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승냥이의 탈 (3)
고르차코프 공작의 후임 자리는 엉뚱한 슈발로프(Пётр А. Шувалов) 공작에게 돌아갔다지만 이그나티예프 공작의 일대 활극이 아예 효험이 없던 것은 아니어서, 중앙 정계에 복귀한 그는 얼마 전 작고한 무라비요프 백작을 잇는 새로운 극동 전문가 겸 팽창주의자로 위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 덕에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이그나티예프의 사람’ 취급을 받는 베베르 역시 덩달아 이름값이 올라, 다음 임지인 미국으로 떠난 슈트루베의 뒤를 이어 주조선 공사까지 올랐다.
주중공사 시절의 이그나티예프가 수족 삼아 파견한 사람이라는 어정쩡한 위치에서 단번에 공사까지 올라왔으니, 그 정도 집안 출신 사람이 나이 고작 마흔하나에 해낸 출세로는 적잖이 인상적이었다. 베베르 생각하기에 이는 자신이 나서서 무얼 하였다기보다는 조선의 행보를 본국에서 멋대로 해석한 결과였으므로, 그러잖아도 나쁘지 않던 조선에 대한 감정이 더욱 좋아졌다.
그러한 심정은 그를 대하는 조선인들도 마찬가지라, 대원군은 근래 드물게 예의바른 청년이라 여겨 – 저의 석파란의 진가를 아는 몇 안 되는 양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 그를 좋게 보았으며, 모난 데 없이 무던한 성품이 퍽 마음에 들었던 국왕 귀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안남에서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사절단이 무사히 그 나라 수도에 도착한 듯합니다.”
어지간한 외국 공사는 잘 들이지 않는 부용정에 들어 귀남을 알현한 베베르가 운을 떼었다.
“비록 이번 일의 끝이 어떻게 날 지는 확언할 수 없겠으나, 적어도 전하의 정부가 이번에 보여준 신중함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역시 전하께서 현명하게 이끌어주신 덕이겠지요.”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파리 사이에서 무슨 밀약이 오갔는지, 베베르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적어도 극동에서 영국과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러시아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음은 그가 보기에 명백하였다.
“허허, 내 무슨 힘쓴 바가 있겠소이까.”
다른 외교관이라 하면 열에 아홉은 아첨이라 여겼겠지만, 마주앉은 이가 바로 베베르였으므로 열에 한 네다섯 정도만이 공치사에 불과할 터.
어느새 극동, 나아가 러시아의 식민사업 전체에 있어 희망의 등불이 된 연해주다. 하지만 네바 강변(상트페테르부르크)과는 낮밤이 반대인 아무르 강변의 사정은, 대개 듣기를 원하는 대로 곡해되고 또 빈틈이 있으면 창작되어 우랄 산맥을 넘기 마련이라, 현지의 진상이 알려진 것과 차이가 있음은 현지의 관료와 유지들 중에서도 몇몇만 아는 바였다.
만약 누군가 진실을 털어놓는다 해도, 고마워하기는커녕 대체 왜 그런 사실을 알려주어 행복을 깨뜨렸냐며 책망하게 될 터였다. 비록 일자리와 시장을 찾아 러시아인도 늘기는 했다지만 여전히 인구 대다수는 조선인이요, 그들이 논밭 일구지 않으면, 하다못해 농기구와 농우를 팔지 않으면 곧장 무너질 연해주였다. 조선왕이 못된 마음 먹는다면, 국경의 초소도 조선인 농지와 농가에 에워싸여 있으니 러시아 측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수천 병력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유지들이 그에게 근래 툭하면 서간 보내, 제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연해주가 전화에 휩싸이지 않게 해달라 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몇 안 되는 중앙에서 나온 관료들이야 적당히 눈 가리고 구워삶을 수 있다지만, 군대는 도저히 그 입막음이 되지 않으므로.
“국제 상황이 이러하여, 자칫 우리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서 택일하여 평화를 어지럽힐 뻔하게 만들었으니 책임 없잖은 사람으로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전하의 현명한 결정 덕분에 극동의 평화가 적어도 오늘은 지켜졌군요.”
“하하, 내 처음부터 알고서 그리하자 제의한 것은 아니오.”
베베르야 겸손으로 해석하지만, 귀남의 말은 참에 가까웠다.
기무회의에서 서로 의견 내놓은 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쪽에서는 도의를 지킴이 가장 중하므로 월남을 도와야 한다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월남이 그대로 법국에 넘어가야 장차 영국의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면, 꼭 도의를 지킨다 해서 월남국만 도와야 하는 것은 아니요, 법국 편을 들어준다 해서 월남국이 반드시 법국에게 삼켜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법국이 스스로 이르기를 그저 월남국을 도와 북비(北匪, 흑기군)를 정토(征討)할 뿐이라 하였으니, 도리를 아는 대서 나라로서 어찌 함부로 말을 뒤집겠소. 그러나 만에 하나, 항간에 떠도는 것처럼 장차 법국이 월남의 국권을 저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면 이는 두 나라의 일에 그치지 않으니, 마땅히 조처할 바를 구하였을 뿐이오.”
사람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법국이 월남을 병탄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아무리 귀남과 조정이 고민한들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허나 겉으로 내세우기로는 오직 문명과 평화만을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만에 하나, 법국의 집정한 이로 어질지 못한 자가 있어, 약조한 바를 버리고 월남을 저들 강역으로 삼게 된다면 이는 법국뿐 아니라 아국 또한 신의를 잃게 되는 것이오. 이치를 살피면 이리할진대 어찌 월남이 바다 건너 멀리 있다 하여 가만히 있겠소이까.”
물론 귀남이 생각하기에도 법국이 정말 순수하게 착한 마음에서 월남을 도와주겠다고 하였을 리는 없을 듯했지만,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선량한 사람 자처하는 이가 중인환시 하에 못된 짓을 일삼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조선이 비록 작은 한 나라지만 지켜보는 (말 많은) 이웃으로 행세하면, 법국이 그리 대놓고 행악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싶었다.
마침 생각해 보면 – 그야 월남국이 지금까지는 능히 그리할 여력이 없고, 조선 역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 종종 북경에서 사신끼리 마주하기도 했던 사이인데, 월남국 도읍 순화성(順化, 후에)에는 조선 공사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번에 (좀 거리가 멀긴 해도 어쨌든) 이웃한 나라로서 수호(修好)하는 뜻을 밝히고 옛적에 최익현과 함께 보평군으로 그 나라 땅을 밟았던 양헌수를 공사로 삼아 보내었다.
정말 법국이 작정하고 월남을 삼키려 하면 물론 조선이 할 수 있는 바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할 것이요, 사세가 그리 어그러진 뒤에는 부득불 영국과 손 잡고 아라사와 법국 두 나라에 맞서야 하겠지만, 그것은 그때 생각할 일이었다.
논의가 이에 이르니 처음부터 법국과 아라사가 월남을 거스름돈 취급하여 교섭함을 마뜩잖게 여기던 중신들은 곧장 찬동하고, 겉으로 도의가 무엇이 중하냐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던 신료들도 끝내 수긍하였다.
“헌데 안남 현지의 프랑스인들이 전하의 사절단을 환대하였다니, 물론 좋은 것이 좋은 것이겠지만 또 조금 의아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하, 우리 살아가는 세상이 아직 그리 야박하지는 않소이다.”
기나긴 인고의 세월 끝에 마침내 그 열매를 얻을 날이 왔다. 오늘에야말로 반드시 출세로 향하는 문을 다시 열어젖히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며, 앙리 드 벨로네 백작은 튈르리 궁의 응접실을 서성였다.
대통령 쥘 그레비(François Paul Jules Grévy)가 통킹 문제로 자칭 극동 전문가인 자신을 불러 조언을 듣고자 한다 하였을 때는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했지만, 막상 때가 되자 초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코트의 목깃을 다시 한 번 만져본다. 여전히 반듯하게 서지를 않는 것이, 거울은 없지만 맵시가 썩 나지 않을 것은 분명하였다. 아내 말대로 다른 예복을 차려입고 올 것을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대통령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고맙소.”
그러나 어찌하랴, 이제 믿을 것은 그의 세 치 혀뿐인데. (그 옛날 국왕과 흥선 대공을 만나러 몰래 한양으로 배 타고 들어가던 밤이 머릿속 한 편에 떠올랐다.)
곧 비서인지 직원인지 모를 이와 함께 대통령의 집무실에 들었다.
“어서 오시오, 백작. 명성이 자자하더군.”
“과찬이십니다, 각하.”
그 옛날 한 번 실수로 영영 사고뭉치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 줄 알았건만, 동양 속담대로 인생사 새옹지마라, 언론을 적당히 이용해 한양으로 망명간 코뮌 반역자들이 세운 공을 자신의 것으로 포장하고 또 부풀린 벨로네였다.
조선과 맺었던 문제의 그 조약도, 다들 기억이 흐릿해진 지금은 (벨로네 본인의 부단한 노력에 힘입어) 재평가되어, ‘양국의 협력을 통해 프랑스의 국위와 국익을 모두 추구한 장기적 시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평도 종종 나오고 있었다.
“지금 안남을 둘러싼 외교관계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소?”
“언론에 보도된 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흠, 그렇군. 그러면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이야기를 조금 해주도록 할 테니 잘 들어보시오.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보면서 말이오.”
조선이 안남에 공사와 더불어 개화의 실무를 담당하였던 관료와 서리들을 대거 파견하기로 하였다고 당당하게 선언하였으므로, 양헌수가 도착하자마자 미리 준비해둔 대로 당당하게 단언하였다.
‘아시다시피 안남의 외교권은 우리 프랑스가 대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귀하는 주권국의 외교관으로서 귀국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안남의 내정에 관한 사안이 있다면 우리 프랑스의 선의를 믿고, 필히 사전에 우리와 상의해주시기를 정중히 요청드립니다.’
무슨 뜻 품고 왔는지는 몰라도 이미 코친차이나를 넘어 안남과 통킹까지 세력을 뻗쳐놓았으니, 허튼 수작 부릴 엄두도 내지 말라고 하였더니 양헌수 답하기를,
‘이곳 안남은 예로부터 예문(禮文) 흥성하여, 그 숭상하는 도의로 보나 사람의 생김새로 보나 따지자면 그대들보다 우리와 더 가깝소. 물론 그대들이 그 공학과 세세한 기물의 일에서는 우리보다 나으니, 이곳 사람들에게 재주 베풀면 어찌 공효 없겠냐만, 그렇다 한들 그대들이 사서(四書)와 통감(通鑑)에 밝은 것은 아니지 않소이까.’
하였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저들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답한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조금 더 음흉한 속셈이 있었다.
‘어허, 딴 속셈이 있다니, 그 무슨 말씀이오이까. 그저 아국과 월남 두 나라의 우의를 위해 관헌끼리 교분을 다졌을 뿐이오.’
그 교분이라는 것의 내용이 엉뚱하였으니 문제였다.
‘그런데 월남 조정의 신료들이 내게 이르기를, 귀국 상인들 중 간혹 물목의 빼어남이 아니라 총칼의 위력으로써 이익 얻고자 하는 모리배들이 있어 월남과 법국 두 나라의 우의를 크게 상하게 할까 두렵다 하더이다.
물론 이 사람은, 그런 일은 대개 침소봉대된 것이거니와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예의의 나라인 귀국이 스스로 조처하여 원통함이 없게 할 것이라 믿고 있소. 그리하여 그 관헌들에게도 그렇게 답해주었다오.’
그러면서도 둘러대는 말 마지막에는 꼭 덧붙이기를,
‘법국의 선의를 믿으니 우리가 이리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저 감사한 마음을 표할 뿐이오.’
하였으므로, 코친차이나 총독부로서는 툭하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안남 정부도 골치아픈 터에 잔소리 심한 얄미운 이웃이 새로 이사온 격이었다.
그뿐이랴? 조선과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이래, 딱히 얻어낸 것은 없고 조선이 프랑스에게서 얻어낸 것은 많았는데, 이제 그 경험을 조선이 어리숙한 안남인들에게 가르쳐주게 되었으니, 그간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려 노심초사하였던 것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 격이었다.
‘허어, 이곳 관헌으로 외무를 맡는 이들 중 아직 『만국공법』의 이치를 심득하지 못한 자가 있더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그대의 나라가 아무리 문명과 도의를 위해 노력한다 한들, 홀로 외로이 힘쓴다면 이처럼 미처 손길 닿지 않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라오. 우리 조선이 조금이라도 보태주도록 하겠소.’
물론 통킹 북부의 흑기군과 대치하면서 프랑스군도 크게 증원되었으니, 굳이 군사력까지 동원하여 안남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한다면 못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안타깝게도)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마치 ‘그대들은 문명 위하는 선의로 왔으니 처신 잘 하시오’ 하는 것처럼 양헌수가 두 눈 크게 뜨고 있으니 여간 걸리적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전비는 전비대로 나가고, 확장이니 식민지니 좋아하는 이들이 원하는 조치, 이를테면 보호국 선포 같은 건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오. 뭐, 여론이야 그깟 동양의 소국이 어찌 되었든 우리 국민의 복수만 하면 되었다, 이렇게 떠들고 있지만.”
대통령 말마따나 쥘 페리(Jules Ferry) 총리를 비롯해 내각과 의회 상당수는 ‘프랑스를 다시 위대하게!’ 같은 구호를 내세우며 얼른 영국을 따라잡아 지도를 ‘프랑스’ 여섯 글자로 채우자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물론 실리주의자 그레비는 그런 이들을 허풍선이로 생각하며 눈엣가시로 보고 있었지만.
“몇몇 장관과 의원들은, 이번 기회에 주제넘게 개입하는 조선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하더군. 이미 해병에 이어 육군까지 통킹에 증원되고 있으니 조금 무리하면 못할 일은 아니오.”
“하지만 그리해도 비용만 나갈 뿐 딱히 얻을 이익은 없겠지요.”
“그렇지, 잘 보았소. 아무리 지난 번 헌정위기 이후로 총리 자리에 실권이 몰렸다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책임은 내가 앉은 이 자리에 있지 않소. 내각이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고 한들 조용히 따라갈 수만은 없는 일이지.”
간만에 말이 통하는 이를 만났다 여긴 그레비의 표정이 밝아지자, 말이야 통하든 말든 그의 출셋길만 열리면 족한 벨로네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다.
그러나 벨로네가 빈말로 대통령의 편을 든 것도 아니었다. 졸지에 극동의 균형추가 되어버린 조선이다.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영국의 편으로 돌아서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대놓고 조선을 자극해 영국 편에 완전히 붙어버리게 만드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다.
그리되면 러시아로서도 기껏 친하게 지내주려 하였더니 짐덩이가 함께 따라오는 셈이니 달갑잖게 여길 것이므로, 외교적 고립무원 상태를 벗어나고자 백방으로 노력해온 현 정부에게도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닐 터였다.
“그렇지만 가만 앉아서 저 조선인들이 안남에 헛바람 불어넣는 것을 좌시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군사작전이 끝나게 되면, 그만큼 세금과 피를 뿌려서 안남에서 얻어낸 것이 무엇이냐며 여론이 금방 돌아서게 될 게요.”
“이미 이전 합의 이후로 그쪽 시장은 완전히 개방된 것 아니었습니까? 이번 싸움은 그러니 뭔가를 얻어내기보다는 지키기 위한 개입이었다고 포장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아니, 그것으론 약해. 뭔가 더 그럴듯하고, 또 실제로도 프랑스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도가 없겠소?”
굳이 그를 부른 이유가 드러났다. 프랑스의 국익과 동시에 확장주의를 내건 페리 총리를 견제할 만한 방법이라.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그의 앞날을 결정할 것을 직감한 벨로네의 이마에 진땀 한 방울이 흘렀다.
이마 따라 흘러 내려가는 땀의 촉감에 – 요 근래 이마가 넓어져서 그런가, 퍽 오래 걸렸다 - 문득 그렇게 그로 하여금 땀 흘리게 만들었던 동양인 부자(父子)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엉뚱한 명분으로 터무니없는 실익 취하는 것이야말로 그들 부자의 전공이었다. 만약 자신이 흥선 대공이나 그 군밤장수 국왕이었더라면 어떻게 이번 안남 일을 써먹었을까, 이만 리 떨어진 귀남이 알았더라면 억울하게 여겼을 법한 그런 궁리를 하는 벨로네였다.
“국제관계에서 이익이란 상대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마침내 ‘팟’ 하며 뭔가가 뇌리를 스치더니, 짖궂은 즐거움이 뒤따랐다. 자신을 골려먹을 때 흥선 대공의 심정이 이러하였을까.
“그야 그렇지 않겠소.”
“우리가 안남에서 이런저런 명분에 얽매여 국익을 제대로 추구할 수 없다면, 다른 나라들을 더 심하게 얽어버리면 되겠지요.”
쉽게 말해서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심보로 일관하자는 것이었다.
“흠, 클레망소(Georges Cleamanceau) 그 친구는 좋아하겠지만, 여론이 좋아할지는 모르겠군. 러시아도 그렇고.”
“그야 포장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인도를 착취하는 영국인들보다 훨씬 양심적이고 문명에 가까운 관계를 구축한다, 인류 전체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위선 대신 실천으로 임하는 자랑스러운 프랑스 공화국. 어떻습니까?
물론 러시아에서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영국인들에게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명분이라고 설득한다면 괜찮을 듯합니다.”
처음 보기에는 헛소리 같은 명분에 몇 번이나 데여 보았던 벨로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손해 볼 것은 없는 듯하군. 진지하게 검토해보도록 하겠소.”
하지만 조선이 승냥이의 탈을 쓰게 하는 대신 다른 승냥이들 모두에게 탈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싶던 정세는 다시 한 번 복병을 만났다.
후방이야 어찌 되었든 일단 중국 국경까지 밀어붙이고 보겠다는 심정으로, 국경 산악지대로 자신있게 진군하던 프랑스군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서양식 소총으로 무장한 흑기군에게 대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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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역사에서는 1882년 고르차코프 공작의 뒤를 그의 조카사위 니콜라이 기르스(Николай К. Гирс)가 잇게 됩니다. 신중함과 충성스러움을 눈여겨본 새 차르 알렉산드르 3세에 의해 등용되지요. 가열되는 그레이트 게임의 와중에서 평화주의적이고 신중한 외교정책을 펼쳐,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일대의 세력 분배를 놓고 영국과의 합의를 이루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작중에서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교분이 있었던 데다 비밀경찰 등 권력의 핵심 요직을 역임한 슈발로프 공작이 먼저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 언급은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의 커리어를 끝장낸 베를린 회의가 열리지 않았던 데서 발생한 나비효과 중 하나입니다.
원 역사에서도 베베르는 고종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조금 더 거시적으로 보면, 일본의 어니스트 사토우(Earnest Satow)처럼 젊은 유럽 외교관들이 현지에 친근감을 느끼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고종이 딱히 인간적 매력이 넘쳤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오늘날까지 프랑스 대통령의 처소는 엘리제 궁이지요. 하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는 원 역사의 튈르리 궁이 파리 코뮌의 진압 과정에서 전소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제2공화국에서 엘리제 궁이 대통령 관저로 쓰이기는 했습니다만, 나폴레옹 3세는 대통령 시절부터 튈르리 궁을 행정부의 (사실상) 청사 겸 본인의 처소로 사용했고 (그의 선대 나폴레옹이 본궁으로 사용했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보불전쟁 직전에는 대규모 개축을 계획하기도 하였습니다.
돔브로프스키의 뒤를 따라 파리 코뮌의 온건파가 조기에 항복하면서 튈르리 궁이 불타지 않은 자잘한 나비효과로 제3공화국의 관저로 엘리제 궁 대신 튈르리 궁이 쓰이는 것은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하겠습니다.
앞서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원 역사의 청불전쟁에서도 프랑스군은 상대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흑기군의 결사적인 방어와 게릴라 전술에 피해를 입었다면, 후기에는 대규모로 참전한 청군에게 손실을 입었지요.
특히 1885년 진남관(또는 방보Bang Bo) 전투에서 수적 우위와 산악지형을 이용한 기동전으로 청군이 프랑스군을 패주케 한 것이 유명합니다. 이때 청군의 수치를 실제의 5배인 4만 명으로 오인한 프랑스군 지휘부는 매우 부정적인 전황보고를 작성해 보고했는데, 곧 착오를 깨닫고 이를 수정했지만 이미 이전의 보고가 언론으로 누설된 뒤였습니다. 이로 인한 책임 논쟁인 통킹 사태(L'Affaire Tonkin)는 쥘 페리 내각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앞서 파리 코뮌 망명자들이 귀국할 수 있던 배경으로 잠깐 언급된 1877년 헌정위기 이후 제3공화국은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상당 부분 이행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페리, 나아가 청불전쟁 전반에 대해 강경한 비판을 주도하였던 것이 바로 1차대전에서 전시 지도자로 명성을 떨친 조르주 클레망소였지요. 1차대전에서의 정력적인 모습으로 인해 나이가 젊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1841년생으로 이미 작중에서는 유력한 정치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