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31화 (131/320)

43. 빛의 빚 (1)

가을 밤하늘에 보름 조금 못 미친 달이 휘영청,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별빛도 한껏 반짝였다.

그에 응대하듯 창경궁 궐내각사에도 두어 칸 건너 한 칸쯤은 호롱불 일렁이니, 은은하게 희푸른 빛 머금은 마당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멋 감돌았다.

허나 왕대비에게 문안 마치고 돌아가는 김에 밤 산책도 할 겸, 빙 우회하여 침소로 향하던 귀남으로서는 멋쩍은 풍경이었으니, 저 호롱불의 태반은 근래 밤새 일하는 젊은 신료들이 태우는 것이요, 그들이 고생하는 사연을 살피자면 귀남 본인과 무관치 않았던 것이다.

그 연유란 무엇인가? 거슬러 올라가면 김홍집과 독대하면서 나왔던 발상에 그 뿌리가 있었다. 김홍집 청하기를 장차 외무 전체의 근본으로 삼을 큰 뜻을 세우자 하였으니 귀남 듣기에도 그럴듯하여, 곧장 다음 기무회의에서 발의하였다.

대신들 들어보니 찬동하지 아니할 이유는 없고 당장 반대할 명분은 없는지라, 곧 그 말을 가다듬어 이른바 ‘교린삼장(交隣三章)’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 관한 세 가지 조항이라, 꼽아보면 ‘대조선국은 다른 나라를 대함에 오직 예와 의를 지켜 함부로 벗어나지 않는다.’가 첫째요, ‘대조선국이 다른 나라로 말미암아 이익을 얻게 되면 필히 그 나라도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가 둘째요, ‘대조선국에 어려움에 처한 다른 나라가 도움을 청하면 힘닿는 한 돕는다.’가 마지막이었다.

하면 실지로 외무를 행함에 있어 이런 고상한 도를 어찌 실천할 것인가? 호조판서 김병시가 한 가지 첨언하니 좌중이 모두 옳게 여겼다.

‘정도를 현양(顯揚)함에 앞서 그 근본이 두터워야 하는 법입니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을 넘지 않고, 백성이 귀히 여기는 것은 저들의 곳간이 채워지는 데 있습니다. 이를 이루려면 두 가지 방책이 있는데, 하나는 남의 소산(所産)을 힘으로 빼앗아 거두어들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스스로 힘써 소출을 늘리는 것입니다.

전자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니, 마땅히 후자에 진력하여 때가 임하였을 때 능히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채비를 미리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나라가 부유해지면 절로 도가 흥하게 된다니, 과연 개화당 세도가 사람들이 기껍게 받아들이고 또 설파할 만한 주장이었다. 허나 귀남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었고, 남의 나라 괴롭히자는 것도 아니니 밑져야 본전이라. 채택할 만하다 여겼다.

더구나 귀남 그가 아무리 배운 것 없는 군밤장수였다지만 지난 생에서 보고 듣고 또 겪은 것을 돌이켜보면 또 이런 일에 쓰일 만한 좋은 발상이 하나쯤 있기도 할 것이었다. 가난 그 자체였던 나라가 수십 년 세월 만에 그럭저럭 잘 산다고 할 만한 나라로 변하였으니, 그때보다상황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없는 듯한 지금의 조선에도 그 방법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러이러한 정책이 가능할지 헤아려보아라. 지금 우리 조선국의 연간 수출액이 얼마더냐 (처음에는 무심결에 몇 ‘불’인지 물어보았다가 서로 곤란할 뻔하였다.). 한 호(戶)가 한 해에 벌어들이는 것은 얼마나 되며, 해마다 가감되는 추세는 어떠하냐. 이런 질문을 툭툭 하문하였다.

차라리 허무맹랑하기라도 하였으면 모르겠으나 호조의 우두머리인 김병시가 보아도, 실제로 일처리를 총괄하는 어윤중이 보아도 그런 질문들 중에 실없는 것이 의외로 몇 안 되고 대개는 정곡 찌르는 것들이라, 답을 구하는 일은 고스란히 어윤중 이하 호조 사람들의 일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귀남이 보고 있는 저 호롱불 그림자는 굳이 따지자면 귀남 자신이 말 몇 마디 꺼낸 바람에 지금껏 일렁이고 있는 셈이었다.

“밤바람이 매서워졌은즉 상한(傷寒)이 두렵사옵나이다. 이만 안으로 드시옵소서.”

안쓰러운 마음에 제자리에서 건너편 창호를 주시하고 있었더니, 옆에서 시위하던 상선이 충심 담아 채근하였다. 그러나 귀남은 딴 마음을 품었다.

“내 저들이 안쓰러워 포장하고자 한다. 각사 안도 여하간 안이니 그리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는데 어찌하겠는가. 만에 하나 안의 신료들이 흐트러진 모습 보일까 두려워, 목청 한 번 가다듬고 지존 행차하심을 알렸다. 멀리 들려오는 순라꾼 방울 소리 외에는 잠잠하였으므로 조용히 이르기만 하여도 족하였다.

“흠흠, 주상 전하 납시오.”

안에서 와당탕하는 소리가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린 뒤 들어섰다.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린 종잇장 사이로 마찬가지로 어지럽게 놓인 산가지 잔뜩. 안에서 밤을 (강제로) 벗 삼는 이들로부터 옮았는지 피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모두들 밤늦게까지 고생이 많구나. ”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자, 다들 피로할 터인데 예를 지나치게 갖추면 아니 될 것이다. 모두 평신(平身)토록 하라.”

“예, 전하.”

아무리 근래 면신례(신고식) 금하기를 엄하게 하고 윤대(輪對)의 예를 그대로 지켜 하급 관료들도 괴롭힘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 한다지만,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라, 밤샘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니 과연 아직 품계 낮은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가장 벼슬 높은 이가 누군지 살피니 낯익은 사람이라, 김옥균과 더불어 법국 유학하고 온 홍종우였다.

“오, 그대도 여기 있었군.”

“예, 전하. 신 호조정랑 홍종우이옵나이다.”

“모두 나랏일로 이리 고생들 하고 있는데, 이때를 만났으니 혹 모자란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고하도록 하시오.”

잠시 고심하던 홍종우가 마침내 직고하기로 마음먹고서 아뢰었다.

“실은 한 가지 일이 있사옵나이다. 야심토록 나랏일에 힘씀은 국록 받는 이로서 지당한 일이나, 보시다시피 수를 다루는 산술의 일이 많고, 더구나 사람은 많은데 호롱은 적으니 어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이를 늘려 밝게 비추도록 하면, 일하는 이는 편리해지고 오산 역시 줄어들 것입니다.”

노둔한 귀남이라지만 번뜩 하는 때가 없지는 않았는데, 지금 홍종우의 말을 들었을 때가 바로 그러하였다.

“그, 밝게 비춘다 하였는데, 그대는 대서 사정에 밝으니 묻겠소. 혹 그 땅에 번개의 힘을 빌어 방을 밝히는 기물이 있소?”

굳이 기억도 잘 안 나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경제정책 따위를 회고할 것이 아니라, 미래에 무엇이 유용하게 쓰일지를 생각해서 미리 만들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이런저런 기술은 있어도 귀남 그가 알던 문명의 이기 태반이 아직 나오지 않은 세상이니, 그 중 능히 만들 수는 있지만 발상이 없는 것이라면 선점하여 이익을 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예, 전하. 신이 서양 사정을 계속 들이며 살피건대, 그러한 기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근래는 더욱 그 재주가 발달하여, 뭇 호롱을 갈음할 수 있는 등도 창안한 바 있다 합니다.”

기껏 발상을 했는데 벌써 발명이 되었다니, 조금은 김이 새는 것이었지만, 아직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니 아직 편승할 때를 완전히 놓친 것은 아닐 수도 있었다. 설령 놓쳤다 한들, 그가 기억하는 전등 – 백열등이든 형광등이든 –을 들여놓는다 하면 어쨌든 편리한 일 아닌가.

“개중 어느 나라의 것이 가장 뛰어나다 하겠소?”

“신이 듣기로 얼마 전 미리견의 에디슨이라는 자가 창안한 것을 으뜸으로 칭한다 하였습니다.”

마침 답하는 것이 외국 물 먹은 홍종우라, 나라 이름은 미리견이라 부르면서도 사람 이름은 원어 그대로 새겼으므로 귀남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연히 발명왕이라 부르면서 어린 아이들 위인전에 단골로 나오게 되지는 않았을 테니, 아직 그 이름 높아지지 않았을 때 연줄 터 두면 도움이 적잖이 될 것이었다.

마치 좋은 말을 들으면 바로 행하려 했다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처럼, 바로 다음날 아침 총리대신에게 기별하여 전등 들이는 일이 어떠한지 의견을 물었다. 무슨 큰 사업도 아니고, 우선 궁 안에 들여 편리하게 사용하고, 나중에 그 쓰임새를 살펴 더 들여올지를 결정한다 하니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 공사관을 통하여 곧장 연통 넣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 반대편 뉴저지 주 멘로 파크(Menlo Park)의 토머스 에디슨(Thomas A. Edison)이라는 젊은 사업가는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그의 발명품과 관련 전기 설비 일체를 구매해 설치하려 한다는 희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희소식으로 시작한 일이 끝까지 희소식만으로 일관하는 일은 세상사 전체를 통틀어보아도 드물고 드문 것이라. 특허를 낸 지 이 년도 채 되지 않아 듣도 보도 못한 아시아 나라 궁궐의 사업까지 따낼 수 있게 되었으니 크게 고무되어, 사업 성과에 따라 아예 아시아를 죽 돌면서 자신의 제품을 홍보할 계획까지 잡고 있던 에디슨에게 곧 한 가닥 비보가 날아들었으니 그 땅에 자신보다 먼저 전구를 발명했다며 생떼 부리는 사업가가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그 일의 뿌리는 에디슨 본인의 언행과는 하등 무관한, 장동 김문 김병학의 회갑연에서 비롯되었다.

도성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원군 회갑연만 하겠냐만, 김병학의 환갑연도 적잖이 화려하였다. 나라의 살림이 피면서 김문 살림도 도로 폈고, 도성 제일가는 세도는 누리지 못한다 한들 그 재보로 말하자면 외려 이전보다 더하면 더하였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도리어 젊어지시니 기이하면서도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이대로 일월과 같이 장수하시기를 기원할 따름입니다, 대감!”

처음 환국 때 대원군 편에 붙지 않고 한 몫씩 챙겨 떨어져 나갔던 김문의 문객들도 근 몇 년 사이 눈치껏 조금씩 돌아왔으니, 지금 상석에 앉은 김병학에게 아첨 한껏 담아 축수하는 이들은 대개 그런 자들이었다.

딴에는 개화당이라 하여 풍악 울리는 악사도 서양 악기 잡고 있었으니, 그 소리 청아하다 하여 김병학이 좋아하는 벽농금(碧籠琴, 바이올린)이었다. 물론 그 연주하는 가락은 악사가 귀동냥으로 아라사 공사관 근방에서 듣고 어설프게 따라한 바흐의 파르티타요, 산조에 고수(敲手) 빠질 수 없으므로 반주로 둥둥 하는 북소리도 따라붙어 본래 곡조 아는 이라면 뒤집어질 일이었지만, 영문 모르고 듣는 이들로서는 그저 흥겨워할 뿐이었다.

그 뒤로는 제대로 축하하는 사람들이 나아와 말을 건네었다.

“대감께서 계시니 어지러운 와중에도 문중의 법도가 바로 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나라의 동량으로서 함께 힘을 합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반남 박문의 사람으로 촌수는 멀디멀다만, 그 재능이 박규수의 눈에 들어 집안의 위세를 이어갈 사람으로 점찍힌 박정양(朴定陽)이 축사하였다.

“고맙소. 말씀마따나 장차 경세(經世)와 부국(富國)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니, 함께 다루어야 할 일이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외다.”

“끊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허허, 물론이오. 항산(恒産) 있어야 항심(恒心) 생기는 것은 사람뿐 아니라 나라에게도 들어맞는 이치 아니겠소이까. 우리가 경세(經世) 대업을 도움이 저 저자의 고인(賈人, 상인)과 다른 연유가 여기 있으니 말이외다.”

나라의 으뜸가는 명문들이 공장 세워 돈벌이에 열중하는 꼴이니, 비록 학문을 내려놓지 않았다지만 김병학과 그 세대의 사람들 생각하기에는 스스로 부끄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불편함을 달래고자 스스로 고안한 논리가 이것, 자신들은 오직 공상(工商)을 크게 진흥하여 나라의 힘에 보태고자 하는 것이니 범상한 상인 무리와는 천양지차라는 것이었다.

“실로 그렇습니다, 대감. 다시금 경축드리며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허허,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자시오.”

박정양 뒤를 이어 조문에서도, 민문에서도, 남양 홍문에서도 하객들이 얼굴 비추고 축하하니 비슷한 덕담이 오고 갔다.

슬슬 지쳐서, 회갑이라는 것도 한 번 하면 되었지 두 번은 못 하겠다 생각할 무렵, 마침내 인사 올릴 객이 동나고 그 나이 먹도록 제 앞에서는 여전히 실실대는 아우 병국이 옆자리에 돌아왔다.

“재차 경하드립니다, 형님. 과연 양의(洋醫) 처방이 용하다 하겠습니다.”

“예끼, 몇 해 전 일을 놓고 농을 던지기는.”

농은 농이되 뼈가 있었다. 몇 해 전부터 해수(咳嗽, 기침) 잦고 부쩍 기력 없다 하니 병국이 청하기를 재동 박규수네 옆에 새로 거하게 차린 양의원을 가보라 하였다. 채근에 못 이겨 찾아갔더니 약을 처방해주기는커녕 대뜸 연초(담배)와 술을 줄이고 몸을 움직여 하루 한 번은 땀을 내라 하는 것이었다.

소개해준 김병국과 병원 주인 박규수의 낯을 보아 해괴하게 여기는 마음을 꾹 참고 근 몇 달을 버텼더니, 정말 몸이 가벼워져 걸음걸이도 절로 가뿐해지는 것이 아닌가.

“좌우지간 국운은 날로 드높아지고 문중의 위세도 그에 따라 높아질 일만 남았으니 경사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천수를 누리시어 그런 성세를 즐기셔야지요.”

“그래, 고맙구나.”

그때 문득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 흥을 깨뜨렸다.

“네 이놈, 얼른 비켜서지 못할까? 저들도 저리 드나드는데 어찌 나는 가로막는다는 말이냐?”

“나리, 금일 잔치는 영초(김병학) 대감께서 검소하게 치르시는 뜻으로 오직 가까운 벗만을 청하여 불렀습니다. 부디 돌아가시지요.”

“풍악 소리가 온 도성에 울리는데 무슨 검소함이냐! 되었다! 내 오늘은 돌아가지만 결코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야!”

실랑이하는 소리 듣고서 사람을 불러, 무슨 곡절이냐 물었더니,

“전 참의대부라는 안인수라는 이가 들기를 청하였는데, 하객으로 맞이할 만큼 지체 높은 사람은 아닌 고로 돌려보내었습니다.”

하였다.

“안인수라 하였느냐?”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 갸우뚱하였더니, 김병국이 얼른 옆에서 받았다.

“일전에 해주 고을에서 올라왔던 참의대부입니다. 물러나서 소소하게 야장(冶匠)들을 모아 이런저런 기물의 작은 부속 따위를 만드는 공방을 차렸는데, 그것이 꽤 성황 이루어 어느새 제대로 공장도 차리고 근자에는 무슨 신보도 내는 이지요.”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해주 고을에서 부업으로 미전(米廛, 싸전) 하던 향리 하나가 대부로 천거되어 올라왔더라는 소식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초대 참의대부라면 김병학 그가 막 대서에서 돌아오던 시절에 상경하였을 것이니 언뜻 떠오르지 아니함도 생각해보면 당연하였다.

“허, 아무리 위아래의 구분이 크게 흐트러짐이 오늘날 세태의 폐단이라지만, 그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아무래도 국운 창성하면서 누구든 일신의 지재 있으면 능히 써서 치부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께서 너그러이 보아주시지요.”

만일 도성과 그 인근 거부들의 재산을 죽 정리하여 앞에서부터 늘어놓는다면, 맨 앞에는 당연히 세도가 우두머리들이 있겠지만, 그 뒤로 넘어가게 되면 안인수도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을터였다. 허나 고작 향리에 쌀장수 하던 이가 자신과 맞먹으려 한다는 것은 괘씸하게 여기기 이전에 아예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

비단 김병학이 유별나게 모질어서가 아니라, 그처럼 태어날 때부터 몸고생 한 번 하지 않고 귀하게 자라왔던 반가의 자제라면 대개 그러할 터였다.

“문지기 네가 사람을 잘 알아보았구나. 그런 자들이 근래 세가 부쩍 늘어났던데, 자칫 귀한 자리의 격이 크게 떨어질 뻔하였어.”

“감사합니다, 어르신!”

옆에서 김병국이 대신 치하하였다. 빗장 걸린 문 뒤에서 아직 젊었을 적 귀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안인수가 분 삭이지 못해 부들부들 떨고 있음은 알 바 아니었다.

내 장동 김문 회갑연에 가서 축수하고 오겠노라 자신있게 공언하였던 안인수는, 솟을대문 박차고 들어와 마루에 털썩 주저앉고는 한두 각 내내 웃었다 울었다를 되풀이하였다.

수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인수는 스스로 복이 많은 사람이라 자부하였다. 한미한 향리의 집안에서 태어나 치부라면 적어도 해주 고을 안에 이름 알려질 만큼 하였거니와, 자식 복도 많아 슬하에 아들만 여섯이었다.

개중 삼남 태훈(安泰勳)으로 말하자면 나이 열 살 되기도 전에 사서삼경에 통달하였고, 머리 굵어질 무렵에는 그 문장 그럴듯하다고 동네 선비들의 인정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필히 그의 손주 대에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양반 대접 받을 수 있겠거려니 싶었다. 더구나 싸전 경영하며 알뜰살뜰히 남긴 이윤으로는 틈틈이 땅을 사들여 어느새 그것만으로도 족히 천석꾼 소리 들을 법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명전법이 시행되면서 천 석 토지 대부분을 나라에 반납하면서 받은 보상으로, 사업을 더 키울 궁리를 하게 되었다. 곳간 헐어 고을의 환심을 두루 사 참의대부 자리까지 올랐고, 멀리서나마 용안을 뵙기까지 하였다.

나아가서는 나라에서 수레를 크게 늘린다는 풍문 듣고서 그 부속을 만들어 팔 궁리를 하여, 그로써 큰돈을 만졌다. 고작 쌀이나 면필 따위가 아니라, 번쩍이는 새 동전과 청국 마제은이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것을 놀릴 수는 없으니 다시 사업을 더 일으켰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라에서 공상(工商)을 장차 중히 여기게 되리라 생각하여, 어차피 벼슬해 보아야 그의 대에는 집안 지체 낮다고 설움 겪을 게 뻔했던 총명한 아들 태훈을 글공부에서 끄집어내 억지로 유학까지 보내 그 말과 재주를 배우게 하였다. (그로 인하여 손주 응칠(安重根)이는 그 아비보다 할아비 낯을 먼저 보게 되었다.)

이제 그러다 보니 좀생이 수염도 하얗게 세고, 허리도 조금씩 굽어갈 무렵. 이 정도면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서, 큰맘 먹고 비단옷 장만하여 이제 저도 그 권세인지 세도인지 하는 것을 좀 부려보겠다 하였더니, 웬걸.

“하하... 나라가 공상을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귀한 사람들이 공상에 힘쓰는 것뿐이었구나. 이 늙은이가 멍텅구리였지.”

“아버님, 괜찮으십니까?”

얼마 전 귀국하여 아직 상투가 어색한 안태훈이 소리 듣고 달려와 문후하였다.

“암, 괜찮다. 괜찮고말고.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어찌 괜찮지 않겠느냐.”

그러고서는, 마음 정한 듯 독한 표정을 고쳐지었다.

“그치들이 어디 감히 얼굴 내미냐며 빗장 걸어 잠근다면, 제 발로 걸어나와 부디 안으로 드시라고 간청할 때까지 치부해주면 될 일이다.

태훈아. 네 그 전등인지 뭔지 하는 호롱불을 잘 알더냐?”

“예, 전기 배우면서 조금 접하였습니다.”

“그걸 우리 공장에서 족히 만들 수 있겠느냐?”

아버지가 일시의 분기가 아니라 나름의 깊은 생각으로 내놓은 방안임을 눈치챈 태훈은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단언하였다.

“다 만든 물건을 들여와 우리 공장에서 만들었다 우기지 않는 한 어렵습니다.”

“되었다. 그것이라도 하면 족하다. 어차피 우리 공장에서 만들어 팔면 우리 수익이 될 일이다.”

태훈 듣기로 안의 심만 바꾸고 생판 다른 전구라고 우기는 정도야 미국에서도 흔하였으니, 유리와 진공펌프만 해결된다면 불가능은 아닐 듯하였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헌데 우리가 만들었다 하기는 쉬워도, 그리하면 전등을 팔러 오던 미국 상인들이 저들 장사를 방해한다며 끼어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 정도야 감수해야 하지 않겠느냐. 내 오늘 깨달았다. 저들보다 더 빨리, 돈 될 만한 비상한 일에 먼저 손을 대야만 따라잡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느니.”

그렇게까지 굳은 결의 내보였으니, 아들이 어찌 가친의 뜻에 반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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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김병학은 1879년 가을 병사합니다. 그가 대원군과 동갑임을 생각하면 요절까지는 아니어도 꽤 이른 나이에 죽은 것이고, 네 살 터울을 둔 동생 김병국이 러일전쟁까지 보고 갔음을 고려하면 가족력으로 보아도 일찍 죽은 것이 맞습니다.

그의 사망 엿새 전 고종이 주관하는 다례(茶禮)에 참석하기도 하였으며, 그의 부고를 접한 고종이 강건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데 놀라움을 표하였다는 것 역시 기록에 전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미루어보면 50대 후반 남성에게 적잖이 일어나는 – 안타깝지만 지금도 그리 드문 일만은 아니지요 - 돌연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가을철 일교차가 심할 때 심혈관계에 부담이 오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애독자 여러분께서도 모쪼록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박규수의 집 옆에 서양식 병원을 차린 것은 의외로 본래의 역사와 같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의사 호러스 알렌이 갑신정변으로 크게 다친 민영익을 살려냄으로써 고종의 신임을 얻은 것이 최초의 근대적 병원 제중원(濟衆院)의 시작인데, 재동에 있던 갑신정변 참여 인사인 홍영식의 집을 몰수하여 그 터를 그대로 병원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박규수 고택의 유명한 백송(白松)이 마당에 서 있어, 홍영식이 박규수 사후 그 집을 매입했거나, 아니면 훗날 제중원이 확장되면서 박규수의 옛 집까지 부지로 쓰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형우 등, 2000. “재동 제중원의 규모와 확대 과정”).

원 역사에서 한국에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서양음악은 개신교 선교와 더불어 퍼진 찬송가,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교육기관에서 가르친 창가(唱歌) 과목의 노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1901년 독일 군악대장을 초빙해 창설하고 1902년부터는 매주 목요일 공개연주회를 열기도 한 서양식 군악대(양악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중에서는 왕실이나 외국 선교사가 아니라, 조선 국내의 세도가들이 저들 입맛에 맞춘 수용을 하고 있기에, 바이올린 파르티타 산조라는 괴악한 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산조 자체가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 성립된 흐름이고, 일제강점기에도 개량악기나 양악기를 도입하고 음반 녹음 및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시대에 맞추어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 국악계였으니 작중 묘사는 완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도 아니라 하겠습니다.

흔히 옛 위인전을 생각해보면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다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19세기 초반부터 백열전구의 선배격인 아크등이 발명되어 19세기 중반에는 종종 공공장소 및 공장 작업등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필라멘트를 사용하는 백열전구도 비슷한 시기 동시다발적으로 개발되고 있었습니다.

에디슨이 해낸 것은, 상용화할 만큼 수명이 길고 저렴한 소재를 찾아냈다는 점이었지요. 1878년 특허출원 시의 제목도, ‘전기 조명의 개선(Improvement in Electric Lights)’이었습니다. 물론 이 역시 최초라고 보기는 논쟁될 여지가 많아서, 끝내 영국의 조지프 스완과 그 명예를 나누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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