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쇳소리에 놀란 제비 날아가고 (4)
수정성(綏定) 성가퀴 넘나드는 밤바람에 횃불 일렁여, 높이 밤하늘 수놓은 겨울 별자리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경을 자아내었다.
허나 눈으로 보이는 풍경과 귀로 들리는 소리는 영 어울리지 않았으니, 성 바깥에서는 꽹과리와 쇄납(嗩吶) 소리 요란하고, 안쪽에서는 북소리, 나팔소리로 응대하여, 설령 귀머거리일지라도 땅 울리는 것만으로 그 소란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 법했다.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공세를 취하는 시늉은 해야 하므로, 스코벨레프가 군을 이끌고 수정성에 틀어박힌 이후 좌종당은 한 차례 시험 삼아 공성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쪽이나 저쪽이나 양총 들고 총통 쓰는 것은 똑같지만 아라사 쪽은 병력의 정예함과 성벽의 유리함을 모두 갖추었기에, 저쪽이 한 백 명 정도나 상했을까 싶은 동안 상군은 족히 일천 넘게 죽고 다쳤다.
어차피 정말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 피를 볼 생각은 아니었으므로, 그날 이후로 좌종당은 성의 서쪽은 터놓은 채로 에워싸고서, 밤마다 이렇게 병사를 보내 안의 아라사 병졸들이 잠 못 이루게끔 괴롭혀대었다. 정면으로 싸우기보다는 제풀에 지쳐 물러나게 할 심산이었다. 만에 하나 못 이기고 오밤중에 반격하러 나온다면, 군병의 수로 밀어붙이면 될 것이니 외려 고마운 일이었다.
허나 스코벨레프도 보통 군재는 아니라, 역으로 저들 기세를 과시하고자 저렇게 북과 나팔로 대꾸하고, 간간이 병사들 노래 부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마 좌종당을 노린 것만큼이나 저들 내부를 묶어둘 심산으로 저런 수를 부렸으리라. 낮에는 좌종당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을 알았으므로 그새 틈틈이 병사들을 재웠는지, 그 큼직한 목청에 피로한 기색은 아직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라. 첫날밤에는 나름 질서정연한 군가와 행진곡으로 시작하였던 것이, 이틀째부터는 점점 흐트러지고, 이레째인 지금은 좌종당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온갖 민요만이 마치 반주하는 듯한 꽹과리와 쇄납 소리와 더불어 이리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과연 부를 노래가 다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그저 머나먼 곳에 계신 높으신 분들의 심계에 따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저들 신세가 처량하고도 우스워 저리 힘써 부르는 것일까? 스코벨레프는 애써 모른 체하고 좌종당은 영영 알 리 없는 일이었다.
짧은 겨울 해는 늘 그러듯 야속하게 뉘엿뉘엿 저물고, 남은 것은 그저 박명(薄明)뿐이었다.
어슴푸레 남은 빛 비추니, 교구 건너편에 옹기종기 모여든 군중들이 보였다. 개중에는 그저 높디높으신 천자께서 친림하시었다는 소식 듣고 구경 온 지각없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개는 이곳 교구에서 있을 담판으로 경조(京兆)에 큰 파란이 미칠 수도 있음을 짐작하고서 혹 그 동향이 어찌 될지 알 수 있을까 싶어 기웃거리는 것일 터.
그렇다면 저 백성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승자로서 이곳 교구를 나서는 서태후 자신을 보고자 할까, 그렇지 않으면 어디론가 벽지로 – 아니면 바로 자금성 한복판에 – 유폐되기 위해 끌려나가는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고자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찌릿한 고통이 목을 타고 올라와 관자놀이에 닿았다.
“여봐라. 탕약은 어찌 되었더냐?”
“국화를 거의 달였다 합니다. 일 각 안에 대령토록 하겠사옵나이다.”
곁을 지키던 태감 장공희가 옆의 궁인에게 조용히 묻더니 곧장 대답하였다.
“알았다. 탕약이 마련될 때까지 물러가 있도록 하거라.”
“예, 전하.”
모두 물러가고 낯선 방에는 서태후 홀로 남았다. 두통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몸이 편찮다고 천하가 멈추어주지는 않는 법.
처음 이곳 교구에 무사히 천자와 함께 도달하였을 때는 마침내 천하의 대권을 되찾을 수 있을 듯하였다. 이홍장은 영국의 손을 잡고 있으니, 그 반대편에 있다는 아라사를 끌어들이면 능히 제어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 대가로 신강 영토를 조금 떼어주기는 하여야 하겠지만, 그렇다 한들 멀리 서쪽의 아라사가 천조를 모두 삼킬 수는 없을 것이니, 어찌 되었든 목소리 내는 쪽은 자신이 될 터였다.
굳이 따지자면 조선왕이 그 옛날 동철의 일을 발의하면서 썼던 수작. 판돈을 아예 키워버림으로써 처음 저를 노리던 이들의 코를 꿰어버리는 그 술수를 보고 배운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헌데 그 조선왕이 보내었다는 밀사 김 모 이르기를,
“태후 전하, 천조를 위하여 큰 꾀를 내심은 참으로 찬탄할 수밖에 없으나, 자칫 양이의 어지러운 다툼을 다시 불러오는 소지가 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천조를 탐하는 두 나라가 서로 다투게끔 하는 술책은, 자칫 그 둘이 작정하고 천조를 갈라놓으려는 흉심을 품게 만들 수 있으니 의당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차라리 양이의 검은 옷을 입고 왔다면 모를까, 몇몇 반심 품은 한인들이 ‘선왕의 의복’ 운운하며 아름답게 여긴다는 저들의 그 예스런 관복 입고 와서 그런 말을 하니, 또 솔깃하게 듣게 되는 면이 있었다.
“예컨대 저들이 야합하여, 아라사는 신강을 얻고 대신 힘으로써 무엄하게 겁박하여 태후 전하께서 일찍이 천하 백성을 이롭게 하고자 두신 철도의 고분을 얻어내 영국에게 넘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대광실(高臺廣室)에 강도가 들었을 때 다른 강도를 하나 더 들임이 결코 상책이 되지 못함과 같은 이치라 하겠습니다.”
허나 서태후는 그러면 어찌하여야 하였다는 말인가? 이홍장 그 자가 전횡하는 꼴을 그저 자금성 안에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였다는 것인가? 더구나 엄연한 외신(外臣)으로서 대청의 국사를 저리 함부로 말하다니 이 얼마나 무엄한 일인가?
그러나 이곳은 자금성이 아니라 아라사 교구였으니, 장차 크게 날아오를 것을 생각하며 일시의 노여움을 눌러 담았다.
“그대의 말이 일면 이치에 닿는다 하나, 무릇 사람이 교분을 잃기는 쉬워도 다시 쌓기는 어려운 법이다. 두 나라가 하루아침에 갈라선 것도 아니요, 내 듣기로 수십 년은 서로 싸우고 다투었다 하였다. 그렇거늘 어찌 그 두 나라가 그리 가볍게 뜻을 합하여 무엄하게 천조의 강역과 재보를 탐하려 하겠는가?”
그러자 조선인 사절의 순박해보이는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한 고뇌가 엿보였다. 잠시 오만 고민이 교차하는 듯하더니, 안 들리리라 믿는 한숨을 내쉬고는 대동한 역관에게 옮길 말을 전했다.
“가운데서 싸움을 말리는 이가 있다면 누대의 원한도 간혹 풀릴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백 번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만일 금번 이어의 일이 끝내 아라사와 영국 두 나라의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면 천하의 큰 환란이 될 것입니다. 그리 되면 대국의 만백성은 물론 소방(小邦) 또한 온전치 못할 것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이리 헌책(獻策)하고자 하니, 부디 한 번만이라도 들어주시기를 간곡히 청할 따름입니다.”
그 송구하다는 말은 사실인 듯하였다. 당장 듣는 서태후부터가, 딴에는 챙겨주었다고 생각하였던 조선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선의를 가장한 협박인가, 협박을 가장한 선의인가.
장공희가 미리 제게 알리기를, 교구에 들어온 조선인 밀사는 세 명이었다고 하였다. 그 중 하나는 저의 앞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옆에서 역관 노릇하고 있으니, 한 명이 남는 셈이라. 매사에 끼어들어 중재 놀음하기를 좋아하는 조선왕이므로, 아마 지금쯤 다른 하나가 영국과 아라사를 오가며 바로 저 제안, 싸우지 말고 대청의 이권을 둘이 나누어 가지라는 제안을 꺼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스로 조선 국왕의 밀사라 밝힌 동양인 청년의 입에서는 유창한 프랑스어가 흘러나왔다. 통역이 따로 필요 없으니 거기서 우선 호감이 조금 붙었고,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이 청년이 그 조선의 ‘선비’라는 작자들 – 한양에서 보내오는 베베르의 보고서를 통해 지겹도록 듣고 있지 않던가 – 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차라리 자신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으므로 더욱 호감이 생겼다.
“솔직히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네. 이렇게 노골적으로 국제정치의 민낯을 더불어 말할 수 있는 비유럽인은 참 오랜만에 보는군.”
그 ‘비유럽인’이라는 것이 사실상 ‘야만인’과 같은 뜻임을 아는 김옥균은 대신 찬 미소로 받아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내가 자네의 그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아. 이미 우리 러시아는 얻고자 하는 바를 모두 얻을 수 있게 되었지.”
일리 땅의 전세는 지지부진하여, 이대로는 뜻밖의 패배도 완전한 불가능은 아니라 들었다. 그러던 중 물밑으로 진행하던 작업이 예상 외의 대어를 낚지 않았던가. 이 정도라면, 그간의 부족했던 실적을 채우고도 남을 성과였다.
“글쎄요. 물론 백작 각하의 수완에는 찬탄하는 바입니다만, 과연 영국이 가만히 있을는지요?”
“하하, 그들이 무얼 어떻게 하겠는가? 중국을 위해 전쟁을 벌이겠는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동철을 송두리째 몰수하는 정도가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었다. 물론 리 총리(이홍장)의 정부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영국이 아니꼬워하기는 하겠지만, 막후공작도 전쟁처럼 엄연한 정치의 일환이거늘 승자의 권리를 취하는 것을 놓고 무어라 하겠는가?
“만주 땅을 조금 더 내어주고, 문제의 그 일리 지역도 할양받고, 거기에 배상금 조금. 이 이상은 바라지 않네. 이 정도 요구를 수용하지 못할 만큼 비합리적인 영국은 아니니까.”
반절은 계획이 성사된 데 도취된 것이었고, 반절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허세였다. 허나 뭔가 단단히 뜯어내어 자신의 경력과 조국 러시아의 미래 양쪽에 모두 보탬 되게끔 만들겠다는 것만은 진의 그 자체였다.
일리 땅의 지지부진한 전세는 그 역시 전해들은 터. 그러던 중 물밑으로 진행하던 작업이 예상 외의 대어를 낚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업적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크림 전쟁의 악몽을 기억하는 늙은이들은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우려하겠지만, 아예 현 상황을 통째로 뒤엎는 것이 아니라, 누가 경쟁에서 가장 우위에 있느냐가 바뀌는 수준이라면 여러 유럽 국가들도 뭉쳐서 막으려 하기보다는 그저 이해관계에 따라 뭉치고 흩어질 것이었다.
당장 지난 1876년에도, 러시아가 정당한 요구만을 내걸자 영국이 절로 물러나 발칸에서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그러니 따로 무슨 협상이나 중재 같은 것을 위해 힘쓰는 것은 가상하다만, 그뿐일세. 중국의 황제가 이곳, 차르 폐하의 가호가 미치는 이 교구로 피신한 이상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이.”
지금의 총리가 만주족 통치자들 사이에서 어떤 평을 받고 있는지는 이그나티예프도 익히 알고 있었다. 자금성과 러시아 공사관을 오가면서 어느새 러시아의 힘을 믿고 따르게 된 만주인 고관들이 많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영국이 리를 시켜 쿠데타라도 꾀한다면, 그 날로 영국에게 제2의 인도가 되어줄 법하던 중국은 혼란에 빠져 시장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저 후일을 기약하며 적당히 물러날 뿐.
영국도 그럴진대, 목소리에 비해 여전히 내실은 적은 조선은 어떻겠는가?
그러나 김이라는 이 젊은이는 수긍하지 않는 듯 가볍게 그의 단언을 흘러 넘겼다.
“피신이라 하셨습니까? 저는 천자께서 평화조약을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 친히 왕림하셨다 들었는데요.”
올해 열 살인 중국 황제다. 거 괜찮은 농담이라 생각하며 이그나티예프는 파안대소하였다.
“그간 연소하시어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시던 중, 몇몇 신하들의 열정이 지나쳐 잘못된 정책으로 이어진바, 이를 직접 고치기 위하여 거둥하신 것이라지요. 참으로 빼어난 자질이요 성군의 재목이라 하겠습니다.”
‘몇몇 신하들’이라는 대목이 나오자, 그제야 농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주의를 끌었다는 것을 흡족히 여기는지, 김옥균의 말아 올린 입꼬리에 조금이나마 진심이 담겼다.
“그리하여 러시아 공사관이 아니라, 엄연히 중국의 영토인 이곳 교구를 회담의 장소로 선정하신 것이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일을 시작으로 친정하시게 되시었으니, 이제 다시 조정을 조정답게 꾸리시게 되겠지요.”
어린 황제를 꼭두각시 삼는 대신, 그 사이 러시아 편에 붙은 만주인 고관들을 새 정부의 요직에 앉히자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올린 성과에 만족하여 그런 방안까지는 미처 생각 닿지 않았던 이그나티예프도 은근히 솔깃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물론 만에 하나, 나라 사이 이간질하기를 즐기는 악한들이 있을 수 있으니, 무슨 숙청이나 정치적 보복 같은 모양이 나와서는 안 되겠지요. 아마 그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태후 전하부터 몸소 나서실 것입니다. 근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마침 요양을 생각 중이시라 들었습니다만.”
“그 무슨 말인가? 아니 될 일이야!”
탕약을 흠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김홍집이라는 자를 들여보내라 하였는데, 마저 그 계책이라는 것을 들어보니 갈수록 그 내용이 황당해졌다.
“허나 그리하면 아라사는 저들의 뜻을 모두 이루었다 여길 것이니, 이리 땅을 모두 대청의 것으로 되돌린다 하여도 이를 거스르지 않을 것입니다. 황실의 위엄을 드높임에 이만한 방도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오직 대청의 종사를 지키고 위엄을 높인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온 서태후였다.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이 조선인의 청 아닌 청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탕약을 마시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을 지도 몰랐다. 차라리 이홍장에 앞서서 영국을 자신의 편으로 먼저 끌어들여,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이 자신을 지켜주게끔 만들었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지 않은가? 그런 기회가 생길 때까지 이홍장 그 자가 전횡하는 꼴을 그저 자금성 안에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였다는 것인가? 둘 수 있는 수가 악수(惡手)뿐이라 하여 아예 두지 않겠다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차 말씀 올린 것처럼, 조선은 이번 일에 그 어떠한 이득도 꾀하지 않고 오직 천하의 평온을 지키는 일에 거들고자 할 뿐입니다. 결코 태후 전하께 해코지하려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차 대국 조정에 다시 어지러움이 생기게 되면 여기서 중심을 지키실 분이 오직 태후 전하뿐이시니, 잠시 귀하신 몸을 보중하여 훗날을 기약함에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이르기를, 역시 황실의 위엄을 생각하여 겉으로 드러내기에는 천자가 친정하게 되었으니, 마침내 여유를 되찾은바 그 사이 쇠해진 몸을 보양코자 잠시 번국 조선에서 휴양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 된다 하였다.
서태후 생각하기에도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은 있었지만, 이번 일에 개입하여 딱히 얻을 이익이 없다는 김홍집의 설명에도 분명 일리가 있었다. 이미 이곳 아라사 교구로 몸을 피하였으니 어떤 식으로든 남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은 명백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말마따나 조선에서 잠시 돌아가는 사세를 바라보며 몸을 낮추고 있는 것이 가장 이롭지 않겠는가?
“저희 조선의 충청도 온양(溫陽) 고을에 용한 온천이 있는데, 예로부터 뭇 병을 능히 낫게 한다 하여 왕실에서 즐겨 찾았습니다. 태후 전하의 고질에도 마땅히 효험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온양온천을 가장 즐겨 찾았던 임금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퍽 냉소적인 말이겠지만, 과연 김홍집이 그런 뜻으로 올린 말인지는 본인만 알 일이었다.
서태후가 러시아의 품으로 황제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좌시해야만 했던 시점에서, 영국 공사 웨이드는 러시아와 한 판 붙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 서태후를 잠시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친러 정부를 새로 구축하여 청러 양국 사이 평화조약을 체결한다는 조선인들의 구상에 대해서는 그나마 차악이라 여길 따름이었다.
물론 기껏 이홍장을 통해 얻어둔 영향력을 내어주는 것은 아쉽지만, 그렇다고 당장 그가 북양대신 자리에서 파면되는 것은 아니요, 그 옛날 공친왕이 난을 일으키기 전처럼 그저 이홍장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힘을 키우는 정도였으니 몇 년 기다리면 다시 얻어내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과 서너 해 사이 눈에 띄게 파인 중앙과 각 성 사이의 틈, 한인과 만인 사이의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한편, 영국이 어찌 생각하든 공식적인 조약의 주체인 청과 러시아 양국은 형식상으로나마 회담을 계속하여, 사실상 일리 전역을 청국에 반환하고, 얼마 안 되는 배상금을 얻어내는 조건으로 합의를 이루었다. 허나 올바른 군주가 제 자리를 찾아 현명한 신료들의 보좌를 받아 통치하게 되었으며, 좌종당의 상군에 대한 영국의 지원도 사실상 끊겼다 하였으니 (이그나티예프의 열렬한 홍보에 힘입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대체로 만족스러운 반응이 전해졌다.
서태후는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여차하면 아예 청 황실을 배제하고 영러 양국이 갈라먹기를 하겠다는 협박까지 나오자 – 이것도 조선 사절들이 미리 사전작업을 해둔 덕이었다 – 동철의 지분 행사권은 자신이 가져가겠다는 조건 하에 조선행에 동의했다. 핑계 내세우기로는, 황제가 친정을 한다 하나 치부(致富)의 일과 경세(經世)의 일은 유별(有別)하다 하였다.
이상의 내막 중 제가 알 수 있는 만큼을 얼추 정리하여 모두 적은 김홍집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렇게라도 끝났으니 다행일세.”
끝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 회담이 끝난 뒤 서태후가 각혈하였다 들었으니 몇 방울쯤은 흘렀겠지만 – 일이 일단락되어, 김홍집과 김옥균은 공사관에 들려 천진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다 존형께서 제 부족한 계책에 따라주신 덕택이지요.”
“자네가 그렇게 모사 자질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
여전히 그 복잡한 세 싸움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김홍집이었다.
“천운이 따른 덕분 아니겠습니까. 형세를 살피면 영국과 아라사 두 나라의 다툼에서 영국이 청을 써서 먼저 신강에서 이로움을 얻고, 그 다음 아라사가 북경에서 정변을 꾀하여 더 큰 이득을 올렸으니, 아라사가 과욕을 부리지 못하게 하고 영국은 우선 지켜낼 수 있는 만큼 지켜내고서 후일을 기약케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판국이 만들어져 있고 거기서 우리는 거간 노릇만 한 것이지요. 모두가 체통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형국이었으니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먼저 형국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다른 이들을 따르게끔 만들어야 하는 그런 정황이었더라면, 글쎄요. 아직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니 성상께서 조일 양국의 동맹을 이끌어 저들이 우리를 조금이라도 눈여겨볼 수밖에 없게 만드신 것이 참으로 빼어난 방책이었다 하겠습니다. 적어도 이곳 청국와 조일 양국의 형세에서는 이제 우리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옆에서 함께 짐을 싸던 김옥균이, 나름에는 명료하게 정리하였다. 그러나 그 ‘우리를 빼놓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김홍집은 곧장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건, 이건 옳은 길이 아닐세.”
몇 번 한숨 끝에 넋두리가 나왔다. 말만 회유지 사실상 선황의 모후 되는 이를 겁박하였던 김홍집의 혀에 새삼스레 씁쓸함이 감돌았다.
“말씀대로입니다. 결코 옳은 길은 아니지요. 그저 잠시 ‘우리 때의 화평’을 구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이 천축 북쪽이 되었든, 저 신강이나 몽고가 되었든 아라사와 영국은 다시 맞붙을 것이고, 그때야말로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얽혀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동안 더 힘을 쌓고, 더욱 목소리를 키워야지요. 성상께서는 이익을 구하지 말라 전교하셨지만, 바로 아국이 이렇게 끼어들어 그 귀중한 시일을 버는 것 자체가 이익이지 않겠습니까.”
“그 얘기가 아니잖은가!”
저도 모르게 고성이 나왔다.
“고균 자네는 비수막(碑首漠, 비스마르크)이 아니야. 우리 역시 동방의 예의 아는 나라 조선이지, 당장 싸움으로써 숨구멍 얻어야 하는 덕의지국(독일)이 아니란 말일세. 그저 조용히,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 될 것을, 왜 다른 나라끼리 싸움을 붙였다 말렸다 하면서 어지러움을 일으켜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 세상이 통째로 어지러운데, 어지러움을 어떻게 더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에 맞추어 움직일 뿐입니다. 그리 말씀하시는 도원(道園, 김홍집) 형께서도 그러니 제 계책에 따르신 것 아닙니까? 그때는 따르자고 하시더니, 계책이 공효 거둔 지금에 와서는 무도하다 하시면, 저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때야 계책이 궁하였으니 그러지 않았느냐’ 하고서 대꾸하려던 김홍집이, 김옥균의 말에 일리 있음을 깨닫고 다시 입을 닿았다.
당장 돌아가는 형세는 급박하고, 그 와중 방편 있다는 이는 김옥균 하나뿐이었으니, 탓하려면 김옥균만 탓할 것이 아니라 마땅한 대안 내놓지 못한 김홍집 자신도 탓해야 할 일이었다.
“그건 자네 말이 맞네. 내 그때 말리지도, 다른 방안 내놓지도 못하였으니 할 말이 없지. 자네는 오히려 나라에 보탬 될 바는 생각지 말고 우선 싸움 말리라 하신 전교대로 하였을 뿐이지.
허나 그 전말을 아는 나도 이렇게 온당치 못하다 여기거늘, 조정의 대신들은 어찌 생각하겠는가? 돌아가면 필히 지나친 언사와 황망한 잔꾀 운운하며 탄핵하는 여론이 일어날 것이야. 스스로 지킬 말쯤은 미리 마련해두도록 하게.”
그리고 귀국할 때까지 둘 사이에는 불편한 침묵만이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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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 서태후는 광서제 즉위 무렵부터 1880년대 초반까지 정체불명의 질병을 앓습니다. 그로 인해 이 시기에는 직접 국사를 돌보기보다는 주로 문서를 통해 업무를 보고받고 처리하는 것을 선호했지요. 그러나 그 이후에도 종종 병치레를 했습니다. 야사에도 전해지는 서태후의 소위 건강 식단은 아마 이로 인한 건강염려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식단 중 비교적 정상적인 축에 들어서 그만큼 더 알려진 것이 바로 국화입니다. 작중에서는 탕약에만 넣어 먹는 것으로 나오지만, 일상식으로도 죽이나 탕에 삶은 채로 넣어 즐겼다곤 합니다.
흔히 태평소의 별칭 중 하나로 알려진 쇄납은, 사실 태평소의 원형이 된 악기의 중국 명칭입니다. 중국 쇄납 역시 추정하기로는 중근동에서 들어왔다 하며, 한반도에 들어와 태평소로 토착화된 것은 여말 시기로 추정됩니다.
원 역사에서도 이리(일리) 분쟁에서 청의 주요 동인은 위신이었습니다. 물론 이리 지역이 척박한 주변 지역에 비해 풍요로운 땅인 것은 사실이지만, 중앙아시아를 개척하는 입장인 러시아와는 달리 청에게 이리는 그저 그나마 살 만한 국경지대에 불과하였거든요.
하지만 다름 아닌 건륭제 당시 준가르 정벌로 얻어낸 땅이라는 상징성이 있었기에, 이리 지역의 보전은 중대한 목표로 인식되었습니다. 청 측 교섭 대표로 나선 충허가 1879년 이리 서부를 러시아에 넘기는 내용의 리바디아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자 곧장 청 조정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실제로는 엄청난 보석금을 내고 면제되었습니다.)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심지어 장지동은 ‘(조약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라 불릴 수도 없다’는 과격한 표현으로 리바디아 조약을 성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증국번의 장남 증기택(曾紀澤)이 나서서 체결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은 이리 일대의 거의 전부 (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회족(둥간족) 및 위구르인 거주지 제외)를 반납하는 조건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대신 청이 지불하는 (분명 이리를 침공하여 점령한 것은 러시아였습니다만) 배상금 액수는 5백만 루블에서 9백만 루블로 증가했지요.
청은 이를 외교적 승리로 인식하였으며, 러시아 내에서도 중국에 지나치게 양보를 하였다는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작중에서는 거의 동일한 조건으로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청국 내부의 정치변동 – 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치적으로 포장하려는 이그나티예프 – 과 맞물리면서 러시아의 인식 상으로는 훨씬 자신에게 호의적인 조건이 조성되었습니다.
비록 그 비극적인 삶으로 인해 가려지는 면이 있지만, 김옥균은 분명 저질러놓고 보는 성격이 강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희대의 풍운아요, 재주꾼이기는 하고, 또 만나는 이들마다 그 용모와 몸가짐, 사교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와 더불어 꾀는 있지만 길게 보는 방략이 없는 사람, 정치력이 부족한 사람 등등의 평도 그를 알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적지 않습니다.
특히 이번 화에서 김옥균의 모습은, 원 역사의 1883년 국채 도입 교섭 당시의 모습에서 많이 착안하였습니다. 당시 임오군란으로 수구파가 재집권하고, 자주적인 개화에 필요한 재정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김옥균은 일본에서 국채를 들여오고자 일을 꾸밉니다만, 부족한 정보력, 개화당의 거덜난 밑천을 미리 알던 일본의 냉랭한 반응, 그리고 민씨 척족의 방해 등으로 인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김옥균은 한 번 좌절에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국채가 안 되면 민간에서 (준 사기로) 끌어오려 시도하고, 그것도 어렵게 되자 고종의 위임장을 위조해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의 차관을 들여오고자 공작을 시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전 계획 없이 현장에서 이루어졌다는 데서 재치와 더불어 막나가는 일처리 방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 망명 후 섣불리 일본 내 자유당 세력과 결탁을 시도하다 역풍을 맞아 근 10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던 것도 어찌 보면 그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