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22화 (122/320)

40. 불장난의 재미와 위험에 관하여 (2)

옛 춘당대 자리에 낯선 양이의 건물이 들어선 것도 이제는 족히 몇 달은 되었다. 소략하게나마 안쪽의 꾸밈새까지 가다듬었으니 급하게 마무리하였다지만 엄연히 준공은 준공이었다.

서쪽에 서서 뒤편 후원과 옆 부용지에서 절로 풍겨오는 봄 정취와 더불어 보면 그 옛날 김병학이 가져온 섭영(사진) 속 대서 풍광과도 같았지만, 또 동쪽에 서서 서쪽을 보면 기와 두른 행랑과 담장, 전각의 지붕 사이로 홀로 오뚝하게 솟은 양관(洋館)의 모습이 영 어울리지 않았다.

성상 귀남도 그 어색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부득불 건물을 올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다. 지금 열심히 설계를 하고 있는 – 대원군에게 회갑 선물로 설계 모형을 보낼 생각으로 열심히 기사들을 채근하고 있었다 – 경복궁은 아직 그 경세(景勢, 경기)라는 것이 오롯이 돌아오지 아니하여 첫삽 뜨기가 무엇하였는데, 그래도 대서에서 찾아오는 길손들을 맞이하려면 그들 방식으로 지은 웅장한 건물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조야 가릴 것 없이 나왔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참의원이나 육조의 각사를 양관으로 새로 짓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건만 무엄하게 지존보다 먼저 그런 건물의 편리함을 얻기는 저어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미리견의 전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 대통령) 구 공(율리시스 S. 그랜트)이 찾아오는 일이 있었는데, 비록 동양풍 물씬 느끼는 궁궐의 풍치에 찬탄하고 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도성의 식자들은 웅장한 전각으로써 오백 년 종사의 위엄을 보였으면 더 좋지 않았겠느냐며 뒷말들을 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원래 경복궁에 지으려던 건물 중 하나의 설계를 축소하여 이곳 춘당대에 올리게 된 것이다. (전국의 대로도 얼추 공사가 마무리 되었겠다, 광통이도국 일감 줄어들 것을 걱정하던 장동 김문에서 쌍수들어 환영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아무래도 급히 올리다 보니 정전이나 침전으로는 쓸 수 없지만, 그래도 상참, 아니, 기무회의(機務會議, 국무회의)를 하기에는 족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회의를 위하여 계단 오르던 신임 영의정 겸 총리대신 홍순목(洪淳穆)은 생각하기를, 전각의 풍모도 그렇고, 이 기무회의라는 것도 그렇고, 영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이 마치 저의 직함과도 같다 여겼다. 따지고 보면 구하지도 않은 높은 자리에 절로 오른 셈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이유원이 처음 통리아문과 육조를 합하는 의론을 꺼낸 것은 자연히 자신이 그 우두머리에 오를 것이라는 심산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막상 국제의 일이 마무리되고 보니 의정부와 육조의 관리들이 은근한 경계의 눈치를 보내었다.

그리하여 물밑 다툼 끝에 아문의 소속도 아니고, 의정부 안에서도 확실히 개화당 쪽도, 운현궁 쪽도 아니었던 홍순목이 영규(領揆, 영의정)의 직에 오르게 되었으니, 자리 채우기 위해 올린 감이 없지 않아 본인에게도 와 닿았던 것이다. (총리대신 자리를 설레발로 시작해 설레발로 끝냈다며 이유원은 속으로 한탄하였다지만, 홍순목이 알 바는 아니었다.)

홍순목 앞뒤로 중신들이 한둘씩 들어와, 대서에서 들여온 것인지 아니면 그 솜씨를 본떠 조선의 공장(工匠)이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꽤 정교하게 만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주상 전하 납시오’ 소리와 함께 성상이 친림(親臨)하니, 신료들은 부복하는 대신 앉은 자리에서 허리 굽혀 예를 갖추었다.

“아, 이처럼 새 전각에서 군국의 기무를 논하게 되니 어찌 복된 일이 아니겠소이까.”

일월도 병풍 앞 용상에 앉은 임금이 회의의 시작을 옥음으로 알렸다.

“비록 세세한 절목의 일로 인하여 새 관제가 오롯이 운영되는 것은 아니라 하나, 금번 일본국의 일은 실로 나라의 대사이므로 마땅히 새 법도에 따라야 할 것이오.”

국제를 제정하면서 더불어 관제도 뜯어고치게 되었으니, 육조의 세세한 업무나 지방 군현의 일은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밤을 벗삼아 고치고 또 고치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이처럼, 그, 기무회의를 열게 되었으니 대신들은 그리 알고 깊은 헤아림과 현묘한 지재로써 나라의 대계를 정하여야 할 것이외다. 비록 내 친람하고 있다지만, 이 회의는 상참하여 아뢰는 자리가 아니라, 그대 중신들이 국가대사를 논하기 위해 꾀를 모으는 자리요. 무릇 이 뜻을 헤아려 살피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후렴 잦아들자 다시 어색한 조용함이 찾아왔다. 그걸 깨는 것이 저의 직분임을 새삼스레 깨달은 홍순목이 먼저 발의하였다.

“흠흠, 신 총리대신 홍순목 아뢰옵나이다. 경진년(庚辰, 1880) 계춘(季春) 상순 기무회의를 거행토록 하겠사옵나이다.”

“그리하시오. 허나 이 회의는 내가 친람할 뿐 경들이 공론을 모으는 것이니, 내게 아뢰는 것이 아니라 경들끼리 국사를 논한다 여기고서 진행토록 하시오.”

“예, 전하.”

여전히 어색하다만 국제로 정해진 일이고 또 어명으로 내려온 일이니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좌중을 한 바퀴 둘러보고서 다시 말을 꺼냈다.

“금번 회의에서 논할 가장 큰 사안이라 하면, 일본국 안에서 아국을 모해하는 자가 있어 일본국 조정과 백성으로 하여금 대경(大驚)케 하였다 하니, 이에 어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이외다.”

처음 문제의 그 글이 일본국에서 화제가 된 것으로부터 따지자면 고작 사흘 만에 소집된 모임이니, 대응이 기민하여 예전에 비할 바 아니었다. 물론 일본국 경도(京都, 교토)에 나가 있는 공안서 직원이 손을 쓴 덕도 있었지만, 그보다 조선 안의 신보들도 대대적으로 소식을 실었던 탓이 더 컸다.

불과 수 년 전만 해도 신보라는 것은 정당들이 나랏일 돕기 위해 내는 물건이었지만, 점차 도성 밖에서도 신보 내는 곳들이 늘어나고 또 양이의 인쇄하는 기기와 그 술기도 퍼졌으므로, 요새는 조선 전체로 잡아도 열 호 중 하나 정도는 신보를 받아본다 생각하여도 무방하였다. 개중에는 신보로 장사를 할 생각으로 뛰어든 영악한 안인수 같은 이도 있어서, 더 자주 찍어내면 더 많이 팔리니 이득이라는 생각에 일보(日報)라 이름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내는 횟수를 늘리게 되면 지면 채우는 것도 일인데, 그렇다고 동네 갑돌이와 갑순이가 서로 연모한 이야기 따위를 신보에 올릴 수는 없는 노릇. 그리하여 몇몇 신보들은 채사(採事, 취재)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조금 더 여력이 있으면 저의 고을 근방의 다른 대읍까지, 재력이 안인수 정도면 천진이나 대마도 정도까지 사람을 보내놓고는 하였다.

“신보에도 익히 실렸기에 제공(諸公)께서도 익히 아시겠지만, 그래도 다시 소략하게 정리하면 이와 같습니다.”

잽싸게 예조판서 심순택이 말을 이어받았다.

“외무를 맡은 일본국 조정의 한 신료라고 스스로 밝힌 서생이 정작 자신의 이름은 감추고서 거짓된 글로 민심을 홀리니 실로 안타까운 사정이라 하겠습니다.

본조(本曹)에서 일본국에 주차하는 공사를 통해 급히 전해받은 바에 따르면, 그 글은 표제하기를 『일본책략(日本策略)』 이라 하며, 나라와 나라 사이를 이간질하여 다툼을 종용하는 것이라 합니다.”

아문과 육조가 합쳐지면서 새로 판서 자리에 오르든,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든, 요새는 바깥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모르고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심순택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그 『일본책략』의 내용 정도는 알고 있었다.

크게 따져서 앞부분에서는 옛 막부가 조선국의 농간에 넘어가 자칫 망국의 지경에 놓일 뻔하였으며, 지금도 조선이 일본을 억누르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고 있으니 마땅히 경계하여야 한다고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책으로 주문하는 것은, ‘친영국(親英國) 결노서아(結露西亞) 용지나(用支那)’라, 원교근공으로써 조선이 일본을 더 해치는 것을 막아내면서 장차 ‘두 나라 사이의 크고 작음을 바르게 한다’는 방략이었다.

“이보다 더 심하게 무민(誣民)하는 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징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첫 반응은 원론에 가까웠다. 여전히 옛 왜란의 앙금도 있거니와, 조선의 식자들이 여기기에는 나라의 문을 연 이래로 일본을 도와준 일밖에 없지 않던가. 심지어 수신사의 일도, 조선의 관점에서 보면 대국과 일본 사이의 끊어졌던 연을 이어준 것이니 아름답기 그지없건만.

“예로부터 왜인은 성정이 간교하여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간 우리가 저들과 통교한 이래 수호하는 도리를 버린 바가 없거늘, 이제 와서 저리 모해하니, 시운(時運)을 타게 되면 우리를 언제고 범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화란의 근원을 미리 끊어 없애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임금이 개의치 않는다고 하교하였더라도 다들 켕기는 구석 있어, 어전에서 함부로 저들끼리 말 나누기가 저어되었지만, 마치 연자방아와도 같이 한 번씩 혀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논의가 절로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에헴. 병조에서 말씀 올리겠습니다. 물론 나라 간의 서로 사귀는 예는 저희 소관이 아니므로 함부로 다루어 말할 수 없지만, 만일 정녕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면 못할 것도 없다 하겠습니다.”

아문과 육조가 섞이면서 종종 그 고신(告身)에 쌓인 연분이나 경력이 부족함에도 과한 자리에 오르는 이들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에 병조판서로 올라간 정운구가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우리의 군병으로 일본국 전역을 아우를 수는 없겠지만, 대마도 정도는 능히 정벌할 수 있습니다. 옛 임진년 병란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나라가 평온한 지 오래라 싸우는 법을 잊었고 그들은 근 백 년을 서로 다투었기에 그 재주가 절로 훌륭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 따지면 오히려 우리는 연병법을 두어 시행하였으므로 정병의 수가 저들에 비할 바 아니며, 동삼성을 평정한 바 있어 병무의 익숙함 역시 저들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근세의 일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간과(干戈) 극렬한 와중에도 능히 법국과 싸워 이겼는데, 저들은 미리견 군함이 쏘는 함포에 놀라 절로 투항하였다 하니. 그 우열을 능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싸움의 승장으로써 아직까지 명성 자자한 정운구다. 물론 실상을 따져보면 양쪽 합해 삼백 명이 채 되지 않았던 문수산 싸움이었지만, 여하간 동삼성 출병 이전까지 최대의 승첩이었으니, 다른 대신들도 정운구가 군무에 대해 그렇다 말하면 사실이겠거려니 여겼다.

소 뒷걸음 치다 쥐 잡은 모양새로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던 것이, 징병제를 시행하였다지만 다른 번의 반발과 예산의 문제로 사실상 모병제에 가까운 일본 육군은 그 옛날 근위병 출신의 정예를 제외하면 허깨비에 가까웠다. 해군이야 아직 저들이 막부 시절에 들여온 배들이 남아있다지만, 조선 쪽에서 민간의 기선까지 징발하여 그대로 밀고 들어간다면, 대마도 정도는 점령하고 지킬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물론 금상께서 전란을 일으키는 것을 꺼림을 익히 아는 정운구였지만, 그를 비롯해 적잖은 무관들은 (지금은 조금 잠잠하다지만) 젊은 학생들이 자강이니 흥국부도니 하며 내세운 주장에 공감하는 바가 적잖았다. 삼 년간 병사를 기름은 사흘 싸움을 위해서라는데, 지금 조선도 이만큼 군대를 키웠다면 어디엔가 제대로 힘을 풀어 그 들어간 밥값만큼의 공헌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저들이 근래 국운 쇠미하여 기세를 잃었다지만, 문을 낮추고 무를 높이는 그 기풍만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위를 보여야만 예를 깨달아 서로 대하는 도리를 바르게 할 것입니다.”

물론 그러다가 일이 틀어져 강화하지 못하게 되면, 그 다음은 전비를 감당하지 못하여 서로 고꾸라지는 결말만 남을 것이었다. 호조판서 김병시가 과녁 꿰뚫듯 이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아직 아라사와 다툼이 일어났을 때 벌어졌던 전란(錢亂, 공황)이 다 수습되지 않아, 가뜩이나 부족한 나라의 재정에는 싸움 벌일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대국에서 초모해온 공인들도 술기 가르치는 것 외에는 일감이 없는 실정일진대, 여기서 더 군비를 지출하려면 필히 빚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 무도한 나라라 우기면 혹 대서에 융통하여줄 나라 하나 없겠습니까?”

심순택이 끼어들었다.

“무도한 나라라! 지금 대서 나라들이 우리를 일컬어 예의를 아는 문명의 나라라 하는데, 일본국이 우리를 당장 치겠다 한 것도 아니고 흉심을 품고 있다고 무고하였는데, 거기에 맞서서 정말로 쳐들어가겠다 하면 명분을 어찌 챙길 수 있겠소이까?

그러잖아도 회의가 시작하기 직전 일본국 공사관에서 본조에 글 보내어 변명하기를, 한 서생이 어리석은 사견을 저들 신보에 내었을 뿐이요, 일본국은 우리와 수호하는 약조를 버릴 마음이 한 조각도 없다 하였소이다.”

아무리 일본국 안 여론이 시끄러워 당장 강호(에도)로 쳐들어가 역도를 참해야 한다는 자들까지 있다지만, 그래도 여론은 여론이고 조정은 조정이다.

이토도 자칫 조선에서 과한 오해를 하는 바람에 원치 않는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은 조선왕의 성정으로 미루어보아 거의 없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니 미리 오쿠보의 양해를 받아 조선에 그렇게 변명하는 말을 전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변명을 믿어주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허, 앞서 다른 분께서 이르신 것처럼 왜인들은 신의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지금 예조에 보낸 글이 겉치레고, 일본국 안에서 무민하는 것이 진심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병법에도 이르기를 능히 칠 수 있을 때는 칠 수 없는 듯 꾸민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풀이할 수 있으니, 갑론을박은 한참을 끌었다.

그러던 와중 가만히 있던 이조판서 최익현 – 관제 개편으로 인하여 이조로 자리를 옮긴 이래로 매일같이 일에 치이던 터였다 – 이 문득 떠오르는 바 있어 말을 꺼냈다.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일전에 법국에 체재할 때 들었던 나파륜 제삼(나폴레옹 3세)의 일이 떠오릅니다. 세간에서는 어리석게 병장을 휘둘러 망조의 치욕을 당하였다 하지만, 제가 그 땅에서 직접 겪으며 살피건대 이미 그 아래에는 보로사를 두려워하고 꺼리는 민심이 있었습니다.

보로사 재상 비수막(비스마르크)이 집정한 이래 그 힘이 강성하여 덕의지 여러 나라를 일통할 기세를 보이니, 바로 서쪽에 붙은 법국으로서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던 것입니다. 누군가 사익을 탐하여 그러한 근심에 풀무질을 하였든, 절로 불이 일어났든 이미 땔감이 갖추어지고 기름까지 부어져 있던 셈이지요.

지금 아국과 일본의 형세를 살피면, 아국이 강성할 뿐 아니라 대서 여러 나라와도 긴밀히 사귀고 있으니, 설령 금번의 사안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본은 우리의 속뜻을 의심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틈타 저의 사욕을 추구하는 권신이 저들 사이에서 나올 것이니, 어찌 불로써 불을 막음을 가하다 하겠습니까.”

여전히 재정을 문제로 들어 싸움은커녕 일본국을 책망하는 것도 반대하던 김병시가 곧장 호응하였다.

“좋은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앞서 병판이 병법을 전거로 들었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칠 수 없을 때야말로 능히 칠 수 있는 것으로 꾸미는 법 아니겠습니까?”

기껏 거둔 세금이 새어나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던 – 그 세금으로 나라에서 다른 사업을 벌이면 장동 김문에게도 소득이 돌아오지 않던가 – 김병시는 끝까지 반대하고, 최익현과 심순택도 영 싸우자는 쪽의 논리에 수긍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중신들로 말하면 아무래도 정운구의 말에 조금 더 마음이 기운 것이 사실이었다. 정 지금 싸워서 제압할 수 없다 하더라도, 조금 길게 잡아 대비해나가면 될 일 아닌가?

“흠. 물론 호판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만, 지금 이판의 말을 들어보니,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가 조종의 은덕을 입어 강성해지는 한 저들 왜인이 우리를 경계하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다는 뜻 아니오? 우리가 그런 마음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 마음이 흉계로 이어지지는 못하게 해야 할 것이오.”

“실로 그 말이 이치에 닿습니다. 호판은 국용(國用)의 부족을 말하지만, 오히려 병기창과 선정국(조선소)을 갖추어두고 공으로 놀림이야말로 국용을 낭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조금 어렵더라도 병비에 힘을 기울인다면, 장차 병란도 막을 수 있는 것이니 인명을 아끼는 어진 정사와도 맥을 함께한다 하겠습니다. 예판께서는 싸움의 명분이 없음을 근심하셨는데, 이리하면 그러한 폐해도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줄기차게 반박하는 김병시를 꺾기에는 부족한 논리였다.

“하지만 지금 일본으로서는 아국과 다투어 얻을 것이 없습니다. 제가 듣기로, 일본국이 우리의 참의원을 따라 제도를 갖춘 이래 당이 나뉘어, 한쪽은 옛 대군 덕천경희(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끌고 , 다른 한쪽은 장주(조슈) 사람으로 새 조정에 출사한 이등박문이라는 자가 이끌고 있는데...”

“잠깐, 호판, 지금 이등박문이라 하였소?”

저들이 내 마음고생을 대신 해 주니 좋지 않은가, 하고 가만히 지켜보던 귀남이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말을 끊었다. 끼어들지 않겠다고 하였음이 떠오른 것은 그 뒤였다.

“예, 전하. 지금 일본국 총리대신으로 있는 대구보(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몸을 일으킨 자로서, 입헌정우회라 하는 당을 또한 이끌고 있다 합니다.”

과거이자 미래인 귀남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해방 이후로는 ‘왜놈들은 죄다 못된 놈들’이라고 단정하고 넘어가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전체를 합산하였을 때 이야기였다. 요컨대 개중에는 좀 더 유별나게 모진 왜놈도, 비록 조센징이라며 낮추어보기는 할지언정 나름대로 사람답게 챙겨주는 일본인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중 모진 왜놈의 대장이라면 대체 왜 그런 소리를 듣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나쁜 놈이라고 다들 얘기하는 (소학교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경을 칠 일이었지만) 이등박문이 있을 터였다.

물론 그의 옆에 두고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 민자영처럼, 가방끈 짧은 귀남이 알 만큼 유명한 악한일지라도 어찌어찌 잘 묶어두면 그리 큰 병폐가 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고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리고 있던 귀남이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일본에 있는 다 큰 어른을 어찌 옆에 두고 키울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니 이등박문이 억울하게 여기든 말든 우선은 그가 모진 심사로 음모를 꾸몄으리라 간주하는 것이 귀남이 보기에는 순리였다. 더구나 지금은 심지어 무슨 당의 영수라 하니, 따지자면 일본국의 박규수나 대원군과 같은 자라, 능히 그리할 깜냥도 될 듯하였다.

일전에 젊은 경연관들 앞에서 조선이 어찌 일본을 대하느냐에 따라 일본도 조선을 은인으로도, 원수로도 여길 수 있을 것이라 하교하였던 생각이 났다. 딱히 일본에 원한 살 만한 일을 그때 이후로 한 것 같지는 않았으니, 아마 무슨 이익을 탐하여서인지는 몰라도 이등박문, 혹은 그와 비슷한 자가 획책하는 바가 있어서 이리 하였던 것이리라 단정하였다.

“흠, 내 생각하여 보니... 아, 하교가 아니라 그저 내 단상이니 경들은 깊이 새기지는 마시오. 여하간 그 나라 안에 당이 갈려서, 한 쪽이 다른 쪽을 누르고 국사를 전횡하고자 이런 무서운 일을 꾸미지는 않았는가 싶구려.”

그렇게 개의치 말라고 한들 말하는 사람이 임금일진대 어찌 가볍게 여기겠는가.

대놓고 '내 미래에 듣기로 저 이등박문이 참으로 나쁜 놈이더라.' 할 수는 없던 귀남이 적당히 앞서 최익현이나 김병시 등이 한 말로 얼버무리자, 대신들의 논쟁도 잠시 멎었다.

그러고서 곰곰이 고민들을 해 보니, 다들 얼추 결론이 비슷하게 나왔다.

“생각건대 만약 일본국 안의 다툼으로 지금과 같은 소란이 일어났다 하면, 그 배후가 누구이든 결코 어진 신하는 아닐 것입니다. 이웃 나라에서 난신과 반신이 활개를 치게 되면 그 어지러움은 고스란히 이웃에게까지 옮겨오게 되니, 이번 일의 방책을 논함에 있어 이러한 이치를 마땅히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임금까지 다시 마음에 두어, ‘하오’하던 말씨를 ‘합쇼’로 갈음한 홍순목이 정리하자, 좌중이 얼추 동의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라, 누가 되었든 조선과 일본이 다툼을 원하는 자일 테니, 속셈은 나중에 헤아리고 우선은 그 의도와 정반대로, 다투지 않는 방도를 마련하여 서로 다투고 두려워할 소지를 없애버리면 되겠다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잘 되면 무언가 못된 심보 품은 쪽의 궁리한 바를 고스란히 무위로 돌릴 수 있을 것이요, 못 되어도 명분에서 손해보는 바는 없으니 본전이라는 심산이었다.

그나마 정운구가 반대하였지만, 제물포에서 나오는 총포와 함선을 일본에게 팔아넘기면 그 재정으로 더 좋은 병기를 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이재에 밝은 김병시가 설득하자 곧 넘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책략』이 붙인 불에 대응하여 조일동맹이라는 해괴한 제안이 교토를 헤집어놓게 되었으니, 불장난을 하다 보면 연기 보고 놀란 이웃집에서 대문 박차고 들어와 물을 퍼붓기도 하는 이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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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역사에서도 갑오개혁으로 의정부가 내각으로 갈음되면서 국무를 조정하는 의사결정기구로서 내각회의가 등장한 바 있습니다. 당시 제정된 『내각사무판리규정』을 보면, 왕은 내각회의에 반드시 임석하여 회의의 내용을 재가할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내각회의는 집행부의 핵심 기구로서, 대신의 임면에 있어서 국왕의 결정은 내각의 의결을 거치도록 하고, 내각의 결정에 국왕이 반대할 경우 반드시 그 이유를 명시하여 내각에 알려야 한다고 규정하는 등, 여러모로 입헌군주제의 행정부로서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비록 광무개혁으로 다시 왕권/황권이 전제화되고 내각이 의정부로 환원되면서 사실상 무력화되기는 하였지만요.

원 역사의 덕수궁 석조전은 본디 정전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석조건물이라는 낯선 시도를 한 데다가, 정전으로서의 규모가 있었기 때문에, 설계와 기초공사에만 5년이 걸리고, 결국 내부공사까지 마치고 준공식을 했을 때는 경술국치가 석 달 지난 뒤였지요. 하지만 작중의 건물은 규모도 줄인데다가 이미 서양식 건물을 짓는 경험이 여러모로 누적된 터라, 그보다는 시일이 덜 소요되었습니다. 건물의 부지인 춘당대는 이전에 한 번 나왔듯, 부용지 서편의 넓은 공터입니다.

작중의 뜬금없는 결론은 의외로 합리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동맹은 우호적인 국가끼리 맺기 마련이지만, 국제정치학, 특히 현실주의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잠재적 위협이 되는 상대국을 동맹으로 묶어두어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게끔 제약하는 것 (물론 그만큼 자신의 자율성도 손실됩니다만)이 안보의 측면에서 이익이 될 수 있거든요. 이른바 ‘결박동맹(Tethering alliance)’이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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