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가운데 마음 (2)
동철의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여, 그 철도라는 물건이 삼십 년 내로 양광에서 멀리 조선국까지 족히 만 리는 될 길을 이을 것이라고는 하나, 잇더라도 직례를 먼저 잇지 이 머나먼 남쪽에 먼저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시일 급한 지금은 부득불 이 목인덕이라는 양인 따라, 이홍장이 몰래 보낸 기선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홍장이 일부러 화인(華人) 없는 배를 골라 보내었으므로, 선장도. 선원도, 그리고 이 배도 모두 무심히 물살 가르고 나아가니 오천 리 뱃길을 만 사흘 만에 주파하여 넷째 날째 아침께 천진에 닿았다.
배 입항하는 동안 고물에서 살피니 옛날 도성에서 벼슬살이 할 적 천진 모습을 기억하는 그의 눈에 변한 모습이 속속 들어왔다. 천진 반절은 양인들이 주인이라지만, 나머지 절반은 요새 저들 모시는 상관의 직함 따라 북양군(北洋軍) 자칭하는 옛 회군의 몫인 듯하였다.
하선하자마자 목인덕 따라 발걸음 옮겨 그 절반의 중심 되는 곳, 통상서에 닿았다.
“잘 오셨소. 아무래도 경조(京兆)는 눈치가 보여서 이곳으로 청하게 되었소이다.”
올해로 나이 예순이거늘 겉으로 보기엔 장지동 자신만큼 강건한 이홍장이 웃으며 맞이하였다.
“그간 강녕하시었습니까.”
“물론이외다. 과한 황은 입어 대신 자리 지키고 있으니 어찌 일신 불편할 일이 있겠소?”
멀리 남쪽에 머물면서 지난번 역추(易樞, 정권교체) 소식도 건너건너 들었던 장지동이 홀로 상상하기로는, 근 삼 년 권신 노릇하다가 이제 다시 저의 뜻을 접게 되었으니 심화(心火) 가득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훤칠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짐작하였겠지만, 일전에 그대가 받들게 된 조칙은 이 사람의 상언(上言)이 가납되어 내려진 것이오.”
이홍장 말마따나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만약 이홍장 없는 조정에서 멋대로 내린 영이었다면, 거두절미하고 장지동 자신을 삭탈관직한 뒤 곧장 법국에 넘기거나 했을 터였다. 장지동 자신이 아니라, 예컨대 이홍장 같은 이가 총독 자리에 있었다면 그런 영을 받자마자 곧장 만당(晩唐) 절도사마냥 들고 일어났을 터이니 참으로 어리석은 명령이겠지만, 그런 분별을 내릴 수 있는 조정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역추 이래로 친정하고 있는 금상이라지만, 보령 열셋에 친정이 가할 리 없으므로, 그의 친부 순친왕 이후완이 대신 집정하고 있었다. 이 사정을 모르는 이가 드물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낼 각오하는 자는 더 드물었다.
순친왕이 일신의 재주 없는 사람은 아니라지만, 대국을 살펴 지략을 세우는 데서는 공친왕에 한참 못 미치고, 사람 사이를 읽어 저의 이득 취하는 데서는 서태후의 발밑도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 한 사람으로도 그리할진대 나머지 고관들이 모두 보탬이라기보다는 짐덩이에 가까우니 국정의 운영이 어떠할지는 만 리 밖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일지라도 북양군의 무서움은 알고 있었다. 물론 저 혼자서는 어떤 명분도 없으니 감히 작란하겠냐만, 후환 생각지 않고 나라가 망할지라도 만인의 씨를 말리고야 말겠다며 이홍장이 날뛴다면 딱히 막을 방편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호랑이 키우는 격임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실권 내어준 이홍장이 앙심 품지 않도록 북양수사와 북양군에게 계속 재정을 떼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므로 ‘황은 입었다’ 하는 이홍장의 말이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하여, 혹 그 진의를 의심하여 자칫 그릇되게 받아들일까 두려워 이렇게 장 총독에게 번거로움을 끼치게 되었소이다.”
“그리하면 그 진의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유영복 그자가 더 날뛰기 전에 반드시 끊어내어야 하오. 이를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대 뿐이기에, 구명의 단초를 조칙에서 빠뜨리지 말아달라 간곡히 청하였던 것이오.”
당연히 법국에게 면피할 구실 얻고자 그런 명을 내렸으리라 단정하였던 장지동에게는 의외의 답이었다.
“법국과 화의 다지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물론 그 또한 맞소. 장 총독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의 남양수사는 법국의 교지수사(交趾水師, 코친차이나 분함대)를 이길 수 없으니.”
남양수사가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를 제공한 사람이 이홍장이었음을 생각하면, 결국 돌고 도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대가 받든 것과 같은 조칙이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오. 어찌 되었든 겉으로 드러나기로 이번 일은 법국 군대의 무비(武備)에 잠시 허술함이 있었던 것뿐이니, 만에 하나 그 뒤에 아국에서 만든 화포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에 상응하는 은자로 달래면 그만이었을 테지.”
물론 금궁에 그림자 드리우는 아라사가 법국을 가까이 하고자 하였으므로, 만에 하나 조정이 법국과 싸우고자 뜻을 다졌더라도 압박하여 마음 고쳐먹게 하였겠지만, 이홍장도, 장지동도 그런 사정은 입에 담지 않았다.
“반면 유영복 그자로 말하자면 기실 때를 잘 만난 반민(叛民) 우두머리에 불과하오. 설령 본뜻이 그리 간특하지 않다 하여도, 그런 자들이 모여들 연유를 스스로 만들고 있으니 어찌 이를 충(忠)이라 하겠소?”
“영복이 그 격문을 퍼뜨린 이래로 몇몇 백성들이 의군(義軍) 따르겠다며 창칼 들고 변경에 모여들고 있기는 합니다. 허나 거기 역심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면서 장지동 또한 보고 들은 바가 있었다.
‘만인 조정’이라는 무엄한 생각을 장지동도 잠시 하였으니, 나라가 저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 있느냐 생각하기 마련인 양광 백성들은 어떻겠는가. 가뜩이나 옛 전란이 뿌린 의문의 씨앗이 싹트지 않았다지만 그 종자 고스란히 남아 민심의 밭이랑에 남아 있다.
더구나 법국 상인들이 홍하(紅河, 홍 강) 타고 올라오게 되면 실지로 손해까지 입게 되니 끽해야 오랑캐 귀신 꺼리는 마음에 척양(斥洋) 소리 하는 자들과 같이 볼 수는 없는 노릇.
“그대는 강남이 평정된 뒤 부임하였으므로 잔잔한 수면만을 보았겠지만, 나는 옛적 사교의 난 때부터 종군하며 그 아래의 드러난 바닥을 살핀 바 있소. 우리 대청이 없이도 중화의 아름다움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지. 그러나 그런 어리석은 자들일지라도 능히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으니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소이다.
물론 지금 유영복 그자를 헛되이 칭송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므로, 그를 추포하면 후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오. 허나 잠시의 소란이 후대의 우환보다 낫지 않겠소? 기껏해야 사교의 잔당과 관의 틈새 노려 이익 취하려는 모리배일진대, 그들의 구설(口舌) 두렵다 하여 나라의 장구지계를 망칠 수는 없는 것이외다.”
“도적의 무리들이 양창(서양 소총)을 준다는 소문에 끌려 변경에 몰리고도 있다 들었습니다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싸움이라며 종족(宗族) 이끌고 오는 자들도, 향용(鄕勇) 새로 꾸리는 자들도 있고, 심지어 서생 홀로 군사(軍師) 되겠다며 찾아가는 자들도 있다 합니다.”
애초에 격문이라는 것이 그러라고 있는 물건이지 않던가. 물론 개중에는 흑기군이 그리 했던 것처럼 변경에 터전 잡고서 가운데서 산적 노릇할 생각으로 찾아가는 음흉한 자들도 없지 않겠지만, 장지동 그가 총독으로 있으면서 문명(文名) 가끔 들었던 자들 중에도 흑기군에 찬동하는 자 없지 않아 당당하게 변경에 나아가 빗장 걸어잠근 문을 열라고 하는 이들 있었다 들었다.
물론 지금 시국에 국록을 헛되이 받지 않는 군관이라면, 나라 사이 다툼이므로 벼슬 없는 이는 변경 넘지 못한다며 강경하게 돌려보냈겠지만, 그런 군관은 장지동 그가 직접 내려갈 때면 성한(星漢, 은하수) 별보다 많아도 그가 자리 비우는 즉시 기린(麒麟)보다 찾기 어려워질 터였다.
“잠깐, 서생이라 하였소?”
“예, 대개는 향리의 유학·거인(擧人) 무리입니다만...”
“허허... 근심하였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구나. 그렇다면 더욱 속히 유영복 그 자를 잡아 죄를 묻고, 흑기군 자칭하는 비적들을 훑어 없애야만 할 것이오.”
이홍장의 장탄식에 그 ‘근심하였던 일’이 무엇인지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야말로 이홍장이 흑기군을 제압하라 하는 진정한 이유였음도.
지난날 공친왕이 상군 이끌고 들이칠 제, 모든 흉화(凶禍)를 청류파 거두 이홍조(李鴻藻)에게 뒤집어씌운 이홍장이다. 만일 장지동 본인도 저의 소신껏 언행한 탓에 청류파에서 떨어져나오지 않았더라면 그에 휩쓸려 함께 당했을 뻔하였으니, 실지로 함께 쓸려나간 이들, 그리고 그런 이들을 흠모하던 초야의 서생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그 동안에야 그런 자들이 불온한 마음 품는다 할지라도 이홍장 본인이 굳건히 버텨 군권 지키고 있으니 괜찮았을 것이련만, 나날이 명성 떨치고 있는 흑기군 기세에 올라타 함께 이름 날리면 그때는 이홍장도 곤란해진다.
보나마나,
‘우리는 저 변경에서 양이와 맞붙어 싸워 이겼는데, 그동안 웅장한 북양수사와 북양군 데리고 있던 이중당은 무얼 하였는가?’
‘비록 사교에 홀렸다 하나 같은 천조의 백성인 자들을 도륙하여 입신한 이와, 우리처럼 총칼 들고 양이와 싸워 이긴 이들 중 누구의 공이 더 크겠는가?’
하면서 목청껏 이홍장 자신을 비난할 것이요, 저들이야말로 민심 얻었다 여기므로 –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 그 목소리는 날로 커져갈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애초에 청류파에게 누명 뒤집어씌운 데 그 근원이 있으니 석교(釋敎) 사람들 쓰는 말 빌리자면 이 또한 이홍장 본인의 업보겠지만.
“아니, 그리하면 원통함만 쌓이고 민심은 더욱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배 타고 오는 내내 사안을 어찌 풀어나갈까 고심한 장지동이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홍장의 편을 들게 되면, 확실히 얻는 바는 있을 터였다. 군권 하나는 확실히 지키고 있는 이홍장이니, 그의 말 한마디면 남양수사에 조금이나마 자금 융통되고, 북양군만큼은 아니라도 ‘남양군’ 꾸려서 그 옛날 증국번이나 좌종당이 그랬던 것처럼 장지동 그도 무명(武名) 떨치고 권세 부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천조가 그 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였을 때, 집정하는 이들은 모두 소인(小人)이라, 재주 있을지언정 제 앞가림만 하고 방략은 오직 저의 사욕을 위해 쓰였을 뿐이어서 끝내 망국으로 이어졌다며 청사에 남게 된다면 그런 권세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리 될 줄 알면서도 알량한 세도(勢道)를 탐하는 것을 어찌 신하된 도리라 하겠는가?
“지금 중당께서 이르신 바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유영복 그 자를 추포해 법국 관헌에게 넘기든, 우리 국법으로 처결하여 주륙하든 필히 금세와 후세를 통틀어 옳고 그름을 놓고 논의 분분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충(忠)도 절로 여럿이 되고, 의(義)는 마치 안개와 같이 희뿌예져 이것은 맞고 저것은 아니라 꼬집을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싶었다. 성현의 말로 이르기는 오히려 그럴 리 없다 하였건만, 그렇게 경의를 따진다면 애초에 화외(華外, 중국 밖)에 문명이 있음은 말이 되던가.
“생각해보십시오. 유영복 그 자가 살아서 죄를 받는다면 중당 이르시는 대로 그 고사 전말(顚末)이 모두 밝혀지겠지만, 치죄하여 죽여 없애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인이 권토중래(捲土重來) 말했다지만, 초패왕(항우)이 강동에 돌아가 늙어 죽었더라면 그 행악한 바만 남아 전해졌을 터이니 후대에 그 이름이 어찌 남아 곤극(崑劇, 경극의 전신)까지 만들어졌겠습니까?”
“그 무슨 말이오? 지엄한 국법으로 정하여 다스린 바를 어찌 민려(民黎)가 함부로 운운하겠소? 그것이야말로 나라 어지러워지는 근원이자, 내 재차 유영복을 징치하여야 한다 이르는 까닭이오.”
“조정에서 말하는 옳고 그름이 어찌 항상 그렇겠습니까? 우리 사직이 민심을 벗어나면 무엇 위에 서겠습니까? 이르신 것처럼 아조와 법국 사이 다툼을 막기 위하여 흑기군을 제지하여야 함은 이 장 모도 옳게 여깁니다만, 영복의 목을 벤다 한들 한 번 일어난 소란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지동이 매섭게 쏘아붙이니 이홍장도 잠시 말문이 닫혔다. 기세뿐 아니라 몸집도 젊었을 때와 매한가지인 이홍장이 앉은 자리에서 인상을 한껏 찌푸리니 분위기가 적잖이 험악하였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론이 장지동 말마따나 그 하찮은 도적의 편이라 하면, 민심 더 돌아가기 전 수습하려던 조치가 외려 화근이 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렇게 된다 하여 자신의 권세에 흠집이 날 것인가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언젠가 다시 그의 정적이 나타나면 족히 그를 끌어내릴 빌미로 삼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 좋소. 그러면 어찌 하자는 것이오?”
“우선은 투항을 권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군문에서 바로 참하여 효수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며, 대서 땅에서 말하는 것처럼 제대로 사법(司法)하는 모양새를 갖추어 잘잘못을 가려주겠다 제의하면서요.
유영복 그 자는 스스로 의군의 우두머리 자처하고 있으니, 나라에서 이렇게 타이르고 또 권하였는데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때는 비로소 허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정말로 투항한다면? 그때는 또 어찌 할 생각이오?”
“그 마음이 정녕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고서 정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자’ 하는 말을 어렵게 풀어놓는 장지동이었다.
낭선 산속 흑기군 본영에 웃음소리 울려 퍼졌다. 말은 본영이라지만 기세로 따지자면 산채에 가까웠다. 지키는 이들도 위명 당당한 흑기군이라고는 하나 검은 영(令)자 깃발 하나를 제하면 어지간한 도적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물론 그랬기에 정말 도적 무리라 착각하였던 프랑스군이 제대로 당한 것이었지만.
“어이, 고가 녀석아, 이 글 한 번 읽어보너라.”
호쾌한 웃음이라기보다는 비열한 비웃음에 가까운 것을 모두 흘리고서, 유영복은 얼마 전 새로 모사로 삼아달라며 찾아온 젊은이 고홍명(辜鴻銘)에게 제게 온 서한을 건네주었다. 머리는 검되 코는 높고 눈두덩은 깊숙하니, 과연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 어미가 포도아(포르투갈) 사람이거려니 싶었다.
“이 몸에게 자복하라 하는구나! 내 무엇이 두려워 그리 한다는 말이냐!”
산적이든 아니든 호방함은 호방함이라, 주변의 뭇 군졸들도 따라 웃었다.
“너무 터무니가 없는 글이라 힘이 빠진다. 너 고가 빼고 나머지는 모두 물러가 보거라.”
누가 보아도 억지 핑계지만 저들 두령이 그렇게 하라는데 어찌하겠는가.
처음부터 그를 따르던 진짜배기 부하들이 모두 나가자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침착해지고 표정은 진중해져,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와도 같았다.
“그래,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앞서 웃으신 건 진심은 아니시었지요?”
너무나 빠르게, 마치 그 옛날 고향 마을에서 보았던 변검(變臉) 하는 광대처럼 얼굴을 바꾸곤 하는 이 흑기군 수령에게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던 고홍명이 확인차 물었다.
“저 아이들이 보기를 원하는 진심이기는 했지.”
문밖을 턱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는 이름은 떨쳤지만 궁색한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그건 그렇지. 아니, 실은 더 심해. 새로 온 녀석들은 도저히 쓸모가 없어서, 발목만 잡겠더군. 따라온 서생들도 대부분 마찬가지 아닌가.”
사실 고홍명 한 사람만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생은커녕 화인(華人)도 아니니 군문에서 쫓아내라’ 하고 찾아온 늙은 서생 하나가 하도 당당히 말하기에, 반골 기질이 도져 이 고홍명 한 사람 빼고 모두 별채로 보내두지 않았던가.
따로 병법을 배운 적은 없지만, 관군부터 이곳 산속 야인들까지 모두 무찌르고 지금까지 살아남아온 그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반 년 내로 패한다.”
아무리 장지동이 흑기군 편을 들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홍장 말마따나 대놓고 법국과 척을 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총포와 탄약을 더는 넘겨줄 수 없었다. 넘겨주었다가는 당장 복주 앞바다까지 올라온 법국 수사에게 근 이십 년을 운영해 온 선정국을 송두리째 잃을 판국이었다.
물론 법국 군사들이 쭉 버티고 있는 하내(하노이) 쪽이라면 모를까, 아직 청 쪽의 국경은 방비가 허술하므로 이곳 산채를 버리고 그대로 산등성이 따라 도주하여 운남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허나 공식적으로는 두 나라 양쪽에서 쫓기는 도적일진대,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두 해 전의 자신이라면 목숨만큼 중한 것이 없다 하면서 바로 옮기기로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지렁이 백성들은 물론, 콧대 높은 선비들까지 찾아와 ‘장군의 무명이 사해에 떨쳤다’ 해주니, 다시 그 옛날 도적떼 두령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항복하게 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뭐, 이만하면 괜찮게 살았지! 껄껄.”
한 번 다시 크게 허세 떨고서 물었다.
“그래도 어떻게 구명할 방도 없을까?”
“나라 사이에 싸움을 붙이면 될 것도 같습니다만...”
“밑져야 죽기밖에 더 하겠냐. 한 번 해 보지, 뭐.”
그리하여 답하여 두 나라 양쪽에 널리 포고하기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나, 오직 충의로 지금까지 싸워왔으니 이를 더럽힐까 두렵다. 훗날 억울함이 없도록 공명정대한 판결을 약속하는 쪽에 투항하도록 하겠다.’
당연히 이리하면 청과 프랑스 양쪽이 저들 쪽이 처결하겠다며 싸울 것이고, 그 다툼에서 자존심 상한 쪽에 의탁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고홍명이 제안한 궁여지책이었다.
물론 그랬다가 어느 한쪽이 자존심 굽히고 들어가면 그대로 거스름돈 신세 되는 것이었지만, 유영복 말마따나 잃을 게 무어 있던가.
이리하여 조선국 사람들이 모은 은자에서 시작해 유영복 한 사람의 격문으로 불이 붙은 사안은, 나라 사이의 큰일로 번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큰일이라면 요 근래 건드리지 못하여 안달이 난 나라가 또 청국 옆에 하나 있었다.
고홍명 예상대로 다시 청국과 법국이 신경전을 벌이자마자, 그 소식을 순화(후에) 나가 있던 양헌수가 득달같이 본국에 아룀에,
“어느 나라의 법을 따를지 정할 수 없다면, 여러 나라가 함께 따르는 공법(公法)으로써 처결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여러 나라에서 사법(司法)하는 이들을 초모하여 이번 사안을 심리하게 하면 장차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는 제안을 두 나라 모두에게 던진 것이었다. 황당하게 여기면서도 또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어, 남으로 하여금 군말 삼키고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국이 본의 아니게 나날이 행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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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초유의 국제사법재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 중 하나로 나오는 청류파 문제는, 작중 서술에도 나오듯 이홍장이 공친왕 내전의 책임을 이홍조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생긴 한 가지 파급효과입니다. 이전에 언급되었던 것처럼, 청말 청류파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反이홍장, 양무운동 비판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딱히 의도적으로 조직되지 않았던 전기 청류파와 달리 후기 청류파는 하나의 당파로 칭할 수 있을 만큼의 조직력을 보였습니다.
후기 청류파는 흔히 남파(南派)라고도 하는데, 청불전쟁 패배 후 양무파가 힘을 잃자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남파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대부분 중국 남방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서구 열강의 침탈을 직접 경험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후기 청류파는 전기와 동일하게 강경한 대서구 외교와 내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지만, 그와 더불어 동도서기론적 관점에서의 온건한 개혁 및 대외팽창, 군사력 확장은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원 역사에서는 서태후와 순친왕이 보수파의 구심적 역할을 했기에 이들이 힘을 받을 수 있었지만, 작중에서 서태후는 조선행 전부터 이미 동철에 투자하면서 수구 노선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순친왕은 같은 만주족들 관리하기도 벅찬 상황이지요.
그런 상황 속에서 불만을 품은 원 역사의 후기 청류파가 서양 세력을 때려잡고 있다고 주장하는 유영복에게 열광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작중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중국인-포르투갈인 혼혈 고홍명은, 원 역사에서는 1913년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올랐던 (끝내 인도 시인 타고르에게 밀렸습니다만) 유명인사였으나 당대 동아시아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당한 비운의 인물입니다. 당대에는 ‘중국에 가서 자금성을 보지 않더라도 고홍명은 꼭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할 만큼 명성이 있었지요.
중국 본토가 아니라 당시 이미 영국령이었던 말레이시아 페낭의 화교 집안 출신으로, 13세에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갈 때까지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나이 25세였던 1881년, 싱가포르 총독부에서 일하던 중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홍장의 막료 마건충을 만나게 되는데 – 웃기게도, 강소성 출신이었던 마건충도 관화가 어설퍼서 프랑스어로 대화했다고 합니다 – 이때 자신의 중국인 정체성을 깨닫고, 사표를 내고는 중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후 강남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은 장지동 아래에서 통번역 사무를 보면서 틈틈이 유학 경전들을 영어로 번역해 (서양에서만) 명성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 외부의 사람으로서 중국의 전통 가치를 발굴·재조명하려던 그의 시도는, 안타깝게도 중국적 가치를 벗어나 서구화·근대화를 추구하던 중국 내의 시대적 흐름과 완벽히 대치되는 것이었습니다.
1915년 북경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임용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신문화운동을 개진하는 단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도 변발을 고집하여 괴짜로 소문이 나게 됩니다. (그 외에도 전족 옹호론을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명성을 얻지는 못하고 끝내 1923년 교수직을 사임한 뒤 1928년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상의 내용은 김수영(2017) "근대 중국의 지식계와 고홍명의 문화 보수주의" (중국사연구 106집)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작중에서는 유영복의 유명세를 듣고 찾아온 혈기왕성한 스물넷 젊은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