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42화 (142/320)

46. 가운데 마음 (3)

처음 귀남이 생각하기에, 조선 코가 석 자인데 득도 실도 없을 일이라면 굳이 끼어들 것까지야 있을까 싶었다. 허나 신료들 아뢰는 사정 들어보니 실은 없으되 득은 많은 것이 남의 나라 사이 다툼 중재하는 일이라.

“대저 나라 사이의 도의란 사람 사이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나라의 크고 작음과 물산의 많고 적음은, 사람 사이 재주와 용력이 다른 것에 비할 수 없이 천차만별이므로, 나라 간에 지키는 예의 쓰임이 다를 뿐입니다.”

계해년 환국 이후 산림에서 등용된 선비들은 아문과 육조가 합하여진 이후 그 세는 날로 줄고, 또 뒤를 이어야 할 후학들은 대학원 거쳐 문중에 따라 혹자는 천한 상공의 일로 귀 잡혀 끌려가고 혹자는 조정이 아니라 사법원으로 들어가므로 수효도 나날이 줄었다.

그리하여 저들 목소리 지키고자 그런 무리 중 가장 명성 높은 최익현을 중심으로 뭉쳐 저들 여론을 모으고자 하였다. 최익현으로서는 기실 저의 뒤에 사람이 있든 조정 안에 저 혼자든 할 이야기였지만.

“신이 살피건대, 처음 당요께서 오복의 법도를 세울 때는 아직 천하에 사람은 적고 나라는 작아, 저들마다 나라를 세워도 서로 맞닿지 않았습니다. 대우(大禹)가 도산(塗山)에서 뭇 공후(公侯)를 모음에 옥백(玉帛) 지닌 자가 일만 명에 달하였다 하는 것은 이를 이름입니다.

그 후에 백성과 물산은 번성하고 마침내 나라 경계가 부딪혀 그 크고 작은 형세가 드러나고, 비로소 성현께서 사대(事大)하고 자소(字小)하는 예를 세우신 것이니, 『좌전』을 상고하여 보면 사대와 자소의 예가 노 소공(昭公)의 대에 이르러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나라 사이의 예는 천하의 형세에 따라 달라지지만, 서로 아끼고 지키는 의리는 변함이 없으니, 지금과 같이 열국이 병립한 때를 만나서는 작은 나라도 천하 보전하는 궁리를 버리지 못하고 큰 나라도 스스로 지키는 재간을 가볍게 여기지 못합니다.

하물며 이번 대국과 법국의 일은 대저 우리가 두 나라 사이에서 중재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지금에 와서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개량하여 여전히 겉 생김새는 사모관대로되 그 색이나 매무새는 양복에 가까워진 관복 입고서, 이처럼 고사 인용하여 언변 늘어놓으니, 만에 하나 바깥에서 살피러 온 외국인 있다면, 파리 코뮌의 일로 아직도 유럽에서 그 이름 전하는 ‘무슈 최’와 조정 선비의 우두머리 격인 면암이 같은 사람인 줄 모를 수도 있을 성싶었다.

“무릇 전란을 즐김은 생령을 해치니 어질지 못한 것이요, 국고를 동나게 하니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천한 사안으로 말하자면, 우리 땅에서 나오는 물산으로써 교역의 이익을 얻는데 저들 땅의 백성이 번영하지 못하고면 곧 물산 쓸 이가 줄어들고, 나라 쓰임새 군색해지면 부세(賦稅)를 무겁게 하기 마련입니다. 화평이 이롭고 전화는 해로움을 이로써 또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참의원에서도 개화당이 앞서서 이렇게 발의하였다. 공산당 보기에도 반대하여 얻을 바는 없는 것이라 그대로 공론이 굳어졌다.

사법원으로 말하자면 이제 전국 팔도 감영과 개시(開市) 둔 도시에는 형송(刑訟, 민·형법)의 일을 다루는 판심청(判審廳)을 두었고 – 대개 동헌 반대편에 부지 넓히기 마련이라 벌써 민간에서 이르기를 서헌(西軒)이라 하곤 했다 – 그 위에 평리원(平理院)까지 두었으니, 그 유영복이라는 자의 사안을 심리할 사람은, 그 수준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머릿수로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명분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두 나라 도와서 평화롭게 함이 가당하다 하고, 또 그렇게 되었을 때 실무 맡을 사람도 있다 하니, 굳이 회의에서 결정하는 바를 불가하다 할 것도 아닌지라, 곧이 그대로 청·법 두 나라에 공법으로써 유영복 건을 처결하자 제안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공식적인 나랏일이 되었으니, 북양대신과 남양대신서리(대리)로서 당당하게 천진에서 만난 이홍장과 장지동 두 사람이 생각하기에, 비록 뜻하지 않게 일이 진행되기는 하였지만 유영복에게 화포 넘긴 일을 은근슬쩍 넘기는 한편으로 처음 장지동이 말했던 명분은 챙기는 방편이라,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조선에 또 누구를 보내느냐 하는 문제였는데, 만인들 중 지재 쓸만한 이들은 모두 동삼성에 가 있는 판국이요, 언제 끝날지 모를 심리에 그들 둘 중 하나가 치소 비우고서 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북경 조정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 그나마 믿을 만한 옹동화(翁同龢) - 그와 원한 있던 이홍장은 조금 께름칙하게 여겼지만, 대안이 없었다 - 를 보내자고 주청하기로 입을 모았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쪽에서도 나름의 속셈이 있었다.

“아무래도 저 제안을 일단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쥘 페리를 이왕 무너뜨린 바에 확실히 묻어버릴 심산이었던 쥘 그레비 대통령과 조르주 클레망소가 머리를 맞대고 있던 것이다. 국회와 언론에서 신랄하고 열띈 어조로 비판을 늘어놓는 것만 보았을 때의 인상 – 페리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일각에서는 그를 ‘내각파괴자(le Tombeur de ministères)라 부르고 있었다- 과는 달리, 의외로 남들 없는 곳에서는 침착하고 냉정한 정객이라, 그레비는 클레망소에 대한 평가를 조금씩 상향조정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군부는 병력을 더 투입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무슨 협상 따위를 하겠느냐고 하더군. 심지어 해군 쪽에서는 이대로 푸초우(복주)나 포르모사(대만)를 공격해야 한다고까지 하던데.”

“영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영국이 나서기 전에 러시아가 먼저 나서겠지. 하지만 군부로서는 이대로 원정을 마무리하면 저들이 사실상 패배한 격이 되지 않는가. 체면의 문제인 게지.”

여기서 더 나섰다가는 영국이 중국 남부에 가진 이권을 침해하려 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전선이 넓어지기를 원치 않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동맹이 아니라 짐덩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당장 육군 앞에서 목소리 내는 것이 중하였던 해군 입장에서는 물러나기 어려웠다. 처음에 해병대를 투입하였다가 기습으로 사상자를 낸 것도 면이 상하는데, 하물며 그 원수를 갚겠다고 억지로 증원된 육군까지 해군 제독 휘하에 밀어넣으면서 진행하는 원정을 중단시키고, 상대편 우두머리에게 ‘공정한 재판’까지 보장해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그 리우인지 하는 흑기군 수장 말입니다. 본인이 잘난 것인지, 아니면 아래에 유능한 사람이 있는 것인지, 꽤 언론을 다룰 줄 알더군요.”

유영복 본인이 격문으로 재미를 보기도 했거니와, 일전에 공친왕이 난을 일으킬 때 서양 공사관에까지 연통을 돌렸다는 얘기 듣고 본인도 따라할 마음을 품었기에 홍콩 쪽에도 여러 서양 말로 번역한 글을 돌린 바 있었다.

물론 그가 그런 마음 먹었다고 해서 바로 이루어질 일은 아니었지만, 아래에 고홍명처럼 한어보다 서양 말을 더 편하게 여기는 인재가 있었으니 무엇이 어려우랴.

“흠... 철 지난 ‘고결한 야만인(Noble sauvage)’ 스테레오타입을 되살려보자, 그런 얘기인가.”

“예. 어차피 안남과 통킹에서의 실리야, 법리 공방을 하면서 은근슬쩍 전례로 남겨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프랑스 국내의 언론만 다루면 되는 일이니, 적당히 왜곡한 인터뷰로, ‘코친차이나의 해적왕, 프랑스군에게 찬사: 훌륭한 적이자 명예를 아는 뛰어난 군인들’ 같은 헤드라인을 뽑아내면 군부의 체면도 살려줄 수 있을 터였다. 어째 영국인들이나 할 법한 음흉한 술수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법 아니던가.

“재밌는 생각이군. 벨로네 그 친구도 비슷한 얘기를 하던데.”

“오, 그렇습니까? 우군이 있다니 다행이군요.”

“우리 섬나라 이웃들처럼 우격다짐으로 야만인들을 교화한다고 나서기보다 그들의 풍습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문명의 동반자로 발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그런 명분을 내세우면 국익은 물론 명분도 챙길 수 있으니 좋지 않겠느냐 하더군.”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프리카에서도 동일한 논리를 내세우면 이미 벌려놓은 일이 많은 영국은 당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것도 좋군. 자, 그러면 수장을 잃은 우리 외교부 사람들에게 대통령으로서 명령을 내려 볼까.”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뜻한 대로 될 것을, ‘가만히’라는 말을 모르는 것인지 같은 조선인 사이에서도 엉뚱한 말이 나오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월남으로 말하자면 비록 지난 협약에서는 법국에 그 국권의 변통을 맡겼다지만 엄연한 하나의 나라입니다. 이번 유영복의 일은 그 국경 안에서 일어난 일인데, 죄를 심리하고 형정(刑政) 다룸에 월남국이 빠짐이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순화성에서 돌아가는 사세 지켜보던 양헌수가 조정에 또 글을 올리자, 이 또한 일리 있다고 여긴 조선이 어찌 생각하느냐며 두 나라에 연락을 넣은 것이다.

청 쪽에서 생각해보면, 비록 교지(코친차이나)에 이어 안남 일대까지 사실상 법국인들이 주인 행세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나라 조정의 속마음은 결코 심복하지 않았을 것이라, 조선 말대로 하게 되면 성현의 말씀 아는 나라가 셋, 오랑캐 나라가 하나라 더 유리해지면 유리해졌지 손해 볼 일은 아닌 듯했다.

당연히 프랑스로서는 반발하고 싶었지만, 안남 정부를 위하여 대신 개입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있었으니 역시 말이 궁색하여, 이렇게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것인가 하고 있었는데, 지구 반대편 조선만큼이나 남의 일 개입하기 좋아하는 영국이 끼어들었다.

“흠흠. 비록 아프가니스탄의 일로 바쁘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좋은 벗 프랑스와 중국이 함께 얽힌 일이니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런 일에는 우리 영국이 정통하였으니, 이번 재판에 한 자리 차지하여 법리의 검토를 돕고자 합니다.”

일이 그렇게 되자, 반대할 명분만 없고 나머지 이유는 차고 넘쳤던 프랑스는 자신만큼이나 영국을 견제하려 할 나라를 추천하였다. 러시아를 끼워넣자니 속이 너무 훤히 비치는 것이라, 대신 미국을 끌어들이기로 한 것이다.

점점 자신과 친한 나라 들이는 경쟁이 벌어지자, 이번에는 다시 서양 나라들이 늘어나면 혹 청에게 불리해질까 걱정한 이홍장이 일본을 끌어들였다. (겉으로 내세우기로는 나라 수가 여섯이면 동률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둘러대었다.)

이대로 가게 되면 독일도, 이탈리아도, 하다못해 근래 콩고 문제를 놓고 목소리 키우는 포르투갈까지도 끼어들게 될 판이라, 결국 일본을 끝으로 더는 늘리지 않는 것으로 나머지 나라끼리 합의를 보았다.

이 정도만 되어도 머리가 아픈 상황이었으므로, 조선 선비들만큼이나 말이 많은 법학자들을 모아놓았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일이 더 필요하다니요?”

“흠흠. 사실 프랑스와 미국인들의 관점만 비교해 보아도 흥미로운 관점이 많이 도출되는데, 거기에 동양 전통법까지 들어왔으니 간단하게 볼 일은 아니더군요. 국제적으로 복잡한 사안이니만큼 하루아침에 판결을 내릴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7개국 모임에서 좌장을 맡은, 영국의 나이 지긋한 국제법 학자 헨리 메인(Henry James Sumner Maine)이 멋쩍은 듯 말했다.

“벌써 석 달째인데, 아직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라도 일곱에, 동서양 학자들이 모두 모이지 않았습니까. 당장 누가 대표를 맡을지를 놓고서도 나흘간 토론을 벌이다 끝내 결론을 못 내려서 조선인들 말대로 나이순으로 뽑아 겨우 해결을 보았을 정도입니다만.”

은근슬쩍 ‘이만한 판을 벌리기 전에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느냐’하고 비꼬니, 얼른 본국에 성과를 보고하여야 하는 주조선 공사 튀렌느 백작만 억울함 반절, 초조함 반절로 마음고생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진전된 논의는 있을 것 아닙니까?”

“아, 물론이지요. 우선 피고인 리우 씨가 자신은 그 ‘충(忠)’에 의거하여 행동하였으니 무죄라고 주장해서, 일단 그것이 하나의 양심적 판단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나아가 충의 대상이 비문명국이나 비국가 주체일 경우 어떻게 간주해야 하는지를 놓고 지난 두 달간 건설적인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국경을 넘어 통킹에서 군사활동을 벌인 것이 전쟁법상 합당한 교전행위로 인정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 있는 중인데, 이는 우선 이 국경이라는 개념부터가 동양 관습법 상에 존재하였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본국의 어떤 멍청이가 이런 이상한 재판 같은 것에 동의를 하였는가, 속으로 욕지거리 삼키면서 이 성가신 영국인 앞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아니, 그래도 명색이 당사국 외교관이신데,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알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곳 신문으로 보도가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전문가에게 직접 듣는 것만은 못하지요.

자, 그래서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자면, 일단 동아시아의 국(國) 개념이 현대법의 국가(State)와 대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비교법학적 문제가 제기되는데요.,,”

튀렌느 백작의 평생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이곳 조선에 부임한 이래로는 가장 긴 하루였다.

“... 하여, 우선 충의는 그 자체로 명분이 되므로, 처음 법국이 주장한 것처럼 단순한 도적의 무리로 볼 수 없음을 결론지었다 합니다.”

보고 듣는 귀남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멀리 정동에서 같은 곤경에 처해 있는 튀렌느 백작과는 다른 점이 있었으니, 물론 귀남이 임금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 이렇게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는 데 그저 만족하는 마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조정에서 봉직한 지 경직과 외직 합해 스무 해 넘어가는 최익현도, 어심을 완전히 안다고야 자평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무엇을 즐겁게 여기고 무엇에 마음을 두는지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말로 하지는 않아도 보고하면서 임금이 만족하는 것을 은근히 알 수 있었다.

“유영복 그 자는 어찌 지내고 있소?”

“물론 심리하여 처결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죄인의 몸이 아니니 함부로 처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에 사대문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 거동을 막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자신이 요구한 대로 ‘공정한 재판’을 약속하였으니, 명분 궁색한 유영복도 결국 흑기군을 해산하고, 그의 통변 노릇하는 고 무어라 하는 자와 함께 영국 군함 타고서 이곳 한성까지 왔다. 흩어지는 흑기군 중 그곳 땅에 남을 자들은 반드시 법국 군영에 와 무기를 반납하라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 땅을 떠나라 하였다.

어느 쪽에도 응하지 않는 자들은 그때야말로 공공연한 비적으로 간주하여 처벌하겠다 포고하였으므로, 유영복의 명성을 쫓아 온 자들은 천하 화평을 위한 ‘유 장군’의 결단을 칭송하고 눈물 흘리며 저들 고향으로 돌아가고, 평생 총칼로 먹고 살아 딱히 생업 없는 자들은 양헌수가 중재하여 대만의 조선인과 일본인 농장에 일자리 알아보기로 했다 들었다.

그렇게 한 번 흩어지기 시작하니 모래알과 같아, 험준하기만 하였던 국경의 산도 텅 비었다. 그리하여 법국 군대도 손속 아끼지 않고 진격해 마침내 국경에 이르렀지만, 거기서 괜히 무슨 일을 더 벌였다가 감당치 못할 후과 나올까 두려워, 그 외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고 있다고 했다.

“듣기로 대국 백성들이 그 영복을 높이 떠받든다 하였는데, 도성 백성들도 그렇소?”

“말도 다르거니와, 우리 백성들은 저 양인들에게 원한 없으니 어찌 그러겠습니까. 다만 인천부에 영복이 당도하였을 때 그곳에 있는 대국 백성으로 그 출신이 강남인 자들이 모여 소란을 일으켰기에 잠시 그곳 경무서로 하여금 힘쓰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니 참 잘 되었소.”

무상히 흐르는 세월에 이제 해도 매일같이 짧아지고 있었다. 난데없는 바람 한 줄기가 공사 중인 경복궁 소리 싣고 날아와, 귀남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청·법 두 나라에 제의한 뒤, 공산당 참의원들 중 사사로이 나라 걱정한 이들이 있었다 하더구려.”

“무릇 항상 나라를 생각함이 국사 받드는 이들이 마땅히 마음 쓸 바라 하겠습니다.”

“이르기를, 비록 우리 조선국 국세가 참으로 융성하다 하나 아직 다른 나라와 견주면 차지 못함이 많거늘, 함부로 움직여 남의 시기를 받게 되면 그 또한 곤궁한 지경에 처하는 화근 되리라 하였다더군.”

공산당 영수가 누군지 생각하면 그 사사로이 하는 이야기가 귀남에게까지 들려옴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임금이 말 멈추니, 저의 의견 묻는 것임을 비로소 안 최익현이 답했다.

“그 말에도 이치 닿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렇소이까.”

“나라 사이의 일에는 반드시 그러한 것도 없고, 반드시 저러한 것도 없다. 서양에서 흔히 하는 말입니다. 오늘은 고맙게 여겨도 내일은 원수로 여길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비록 우리가 나라 사이 다투는 것을 기껍게 여기지 않는다 하여도 병비(兵備)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또 우리의 세가 저들만 못하다 하여 반드시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오직 일국을 보전하는 데 오롯이 마음을 둔다면 어찌 군자의 나라라 하겠습니까. 오히려 세가 넓지 않으므로 사사로운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을 그 가운데(中)에서 벗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좋은 말이오. 앞으로도 그리할 수 있겠소?”

단순히 묻는 것인지, 아니면 의심하는 것인지. 그러나 묻는 바 예리하여 잠시 답을 멈추었다.

시기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다른 이의 가진 힘과 재산만을 질투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과 평판을 고깝게 여길 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니, 최익현 생각하기에도 후환 될 법한 일이었다.

‘너희만 군자더냐’ 하고 헐뜯을 수도, 때로는 창칼로 직접 겁박하려 할 수도, 어쩌면 최익현 그조차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음험한 흉수를 꾸밀 수도 있을 터.

“할 수 있는 바를 다하면 어찌 부끄러움이 남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무사히 버텨 온 사직이 어찌 하루아침에 무너지겠는가. 쌓아 온 신의가 어찌 배신하겠는가. 평온한 용안을 언뜻 살피며 최익현은 단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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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 점차 유학에서 인용하던 고사들이 기존의 용례에서 조금씩 벗어나 쓰이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근대 서구 학문이 마구 들어오고, 또 현실적으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만한 이들이 정신이 없기 때문에 어물쩡 넘어가고 있습니다만...

본래 조선시대 지방관들이 머물며 정무를 보던 관아를 동헌이라 속칭하였던 것은, 지방관의 관저인 내아(內衙)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내아는 동헌 반대쪽이니 서헌이라고 부르곤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 서헌 서쪽에 새로 지방법원이 생기면서, 그 속칭을 법원이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 조선의 근대적 사법제도는 갑오개혁 당시 일본의 제도를 본떠온 데서 시작했습니다. 이후 광무개혁으로 추가적인 보완(황제권 강화의 측면도 있었지만, 졸속 시행에 따른 혼란상 정리의 목적도 있었습니다.)을 거치게 됩니다. 정작 사법제도가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국권을 잃기 직전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요.

작중의 평리원은 본래 역사에서도 고등재판소(일본식 명칭이지요)를 광무개혁 시기에 개칭하면서 사용한 명칭입니다.

잠깐 언급되는 옹동화는 청말의 서예가 겸 정치인입니다. 역시 서예와 학문으로 이름 높았던 함풍제와 공친왕의 스승 옹심존(翁心存)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황제의 스승 역할을 하면서 동치제와 광서제를 가르치는 한편, 보수적·강경론적 입장에 서서 청류파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는 그 본인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홍장과 개인적 악연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형 옹동서가 태평천국의 난 당시 안휘순무로 있었는데, 증국번이 졸렬한 지휘를 명분으로 그를 탄핵했고, 그 탄핵하는 글을 증국번의 제자였던 이홍장이 썼거든요.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옹심존도 병에 걸려 끝내 사망했으니, 옹동화로서는 가히 원수라 할 만 합니다.

국제법의 관점에서 보면, 청불전쟁 전체에 걸쳐 청은 ‘공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명분을 확보하고 프랑스를 억지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이홍장과 푸르니에의 협약이 군사충돌로 이어진 뒤에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다른 유럽 국가들의 중립 선언을 이끌어내려 노력하고 프랑스 쪽이 명분 없는 선제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프랑스 해군은 원 역사에서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공세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복주선정국을 공격해 일방적으로 남양수사를 전멸시킨 뒤 (마미 해전), 해당 수역을 봉쇄하고, 대만까지 공격했지요. (다만 대만의 기륭(基隆)을 공격했다가 패퇴하는 등, 이 과정에서도 청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청은 이 해상봉쇄를 빌미로 역시 법적 공방을 시도했지만, 프랑스의 실력 행사 앞에서는 큰 소득을 거두지 못했지요. 심지어 산동의 위해위나 천진에 대한 공격도 검토했지만, 영국을 자극할 것을 우려한 내각의 제지로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청의 노력이 완전히 헛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선전포고 후 스페인과 벨기에의 중립선언을 이끌어내었고, 또 해관(세관) 업무를 담당하던 영국인 로버트 하트(R. Hart)를 통해 미국의 중재를 받자고 제의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레이트 게임을 이용해 남중국에서 이익을 확보할 생각이었던 페리 내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작중에서는 흑기군이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전과를 거두었고, 거기에 조선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제3자가 개입하였기에 프랑스 역시 합의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말 국제법은 제국주의 확장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많이 사용되고는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원된 개념 중 하나가, 국제법은 ‘문명국’의 공동체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으로, 그 주권이 제한되거나 반문명~미개에 머무르는 정치단위들에 대해서는 국제법이 제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신제국주의라는 시대적 조류뿐 아니라 전통적인 자연법 사상에서 법실증주의(Positivism)로의 선회가 이루어지던 학계의 흐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법과 도덕은 분리되고, 국제법 자체가 주권국가의 창조물이며 오직 주권체에 의해 집행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게 드러났습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대상으로 사용할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논리가 보편화된 것은 18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으며, 그 이전만 하더라도 비서구 국가들이 (그럴 만한 실력만 있다면) 국제법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옹호할 여지는 있었습니다. 청과 조선이 『만국공법』을 활용해 자기변호를 시도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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