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20화 (120/320)

39. 배우고 때로 익히면 (3)

이제 막 동녘에서 해가 고개 내밀기 시작하였지만, 바다안개 자욱이 일어나 바다와 구름 사이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낮게 깔린 바다안개 사이로 몇몇 섬들이 고개 내미니 정취도 적잖았건만, 새벽 기차 타고 인천에 막 도달하고 있던 이용익으로 말하자면 그런 정취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인천 오가는 기차를 종종 타보았어도 갑석(甲席, 일등석) 자리에 앉아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푹신한 양이식 의자가 신기하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였다. 허나 저의 마음껏 몸을 완전히 기대지는 못하고 허리 꼿꼿이 세우고 있었으니, 이유인즉 반대편에 앉은 그의 달갑잖은 길동무 김가진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저 도성에서 하던 일에만 전념하면서 부업으로 이런저런 잔재미를 보면 그것으로 족할 터인데, 지난 번 은 소동 이후로 김가진이 무슨 일만 있으면 저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물론 김가진의 해명으로는, 아무래도 사람 사는 곳에서 일이 나면 십중팔구는 돈이 걸려있기 마련이라, 데리고 다니면서 도움 받기에 이용익 그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 아닌가.

요새는 그저 눈앞의 이 사람이 마당쇠 하나 필요해서 만만한 저를 끌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하던 터였다.

“그러고 보니 요새 대갓집 자제들이 다들 울상이던데, 뭔 일이라도 있었나 싶더군그래.”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김가진이 뜬금없이 물으니, 불만은 마음 한 구석에 다시 집어넣어야 했다.

“엇, 모르셨습니까? 근래 신보에도 떠들썩하게 났었는데요.”

“요 며칠 사람 찾느라 바빠서 신보도 통 보지 못하였다네.”

운현궁 문객 된 뒤, 대원군 시키는 일에는 침식 잊다시피 독하게 매달리곤 하는 김가진이었다. (적어도 이용익이 듣는 풍문에 따르면 그랬다.) 정말 신보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겠거려니 싶어, 그가 아는 한에서 설명해주었다.

“근래에 학원의 학도들이 하라는 글공부 대신 무슨 모임 같은 것을 만들어서 풋내기 같은 소리를 하기에, 상감께서 엄하게 전교하시어 과거에서 보는 과목을 늘림으로써 그 본분을 다시 마음에 새기게끔 하셨다 합니다.”

귀남이 ‘창안한’ 용어대로 고시(考試)라 이름 붙이기로 한 이 시험의 제도는 아직 말만 나온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벌써 전국 서원과 학원의 눈길을 붙잡고 있었다. 당연히 경의(經義, 경서)는 빠질 수 없는 것이니 그대로 들어가고, 문·무과냐 (역시 새로 세울) 법과냐에 따라 이런저런 과목의 가감이 있기는 하겠지만, 분명 서양 사정이나 산학을 필두로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마구 들어오리라는 점은 명백하였다.

처음에는 아무리 그래도 수백 년을 내려온 과거의 제도를 바꾸기는 어렵다 생각하였던 조정의 신료들이었지만, 각종 사무에 통달한 신참이 들어오게 되면 저의 업무가 줄어드는 이치를 깨닫게 되자 오히려 이 일을 창안한 귀남보다 앞서서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꼭 숙지하여야 한다며 덧붙였기에, 막판에는 귀남이 ‘그래도 이건 조금 과하지 않으냐’ 하고 몇몇 과목은 선택하여 응시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아야 할 정도였다.

“아, 그래서 학사의 일은 일단락되었으니 괘념치 아니하여도 된다 하신 것이었군.”

“예?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아, 실없는 혼잣말이니 흘려 듣게나.”

좌우지간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효과는 확실하여, 적어도 향후 몇 달은 학사든 학계든 정말 이름대로 배우는 모임이 되어야 할 터였다. 정작 모임을 주동하여 이 사달의 근원을 제공한 학도들은, 어차피 그 모임을 이끌기 위해서는 서양의 사정에 통달하여야 했으므로 이번 개편에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으리라는 점이 조금 기묘하다면 기묘할까.

기차가 슬슬 인천부를 지나 제물포 가까이로 들어서고 있었다. 물론 요새는 (본래 같은 인천부 안이기도 했거니와) 제물포 포구서 뻗어 나오는 새 건물들과 인천부 외곽에 들어서는 가옥들이 점차 마주하여 그 경계가 애매해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공장에서 나오는 저 매연만은 아직까지는 제물포의 전유물이었다.

조선 팔도의 물산 모이는 곳은 물론 서울이지만, 제물포는 그 대신 바다 건너 여러 나라의 사람과 문물이 들어오는 창호와도 같으니 또 서울과는 다른 흥성함이 있었다.

대략 어느 정도인가 하면, 어느새 공장이다 기기창이다 하여 부두 옆 자리를 모두 채우고, 또 그 직인(職人)과 고공(雇工)들 지낼 가옥도 그 옆에 짓고, 또 그 옆에 새로 공장을 차리고 하다 보니 어느새 인천부 부내와 맞닿게 되었다.

물론 북쪽 강화도 너머 황해도에 동철에서 융통해온 자금으로 짓고 있는 철정국(鐵政局, 제철소)이 완비된다면 몇몇 공장들은 건너가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그만큼 싼 값에 들여오는 철로 뭔가 다른 것을 해보려는 이들이 몰려들 터이니, 조만간 아예 갯벌을 모두 메우지 않고서는 쉬이 더 뭔가를 지을 요량도 내기 어려울 지경에 이를 것이었다.

“여기서 왜인 한 명 붙잡아오는 것도 어지간한 일은 아니겠습니다요. 서울서 김서방 찾는 것보다 더 막막하면 막막했지, 덜하지는 않을 듯합니다만은...”

“아무리 제물포 이곳에 국외인 왕래가 잦다지만, 일본인으로 학문 배우고자 찾아온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내 지난 며칠을 공으로 보낸 게 아니라면야 금방 찾을 수 있을 걸세.”

그러면서 당당히 경일학당 있는 포구 위 언덕으로 발걸음하는 김가진이었다.

한편에는 진서로 경일학당, 다른 한편에는 뤼세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Lycée Siméon-François-Berneux). 아무리 근래 법국과 조선 관계가 나라 문호 열던 처음 몇 해에 비하면 격조해진 감이 있다지만, 경일학당은 외려 해를 거듭할수록 흥성하고 있었다. 근래 의술을 배우고자 건너오는 청국인들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유학생들이 찾아오는 것은 그 한 가지 원인이었다.

“그 편산인지 무언지 하는 왜인도 지금 저 안에 있는 것이겠지요?”

“아마 그러겠지. 양근까지 찾아가 소란을 일으킨 지도 벌써 두어 순(旬)은 족히 되었으니 돌아오지 아니하고서 어디 발붙이고 있겠는가.”

그렇게 학당 올라가는 언덕길 기슭에 서서 애매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그럭저럭 구색 갖추어가는 학원가 풍경에 이용익의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종종 지나가는 콧대 높은 양인은 물론, 변발 늘어뜨린 청국인 여기, 혹자는 단발머리, 혹자는 그 이상한 일본식 상투 튼 일본인 저기.

물론 북경에도, 상해에도, 저 남쪽 향항(홍콩)에도 넘쳐나는 것이 코쟁이 의생이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청국에 와 있는 양의에게서 술기 배우러 조선의 의생들이 배 타고 건너가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드는 일이었다. 허나 하필 조선 땅의 양의들이 신통하다 하였으므로 굳이 바다 건너로 유학 오는 청국인이 적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그에 따라 – 배우려는 염원보다는 그에 상응하는 금은에 끌려 - 가르치는 이도 하나둘씩 이곳 인천으로 건너오게 된 것이다.

그 곡절은 굳이 따지자면 의외로 근래 천하정세와 맞닿아 있었는데, 마신이가 한성에서 총격을 당하고서 죽다 살아난 것이, 입과 입을 오가면서 점점 부풀어 올라 아예 칠공구규에서 토혈하던 것을 영약 한 첩으로 고쳐내었다 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동삼성의 공친왕을 보좌하여 요새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물론 무릎이 으스러졌으니 정말로 뛰지는 못하지만) 하던 마신이가 들으면 족히 한 다경은 포복절도할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 건너오는 이들은 순수하게 배우고자 오는 이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요코하마로 가기는 뭐하지만 그렇다고 사츠마나 조슈 가기도 뭐 하였던 애매한 번의 학도들이 그 중 다수를 이루었다.

근래 조선의 뒤를 따라 그들 말로 의회를 두고, 전직 쇼군 요시노부를 필두로 하나둘씩 동국의 영주들이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우선 겉으로 보이는 동서의 분단은 그럭저럭 봉합이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하였기에 이면에서는 더욱 경계하고 편 가르는 것이 심해져, 이도저도 아닌 번의 사람들은 괴로워지는 측면이 있던 것이다.

그런 사정 알 길도,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이용익은 그저 낯선 풍모의 사람들 구경에 빠져있을 뿐이었지만.

“아, 저기들 나오는군.”

아무래도 외지에 나오게 되면 동포끼리 뭉치는 것이 사람 습성일진대, 상투 튼 조선 사람들 사이에 단발머리 일본인이 한 명 끼어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학당 대문 나서는 저 자가 편산이 틀림없었다.

“자, 가서 운현궁으로 정중히 청하여 볼까.”

곧장 다가가서 용건을 꺼냈다. 웬 낯선 이들이 다가오니 저의 그 공사론(公社論, 사회주의) 공부 모임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 단정하였는지, 곰살맞게 맞이하였다.

“안녕들 하신지요? 혹 원하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유창한 조선말이 나왔지만, 그런 놀음에 굳이 어울려줄 이유가 없는 김가진은 곧장 용건으로 들어갔다.

“공안서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공안서 세 글자 얘기가 나오자, 편산을 에워싼 다른 조선인들의 표정이 굳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정작 그 말을 하는 김가진은 공안서가 아니라 그 윗선에서 움직이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저희는 그저 공부하는 학생들입니다만... 물론 혐의가 있다면야 마땅히 밝혀야 하겠지만, 우선 무슨 곡절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당황한 편산 대신 그의 벗인 듯한 땅딸막한 젊은이가 옆에서 나섰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저희 공안서의 높으신 분께서, 흠, 선생들께서 평소 의론하고 궁구하는 바를 전해 들으시고는 굉장히 훌륭하다 평하시면서, 그 좌장 되는 이를 모셔다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자 편산과 그 젊은이 둘이서 잠시 무어라 소곤대더니, 곧 단서를 달아 승낙하였다.

“좋습니다. 저희 모임은 오직 배움으로써 세상에 보탬 되고자 하고 있으니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지요. 다만 국외인으로서 함부로 다른 나라의 고관을 만난다 하면 혹 부지불식간에 결례를 범할까 저어되니...”

말꼬리 흐리는 모양새로 보니 운현궁이 뒤에 있는 것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곧장 예의 땅딸보가 말을 받았다.

“그러니저도 대동하여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편산 아우와 더불어 대동사(大同社)에서 교학(敎學) 겸하고 있는 전봉준(全琫準)이라 합니다.”

물론 고작 한 사람이 같이 간다 하여 무슨 보탬이 되겠냐만, 그들로서는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셈이었으니 동무가 하나라도 있는 편이 위안이 되었으리라.

운현궁 도착할 즈음에는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

“노량진에서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으니, 합하께서도 이미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얼른 드시지요.”

김가진의 채근에 여전히 얼떨떨한 두 사람이 노안당 섬돌을 올랐다.

최근 나라에서 과거의 제도를 혁파하기로 하면서, 학풍을 일신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기에 필히 자강사 같은 학사들이 문제가 되었으리라 여기고 있던 전봉준과 가타야마였다. 한편으로는 고소하기도 하였지만, 당장 얼마 전 양근까지 찾아가 주먹질로 마무리하고 온 가타야마의 경우처럼 저들 대동사도 파 보면 말끔한 것은 아니었으니 불안하기도 하였다.

물론 나라 안에 버젓이 공산당이라 이름한 정당이 있고, 그 정당의 실질적인 영수가 다름 아닌 흥선대원군이었으므로, 왜 마륵(마르크스) 선생의 글을 공부하느냐며 책잡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 대신, 오경석을 위시한 공산당 중진들이 옛 코뮌 사람들의 글을 ‘보완’하여 새로 낸 주해(注解)를 내버려두고 망령된 사견으로 무민(誣民)하는 글을 퍼뜨렸다며 죄주는 것은 족히 하고도 남음직하였다.

대동사 사람들로서도 할 말은 있었는데, 그들이 직접 경일학당에서 배운 법국 말로 『공산당 선언』, 그리고 내용 난해하여 아직 옮긴 이 없던 『자본론』 같은 것들을 읽어보니, 만민공산당이 내놓은 판본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던 것이었다.

당장 『공산당 선언』만 하더라도,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하는 마지막 줄을 이렇게 옮겨놓지 않았던가.

‘... 이처럼 위정(爲政)의 도가 어그러지면, 잃을 것은 쇠고랑뿐인 가련한 백성들이 천하를 뒤엎고자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만국의 빈궁한 이들이 장차 함께 반민(叛民)이 될 것이니, 천하의 대란(大亂)이 일어날 근원은 여기에 있도다!’

본 문구의 통렬한 비판은 절절한 애민의 표현으로 바꾸어 놓고,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부분은 아예 대원군 입맛에 맞게 윤색을 하는 식이었다. 그러니 조선 땅 선비들은 (반절은 오경석이 새로 쓰다시피 한) 졸지에 곤궁한 백성과 천하의 우환을 근심하는 격이 된 이 글을 보고 대서 땅에도 참선비가 있다며 훌륭하게 여기고, 동양인들이 무어라 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서양인들은 그렇게 새로 쓰다시피 한 글에서도 충분히 공사론 – 혹은, 가타야마가 저들 말로 부르는 표현으로는 사회주의 – 의 색깔이 드러난다 여겼으므로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코뮌 사람들이 프티 파리에 남아있던 시절에는 이를 알고서 공론화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만큼 사회주의에 깊이 빠진 이들은 이미 본국으로 돌아갔거니와, 설령 이 일의 전모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마르크스에게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기에, 그 수염쟁이 프로이센인이 기함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라도 은폐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니 본말이 전도되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전봉준이나 가타야마 같은 이들이 직접 나서서, 대동사 같은 모임 꾸려서 그 본의를 설파하고 있는 것은, 따져보면 지금의 만민공산당의 기틀을 뒤흔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결국 천하의 나라들이 나아갈 방향은 공산 두 글자의 본뜻을 살리는 데 있다 여기는 두 사람이었기에 저들 하던 일을 묵묵히 해 나갔다.

그러하였으니, 난데없이 공안서에서 나왔다며 그 김 모라는 자가 찾아왔을 때 철렁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이 속으로 떨고 있든,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냐며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든, 제물포서 붙잡아 이곳 운현궁에 데려다놓은 것으로 소임은 다하였던 김가진으로서는 신경 쓸 연유 없던 것이라, 무심하게 인기척하고 방 안의 대원군에게 왜인 편산이 경일학당의 같은 학도인 전봉준이라는 자와 함께 대령하였음을 고하였다.

“아, 어서들 오게.”

어울리지 않는 환대에 두 사람은 절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래, 그 전봉준이라 하였는가. 자네 얘기는 제대로 듣지 못하였지만, 편산 자네는 일전에 양근에서의 일도 있고 하여 대략 사정을 수소문해보았네.

들리는 말로는, 만민공산당의 힘쓰는 일을 마뜩치 않게 여기고 있다 들었는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조선 속담도 있지 않던가. 가타야마가 각오 다지고서 답하였다.

“예, 합하. 들으신 바가 모두 맞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잘못이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하겠습니까?”

비슷한 각오를 하였던 전봉준도 맞장구를 쳤다.

”지금 만민공산당은 마르크스 선생의 글을 사당(私黨)으로서의 이득을 위해 취장절구하고 있으니 결코 온당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저희 대동사에서는 이를 바로잡고자 미약한 힘이나마 모았던 것입니다.”

그 옛날 장동 김문 위세를 하룻밤 환국으로 무너뜨리고 익문사를 팔도에 풀었던 대원군의 무서움을 전해 듣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알고서도 이렇게 대드는 것일까? 전자라면 모르겠으되 후자라면 그 기개는 훌륭하다 할 일이었다.

어디 가지 않은 대원군의 눈썰미는 후자일 공산이 높다는 직감을 전하고 있었다. 일전에 입궐하였을 때 주상에게 아뢰었던 그의 큰 계획에는 적임자가 아니겠는가?

“하하, 좋은 기개일세. 젊었을 때는 그러기도 하여야지. 자, 그런데 생각들 해보게. 자네들이 마씨의 설을 좇는 까닭은 무엇인가?”

“천하 만민을 고루 태평케 할 방도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해본 답변인지 이번에는 가타야마가 능숙하게 맞받았다. 어쩌면 한 번 각오를 다졌으니 끝장을 보자는 심산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면 꼭 마씨의 설이 아니더라도 만백성에게 이로운 도가 있다면 어찌 하겠는가?”

“마 선생이 논변하기를 그런 도는 설령 있다 하여도 허황되지 않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니, 당장 민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라면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도가 허황되지 않다면? 그때는 어찌할 텐가?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할 도를 어찌 마씨만 알고 우리는 모른다는 말인가?”

사문난적(斯文亂賊) 소리 듣는 옛적의 한 선비를 끌어오며 말하니, 대원군이 저들을 농으로 어르는 것은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는지 두 사람 모두 나름대로 생각에 빠진 듯하였다. 그러면 이미 반절쯤 찍어낸 나무와도 같았다.

“생각해보게. 지금 공산당이든 공사당(公社黨, 사회당)이든, 우리네처럼 당당하게 자리 차지하고서 국정에 목소리 내는 곳이 천하에 얼마나 있겠는가? 대서 땅의 사정이야 나보다 자네들이 더 잘 알 테지.”

그야 공산당이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세력 모은 당이 이름만 공산당으로 한 셈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마씨의 학설은 서책 안에 있고 우리 당은 지금 이곳 조선 땅에 서 있는데, 정녕 자네들이 백성을 이롭게 하고자 한다면 어디에 기대는 것이 더 합당하겠는가?

내 자네들 대동사 모임을 놓고 속히 폐하여라, 아니면 숨죽이고 있어라, 이런 말은 하지 않겠네. 마씨의 학설을 완전히 내팽개치라 하는 것도 아니야. 다만 머나먼 대서 땅의 한 서생이 하는 이야기는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우리 당이 하고자 하는 바에는 마음을 두지 않으니 그것이 아쉬울 뿐일세.”

울리는 바 있었는지, 편산에게서 돌아오는 말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합하께서 저희에게 바라시는 바는 무엇인지요?”

“별 건 아닐세. 원한다면 자네들 대동사 모임을 우리 당에서 도와주겠네. 저 화서학원 자강사가 하는 것처럼, 아니, 했던 것처럼, 서책도 내고, 논학회도 열고 할 수 있도록 말일세. 다만 예전처럼 마씨 한 사람만을 숭앙하지는 말고, 지금 있는 우리 당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마씨를 비롯해 고금의 여러 학설을 망라하여 제대로 된 공산론이든 공사론이든 펼쳐보자 이 말이야.”

말 마치니 문득 산바람 한 가닥 불어 창호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났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가라앉은 정적 덕분이리라.

“이 자리에서 결단하라는 것은 아닐세. 다만 이런 얘기를 내가 아닌 다른 이들로 하여금 유세케 하면 자네들이 의심하는 소지가 생길까 두려워 이렇게 불렀다네. 덕분에 기개 있는 젊은이들을 또 알게 되었으니 좋지 않은가? 하하.”

공산당의 폐해를 걱정하는 아들 주상에게, 이번에 권학하는 도리를 세워 서생들의 황망한 논변을 막은 것처럼, 아예 만민공산당만의 이론을 세워 훗날 성상이 걱정하는 것처럼 마씨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글과 말이 새어들어와 나라를 어지럽히는 화근이 되지 않게 만들 방도를 세우겠다며 장담한 대원군이었다.

‘배우고 때로 익히게끔 만드니, 어찌 즐겁지 않은가.’

이미 마음 흔들린 저들 두 사람이 언제고 자신의 뜻에 따를 것임을 직감한 대원군은, 학문으로써 장차 닥쳐올 화란을 미리 통어하니 참 훌륭하다며 은근슬쩍 자찬하는 마음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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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에서 『자본론』은 1부만 출간된 상태입니다. 불어로의 번역은 1872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산당 선언』과는 달리 코뮌 사람들이 조선으로 도피할 때 들고 갈 수 없었겠지요. 여담으로, 자본이라는 말은 우리가 아는 사업의 밑천이라는 뜻으로 이미 조선시대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사회’를 옮기기가 참 어려웠습니다만, 우선은 공사(公社)로 하였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일본 학자들의 골머리를 썩였던 단어지요.

이전에 잠시 언급되었던 동철의 설립 조건, 즉 조선과 청국 양쪽에 제철소를 설립하는 것이 다시 작중에서도 이야기되었는데요, 만주와의 연계를 노렸던 원 역사의 일본과는 달리, 여기서는 경의선을 통한 청 본토와의 경제적 교류가 중시되는 상황이기에 함경도 대신 황해도에 제철소가 먼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인프라의 측면에서도 황해도가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하고요.

가타야마 센과 더불어 전봉준도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1855년생이기 때문에 1859년생인 가타야마에게는 형이 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몰락한 양반의 후손인데, 본인의 술회에 따르면 동학에 입교한 것이 30대 전후였으므로 동학에 입교하기 전이지요. 물론 훗날 ‘충효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하려는 동학의 취지에 공감하였다고 밝혔으니, 종교적 열정보다는 정치적 목적의식이 더 강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동학(천도교)에 마음을 두기 전에 먼저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네요.

실제 역사에서도 그가 고부군에서 훈장으로 지내게 되기 전 잠깐 대원군의 식객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의 수많은 야심찬 젊은이들처럼, 그에게도 출세의 욕구가 없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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