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24화 (124/320)

41. 쇳소리에 놀란 제비 날아가고 (1)

동맹의 일로 시끄러울까 미리 충허를 불러 접대하였던 것은 여름을 지나 가을, 그리고 겨울이 되기까지 주욱 이어질 연회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물론 연이어 잔칫상 차린다는 것은 과장하여 이르는 말이요, 실제로는 한 달에 한 번꼴이었지만, 그 대신 또 사소한 모임도 적지 않았다.

오늘은 이 핑계로 옛 단골집 청작루에 가서 모이고, 내일은 또 다른 모임을 빌미 삼아 또 노니니, 대원군 생각하기에 조선 개국 오백년 이래 자신처럼 회갑연 성대하게 치르는 사람이 또 얼마나 있었을까 싶었다.

물론 그 중 태반은 자신에게 연줄 대려는 참의대부나 어떻게 개화당 건너뛰고 자신과 직접 친해져 보려는 자잘한 집안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성의 보이는 것이라지만, 대원군으로서는 알 바 아니었으므로 짐짓 모르는 체, 그 옛날 한량 시늉할 때 하던 것처럼 그저 가서 집어먹기만 할 뿐이었다.

‘모두 하해와 같은 성은 아니겠는가.’

근래 겸양하듯 매일같이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둘째아들로 말하자면 정말로 그럴 만한 은혜도 내려준 것이 적지 않았으므로 또 빈말만은 아니었다. 심지어 감읍(感泣)으로 따지자면 얼마 전 완성된 경복궁 모형을 보고서 실제로 감동에 눈물 흘리기까지 하였으니 오히려 공치사보다 참말에 가까웠다.

그렇게 시일 흘러 어느덧 겨울 되니, 회갑을 달포 남겨두고 찾아오는 내빈도 점차 화려하였다.

“하하, 대원위 합하께서는 정녕 복이 많으십니다. 천하 만방에서 그리 찾아오신다니요.”

공친왕의 축하하는 뜻을 전하러 찾아온 마신이가, 볼 일 보러 운현궁에 가기 전 먼저 창덕궁에 찾아와 인사를 올렸다. 그러잖아도 오래 본 사이인데, 얼마 전에는 바로 궁의 코앞에서 총에 맞고 요양까지 하고 갔으므로 정이 각별한바, 마신이의 수더분함과 맞물려 분위기가 자못 화기애애하였다.

“아, 실로 그렇소. 성정이 돈후(敦厚)하시고 사람 대하기를 항상 성심껏 하시니, 그 돌아오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이라 하겠소이다.”

물론 대원군이 정말 좋아서 그렇게 접대하는 이가 개중 얼마나 되겠냐만, 아들 귀남 입장에서는 그저 그가 아는 유일한 아버지인 대원군을 축하해주는 곳이 많다는 것을 그저 뿌듯하게 여길 뿐이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그, 대양주(大洋洲)의 하위이(夏威夷, 하와이 왕국) 국에서 그 추장이 찾아오기까지 하였다오. 아들 된 이로써 어찌 기쁘게 여기지 않겠소이까.”

칼라카우아라 하였던가. 풍채 좋은 흑인 – 귀남의 눈에는 살갗 검으면 다 흑인이었으니 – 왕이었다. 물론 나중에 듣기로는 축하하러 찾아왔다는 것은 둘러댄 말이고, 실제로는 천하 나라들을 순방하던 길에 그저 때 맞아 들렸던 것이라 하였다. 청국에 결코 입조(入朝)한 것이 아님을 해명하느라 예조에서는 한동안 진땀 흘렸다지만 귀남이 신경 쓸 사정은 아니었다.

“참 잘 된 일이라 하겠습니다. 천조의 으뜸가는 번국이요, 우리 동삼성의 제일가는 이웃이니, 어찌 남의 경사로 대하겠습니까? 근래 천하가 어지러운 가운데 이러한 기쁜 일을 맞이하였으니 더욱 그러하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찾아오는 외국인들이며, 본래 이곳 한양에 머물던 공사들이며, 다들 이렇게 찾아와 축하하는 시늉을 하는 이유는 마신이가 넌지시 이른 것처럼 작금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질 기미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천하가 어지럽다니, 무엇을 말함이오?”

귀남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 혹 그가 놓치는 사정은 낮에는 대신들이 알리고 밤에는 중전이 일러주므로 크게 걱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밝지 못한 머리가 어디 가지는 않아 가끔 엉뚱하게 이해하곤 하니 이렇게 확인해야 할 때가 있었다.

물론 듣는 이 입장에서는, 다 알고서 자신을 떠본다 생각하기 마련이었고, 덕분에 참으로 어리숙한 모습은 어리숙한 시늉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지금껏 큰 탈 없이 왔다.

“누성(婁星)을 형혹(熒惑)이 침범하니 다시 서토(西土) 천산 자락에 상서롭지 못한 기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강 건너편의 사정이니 이 일을 여쭙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물론 대원위 합하의 장수를 축하함도 있지만요.”

차라리 저들 섬에 백인이 너무 많으니, 황인을 일꾼으로 데려다 써서 견제해볼 요량으로 찾아온 하와이 국왕은 순수한 축에 들었다. 이리 문제라는 불꽃이 되살아나, 천산산맥 일대에 전운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중이었으므로, 대원군 회갑연은 곧 서로 사정을 탐문하는 외교관과 사절들이 한데 모이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은 조선이 근래 조일동맹이니 무어니 하는 이상한 놀음을 하더니 숫제 북녘 아라사 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아라사는 그 동맹이라는 것이 노릴 만한 곳이 결국 청국 아니면 자신뿐이라 여겨 또 두려워하였다. 법국은 이번 기회에 다시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을 방도 하나쯤 없을까 생각하여 두리번거리고, 심지어 바다 건너 장사치 미국도 싸움 일어나면 뭔가 이권 챙길 것 없을까 싶어 기웃거리는 판국이었다.

그뿐이랴? 다시 중원에 전란 일어나게 되면 문명과 화평을 벗으로 삼는 자임을 인정받아야만 그 낙씨인지 노씨인지 하는 양이(노벨)가 세운 공장에서 용한 화약을 사갈 수 있을 터이니 여러 성의 순무와 총독도 몰래 사람을 보내었다. 공식적으로 당당하게 찾아올 수 있는 마신이 그나, 선정국과 제조국의 일로 엮여있는 장지동이 보낸 장패륜(張佩綸)은 그나마 떳떳한 축에 들었다.

“그 일이라면 근래 영국의 항간에 곧 전란 있으리라는 이야기 떠돈다 하기에, 만일에 대비하여 조처하는 방도를 강구토록 품처한 바 있소. 마침 그 나라에 새로 취임한 정승이 아국을 친하게 여긴다 하여, 소식이 적잖이 통하더이다.”

조선 선비들의 지원 덕에 스펜서의 반침략연대가 꽤 인기를 끌기도 하였고, 글래드스턴 본인의 기량도 어디 가지 않았기에, 1880년 선거에서 무난하게 당선된 뒤 마침내 총리 자리를 되찾은 것이었다. 물론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니만큼 조선에 대놓고 내각의 의론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감정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법. 선거를 전후하여 조선 공사관이 그러모아 본국에 보내오는 소식이 확 늘어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비하는 바 있으시다니 실로 천행입니다. 만약 어지러운 일이 오직 신강 한 자락에서만 일어난다면 그뿐이겠으나, 하필 천하의 다른 두 강대한 나라가 끼어들 소지가 생겼으니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부디 만반의 준비를 갖추시어 화란이 번지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청할 따름입니다.”

공친왕의 거사에 힘을 보태었다가 졸지에 근 오 년을 멀리 서쪽 변방에서 보내게 된 좌종당의 심정이 어떠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만약 공친왕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 처음 지녔던 십만 대군으로 고스란히 이리를 들이쳤다면, 능히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는 법이고, 이홍장 그가 집정하고 있는 지금 시국이 이와 같이 흐르고 있었으니, 잃어버린 기회는 그만 생각하고 이제 취할 과실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차례였다.

좌종당에게 정중하게 보낸 글은 예순 넘은 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창의적인 표현으로 가득한 서한으로 돌아왔다. 원래 좌종당의 성정이 그리한 것을 알았기에, 이홍장은 피식 웃고서 그저 서한을 도로 접을 뿐이었다.

그때, 문앞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마 낭중(郎中, 마건충)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라 하게.”

국왕의 생부의 생일을 핑계삼아 조선의 동정을 탐문하러 간 마건충이었다. 곧 들어와 절도 있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 오가면서 탈은 없었는가.”

“예, 대인의 배려 덕택에 추호의 불편함도 없이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가까운 조선이었기에 그를 보낼 엄두를 낼 수 있었다. 매사를 꼼꼼하게 챙기는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홍장은 아마 지금보다 배는 과로에 시달려야 했을 터. 이곳 천진에 머물 때면 직례 일대의 첩보부터 북양수사와 회군의 군정(軍政)까지, 다루지 않는 일이 드물었다. 장수나 책사는 아니로되 꼭 군대에 필요한 참모라고나 할까.

“조선의 사정은 어떠한가?”

“직접 살피건대, 영국의 사정을 예의주시하고는 있으나 그 외의 조처하는 바는 없어, 영·아 어느 쪽에서도 미리 언질은 받지 않은 듯하였습니다. 또한 조정에서는 최근 진행하는 조일동맹의 논의에 마음을 쏟고 있어, 혹 두 양이 중 어느 한 쪽의 연통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에 대처할 요량은 없을 듯하였습니다.”

대답하면서도 방구석 곳곳에 눈길을 흘깃 보내는 것이, 새로 꾸민 집무실의 모양새에 꽤 마음이 동한 듯했다.

“이 사람. 내 방이 마음에 들면 그리 말을 하게나. 하하.”

속마음을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나이 서른여섯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내심 천진 통상서에 새로 꾸린 집무실을 자랑스레 여기던 이홍장이었으므로 껄껄 웃고 지나갈 뿐이었다.

사실 그리 사치를 부린 것은 아니요, 서양 가구를 조금 들여오고 예전 공왕부에서 보았던 것을 본떠 큼직한 세계전도를 한 구석에 걸어놓은 것이 다였다 (이번에는 향항(홍콩)에 특별히 주문하여, 꼭 대청이 전도의 가운데에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도 예전 조정이었더라면 이홍조 같은 자들이 나서서, 역시 양이와 한통속이다, 그들 습속을 받아들였으니 이제 못 받아들일 것이 있겠느냐 하면서 헐뜯었을 터.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세나. 또 누가 있던가? 사실 조선이 무얼 하느냐보다 우리 대청에서 어떤 이들이 몰래 찾아갔는지가 중한 일이지.”

“전 흠차대신 마 공이 와 있었고, 전 시강학사 장패륜 역시 있었습니다. 허나 그 외에는 그저 작약 구하러 기웃거리는 중요치 않은 무리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이로는 조선 땅에 이미 있던 공사들이 전부였으며, 대양주 어느 섬나라 추장이 찾아오기는 하였으나 이 일은 이미 잘 아실 것으로 압니다.”

양강의 장지동이 장패륜을 보낸 것이야, 상해가 그 옆이니 새어나가는 소식 들었을 법도 하였다. 허나 마신이가 온 것은 의외였다.

“아라사가 뭔가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군.”

그 꾸미는 바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중간에 새어나가 동삼성 봉천까지 닿았든, 애초에 봉천의 공친왕을 끌어들이는 것이 계획의 일환이든 무언가 노리는 것이 있음은 확실하였다.

“이리의 일 때문일지요?”

“근래 그 일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지난 몇 년 사이 대놓고 싸우는 일이 부쩍 줄어든 영국과 아라사다. 그러나 두 나라가 땅을 놓고 싸우는 세 강역, 즉 구주 남쪽의 돌궐 땅과 인도로 이어지는 중원 서쪽의 황량한 땅, 그리고 동삼성과 조선, 일본이 있는 극동. 이렇게 세 군데 중 두 군데에서 영국이 아라사에 양보한 모양새가 나왔다. 아예 영토를 나눈 돌궐은 물론이요, 아주개발은행이라는 것을 세워서 우선은 중립이되 굳이 따지면 아라사에 조·일 두 나라가 가까워지게 하기까지 하였다.

“작금의 형국은 양쪽 모두 불만스럽게 여기려면 능히 그리할 수 있는 것이야, 영국은 당연히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그처럼 아라사가 세력을 키우게 내버려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아라사는 두 나라의 약조로 더 뻗어나갈 구석이 없어졌으니 그나마 남은 쪽에 온 힘을 실을 것이고.”

마건충은 물론이요 다른 막료들에게도 전모를 모두 밝히지 않았지만, 공친왕을 따라 정변을 일으킨 상군 중 거의 절반 이상을 온전히 신강으로 되돌려보낸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직접 싸워서 피 흘리기는 꺼려지니, 중원 병사들의 힘으로 아라사를 막아내라는 영국의 뜻. 좌종당에게도 그런 사정을 설명하고서 아라사와의 교섭에 큰 기대를 갖지 말고 여유 갖추어지는 대로 진격할 것을 종용하였으므로 (즉 사실상 명령하였으므로) 조만간 그대로 될 터였다.

물론 서태후를 압박하여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이홍장이었지만, 영국에 손 벌리는 모양새가 집권을 전후하여 이미 공공연히 드러났기에, 벌써 물밑 여기저기서 권신은 물론 간신 소리까지 나오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기껏 서태후가 황실의 금고를 털어 과반을 보유하게 된 동철을 조각내 영국에 넘긴 것도, 그리하지 않으면 공친왕을 돕겠다는 겁박에 말미암은 것이었지만 세간에서는 영국에 매수되어 저의 욕심을 차리고자 그렇게 한 것이라고 풍문이 자자하지 않던가. 물론 그 거스름돈 격으로 들여온 철갑함 덕택에 북양수사의 전력이 탄탄해지기는 했다만.

그러니 영국의 뜻대로 따르는 것임을 알면서도 이리를 가만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었다. 좌종당 본인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요, 처음에는 영국이더니 이번에는 아라사에게 나라를 내어주느냐며 벌떼같이 여론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궐 안의 수인 신세라지만 뻔히 귀 있고 눈 달린 서태후가 이를 놓칠 리 없을 터.

“물론 좌 대인과 나는 엄연히 마음 두는 바가 다르지. 하지만 선제들로부터 물려받은 강역을 쉬이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 당파싸움을 위해 부정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네.”

“예, 알겠습니다. 대인.”

물론 아라사도 바보는 아니므로, 그때보다 지금은 더 일리 일대의 병비가 탄탄할 것이다. 허나 어차피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은 그의 회군이 아니므로 설령 실패하더라도 차도살인이요, 성공하면 고스란히 그 공의 반절은 이홍장의 것이다. (군자금을 계속 융통해준 것이 영국이니, 영국과의 교섭을 담당한 이홍장의 공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보다 아라사가 노리는 일을 미리 눈치 채고 막아낼 방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야.”

잠시 고민하던 마건충이 무언가 떠오른 것이 있는 듯 정적을 깨뜨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금궁을 오가는 만인 신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온갖 실무를 담당하다 보니 어느새 이런 쪽에도 손 대고 있는 마건충이었다. 그 말을 듣자 이홍장도 곧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바 있었다.

“아라사를 끌어들이려 하심인가. 거 참, 태후 전하께서도 과한 구석이 있으시군.”

태후 딴에는 나름대로 궁리하여 내놓은 방책일 것이다. 당장 양무(洋務)로써 무비의 일을 갖추는 것이 급하다 보니, 그 옛날 위무제(조조)처럼 유재시거(唯才是擧)를 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그 과정에서 저 잘난 줄만 알고 실제로 업무를 손에 잡아 본 적은 없던 만인들은 대거 한직으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히 앙심 품은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을 터. 태후 딴에는 환관을 풀면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니 나름 수를 감춘다는 생각으로 대신 만인들을 움직여 아라사에 연통을 넣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경계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허나 금궁의 규모는 천하 제일이니, 우리가 경조(京兆)의 모든 문을 막는다 하더라도 금궁 안에는 빠져나올 구멍 하나쯤은 있을 걸세. 그러니 차라리 도달하려는 곳을 막아놓는 것이 낫겠지. 아라사 공사관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에 사람을 풀고,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용의주시케 하게나.”

“예, 대인.”

그리하여 대청의 장수 좌종당이 저의 상군 이끌고서, 천산 넘어 아라사군의 진채를 포위하기에 이르렀으니, 원 역사의 아프간 전쟁을 갈음하여 청이 영국을 위해 아라사에 싸움을 걸게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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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고종도 흥선대원군의 회갑연에 돈 1만 냥과 각종 면필, 식재료 등을 지원하였습니다. (다른 생일 때에는 그저 도승지를 보내 문안인사를 올렸던 것과는 대조됩니다.) 한창 데면데면할 시기였음에도 그리하였으니, 만약 귀남옹이 아니었더라도 고종과 대원군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더라면 나름대로 성대하게 치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잠깐 언급된 장패륜은 초기 청류파의 구성원 중 하나로, 개중 가장 젊은 축에 듭니다 (1848년생). 원 역사에서는 청불전쟁에서 복건수사를 지휘하였지만, 졸전의 연속 끝에 서태후의 노여움을 사 우리 식으로 말하면 백의종군의 처벌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이홍장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됩니다만, 끝내 거기서 더 현달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작중에서는 청류파가 세를 굳히기도 전 이홍장의 모함으로 풍비박산나면서, 그나마 한때 같은 청류파였던 장지동을 따라 남족으로 피신하였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전에도 종종 나왔던 마건충이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프랑스 유학 중 파리자유정치학교(L'École Libre des Sciences Politiques, 훗날의 시앙스 포 Science Po)에서 학위를 따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중국인의 손으로 저술된 최초의 근대적 중국어 문법서인 『문통(文通)』을 집필하는 등 인텔리적인 면모가 강한 인재였지요. 여기서도 그런 능력이 (비록 조기에 집권한 이홍장 때문에 유학은 못 갔지만) 십분 발휘되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등장한 하와이 왕국은 의외로 고증에 맞는 내용입니다. 칼라카우아 국왕(마지막 왕인 릴라우오칼라니 여왕은 그의 여동생입니다.)이 1881년 초 (음력으로는 1880년 말이지요) 극동을 시작으로 해외순방을 다녔거든요. 특히 그는 플랜테이션 농업에 일본인 노동자를 들여오고자 하였으며, 순방 중에도 일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메이지 신정부가 인신매매에 가까운 해외노동자 파견을 1880년대 후반까지 금지했거든요). 심지어 일설에 따르면 자신의 딸 카이울라니 공주와 천황가 사이의 혼인을 제안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폴리네시아인 특유의 덩치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기에 남아있는 사진이나 기록화 등을 보면 어지간한 백인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간에 마신이가 형혹 운운하는 것은 동아시아 전통 점성술에서 유래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형혹, 즉 화성이 각각 방위를 상징하는 이십팔수 중 어느 별을 건드리면, 그 방위에 있는 지역에서 분란이 일어난다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누수(婁宿)는 그 중 대략 서북서 정도에 해당합니다.

한편, 좌종당의 신강 재정복이 공친왕의 쿠데타로 인해 중간에 맥이 끊기면서 잠시 진행이 멈추었던 이리 분쟁에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조금이나마 영러 간의 그레이트 게임의 영향을 받았는데, 작중에서는 동방문제의 조기 해결로 제2차 영국-아프간 전쟁도 (어쩌면 아직) 일어나지 않게 되면서 청과 러시아의 무력분쟁이 대신 영러 간의 대리전 양상까지 띄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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