는 국조 초에 당송(唐宋)의 성시(盛時)로부터 그 법을 따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막는 폐단을 없애고 여러 신하의 현부(賢否)를 가리는 덕을 얻고자 시행하였으니, 영·정묘조(영조, 정조)에 그 제도가 흥성하여 언로가 크게 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옥음 내리신 취지는 참으로 옳고도 아름답다 하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국사(國事)가 다망하여 위로는 정승부터 아래로는 녹사(錄事)까지 지극한 성은에 보답코자 주야와 침식(寢食)을 잊고 있으니, 윤대의 횟수를 늘림은 곧 이들로 하여금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하는 폐단을 낳을까 두렵사옵나이다.”
다름 아닌 최익현이 이렇게 직소하며 딴지를 걸었다. 그때 문득 생각하기를,
“내 알기로 윤대의 옛 제도는 품계로써 입시할 이를 정하는데, 참의대부도 비록 육조의 반열에 들지는 않는다지만 따지면 조정의 사람이요, 품계도 또 내리지 않는가?”
최익현이 듣고 보니 윤대 들 수 있는 이는 문관으로 6품, 무관으로 4품이 그 규정이라, 엄연히 종4품 품계 받는 참의대부라면 임금 말마따나 윤대의 범위에 넣음도 불가한 일은 아니었다. 또 생각해보면, 참의대부는 단순한 벼슬아치가 아니라 각 군현을 대변하여 나온 이들이니 언로 넓힌다는 취지에도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귀남이야 지방의 사정을 그 지방 수령 외 다른 이의 입으로 듣는다는 정도의 명분만 생각했지만, 또 참의원 사람들 듣기에는 이만한 호재가 드물었으니, 저의 뜻 아뢰어 임금으로부터 ‘네 말이 옳다’ 소리 한 번 들으면 그 다음 모임에서 대폭 제 목소리에 힘 실릴 것이 명백하였다.
그리하여 나랏일 중 머리 아픈 세세한 사항에 대해서 마침내 손을 털었다 생각하자마자 다시 그것을 눈앞에서 마주하게 되었으니, 탓할 사람은 저 한 사람 외에 따로 없다 함이 이를 이름이었다.
“무릇 나라의 문물이 일신하여 뭇 백성의 풍족함은 나날이 더해지는바, 그것을 다루고 또 나아가 지극한 정도(正道)에 도움 되게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참의원의 제도를 처음 세울 때, 제한하여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한 자만 추거하여 올리게 하였으니, 이 뜻을 지켜 이어나감이 참으로 옳다 하겠습니다.”
나라 풍속이 한 번 어지러워진 이래로, 선비 많은 삼남 고을로 말하자면 읍마다 초시와 생원이 한가득이요, 선비 적은 북변 고을에도 동리에 글 좀 읽었다 하는 사람이면 진사 한둘씩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속으로야 집안 한미하다 욕할지언정 겉으로는 막을 핑계가 없었으니, 이는 까마득한 옛날 같은 시절, 제대로 된 정당은 없고 그저 저의 성향 따라 산당(山黨)이니 유당(儒黨)이니 부르던 시절부터 몇몇 대부들이 생각하던 폐해였다.
“송구하오나, 지금 개화당이 아뢰는 뜻은 도리어 성총을 가리고 언로를 막히게 하는 폐단을 낳으니 쉽게 택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성상 전하께서 사위(嗣位)하신 이래 상서(庠序, 학교)가 크게 일어나 나라의 인재를 고루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과거의 제도도 한 차례 정비하여 그 과목이 늘어났는데, 지금 향리와 여항의 사정을 살피면 덕행과 문재로 이름난 사람으로 불행히 시학(時學)의 가르침 얻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임오년(1882) 식년시를 끝으로 시부(詩賦)와 책문만 보던 과거는 말 그대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대소 유별(有別)이 있다지만, 사마시(司馬試, 소과)도 과거는 과거이므로 대과 과목을 늘릴 때 함께 정비하였다. 그러니 예전처럼 문장만을 보는 시험은 끽해야 가끔 시골 백일장 여는 것 외에는 더 열리기 어렵고, 설령 열린다 하여도 급제하는 이에게 실직 제수할 일은 없을 터였다.
집안 번듯한 젊은이로 요새 양이의 문물 배우지 않는 이가 드물다지만, 그래도 새 과거까지 볼 만큼, 그러니까 어디 대학원 들어가 몇 년간 골 아픈 공부에 전념할 여력 되는 이로 말하자면 아무래도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았다. 정말 총명한 이들이라면 스스로 노력하여 능히 급제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처음 과거의 제도를 혁파할 때만 하여도, 대원군을 비롯한 공산당 중진들은 아직 옛 과거에서 등과한 이가 수두룩하므로 한동안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믿었고, 기실 지금도 개화당과 다툴 일이 적지 않거늘 무슨 그런 일로 벌써 힘을 빼느냐 하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지방 군현의 젊은이들이 말하기를 이대로라면 장차 공산당 대부의 씨가 말라버릴 것이라 하며 동네 개화당 유지들을 가까이하고 있다 하였다. 운현궁과 별 연줄 없이 그저 그 당이 좋아서 (아니면 그 당에 든 사람과 친해지려) 들어왔던, 그리고 개중에서도 앞날 아직 창창하던 대부들로서는 조바심이 날 법도 하였다.
그리하여 갑신년(1884) 여름인 지금, 경복궁이 준공된 뒤에 마지막 상량을 하겠다며 짓기는 다 지었지만 아직도 ‘공사 중’인 참의원 대신 어전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전하, 감히 말씀 올리건대, 국초 이래 문풍(文風)이 흥성함이 지금과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나라의 지극한 정사가 갖추어져, 배우고자 하는 이는 능히 배울 수 있고, 익히고자 하는 이는 족히 질정(質正)할 스승을 구할 수 있으니 아름다운 일입니다.
허나 성세 가운데는 이를 사사로운 욕심으로 망치는 자들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 자들이 스스로 선비라 칭하며 지극한 왕업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을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살피건대 같은 사류(士類)의 자제 가운데도 현토(懸吐)하지 않은 경서를 읽는 이가 대를 거듭할수록 드물어지고 있는데, 이제 글을 가까이하지 않고도 참의대부로써 출사할 수 있다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지금 이르는 바는 통달한 듯하면서도 궁벽하니, 스스로 이른 것처럼 사사로운 욕심이 어찌 없다 하겠습니까. 대대로 권세 누려온 벌열의 자제라면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둘 수 있으나, 청렴하고 근검한 집안의 자제는 정학에만 뜻을 두거나 곁가지에 마음 흩는 것, 둘 중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올바른 풍속을 권면하기 위해서는, 때에 맞추어 조처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어라? 지금 궁벽하다 하였소?”
“언로를 크게 터, 올라오지 못하고 막히는 목소리 없게 함이 참의원의 대의일진대 어찌 궁벽하다 하지 않겠소?”
어전임을 잊고 두어 순 더 아웅다웅하다가, 그제야 정신 차리고 숙연해졌다.
“허, 어찌 멈추었소? 무릇 정사에 항상 뜻이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 더 이야기하여도 괜찮소.”
정작 임금이 직접 ‘재밌으니 더 해보아라’ 하며 멍석 깔아주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으므로 우스운 일이었지만, 이후 몇 번 윤대에서도 비슷한 다툼이 계속되었으므로 무언가 변통하는 바 있어야 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임금이 지금 당장 어느 쪽 편을 들 필요는 없었다. 귀남 살던 세상에서야 이럴 때 다수결도 하고 하였다지만, 아직 체면 차리기 좋아하는 참의원에서는 그 공론을 만드는 것을 중히 여겨 대놓고 그리하지는 못하고 있었으니, 이렇게 두 당의 당론이 팽팽한 상태에서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결국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잠잠해지고 말 터.
아직 운현궁에서 조정해달라며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그쪽만 믿고 있기에는 또 곤란하였다. 나라 안의 은밀한 일은 혀 내두를 만큼 나이 무색하게 잘 처리하는 대원군이지만, 의외로 한 길 사람 속을 살피는 데는 부족함이 있었다. 아마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너 따위가 불만 품은들 무엇하겠느냐’ 하는 지나친 자신감이겠지만.
그러니 훗날 화근 될 만한 일이 눈에 들어온 이상 앙금을 풀어주고 갔으면 좋겠다 생각하기는 했다만, 귀남이 언뜻 보기에 저 두 입장 사이에서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처음 과거 과목을 늘리자 하였던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 뒤 열렬히 신료들이 따라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와서 물리자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지금 있는 진사시만을 똑 떼어서 예전처럼 다시 시행할 수도 없었다. 여러 대학원들이 저들 가르치는 바를 넓혀 양이의 학문도 꺼리지 않으므로, 성균관도 나라 가르침의 큰 근본 되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는데, 명색이 성균관 들 자격을 주는 시험인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예전처럼 경의(經義)나 시부(詩賦)만을 보았다가는 가르침에 곤란함이 꽃필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한창 고민하고 있는데 멀리 후원을 가로질러 요새 부쩍 키가 크고 있는 – 여전히 아비 눈에는 어린아이였지만 – 세자가 일행 대동하고서 총총 걸어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라지만 아직 무더위는 찾아오지 아니하여, 응달에 앉아있으면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딱 덥지도, 춥지도 않아 상쾌하였다. 그리하여 글공부 소식도 본인 목소리로 들어볼 겸, 이렇게 좋은 날 가끔 바람도 쐬게끔 해주고자 불렀던 것이다.
“숙수로 하여금 양과자를 굽게 하였다. 양인 처자 손씨(손탁)로부터 그 솜씨 배워오게 하였는데, 내 맛보니 참 그럴듯하게 따라하더구나. 꺼리지 말고 들거라.”
“예, 아바마마.”
표정을 감추려 해도 희색 완연한 것이, 아직은 어린아이다. 물론 아비 눈에 아들이 아기 티를 완전히 벗을 날 있겠냐만.
“스승이 근래 계속 바뀌니 세자의 공부도 어려움이 있겠구나. 근래 어떠하더냐?”
관제를 고치면서 겸직은 가능한 한 없애는 것이 개편의 원칙이어서, 이런저런 직책을 주렁주렁 달기 마련인 영의정 자리도 이제는 총리대신 하나만 겸직하게 되었다. (그것만 해도 이전 영의정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바빠지기는 했다.)
그러다 보니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의 시강원사(시강원 총책임자) 자리도 영의정이 겸직하던 것을 슬슬 기로소 들기 전 영부·판사(영·판중추부사) 할 연배의 노신으로 하여금 전임케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하필 근래 노신들이 죄 몸이 불편하여 사직하거나 아예 작고하는 일이 잦아서 자연스레 세자의 스승도 서너 달에 한 번꼴로 바뀌게 되었다.
“스스로 부족함을 아니 어찌 돌아가는 사정을 탓하겠습니까. 오직 정진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나이 열한 살 먹은 지금은 제법 성숙하여, 통상 오가는 말에 대꾸하는 것만 들으면 그럴듯하면서도 의젓하니 어른이 따로 없었다. (물론 이 역시 귀남의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였다.)
애초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애매할 때는 그렇게 에둘러 말하면 되니, 미리 말을 여러 가지 생각해두라 일러준 것이 귀남 아니었던가. 어려운 말은 미리 준비하였다가 그때그때 풀어놓아라. 옛적 오경석에게 배운 나름의 비기(祕技)였다.
“허허, 기특하구나. 그래, 노둔하든 총명하든 스스로 힘쓰면 현량한 사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 듣자 반색하면서도 살짝 걱정하는 기색 비추는 것이, 머리 굵었다 한들 여전히 속마음 읽기는 여반장이라.
“소자 백방 노력한들 어찌 아바마마를 따르겠습니까.”
“그 무슨 소리더냐. 나는 소싯적 공부에 마음을 두지 않아 군밤 굽는 잡기에 힘을 쏟다가 과분한 은총을 받았으니, 내 너의 나이일 때는 사서(四書)도 통달하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사직한 홍순목도, 얼마 전 작고한 한계원도 모두 이르기를 그의 아버지 주상은 실로 열성조의 은총으로 금세에 임한 성군이라 하였다. 비록 눈치 없고 머리는 둔한 세자라지만, 그 말을 계속 듣다 보니 단순히 아첨하는 말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수소문해보니 그들 말이 옳았던 것이라, 잘은 몰라도 저의 아버지가 보위 오르기 전 조선국은 국운 쇠미하고 해마다 재난에, 백성은 반심 품고 외국은 아예 그런 나라 있는 지도 모르거나, 혹 알더라도 우습게 보았다 하지 않았던가.
피로 따져 저의 조부인 대원군과 재동 환재대감, 서양에서도 무수(무슈) 최선생으로 불린다는 최익현,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신료들. 인물 쟁쟁하기로는 선조대왕 시절에 비길 법하다 하는 지금이지만, 그들만큼이나 총명할 것만 같은 그의 어머니가 누차 말하기를 그런 사람들을 모두 아래에 거두어 지금의 성세를 일구어나가는 것이 그의 아버지 주상이니 얼른 공부하여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라 하였다.
“나라고 무슨 신산묘책(神算妙策)이 있어 나랏일을 이끌었겠느냐. 누구 다치고 한 품지 않도록 가운데 지키기만 잘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그 길이 정답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아직껏 나라가 나라 꼴은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대로 하게 되면 저의 당초 계획대로 누구의 원한도 사지 않을 테니, 설령 (그럴 공산은 나날이 줄어드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나라가 그의 아들 대에 망한다 할지라도 아예 대가 끊어지거나 할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닦달하는 어머니 중전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너도 할 수 있다. 잘만 하면.’이라고 답하는 아버지가 더 어려운 것이라. 그런 눈치를 놓치지 않은 귀남이 한 마디 더 보탰다.
“물론 세상에 지모 빼어난 사람들이 많지만, 그래도 사람일진대 어찌 편벽한 마음 없겠느냐.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수두룩하지만, 그 중 한두 가지 명안 없는 사람이 또 없겠느냐. 그러니 그런 말을 고루 듣다 보면, 더 좋은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한 본인이 듣기에도 꽤 그럴듯한 것이, 이 정도면 노인의 지혜 아닐까 싶었다 (아직 몸으로 따지면 노인 소리 듣기는 한참 일렀다만).
“지금 한창 참의원에서는 물밑 다툼이 일어나고 있단다. 참의대부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보아야 하는데, 한쪽에서는 과거가 너무 어려워서 부자들만 대부가 될 수 있다고 문제를 삼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래도 과거가 없으면 어떻게 사람을 거를 것이냐고 반박하고 있지. 자, 너라면 무어라 하겠느냐.”
귀남 본인도 답을 찾지 못한 것이었으니, 세자인들 알겠는가. 누구도 답을 쉬이 알 수 없으니 서로 대화하고 합의하여 그나마 나은 방책을 마련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말을 꺼낼 생각이었는데, 의외의 현답이 나왔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과거를 쉽게 만들면 어떨지요?”
세자가 평소에 경서를 강독할 때마다 품곤 했던 희망사항을 잔뜩 담아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소자가 글공부를 할 때, 진서로 된 경서를 읽는 것은 어렵지만 스승들께서 말로 일러주시는 그 속뜻을 듣고 나면 능히 알 수 있었습니다. 언문으로 풀어쓴 경서로 공부하게 되면 보는 사람도 쉽고 뜻은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을는지요?”
의외로 그럴듯하였다. 애초에 당연히 글은 한문이고, 그걸 식자라면 다들 참된 글(眞書)이라 일컫는다지만, 귀남 그가 생각해보아도 그 옛날 소학교에서는 새 발자국 같은 왜말로, 해방 후를 생각하면 (비록 학교 문턱은 다시 넘지 못했지만) 가갸거겨 우리말로 가르칠 것은 다 가르치지 않았는가?
“하하, 좋은 생각이다. 나랏일에 다 나름의 연유가 있어, 쉽게 시행할 수도, 이미 한 일을 무를 수도 없는 것이지만, 지금 네가 말한 것처럼 계속 방도를 고민하고 또 사람들을 모아 머리 맞대다 보면 명안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란다.”
“예, 아바마마. 소자 마음 속 깊이 새기겠사옵나이다.”
물론 새기는 깊이는 다르겠지만, 귀남 역시 세자의 답을 마음속 한 군데에 담아두었다. 다음 기무회의에서 발의해봄직 한 일 아니겠는가.
얻어걸린 것 치고는 꽤 괜찮은 발상이라, 퍽 기특하였다. 세자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이 도로 확 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 아니겠습니까, 고균 형님.”
어색한 ‘포-즈’로 당구공을 툭 치면서 홍영식(洪英植)이 말했다.
한양 제2의 구락부(俱樂部)는 이곳, 장의동에 있다.
구락부라는 이름은, 따지면 일본국에서 먼저 ‘클럽’을 옮겨 그럴듯하게 음차한 것이요, 같은 도성 안에서만 따져도 두 번째였다.
특허인지 전영인지의 일로 미리견 공사관을 종종 오가던 안태훈이 선수를 쳐서, 먼저 정동에 건물 하나를 세 내어 이름하기를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라, 문중 불문하고 널리 사람 받아들여 새 시대 양속(良俗) 권면하는 것을 그 정강으로 삼았던 것이다.
“무엇이 말인가?”
만약 김옥균 자신이었더라면 무엇이든 첫 번째, 으뜸이 되어야 하니 이름도 아직 천한 느낌 가시지 않은 영어 대신 교양 있는 불어를 옮겨 살롱 비슷하게 불렀겠지만, 이 장동구락부 꾸린 것은 전 영의정 홍순목의 귀한 늦둥이 홍영식이었다.
“요새 기무회의에서 성현의 말씀을 언문으로 옮기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더군요.”
“뭐, 그 정도야 고릿적 『격몽신편』도 언해본을 함께 돌리지 않았던가. 경서도 따지자면 마찬가지고.”
홍순목은 남양 홍문의 대들보이자 조정의 큰 인물로서 적잖이 이런저런 사업에 끼어들어 은근슬쩍 문중의 이익도 얻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개화당에 직접 기웃거리지는 않고 있었다. 아마 나름의 처신이겠지만, 그 아들 홍영식은 그런 사정 알 바 아니니, 저와 비슷한 처지의 젊은이들 모아다 이렇게 구락부 차린 것이었다.
말로만 구락부요 실제로는 그저 다점인 정동구락부와는 달리, 양주도, 연초도, 당구도 있는 곳이라 그런 여유 즐길 만한 집안 자제들 사이에서는 꽤 입소문이 났다. 다만 '장동구락부'라 하면 공교롭게도 정동구락부와 너무 비슷하였기에, 부르는 이름은 지난 달포 사이 두세 번이 바뀌었다. (김옥균도 한 번은, 이왕 이름지을 것 근본 있게 충의(忠義) 구락부 어떻겠느냐 제안하였다가, 엉뚱한 오해 사 사람 여럿 잡을 일 있냐는 홍영식의 면박을 당한 바 있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언해본을 근본으로 삼겠다 그 말입니다. 얼마나 맞는 얘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숫제 시권(試券)을 언문으로 써서 내도 가감없이 그 내용만으로 평하도록 한다... 그런 얘기도 있더군요?”
“허, 저자에 도는 소문이라는 게 대저 그러한 것 아닌가. 언문이라는 것이 백성으로 하여금 편리함을 얻도록 창안한 물건이니 참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진서를 갈음하겠나?”
‘탕’ 하는 청명한 소리 나더니, 그래도 막대는 막대요 공은 공이라는 듯 당구공 굴러가 다른 공을 툭, 툭 쳤다.
“만약 언문으로만 글을 써서 진서처럼 의미가 깊게 통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글재주 있는 이일 테니 나라에서 씀도 가하겠지!”
허나 허심히 농 던지는 김옥균이 곧 입 떡 벌릴 일이 있었으니, 근래 노쇠하여 도통 재동 집밖을 나서지 못하는 저의 스승 박규수가, 나라 안에 길이 이름 오르내릴 기서(奇書) 남기겠다며 열과 성을 다해 마무리하고 있는 글의 제목이 ‘함論 을情事 의國隣 과國遠’ (먼 나라와 이웃 나라의 사정을 논함)이요, 그 내용은 『격몽신편』 언해본보다도 더 언문 많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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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문(文)이 가지는 중요성은 낮추어볼 수 없지요. 그것을 정면으로 건드리게 된 귀남과 박규수입니다.
이전에도 몇 번, 아직 개화파 관료들이 말직에 머무를 때 귀남과 마주치는 계기 되었던 윤대가 다시 나왔습니다. 이론상 월 3회 시행하는 것으로, 하급 관료가 왕을 직접 만나는 자리인만큼 상당히 복잡한 절차가 있었습니다. 시행하기 나흘 전 임금의 승낙을 받고, 그 뒤에는 다시 윤대 대상자 명단의 승인을 거친 뒤, 시행할 때도 각 윤대관이 용안을 뵙기 전 관등성명과 자기소개를 하게 시켰습니다.
상하 소통을 돕고 신진 관료들의 인품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조선 초부터 그런 제도의 중요성이 언급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숙종~정조 연간이었고, 그나마 월 3회라는 이론상 수치에 달하지는 못했습니다. (왕 앞에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종6품 관원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작중 언급된 것처럼, 홍영식은 홍순목의 늦둥이 둘째아들입니다. 첫째아들 만식이 그의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는 바람에 사실상 말년에 본 외동아들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라서 성정이 제멋대로인 면이 있던 듯합니다. 흥선대원군의 편이었던 아버지 눈치를 보지 않고 박규수, 그의 사후에는 유홍기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것을 보아도 그렇지요.
원 역사에서 1884년은 그와 그의 집안에는 불행의 해가 되었습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홍영식도 살해당하자, 홍순목은 며느리 조씨와 홍영식의 어린 아들 등 일가와 함께 음독자살하였습니다. 작중에서는 그럴 일 없이 편한 노후를 보내겠네요. (물론 늦둥이 아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사 클럽은, 이미 17~18세기에 영국에서 발흥한 커피하우스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하지만 계통상 그렇다는 것이고, 빅토리아 시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 수 있던 이유는 따로 있지요. 당시의 엄격한 도덕주의와 가부장주의 속에서, 성인 남성 (그리고 일부 여성)이 개인으로서 사교와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장으로서 클럽이 대두된 것입니다. 여러모로 비슷한 경향이 있는 개화당 세도가 자제 사이에서 클럽이 인기를 끌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원 역사의 정동구락부는 본래 1890년대 중반 정동에 있던 서구 외교관들이 꾸린 모임으로, 대한제국의 개화파 정치인들도 참여하였습니다. 손탁호텔 1층의 커피숍은 정동구락부가 자주 모이는 장소가 되었지요. 이 모임은 특히 일본을 배제하려는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춘생문 사건 모의, 독립협회 창립 준비 등 많은 정치적 격랑의 중심에 있게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