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34화 (134/320)

44. 이 글을 어지럽히는 이들 (1)

심양 봉천부에 영국 영사관이 있음은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하겠지만, 끽해야 별 상업적 가치가 없는 중국의 일개 지방도시에 해리 파크스(Harry Parkes) 같은 노련한 외교관이 영사로 와 있는 것은 확실히 특이하다 할 만하였다.

동삼성총독 공친왕 이힌이 그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굳이 오늘 그가 접견을 청해온 것도 마찬가지.

“항상 건강하시니 우리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는 참 좋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전하.”

‘네놈들 사정에 연줄 하나가 급하니 그런 것 아니냐’ 하고 잠시 쏘아 붙일 생각을 했지만 곧장 제쳐냈다.

“고맙소. 그대 또한 건강하길 바랄 뿐이오. 이곳 봉천의 겨울은 작년에 겪어보았겠지만 혹독하다오.”

말하기야 조종의 뿌리가 발상한 용흥지지(龍興之地) 동삼성이라지만, 이곳 봉천에 안착하여 터전 새로 일구려 하다 보니 그 열악한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런 풍토를 끝내 견디지 못하였기에 그 옛날 저의 조상이 입관(入關)할 궁리를 하기에 이르지 않았는가, 한 번은 그런 괘씸스러운 생각을 품기도 하였다.

그런 곳으로 밀려나 다이칭 구룬의 앞날을 지켜낼 방법 마련하고자 하고 있으니, 애써 노력하면 뭐라도 되겠거려니 싶었던 것도 하루이틀이라. 물론 이제 그 결실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래도 쾌활하다고는 하기 어려웠던 성정이 더욱 냉소적으로 변함은 어쩔 수 없었다.

“그 겨울도 이제는 다 지나갔지 않습니까. 벌써 봄 만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듣기 좋던데요. 그럼 이만 하직을 고하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시오.”

허나 얼음장 녹으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과연 새만 있겠는가.

청한 듯 청하지 않은 객이 치소 밖으로 나가자, 같은 건물 다른 전각에 있던 마신이가 들어왔다.

“전하,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뭐, 고생스럽다 칭할 게 있겠는가. 늘상 그렇듯 저들 양이끼리 서로 목덜미 노리고 다투는 이야기를 넘지 않는데.”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그도 많이 늙었다. 굳이 절뚝이며 지팡이 짚고 다니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몸의 쇠함이 보일 정도였다. 허나 공친왕이 냉소적으로 변할수록 마신이는 도리어 갈수록 사람이 실없어지는 것인지, 늙은이 미소는 좀처럼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 하여도, 동삼성이 만약 하나의 나라라면 그 나라의 재상은 당연히 마신이 이 사람일 것이었다.

그 땅에는 기근 없고 땅은 많다 하는 소문을 듣고서 매양 밀려 들어오는 한인들을 수용하는 일, 개중 무재 있는 이들을 뽑아 군대 행색 갖추는 일, 가친에게 떠밀리거나 저의 머릿속 꿈 쫓아 공친왕 따라온 젊고 늙은 만인들을 살펴 개중 유능한 이에게는 실직을, 자리만 차지하는 이에게는 말 그대로 자리만을 내어주는 일. 이 모든 것이 어찌 공친왕 홀로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겠는가.

“허, 그렇습니까. 도대체 그자들은 싸우지 않는 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이곳 동삼성까지 어지러워질 일인지요?”

“그리 될지도 모르겠네. 아마 지난 이리의 일처럼 직접 군병 내어 싸우지는 않겠지만...”

파크스 말로는 그저 문안차 왔다고 하지만, 그러면서 은근슬쩍 저의 나라 사정 흘리는 것을 보면 의중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금껏 미루고 미루어왔던 싸움이 곧 재개될 것이라더군. 토번 건너편 아부한(아프가니스탄)에서 말이야. 거기에 비주(아프리카) 곳곳에서도 다툼이 벌어지고 있고.”

비주의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부한은 천축(인도)과 접하고 있으니, 아마 얼마 전 신강의 일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신강을 모두 평정하였지만, 기껏 땅을 대청의 품에 돌려놓았더니 이제 대청 전체가 아라사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였다. 물론 이홍장이 멀쩡히 버티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었지만, 적어도 조정이 아라사 쪽에 기울어져 있음은 분명하였다.

그리하여 좌종당은 제의하기를, 장차 아라사가 척경(拓境, 영토 확장) 하는 일로 싸움이 나지 않도록 신강 땅에 성(省)과 군현을 설치하고 넘쳐나서 문제인 중원의 한인들을 데려와, 오롯이 그 땅을 중원의 일부로 만들자 하였다.

대청이 입관한 이래 세웠던 번부(藩部)의 예를 깨뜨리는 일이었지만, 공친왕 생각하기에는 제대로 해낼 수만 있다면 그럴 만한 가치는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방안이 자금성 안에 들어갈 때는 그리하였을지언정 나올 때는 멀쩡하지 못하였으니, 성을 두기는 하되 지금 동삼성과 같이 총독을 두고, 그 총독에게 아라사와 교섭하여 변방의 화평을 지키고 그 물산을 풍족케 할 계책을 일임한다 하였다. 더불어 후일 몽골에 대해서도 동일한 법도 세울 계획을 짜겠다 하였으니, 말이 총독이고 건성(建省)이지, 사실상 아라사에게 땅 떼어주고 그 앞잡이를 대청의 이름으로 세울 뿐인 것 아니겠는가.

새로 세워질 총독에게 (신강의 경우 그대로 아라사 손에 들어갈 지도 모르는) 각종 권한이 주어질 것이므로 공친왕도 그 예를 따르겠다 함으로써 지금보다도 더 제대로 나라 하나 세우는 놀음을 할 수야 있겠지만, 대청 전체로 따지면 옛 제도를 버림으로써 명분도 잃고 실익도 거의 없는 셈이었다.

그런 주제에 하필 모책(謀策)은 치밀하여 좌종당을 경사(京師)로 소환한 뒤 그런 조서를 반포하였으니, 신강에 기껏 세워 둔 군병들도 우두머리 없이 고스란히 넘어갈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니 아라사가 움찔하기만 하면 경기하는 영국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이제 저들의 옆구리가 안전해진 아라사가 거리낌 없이 천축으로 남하하리라 여기고서 반드시 선수를 취하려 하겠지. 법국은 그 틈바귀에서 뭔가 얻어내겠다며 기웃거릴 것이고.”

열강의 생리라면 이미 그 옛날 불탄 북경에서 그들과 협상할 때부터 질리도록 접한 이힌이다. 일전에 덕국에게 거하게 패전한 법국이라지만, 이제 그로부터 시일도 근 십년 넘게 지났고, 위세도 어느 정도는 돌아왔으니 욕심도 다시 동할 터.

그러니 아마 이번 아부한 싸움에 영국과 아라사 마음이 팔린 사이, 아라사가 신강 취한 것처럼 안남(베트남)을 완전히 저들 것으로 하겠다 할 수도, 둘 중 어느 한 편에 서는 대신 그 대가로 중원의 한 조각을 내어달라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허나 지금 영국 조정의 총리는 나라 사이 싸움을 꺼리는 구씨(글래드스턴)라 하지 않았습니까? 병자년(1876)에 그랬던 것처럼 말로써 해결할 공산은 아예 없을는지요?”

“방금 손이 찾아왔던 것이 그 때문이었다네. 나라 안의 여론이 기울어 아마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더군. 그 구 무어라 하는 자가 아무리 화평을 기껍게 여긴다 한들, 그도 결국 한 사람의 신하일 뿐이니 나라의 뜻이 전쟁에 있다면 따를 수밖에 없겠지,

굳이 와서 그런 말을 전하는 뜻도 얼추 알 만하지 않은가. 만에 하나 그들에게 사세가 재미 적게 돌아가 중원에서 아예 손을 떼야 할 지경이 목전에 놓인다면 반드시 우리 동삼성을 끌어들여 마지막 수를 써보려 할 테지.”

나라 안에 난리가 처음에는 한 다섯 해에 한 번쯤 나더니, 이제 그 주기가 짧아지는 듯하였다. 이리 싸움과 난데없는 역추(易樞, 정권교체)가 불과 두 해 전이었건만.

“하하, 우리 동삼성이 벌써 저들이 기댈 생각을 할 만큼 자리를 잡았단 말입니까. 함부로 기쁘게 여길 수는 없는 정국이라지만 그래도 뿌듯하게 여기는 마음 들지 않는다고는 못 하겠군요.”

물론 중원에 이미 깊게 뿌리내린 영국이므로 쓸 수 있는 수가 정말 동삼성 하나뿐은 아닐 것이다. 아직 북양대신 이홍장도 있고 (영국으로부터 군함 들여오기가 어렵게 되자, 교묘한 핑계 대면서 나랏돈으로 독일제 총포와 군함 들여오는 중이라 하였다.) 동철도 있다. 모든 수가 엇나가게 되면 이 악물고 조선과 일본까지 끌어들여 막아낼 수도 있으리라.

허나 그렇다 하여도, 처음 옮겨왔을 때 그저 패배하여 추방된 것으로 여기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에 비하면 말 그대로 눈 비비고 다시 볼 일이었다. 마신이도 그것을 알았기에 침울하기만 한 가운데 굳이 환기하려 한 것이리라.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만인뿐 아니라 조선인, 한인들이 계속 넘어오니 민호(民戶) 수는 늘어나고 (비록 그중 조선인들은 세금 내지 않으려 각종 수를 쓰기 때문에 골칫거리이기는 하지만), 탐광하는 이들이 찾아내기로는 비록 동삼성 땅에 이렇다 할 금은광은 없을지언정 철과 석탄은 지천이라 하였다. 길고 혹독한 겨울 탓에 농업의 경영으로 큰 성과 내지는 못하리라 단정하였건만, 그런 일이라면 도가 텄다는 듯 무심히 논밭 가는 조선인들, 그리고 경비로 종종 들어오는 일본인들 통해 소개받은 서양 농학자들 덕에 소출은 매년 늘어만 갔다.

그런 보고를 받다 보면 공친왕도 가끔, 아주 가끔은, 대청 부흥이니 뭐니 하는 대업은 제쳐놓고 그냥 이곳 동삼성만 떼어 나라 하나 세우고 칸 노릇하는 것도 해봄직하지 않겠느냐 하는 모반의 유혹을 받을 정도였다.

공친왕이 그럴진대 혈기 넘치는 만인 젊은이들은 어떻겠는가. 매일 흔들리고 쇠망하는 중원과 달리 이곳 동삼성이야말로 중흥의 대업 이룰 땅이라며, 만주의 오래되었지만 가장 새로운 터전, ‘만주이 구룬(만주의 나라)’이라 부르는 자들도 벌써 있다고 들었다. 이대로 동삼성이 계속 커나간다면 그런 목소리도 나날이 커져 가리라.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좌우지간 면밀히 지켜봐야 할 일일세.”

“예, 전하.”

물론 모든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잠시 그런 공상에 빠진다 한들, 공친왕은 엄연한 대청의 사람. 지금의 천하가 한 바퀴 반쯤 뒤집히지 않는 이상은 감히 그런 망상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하가 뒤집힐 일은 과연 있을 것인가?

“뒤집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에 돌려놓는 것뿐입니다.”

작년에 작고한 디즈레일리의 뒤를 이어 보수당 당수로 올라선 솔즈베리 후작(Robert Gascoyne-Cecil, the Marquess of Salisbury)이 의사당 가운데 서서 느긋하게 말했다. 본래 성격이 느긋하지 않음은 서로 아는바, 이미 자신이 유리한 입지를 점했음을 알고서 일부러 속을 긁는 것이리라.

“물론 쓸데없이 대륙의 싸움에 관여하여 우리의 국력을 낭비하는 것은 옳지도 않을뿐더러 우리 위대한 선배 정치인들의 지혜에도 반하는 것이지요. ‘위대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을 지켜야 한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국익에 손해가 미치지 않는 선에서 지켜져야 할 원칙입니다. 수상 각하의 정책이 물론 이상주의적인 의도에서 나왔음은 인정합니다만, 과연 수상 각하께서 야당에 계실 때부터 내세워 온 정책이 그 선을 넘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옳다’부터 ‘꺼져라’까지 다양한 고성이 한 차례 오간 뒤, 후작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주의가 과연 관철되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지요! 대화와 적절한 협력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하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해서 러시아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까?

러시아를 설득해서 평화를 얻고자 하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지난 내각에 그렇게 압박을 가해서 얻어낸 소위 평화는 러시아를 만족케하기는커녕, 그 눈을 동쪽으로 돌리게 만들었지요. 지금 극동의 상황을 보십시오. 우리의 영향력은 나날이 줄어가고 있고, 이대로 시일이 흐르면 어떻게 될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장담컨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곧 그렇게 될 겁니다.”

처음 중국이 일리를 탈환할 기세를 보일 무렵, 새로 왕위에 오른 아프가니스탄의 젊은 왕 무함마드 야쿱 칸은 인도 쪽에 열렬히 구애 공세를 한 바 있었다. 전임자의 중립노선이 영국 당국에 썩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눈치채고서, 만에 하나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서 축출될 수도 있으리라 걱정하며 그에 대한 대비를 하던 것이리라.

허나 중국의 눈치 없는 태후가 모든 것을 망쳤다. 천산산맥에서 불던 바람이 뒤집히자, 무함마드 야쿱 칸은 다시 저의 아버지가 지켜온 중립으로 돌아가겠다며 러시아 쪽에 친교의 뜻을 표했다. 그러고서 러시아 사절단을 받아들인 것이 작년 겨울. 사절단과 교섭한 바를 통보하고 영국 사절단도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던졌지만 아직 반응은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대화가 아니라 힘으로, 우리의 정당한 무력을 보여주어 서로 다툴 일이 없게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이야말로 수상 각하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인류 평화와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는 길 아니겠습니까? 이상입니다.”

다시 한 차례 야유와 환호가 오갔다. 가만히 앉아 듣고 있는 글래드스턴의 귀를, 그의 친우 겸 동료 그랜빌 백작이 빌려 말했다.

“지난 번보다 야유가 훨씬 적군요. 환호는 더 큰 듯한데요.”

“어쩔 수 없지. 현실도 현실이거니와 매일같이 언론을 동원해서 우리 쪽을 때리고 있지 않은가.”

글래드스턴 자신이 대중 언론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탓일까. 동원하는 수단에 있어서는 그나마 고지식했던 디즈레일리와는 달리, 솔즈베리 후작은 정력적으로 모든 수를 동원하고 있었다.

“그쪽 기사라면 저도 읽었습니다. 꽤 매서운 공세를 펼치고 있더군요.”

기세 좋게 출발한 반침략연대는, 요 근래 계속 힘이 빠지고 있었다. 처음 글래드스턴이 집권할 때만 하더라도 퍽 위세 좋았지만, 곧장 남아프리카에서 일이 터지고, 더구나 적절한 금융 조치-즉 채권 관리를 가장한 적절한 압박-로 터키의 술탄으로 하여금 개혁을 추진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대규모 반서방 폭동으로 이어지면서, 수에즈 운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집트를 점령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론을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든 것은 솔즈베리 후작 말마따나 중국의 일이 불거진 뒤였다. 후작은 그 옛날 아편전쟁 당시 자신이 반대를 내걸었던 것까지 걸고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쪽에서 학술적 논쟁을 정쟁으로 끌고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한 잘못이지.”

“돌이켜보면 미리 예상했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걸로 꽤 효험을 보았으니까요.”

“뭔가 뒤집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스펜서 선생에게 연락해 보아야겠군.”

“글쎄요. 그쪽이야말로 학계 동향을 보면 요새 수상 각하보다 열심히 얻어맞고 있던데, 과연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늘 그렇듯 걱정어린 말투로 비꼬는 말을 하여, 글래드스턴과 그의 관계 모르는 이라면 오해할 만한 소리를 하는 그랜빌 백작이었다.

교묘하게도, 솔즈베리 후작은 반침략연대를 내세웠던 것을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듯 자신이 직접 나서는 대신 학자들을 내세워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반침략연대의 한쪽 축을 맡고 있던 허버트 스펜서를 공격해, 자신이 세운 이론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그런 사람이 내세운 엉터리 정책노선이라고 몰아세우기 위함인 것은 분명했다.

“또 하는 얘기를 보면 그럴듯한 것도 사실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도덕과 문명 같은 개념을 끌고 와서, 진화니 진보니 하는 데 끼워맞추고 있으니까요. 의외로 그런 명분론이 먹히더라니까요.”

“그래, 그게 학문의 힘 아니겠나. 다들 말로는 저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하지만, 속으로는 사실 저들 하는 것이 옳고 참된 길이라고 인정받고 싶어하기 마련이거든. 후... 일단 스펜서 선생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꼭 스펜서가 아니더라도, 지난번 소동 이후로 꾸준히 뭔가를 배우겠다며 스펜서 주변 맴도는 동양인들이 있으니 그들의 언변을 빌려볼 방도 하나 없을까 싶었다. 바로 그 동양인들이 지금 스펜서가 공격당하는 원인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더라면 지나친 기대라고 스스로 일축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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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친왕부터 글래드스턴까지, 왕년의 등장인물들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좌종당은 신강 재정복 후에 ‘건성론’, 즉 신강 땅에 중원과 같은 행정체제를 구비하고 그 땅을 개척하는 방책을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산의 문제와 더불어, 작중에 묘사된 대로 그것이 청의 전통적인 지배 방식인 번부 제도에 어긋난다는 반론에 부딪혔지요.

우리는 청을 만주에서 일어난 중원 국가로 흔히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중원뿐 아니라 만주, 몽골, 티벳, 위구르를 모두 아우르는 보다 보편적인 제국에 가까웠습니다. 청 내에서도 공자진처럼 청 체제를 옹호한 유학자들은 이 점을 강조하여 청 체제를 지지했지요. (흥미롭게도 이는 원대 유학자들 중 친원적 성향을 보인 이들이 내세운 주장과도 비슷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부 제도는 쉽게 고치기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중에서는 지난 ‘아관파천’ (러시아 정교 교구도 집(館)은 집이니까요) 후 들어선 친러 내각에 의해 건성론이 엉뚱하게 왜곡되어 적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지금까지 러시아에 밀리는 형세를 보여온 영국에서 다시 강경론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실제로도 2차 글래드스턴 내각의 외교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몇몇 사학자들은 “네빌 체임벌린 내각에 의해 추월당하기 이전까지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황당한 무능력과 혼란”이라고까지 표현하지요.

특히 제국주의적 팽창에 깊은 반대를 표하면서도 일관적인 대외정책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개입하였으며, 그 개입도 적시적으로도, 적절하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하였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제1차 보어전쟁, 이집트 점령, 그리고 묘사되는 것처럼 제2차 영국-아프간 전쟁까지 많은 개입정책을 추진했고, 한국의 경우 거문도 점령이 제2차 글래드스턴 내각 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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