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25화 (125/320)

41. 쇳소리에 놀란 제비 날아가고 (2)

그 불같은 성정은 한 점도 누그러지지 않았다지만, 세월은 속일 수 없으니 좌종당의 나이도 어느새 고희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뿐이랴? 계절이 벌써 한겨울이니, 이 시기에 일흔 노인이, 그것도 대군을 이끌고 천산을 넘는 것은 그야말로 부모로부터 받은 귀한 목숨을 내다버리는 것과 같다.

“좌 대인, 그렇다 한들 적을 치라는 황명이 있었는데 아니 받들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상군, 초용(楚勇). 지금까지 많은 이름으로 불려왔던 좌종당 아래의 군대다. 지금도 그저 그 이름이 입에 붙어 상군이라 하지만, 죽는 이, 고향 돌아가는 이의 자리를 채우고자 이곳 신강에 머물면서도 초모를 멈추지 않다 보니 어느새 군의 반의 반쯤은 회민(회족)이라, 발에 치이는 것이 마씨라는 농이 돌 정도였다..

지금 그의 성정을 알면서도 감히 찾아온 마안량(馬安良)도 그런 젊은이 중 하나였다. 그의 아비 점오(馬占鰲)가 처음 반란을 진압하러 왔을 때부터 청에 귀순하였으니 자연스레 그의 세 아들도 나이 차자마자 종군하게 되었고, 지금도 마안량 그만 막료로 남고 나머지는 저기 천산에 가서 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이놈. 젊으니까 아량을 베풀어주마. 병법에도 현지의 장수는 왕명을 받들지 아니하여도 된다 하였거늘.”

“그러나 적이 지금 우리 강역을 노리고 있는데 어찌 대군을 이끌면서 막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아라사의 군병이 정예하다 하지만 우리가 열이면 저들은 하나도 되지 않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다들 이런 생각을 품었기에, 그 옛날 도광(道光) 연간의 양요(洋擾, 아편전쟁)는 물론이요 함풍(咸豐) 말년에도 번번이 당한 것이리라 (제2차 아편전쟁). 그나마 눈앞의 이 마안량은 나이 서른도 되지 않았으니 정상을 참작할 만했다. 그의 뒤를 이어갈 인재다 생각하고, 올라오는 욕지거리 대신 최대한 (딴에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어허! 머리라는 것이 있으면 생각을 하라 이 말이다. 일개 필부가 지모가 없으면 패가망신이 끝이지만, 장수된 자에게 지모가 없으면 어찌 되겠느냐?”

“대인, 비록 겨울에 천산 넘기가 험난하다지만 양 치는 목동과 행상들은 다 아는 길이 있습니다. 저들 아라사인들은 우리가 눈 녹은 뒤에야 움직이리라 여기고 있을 터이니, 그 길로 우회하여 일순에 들이치면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그래도 나름 생각해서 나온 말이라, 좌종당은 마음속으로 이 젊은이에 대한 평을 조금 높였다. 그래도 틀린 것은 틀린 것.

“그 길이란 걸 직접 가서 보기는 하였느냐? 양치기만 아는 길은, 양치기들이나 다닐 만한 길이다. 어찌 거기로 수만 대병이 오가겠느냐? 그것도 겨울에. 생각이 짧구나, 마가 풋내기야.”

정곡을 찌르자 대꾸하지 못하고 꾹 참는 것이, 혈기는 넘치지만 사리의 분별은 할 줄 아는 젊은이인 듯했다. 그 옛날 증국번이 저를 등용할 때, 자신 잘난 줄만 알았던 시절의 자신이 문득 청년과 겹쳐 보여, 더 괴롭히거나 놀리는 대신 깨우쳐주기로 하였다.

“흠... 오늘이, 어디 보자. 원단(元旦) 쇠고서도 닷새는 지났으니 이제 슬슬 말을 꺼내어도 되겠군. 너의 아비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느냐?”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답은 해야 하는 법.

“대인의 명을 받들어 천산의 남쪽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 산길에서 내려오는 자가 있는지 살피는 데 이만 대군을 이끌고 갈 이유가 무에 있더냐? 네 생각이 사실 반절은 옳다. 적이 모르는 길로 미리 병력을 옮기면 그 허를 찌를 수 있는 것. 하여 미리 병력을 보내어 길을 닦고 고개마다 초소와 곡량을 두게 한 것이다.”

이미 아고백(야쿱 벡) 그 자를 칠 때 썼던 방식이다. 적은 방심케 하면서 아군은 준비하게 하니 어찌 좋지 않은가. 더구나 이번에는 이홍장 그 자가 어떻게 영국을 끌어들여 계속 은자를 보내오고 있었으니, 여유가 있다 못해 넘쳤다.

어느새 성질 더러운 늙은이에서 대청의 얼마 남지 않은 명장으로 돌아온 좌종당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지키는 시늉 하는 것이 산 남쪽에 이만, 북쪽에 이만. 그리고 이곳, 가운뎃길 영원(寧遠) 쪽에 실제로 지키는 사만. 이곳 적화(우룸치)에 머무는 중군보다도 더 많은 수다. 당연히 저들은 우리가 날 풀리는 대로 가장 길 평탄한 영원 쪽으로 들어오리라 여기겠지.

앞서 우리 병사 열이 저들 하나를 못 이기겠느냐 하였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양창(라이플)만 들고 있으면 우리 하나가 저들 두엇을 상대할 수도 있고, 또 정밀한 화포를 가지고 있어도 우리 백 명이 저들 하나를 이기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의 군무(軍務)는 저들만큼 세심하지 못하여 뒤의 경우가 훨씬 많으니, 굳이 싸워서 이기고자 함은 하책이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이니라.”

찬탄하면서도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마안량이 다시 딴지를 걸었다.

“이 마 모가 어리석어 그러한 심모원려가 있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망령된 말을 내었으니 부끄럽습니다. 허나 설령 저들의 허를 찔러 산을 남북에서 넘는다 한들, 결국 적어도 한 번은 싸워야 할 텐데 이르신 대로라면 어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내 병가에서 싸우지 않고 이긴다 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마, 애송이 녀석아.”

천산의 얼음 녹아 시내 이루어, 어떤 줄기는 서쪽으로, 어떤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제비 돌아올 무렵에는 이리의 싸움 소식이 북경에도, 한양에도 닿기 시작하였다. 제비 날아와 처마 아래에 둥지 틀고, 궁궐 안에 양관 들어섰으니 마침내 그간 벼르던 이들이 하나둘씩 따라서 세우기 시작하여 봄의 새소리만큼 뚱땅거리는 쇳소리도 도성에 울렸다.

허나 멀리 서쪽 일리 땅에서 들려오는 소식만큼 크게 울리는 것이 있겠는가.

“신강에서 하나씩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니 놀랍기 그지없소.”

“그렇습니다. 역시 그 무위(武威) 헛되지 않았으니 천조의 홍복입니다.”

아들 걱정에 시작한 국제의 일이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라면, 임금 귀남의 일과도 크게 바뀌었다는 것이 있었다. 관제가 정해져 겸직 직위를 대대적으로 손보면서 경연의 규모를 대거 줄이게 되어, 한때 어윤중 이하 젊은이들 데려다 놓고 머리 맞대던 시절의 임시 직제가 고스란히 굳어진 것이 하나였다.

또 다른 건이라면, 아무래도 자잘한 행정의 일을 의정부 아래로 떠넘길 핑계가 생겼으므로, 기무회의 하나가 윤대니 차대니 하는 것 여럿을 갈음하였다는 점이었다. 물론 여전히 신료들이 임금 귀남의 눈치 보는 것은 똑같지만, 적어도 사소한 일을 가지고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한 마디를 올리고자 찾아오는 것은 줄었으므로, 얼마 전에는 간만에 심심하다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렇게 심심하던 차에 또 다른 심심한 노인 있으니, 종종 접견하고서 천하의 중대사를 논하는 – 즉 한담을 나누는 – 일도 있음직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대원군 회갑연에 고개 내밀기 위해 동삼성총독부의 벼슬을 잠시 내려놓고 찾아온 마신이가, 신병을 핑계로 계속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다사다난한 시기에 공친왕의 눈과 귀 역할을 하고 필요하면 그 입 노릇까지 하기 위하여 찾아왔음이 명백하였다. 비록 산해관을 사이에 두고 북경과 동삼성이 요새 따로 논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같은 나라인지라 따로 대놓고 사절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그 정상을 참작할 만은 하였다.

“적장은 석과보(石科保, 미하일 스코벨레프)라 하는 젊은 장수인데, 일찍이 서번(西藩)을 제압하여 용명을 떨쳤다 합니다. 그러니 아직 승패를 논하기는 이르지만, 이미 얻은 바가 적지 않으니 좌 공이 실로 용병의 묘를 얻은 것 아니겠습니까.”

찰림하(察林河) 따라 일군이 슥 이리에 발 들여놓고, 또 한 무리가 비어있다시피 한 혜녕(惠寧)을 급습하니, 그저 편한 길로 올 것이라 믿고 그 길목인 영원성만 지키고 있던 스코벨레프는 사세 불리함을 깨닫고서 곧장 그 다음 방어선인 수정(綏定)으로 병력을 물렸다.

혜녕에서 한 번 반격하여 상군을 대파하기는 했다지만, 이쪽에서 한 영을 격파하면 다른 쪽에 다섯 영이 튀어나오니 어찌하겠는가. 그리하여 러시아 쪽에서는 영웅적인 탈출을 선전하고, 북경 조정은 대승 거두어 일리의 반절을 벌써 얻어내었다며 자축하였다.

“하지만 좌 대인은 더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도중에 한 번 혜녕에서 다툰 것도 아라사가 몸 빼낼 틈을 만들고자 먼저 싸움을 건 것일 테지요.”

적을 잡으려면 아군도 죽고 다칠 것을 각오해야 하는 법. 그러니 싸워서 이겼을 때 득 보는 것은 북경의 이홍장이지, 현장의 좌종당은 아니지 않던가.

“허나 정작 병력 온존하여 수정으로 물러난 뒤로는 가만히 대치할 뿐이라 하니, 기이한 일이오. 아라사가 그리 쉽게 물러날 것 같지는 않거늘...”

당연히 귀남 스스로 생각한 바는 아니요, 어차피 서로 동정 살피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한 번 떠보아 달라는 청을 받고서 말을 옮기는 것이었다. 물론 마신이는 그런 사정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옛적 효자밤 팔던 시절부터, 귀남이 뭔가 언행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멋대로 해몽을 가져다 붙이곤 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남의 말 빌려 천하의 대세를 논한다 한들 이상하게 여길 리는 없었다.

반면 러시아가 가만히 물러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만한 일이었다. 귀남 생각하기에도 베베르처럼 인성 순한 자도 물론 있기는 하겠지만 대개는 그 옛날 무랍욕(무라비요프)처럼 영토 욕심 가득한 무리가 더 많을 듯하였고, 외국 사정에 밝은 신료들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물론 아직 본 싸움은 시작도 안 하였다지만, 다 합쳐도 채 일만이 되지 않는 아라사군이 좌종당의 십만 대군을 하루아침에 격파할 수 있을 듯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영토를 잃었지만 곧장 되찾을 것이니 헛된 생각 말라는 둥, 곧 동삼성을 칠 것이니 조선도 그 조일동맹이라는 것의 체결을 빨리 마무리짓고 합류해달라는 둥 할 법도 하였건만 정작 러시아 공사관이 조용하였던 것이다.

“흠흠, 봉천부에도 근래 아라사 사람들이 종종 오간다 들었는데, 혹시 경은 이처럼 아라사가 조용한 까닭이 무엇인지 짐작가는 바가 있소?”

신료들이 대신 물어봐달라 청한 본론을 꺼내었다.

“아, 저희 역시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만일 저들이 정녕 대청을 탐낸다면, 필히 성동격서를 위해서라도 동삼성을 노릴 터인데, 아직껏 잠잠하니 말입니다. 그 궁금증이 심병으로 도져 저 또한 타향에서 이처럼 머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라 하니 이번에는 두 번째 질문을 던질 때였다.

“실은 북경에 가 있는 우리 공사가 글을 올려 알리기를, 근래 북경에는 그런 풍문이 돈다 하였소. 물론 아직은 풍문이지만, 아라사인들이 근래 흑룡강을 부쩍 많이 오간다, 봉천부 안에도 몇몇이 자리를 잡았다. 대개 그런 얘기이니, 우리 조정 신료들이 말하기를 누구를 음해하는 것이라 하기에는 부족하고 의심케 하기에는 충분하다 평하더이다.”

“허어, 그렇습니까? 물론 근래 훈춘 땅에 들어와 장사하려는 아라사인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흑룡강 넘나드는 이야기나 봉천부에 터 잡았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설령 그리하였다면 공친왕 전하께서 어찌 그에 맞추어 대처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일전에 김옥균이 아뢰기를, 양이 다루는 데 있어서는 아마 이홍장보다도 도통하였을 공친왕이라, 만약 정말 아라사가 동삼성을 집어삼키려 한다면 곧장 영국에게 손 내밀든, 하다못해 조선을 끌어들이든, 어떻게든 가만히 앉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고 마신이가 아라사에 포섭되었는데 공친왕이 모르고서 이곳 한성에 보내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의문은 더 늘어날 뿐이었다.

“흠, 그러면 혹 노리는 바가 동삼성 아니라 다른 곳일 수도 있지 않겠소?”

“아라사가 천조와 접한 곳이라면 신강과 동삼성을 제하면 외번(外藩)인 몽고(몽골) 뿐입니다. 그 땅을 건드려 무엇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아라사가 영국처럼 바닷가를 조차하여 이상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므로, 남는 접점은 – 암만 생각해도 그럴 공산은 낮지만 - 한 군데뿐이다.

“음... 그 외에 아라사인이 들어와 천조를 마주하는 곳이라면 경사(京師)가 있기는 하겠습니다만, 아무리 그리하여도 저들이 군대도 없는데 어찌 그곳에서 작란을 하겠습니까?”

미심쩍어하면서도 설마 그러겠냐며 반문하는 마신이였지만, 어차피 지금 조선에 바쁜 일도 없는데다가 바로 옆 중국 얘기 아닌가. 불한당이 불현듯 잠잠해진 것은 필히 등 뒤에서 꾸미는 것이 있음이요, 총칼을 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면 말과 속임수로 뭔가를 획책하는 것일텐데, 지금 북경에 그런 장난질에 놀아날 사람이라 하면...

“태후 전하, 정녕 그리하셔야 하겠습니까?”

순친왕 이후완이 한껏 걱정을 담아 확인차 물었다.

“물론이오. 내 종실의 안녕을 위하여 고심한 끝에 무겁게 내린 결정이니, 아녀자의 생각이라 하여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될 것이오.”

“어찌 그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자신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를 굳이 해야 하다니, 이 얼마나 궁색한가.

서태후는 한탄할 뿐이었다. 얼마 전 눈엣가시 동태후도 끝내 명을 다했으니, 신유년 정변으로 조정을 바로세운 세 사람 중 북경에 남은 것은 서태후 혼자뿐이었다.

세간에서는 동태후가 ‘나라에 권신이 있으니 안팎으로 어지럽다.’ 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므로 필히 이홍장이 뒤에서 손을 썼을 것이라 여겼지만, 동태후를 요절케 할 생각을 훨씬 전부터 품고 있던 서태후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서태후 본인의 잔병치레도 유독 심해진 감이 있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서태후 본인이 독을 쓰는 데 통달해 있었기에 이홍장이 자신을 중독시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직 앞날에 대한 불안, 그리고 왠지 모르게 이런 궁한 가운데 구명줄이 내려올지도 모른다는 미미한 기대가 있기에 지금도 병석에 들지 않고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구명줄을 얻었는데, 지금 이 어리석은 자가 재고해달라며 버티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옛날 종사를 바로잡기로 한 이들 중 남은 사람이 얼마나 있소? 지금 조정에 우리 만인이 설 자리는 또 얼마나 남았고?”

불과 삼 년 만에 이홍장이 이뤄낸 것은, 외부인이 보았을 때는 참 대단하다 평해야 할 만한 업적이었다. 자금성의 수족을 잘라내는 대신, 그 수족이 쓸 수 있는 연장과 신발을 모두 치워버렸으니, 이렇게 자금성 안에서 이홍장의 험담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은 심기(心氣)에 이로운 일이었지만, 그렇게 욕하여도 바뀌는 것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풀린 분기만큼 고스란히 울분이 돌아왔다.

평소 만인들 중 군국의 사무에 밝은 이들은 반절쯤은 공친왕의 난에 연루되어 낙향하였고 나머지 반절은 그를 따라갔으니, 지금 있는 이들만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나마 재주 있는 자들도 오히려 회군의 무서움을 알고서 이홍장의 편을 들어 얼마 남지 않은 자리나마 차지하려 하는 것이 근래 북경 만인들의 속사정이었다.

허나 그러던 차에 국경의 일이 시끄러워져 이홍장의 주의도 흐트러졌겠다, 부족한 손속으로도 겨우 일을 꾸밀 여력이 되자마자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과감히 밀어붙인 서태후였고, 어쩔 수 없이 순친왕도 따라왔다.

“주저할 것이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따라오지를 말았어야지. 이제와서 충언(忠言)이라고 하는 말이 그만두자는 것이니 어찌 온당하다 하겠소?”

“허, 허나 아라사는 이미 우리 강역을 탐하여 이미 백여 년 전부터 우리 강역을 수천리씩 삼킨 대적(大敵)입니다. 지금 겨우 장재(將材)를 얻어 물리칠 기미를 얻었는데, 오히려 그들과 사귀자 하시니, 이로써 나라 안이 소란스럽게 되지 않겠습니까?”

“순친왕 그대야말로 안목을 늘려야 할 것이오. 이제 저들도 천조가 마음을 먹으면 능히 저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보았을 테요.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끌어들여 이로움으로 삼아야지.

양이의 힘을 빌어 권세 부리는 것이 어디 동삼성의 그 자나 저 북양대신만 할 수 있는 일이오? 나 또한 일찍이 분고의 술수로써 여러 양이를 부린 바 있지 않소? 그런데 덮어두고 그리 의심하니 참 답답한 일이올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친왕은 눈을 감았다 떴다, 작게 한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저의 어쩔 수 없는 처지를 깨달았는지, 힘 없는 말투로 말하였다.

“송구합니다. 마땅히 이르신 대로 연통을 넣겠습니다.”

“그리하시오. 이번 파천(播遷)의 일은 비록 멀리 이어(移御)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로 나라의 중대한 일이니,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될 것이외다.”

“예. 성심진력하여 성상을 보필하겠습니다.”

제비의 수도 연경(燕京)의 둥지에서, 한때 천하를 저의 것으로 여기던 제비가 몸 피할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 천하의 운수란 쉬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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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친왕의 쿠데타로 상군 전력이 빠지면서 잠시 보류되었던 일리 분쟁이 영러간 대리전 양상을 띠면서 재개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 좌종당이 신강을 정벌할 때 철저하게 사전작업을 한 뒤 일시에 내리치는 용병술을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작중에 묘사된 작전도 나름 그의 성향에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청의 근대화 시도는 아무래도 비교대상이 일본이다 보니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여기저기 허술한 면이 있어서 그렇지 성과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육군의 경우 마침 보병화기의 발전이 막 이루어지던 군사기술의 동향 덕분에 빠른 군사력 개선(소총과 야포만 들여와도 적잖은 수준 향상이 이루어졌으니까요)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제 정신 갖춘 지휘관과 양적 우위라는 조건 하에서는 예전 아편전쟁처럼 간단하게 밀리지만은 않을 정도까지는 올라왔고, 청불전쟁에서도 그런 면모를 잘 보여주었지요 (물론 그런 조건이 쉽게 갖추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고, 게다가 해군이 신무기 어뢰에 전멸당하면서 결국 패배하기는 했지만요).

이는 원 역사의 좌종당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일리를 두고 대치할 때 러시아 측이 남긴 보고에 따르면, 후장식 라이플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상당한 보병화력 향상을 이루었음을 언급하고 있지요.

한편. 좌종당은 이미 회족 봉기(둥간 반란) 때부터 감숙~신강 일대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적잖은 회족 및 위구르계 군사세력도 흡수하였습니다. 회족 봉기를 주도한 근본주의적인 자리야(Jahriyya, 新敎)파는 청뿐 아니라 청과의 공존 노선을 지켜온 쿠피야(Khyfiyya, 舊敎)파와도 갈등을 빚었고, 이를 알고 있던 좌종당은 전자는 강경하게 진압하지만 후자는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는 전략을 취했지요.

이때 청의 편으로 돌아선 회족 무장세력은 훗날 서북삼마(西北三馬)로 대표되는 서북군벌로 이어지게 되는데, 작중에 등장한 마안량은 그 과도기에 해당하는 주요 인물입니다. 원 역사에서는 회족 반란의 군사지도자였던 아버지 마점오가 좌종당에게 항복할 때 사절 역할을 했고, 이때 좌종당의 눈에 들어 계속 종군했습니다. 이후에도 아버지의 군사적 기반을 물려받아 서북 일대의 자잘한 봉기를 진압하면서 위세를 떨쳤고, 의화단 운동 당시 서안으로 도피한 서태후 일행의 경호를 맡기도 했습니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감숙성을 거점으로 삼아 서북군벌 1세대의 주요 인물이 되지요.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스코벨레프는 원 역사에서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위명을 떨쳤습니다. 그 전에는 중앙아시아에 머물면서 총지휘관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청년 장교로 견실한 군공을 세웠지요. 원 역사에서는 1880년과 1881년 사이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멘 반란을 진압하면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세력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1881년 급사한 동태후의 사인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원 역사에서 가장 유력한 혐의자인 서태후가 그 시기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지병이 도져서 요절하였을 가능성 – 그 전에도 뇌혈관 질환이 의심되는 와병 사례가 종종 있었습니다 – 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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