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40화 (140/320)

46. 가운데 마음 (1)

“아니, 그걸 졌다는 말인가?”

의아함 반절, 기쁜 마음 반절 담아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반문하였다. 의아함이야 당연히 프랑스군이 중국군, 그것도 정부군도 아닌 일개 도적떼(공식적으로는)에게 당했다는 데서 나온 것이요, 기쁜 마음은 신앙의 형제니 문명의 동반자니 해도 속으로는 이웃나라의 잘못되는 꼴을 보고 즐거워하는 유럽인의 전통적인 심술에서 비롯하였다.

“뭐, 그랬다고 합니다. 프랑스 친구들은 열심히 쉬쉬하고 있지만, 어차피 조만간 언론에 보도되겠지요.”

만약 의외의 철두철미함으로 프랑스의 쥘 페리 그 자가 국내 언론에 소식 새나가는 것을 모두 틀어막는다면, 그때는 비스마르크 본인이 그 옛날 나폴레옹 3세를 낚았던 것처럼 (엠스 전보 사건) 영국 언론에 조금 흘려주면 될 일이다.

“어쩌다 그리 되었다던가?”

과묵한 몰트케가 두 번 연달아 물어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웃나라 군대 얘기라면 그의 소임과도 무관치 않으니 그러려니 하였다.

“그 흑기군이라는 도적, 아니, 말이 도적이지 실은 군벌이라 봐야지요, 좌우지간 그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현대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더랍니다. 그저 머릿수로만 밀어붙이는 자들이라 생각하고 공격을 감행하다가 한 번 매복에 호되게 당했다고 합니다.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장교들이 꽤 죽었다더군요.”

듣던 몰트케는 순간 ‘1870년 이후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것 아니냐’ 하고 비아냥거릴 뻔하였으나 곧 생각을 고쳤다. 군인의 본능은 어디 가지 않아, 비스마르크의 저 말만 듣더라도 전황이 머릿속에 곧장 그려졌던 것이다.

처음 프랑스군이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을 때 문제의 통킹 일대 지도를 슥 살펴본 몰트케였다. 흑기군 지휘관이 바보가 아닌 이상 – 그리고 승리를 거두었으니 바보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중국 국경의 험준한 산악까지 퇴각하여 적을 기다렸을 것이고, 방어전을 펼치기 전 기세를 꺾기 위해 매복을 준비했을 것이다.

장교들이 사망했다는 것은 제대로 대열을 구축할 여유도 없이, 그대로 흑기군 사격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사력과 사거리에서 동양 군대가 그 전까지 사용하던 구식 머스킷과 비교를 불허하는 현대 소총이다. 처음에 장교들이 저격당하고, 일순 당황하는 사이 두 번째, 세 번째 일제사격이 이루어지고 그대로 고스란히 제압당했으리라.

그런 상황이라면 설령 가장 정예한 영국군이나 독일군일지라도 몸 건사하여 빠져나오는 것만으로 분투라 평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전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이미 패배한 것과 진배없었으므로.

문제는 어떻게 중국 정부군도 아닌 흑기군이 서양 소총을 그렇게 들여와 쓸 수 있었냐는 데서 불거질 것이었다. 아무리 10여 년 전 톡톡히 망신을 당한 프랑스군이라지만 명색이 유럽 군대. 군인 구실은 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런 이들을 화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한두 정으로는 불가능하다. 중국 쪽에서 몰래 소총을 대량으로 넘겼거나, 아니면 알고서도 프랑스 정부나 군부가 이를 숨겨서 현장에 전달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어찌 되었든 가볍게 다룰 일은 아니었다.

“정치적 파장이 작지 않을 듯하군.”

“말씀대로입니다. 적어도 총리를 비롯해 내각 전원 사퇴 정도는 하게 될 겁니다.”

이웃나라에 닥친 불행을 이용하려는 현명한 (혹은 심보 고약한) 사람의 개입이 없다면 그것으로 그칠 터였지만, 비스마르크는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섭하지요. 이번 일로 우리 이웃 프랑스가 다른 벗을 찾아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단단히 쐐기를 박아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이 러시아의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프랑스에게 굴욕을 안겼다고 선전한다면, 국민감정 때문에라도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는 친밀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평소대로라면 러시아와 친해지지 못하면 아쉬운 쪽은 프랑스였겠지만, 지금은 한창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과 대치하면서 현지 군대로 대리전 치르고 있는 – 아직 전면전까지 격상되기에는 양쪽 모두 심적·물적 대비가 부족했다 – 러시아야말로 아군 하나가 급한 상황.

러시아가 한 발 물러나 중국의 소년 황제를 압박해 프랑스에게 사과하게 한다 하더라도, 사람은 남이 베풀어준 것은 쉽게 잊지만 남에게 당한 것은 끝까지 기억하는 법. 두 나라 사이의 앙금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 일이야 나는 잘 모르니, 자네만 믿을 뿐일세. 우리 쪽에 불똥 튈 것 같으면 미리 알려만 주게.”

“하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염려 마시지요.”

곧 ‘중국이 양국 합의를 어기고 흑기군에게 무기를 공여했다’라는 (추측성) 폭로 기사가 영국 언론을 통해 프랑스까지 들어갔으니, 페리 내각을 무너뜨리고 다시 대통령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보는 정도로 안남의 일을 매듭지으려던 쥘 그레비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드는 동시에, 비스마르크 본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분란을 대륙 반대편에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총독 대인, 무고하셨습니까.”

예순여섯 노구를 이끌고 멀리 운남의 경계까지 다녀온 노장 풍자재(馮子材)가 공손히 군례를 올렸다.

“아, 풍 장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칭병하여 사직할 때 그의 벼슬이 이미 제독에 이르렀으니, 비록 직함은 없을지라도 아랫사람이라 낮추어볼 수는 없을 것이요,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장지동이 먼저 예를 갖추어야 할 지경이었다.

공치사 몇 번 오가고, 차 두 잔이 나온 뒤 – 풍자재는 광동 사람답게 차 없이는 혀 움직이지 않았다 - 본론에 이르렀다.

“관의 파발보다도 빨리 퍼지는 것이 소문이라 하지 않습니까. 벌써 양광과 운남에 승첩 거둔 소식이 떠들썩합니다.”

이리의 ‘승첩’이야 정면에서 맞서 싸웠다기보다는 기책으로 위압한 것에 가깝고, 멀리 신강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천산산맥 너머의 일이었다. 반면 이번 싸움은 바로 옆이 사람 가득한 양광이라, 풍자재 말마따나 파발 닿기 전에 이미 법국 군사가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멀리 남쪽으로 부리나케 도주하였다더라 하는 과장된 소문이 장지동의 치소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가서 보시니 흑기군의 세는 어땠습니까?”

“헛된 명성 얻은 이 늙은이와는 다르게, 유영복(劉永福) 그 사람은 참으로 장재(將材)라, 나라에서 거두어들여 썼더라면 이름마따나 조종의 큰 복이 되었을 법했습니다.

비록 출신 비루하여 도적의 무리를 이끌게 되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아 마침내 하나의 군영을 이루었습니다. 소장이 가서 보니 군중의 기세가 흐트러진 듯하면서도 정연하여 진퇴에 빈틈이 없어, 녹영군은 물론 어지간한 향용보다도 빼어났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 ‘아’는 한탄에 가까워, 풍자재로 하여금 자신이 변경 오가던 사이 곡절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였다. 아마 그가 생각하는 그 일이 맞으리라.

“실은 그 사이 조정에서 영이 내려왔습니다.”

“벌써 그 소식도 바깥에 퍼져, 역시 떠들썩하더군요. 헛소문이 아니었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엄함을 무릅쓰고 생각해보면, 지금 조정이 어디 제 구실하는 조정이던가. 그 내린 영에 이르기를,

‘흑비(黑匪, 흑기군)의 무리에 양창(서양 소총) 넘긴 주모자를 색출하여 처벌하고, 두 나라 사이의 화평을 해친 유영복을 추포함에 있어 법국에 모든 협력을 다하라.’

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흠차대신 충허가 조선국 도성에서 법국과 담판 지어 원만히 해결하기로 한 월남국 국경의 일이었다. 그러니 나라 사이 합의하는 이치로만 따지자면 청이 법국 뒷통수를 친 격이라, 저들이 노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상해와 신안(新安, 홍콩) 통해 들어오는 소식에 따르면 이미 안남 남쪽에 머물던 저들의 수사(해군)도 북상할 준비를 마쳤다고 들었다.

그러나 민심이 언제 그런 것을 신경 썼던가. 백성들이 어리석다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당장 월남 국경이 법국 손에 넘어가고 그리로 법국인 상인들이 몰려오게 되면, 운남과 귀주, 양광의 뭇 상인들이 손해를 보게 될 테니, 정말 산골짜기에서 외롭게 살지 않고서야 어떻게든 시장에 발 걸치고 있는 백성들로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미 승첩 소식을 듣자마자 ‘유 장군’을 불세출 위인이라 떠받들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난데없는 칙령 내리니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서 이르기를,

‘멋대로 날뛰는 법국을 옹호함은 무슨 법(法)을 따름이며,

양이를 징치한 영복을 주벌함은 무슨 복(福)을 위함인가?’

하더군요.”

풍자재가 옮기는 대구(對句)를 들어보니 평측(平仄)의 운이 모두 들어맞아, 흔히 저자에 나도는 시사 비꼬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과히 정교하였다. 필히 식견 있는 초야의 서생들까지 분하게 여기어 그런 대구를 지은 것이리라.

생각이 이에 닿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조선에서 들여온 은을 나라에 도움 되게 쓰려 하였건만, 그것이 이리 화근이 될 줄 알았겠습니까. 심정 참괴(慙愧)스러울 따름입니다.”

일전에 조선국에서 생각지도 못한 은자 사백만 냥을 들고 왔을 때, 저들이 은근슬쩍 빼돌리는 공인 값만큼은, 아니, 그 이상으로 나라에 보탬 되게 만들겠다는 생각에 미국과 덕의지국에서 최신 화포와 탄약 만드는 기기를 들여왔다.

마침내 제조국 완비되어 이전에 자신들이 양창이라 부르며 매섭게 여기던 물건은 굴러다니는 쇠막대기처럼 보이게 만드는 신식 총포가 나왔을 때는 벌써 국경 너머 남쪽의 정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때 생각하기로는 법국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무작정 밀고 들어오리라 여겼지요. 조정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그런 우환을 막아낼 방도라 여기어, 장군께 청하여 한양(漢陽, 현 우한 일부)에서 새로 나온 뇌씨창(雷氏槍, 레밍턴 롤링블록 소총)을 국경 너머로 보내달라 한 것이었는데...”

때마침 ‘말로만 돕는다 하지 말고 좀 제대로 보태 달라’ 하는 유영복의 무례하리만치 솔직한 청도 들어왔겠다, 무명 높은 풍자재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정예한 양창의 호송을 맡아달라 하였다. 만에 하나 패관 무리와 결탁한 도적의 손에 양창이 들어가게 되면 안 될 일이었고, 더구나 그때만 하더라도 본질이 도적 무리이니 흑기군을 의심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무릇 세상사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라, 총을 넘긴 뒤 흑기군이 밀릴 때에 대비해 국경의 방비를 새롭게 하던 풍자재가 법국이 패하였다는 소식 듣고 돌아올 무렵에는 일이 이렇게 되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장지동 자신의 지모가 법국에 미치지 못한 탓이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힘으로 밀어붙이기 전 명분으로 길을 닦고 들어오니, 흑기군은 일순간에 대청과 법국, 월남 세 조정에서 모두 토멸해야 할 비적으로 굴레 씌워지게 되었다.

가만 앉아 당할 수는 없던 유영복이 장지동 자신이 넘긴 무기를 남김없이 휘둘러 싸움의 이득을 취하게 되었으니, 졸지에 유영복과 더불어 장지동 자신도 엮여 들어가게 되었다.

“늙은이가 어찌 조정의 꾸미는 일을 함부로 논하겠습니까만, 감히 말씀드리자면 그 영을 면밀히 살피면 총독 대인에게까지 죄가 미치지 않게끔 빠져나갈 방도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나라 안에 신식 양창 만들만한 제조국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넓고 넓은 대청 안에 북양대신 이홍장을 제하면 장지동 한 사람뿐이다. 그 사정을 알면서 ‘주모자를 색출하라’ 함은, 적당한 아랫사람 하나를 골라내 죄를 뒤집어씌운 뒤 유영복을 주살하는 데 힘을 다하면 장지동 그로 하여금 능히 구명(救命)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지금 유영복이 세간에서 어떤 평 듣는지를 생각하면 어찌 목숨을 구하든 장지동 그의 명성에 흠이 아니 갈 수는 없겠지만.

풍자재도 그 ‘아랫사람’의 후보자 중 하나일진대 이렇게 직접 짚어 말함은, 여차하면 자신을 바쳐도 좋다는 뜻일까? 아니면 장지동이 그리하면 살아남을 수 있음을 꿰뚫어보고 있으니 제게는 허튼 수작 걸 생각 하지 말라는 뜻일까? 노장을 예우하는 마음에서라도 (지금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그가 죄 얻어 죽기를 바라지 않는 이라면 이홍장일 것이다. 만인 조정이 생각하기에는 어쨌든 아라사는 가깝고 강남은 머니, 한인 한 명의 목을 바쳐 사직의 온전함을 얻고자 했을 터. 힘이 줄었다지만 여전히 직례의 군권을 쥐고 있는 이홍장이 개입하여 썩어가는 동아줄이나마 내려준 것일 듯했다.

그때 무언가가 등을 스치고 내려가는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언제부터 그가 조정을 ‘만인 조정’으로 생각하게 되었단 말인가?

그 소름을 최대한 무시하면서, 결국 마음 정하지 못하는 것을 거창하게 포장하였다.

“장군도 익히 짐작하여 알겠지만, 이 일은 나라 사이의 일로 종사의 앞날과도 맞닿음이 있습니다. 이 장 모가 깊이 생각하여 조처할 터이니 심려치 마시고 군무에 힘써 주시지요.”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조정에서 닷새에 한 번 꼴로 독촉이 들어왔지만, 한양에서 나온 양창이 어찌 양산(諒山, 랑선) 산 속까지 들어갔는지 그 전말을 면밀히 살피는 데는 시일이 걸린다는 핑계를 대며 최대한 버텨왔다.

한편 그 산속에 틀어박힌 유영복도 바깥에 귀가 있는지, 월남과 광서 양쪽에 격문을 흩뿌렸다. 어차피 대청 조정에서 버림받을 몸임을 자각한 것인지 그 내용이 심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하였다.

‘서삼선제독(署三宣提督)을 겸하는 웅위대장군(雄威大將軍) 유영복은 고한다. 법국 비적이 천하의 고질이 되어, 안남과 양광을 침노하여 그 이익을 온전히 저들 것으로 하려 한다. 말로는 통상에만 뜻을 둔다 하나, 실제 음모하는 바가 그 땅에 있음을 세인이 모두 알건만, 저들의 그릇되고 간악한 속임수가 이와 같도다.

이미 법국이 안남 조정을 겁박하여 우리 의군(義軍)을 거꾸로 토비(土匪)라 몰아세우니, 하늘과 만백성이 더불어 노하였다. 그러나 저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심지어 우리 천조의 눈을 가리려 드니, 땅과 뭇 귀신도 가만히 있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니 나 유영복과 용맹한 장졸은 끝내 의리를 지켜, 마지막 화약 한 줌이 다하고 홀로 남은 창대 부러질 때까지 한 치의 물러남 없이 싸울 것이다. 맑은 것(淸)이 흐려질지언정 백성은 그 자리에 남으니 어찌 버리겠는가?’

정말 유영복이 충의에 가득 차 쓴 글은 아닐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충의라 믿고서 그리 썼을지는 모르겠지만, 세상 어지럽히는 것을 어찌 충(忠)이라 부르겠는가? 누가 붙였는지 처소 옆 골목에도 붙었다 하여 뜯어오게 한 격문을 살핀 장지동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성난 민심을 뒤흔들기에 저만한 말이 또 있겠는가? 그러잖아도 근래 양이가 밀려오는데 조정은 무얼 하고 있느냐며 분개하는 자들이 적지 않고, 아직도 음지에는 장발적(태평천국)이 야소의 말에 빠져 사교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장차 천하를 얻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자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장지동의 고심은 나날이 깊어갈 뿐이었다.

이홍장 아래서 일한다는 목인덕(묄렌도르프)이라는 자가 찾아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대인, 천진에서 대인을 뵙기를 원하는 분이 계셔서 긴히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유창한 한어로 청하였다. 이홍장 아래에 사람이 이 코 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닐진대 굳이 그를 골라 보냄은, 조정이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리라.

“어찌 두 성의 총독을 겸하는 몸으로 임지를 함부로 벗어날 수 있겠소?”

“그러면 총독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선비로 오시면 되시는 일 아니겠습니까. 허해 주신다면 헛되이 혀와 귀를 놀리는 자들을 능히 피할 수 있도록 작고 빠른 배를 보내겠노라, 저를 보내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더군요.”

잠시 고민한 끝에 마침내 답이 떨어졌다.

“언제, 어디로 가면 되겠소?”

--- *** ---

헬무트 폰 몰트케는 이름이 같은 조카 소(小) 몰트케와 구분하여 흔히 대(大) 몰트케로 부르고는 하지요. 비스마르크와는 연배가 꽤 차이가 나지만, 나이 여든을 넘긴 현 시점에서도 정정하게 (그가 참모총장 자리에서 은퇴한 것은 1888년의 일이었습니다.) 일하고 있을 때입니다.

풍자재는 1818년생으로 1883년인 작중 시점에도 노장 소리 들을 연배입니다. 고아 출신으로 태평천국의 난 진압 과정에서 군공을 세워 제독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원 역사에서는 은퇴하여 고향인 광서에 머물고 있던 중 장지동에게 다시 기용되어 청불전쟁에서 여러 차례 활약합니다.

유영복이 작중에서 뿌린 격문은, 일전에 작가의 말로 언급했던 꺼우저이 전투에서 프랑스군 장교 앙리 리비에르를 도발할 때 유영복이 썼던 실제 격문을 참고했습니다. 하노이 성벽에 붙인 이 격문은 프랑스 ‘도적’의 횡포를 고발하면서, 자신이 있으면 한 번 나와서 일전을 벌여보자며 도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모범적인 ‘어그로’ 앞에서 프랑스군은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당당하게 일전을 벌일 생각은 없던 흑기군의 매복에 걸려 패퇴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역사에서 흑기군은 1883년 프랑스군과 싸우면서 몇 번은 성과를 거두지만 결국 큰 손실을 입고 밀려나게 됩니다. 청과 베트남 모두 흑기군과 명분상 함께 싸웠지만 실제로는 흑기군 홀로 버티는 형세였지요. 그러던 중 천진협약 위반을 빌미로 청불전쟁이 ‘공식적으로’ 개전하게 되면서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심리로 – 청군 사령관 당경송(唐景崧)을 개인적으로 존경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 청의 편에 서게 됩니다.

이후 청불전쟁이 청의 패배로 끝나게 되면서, 종전 조건 중 하나로 유영복은 통킹을 떠나게 됩니다. 실제 심리야 어쨌든, 해당 시점에서 2천 명 수준으로 줄어든 흑기군이 홀로 전쟁을 계속할 수는 없던 것이지요.

이후 유영복은 총병 벼슬을 제수받고 광동의 한 진에 부임하게 됩니다만, 지속적인 시기와 견제에 시달렸고, 푸대접으로 인해 귀국한 흑기군 중 휘하에 남은 것은 3백 명을 조금 넘겼다고 합니다. 그러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흑기군을 재건해, 대만에서 일본과 일전을 벌이게 되지요.

원 역사에서 레밍턴 롤링블록 소총은 이홍장이 회군에게 지급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1880년대 초반에 걸쳐 독일 크루프 사의 화포도 들여오는 등 근대적인 화기를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요. 여기서는 한양조병창이 조선의 은 투자로 조금 더 일찍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서 이홍장보다 장지동이 먼저 레밍턴 소총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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