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배우고 때로 익히면 (2)
옛날, 그러니까 박규수가 처음 저의 조부 박지원의 문집을 읽었을 때의 이야기니 정말 까마득한 옛적 이야기다. 그때 아직 철없던 그는, 어찌 이처럼 문재(文才) 가득하시고 재주가 빼어나신 조부께서 저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승을 뜨셨을까 하며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저 잘난 맛에 흠뻑 빠져있던 소년 시절의 그였기에, 조부에게서 총명함도 인정받고, 또 역시 (자신만큼) 지재 뛰어난 조부로부터 가르침도 받고 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이왕 회갑도 맞이하셨겠다, 고희는 물론 팔순까지 지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던 차에, 하루는 꿈에 정말 그림으로만 뵈었던 조부 연암이 나타났다. 그런데,
‘인석아. 나도 마음 같아서는 백세토록 살고 싶었다. 너희들에게 맡기고 가기가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이 말이다. 그런 속도 모르고서, 하여간 요즘 것들은...’
하면서 장난스레 면박 주는 것이 아닌가. 웃어른께 마음속으로나마 공경스럽지 못한 생각 품었음을 그제야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꿈에서 깬 뒤 어디 가서 말로 꺼내지도 아니하였다.
대원군의 말 듣고서 개화당 중진 집안들에 연통 돌려, 혹 무슨 학사니 학계(學契)니 하는 것에 자제가 끼어있지는 않은가 확인해보라 하였는데, 돌아오는 서신들을 보니 점입가경이라, 읽던 중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나라에서 국제의 일을 논할 무렵, 장차 개화당은 부국의 길을 찾는 당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선포하였던 박규수였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것은 박규수의 대에는 끝을 다 보지 못할 일이다. 허나 박규수 그보다 반절쯤 아래 세대라 할 수 있는 대원군과 김병학 형제쯤이면 벌써 그 끝에 살짝이나마 발 디뎌볼 심산은 품을 수 있을 것이요, 어윤중이나 김윤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 다음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다음을 노려 무엇하겠느냐? 그만큼 올라온 것도 천지신명과 열성조의 보우 아님이 없거늘!’
이렇게 호통치고자 하여도, 당장 금상 즉위 전 얼마나 국운이 쇠망하였는지 기억하지 못할 젊은이들 – 예컨대 금릉위(박영효) – 는 ‘그 무슨 말이냐. 이 나라 조선이 언제 그렇게 쇠하였던 적이 있었더냐’ 여기면서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면서 어설프게 서양 나라를 따라하다가 기껏 일으켜세운 나라를 도로 구렁텅이에 빠뜨릴 올가미를 스스로 놓을지도 모른다.
‘환재 선생께 삼가 글월 올립니다. (...) 보내주신 글을 받고 곧장 학원에 적을 올린 문중의 자제들을 수소문하였더니, 과연 학사에 몸담은 학도들이 적지 않았으며, 개중에는 실지로 서책을 발간하고 신보를 내는 일에 관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나이가 찬 뒤 학도가 아니라 훈도(訓導, 조교)로 있는 이들 중에도 그러한 예가 있었으니, 그저 민망하여 참으로 부끄러워하고, 또 미리 일깨워주심에 한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나 추궁하여 그 내막을 들어보니 비록 궁벽한 논의이기는 하나 우리 개화당의 당론으로 취할 바가 아예 없지는 아니하여, 감히 선생의 마음을 어지럽힐 각오 품고 이처럼 덧붙입니다.’
이런 류의 글이 어디 한미한 가문도 아니고, 요즈음 개화당의 동량을 이루는 여러 거족에서 속속 들어왔다. 저들은 말이 번지르르하지 그저 가산과 권세를 동시에 불릴 생각만 하고 있는데, 그 아들들이 어찌 그런 생각만 하느냐며 은근히 설득하니 역으로 넘어가 그럴듯하게 여기는 것이리라.
물론 개중에는 장동 김문의 김병시처럼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는지 자신이 생각한 비평을 함께 적어 보낸 이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그저 ‘논의가 심오하다’ 정도의 단평에 그쳤다. 지금 이 서간을 보낸 민치상도 그렇지 않던가.
‘이하는 선생께 올려달라 청한 바를 옮긴 것입니다.
무릇 동녘 땅은 일찍이 성인의 교화 있어 도(道)가 밝혀지니 인의와 예악이 갖추어졌고, 서쪽 땅은 성인 없이 서로 다투는 여러 백성들만 있어 그 기(器)의 정예함으로 위엄을 삼아 절로 기물의 정교함을 얻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순의 대에도 일찍이 선기옥형(璇璣玉衡, 천문 관측기구)을 창제하였으며, 대우(大禹)도 낙수(洛水) 다스려 하도(河圖)를 얻었으니 결코 옛 성현이 기(器)를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동녘에서는 정학의 아름다움은 이어졌을지언정 그러한 도리는 흐려졌습니다.’
박규수가 한창 개화재상으로 일하던 시절, 양이의 기물을 들여온다는 소리만 꺼내도 기겁하는 자들이 어느 동리를 가든 차고 넘쳤던 때가 있었다. 물론 뭘 알고서 그렇게 반대하는 이들은 한없이 적고, 그저 낯선 것이 싫어서, 아니면 고을의 제반사에서 저의 몫이 줄어들까봐 우려하여 반대부터 하고 보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럴 때면 저렇게 그럴듯한 전거를 끌어와 설득하곤 하였으니, 통리아문의 주요 업무 중 하나기도 하였다. 그리하면 어쨌든 의식 있는 선비라면 나라의 궁벽함을 알고는 있었으므로,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며 잠시 물러나고, 지각없는 겉치레 서생들은 뭔가 엄청난 것을 깨달았다는 양 뒤로 빠지고는 하였다.
그러니 사문(斯文)의 밝은 도를 지키면서 양이의 기물을 들여올 수 있다는 것은, 전후를 면밀히 따져보면 유학을 아예 버리지는 않겠다 하면서 내세우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그 이래 복잡기괴한 천하의 움직임 속에서 한 번도 핑계의 밑바닥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그런 내막 모르는 젊은이들은 그저 저의 말이 처음부터 옳았던 것처럼, 즉 처음부터 성현의 가르침 안에 양이의 학문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모두 배태되어 있었다 여기곤 하는 것이었다.
‘한편 서녘 학문의 뿌리를 상고하면, 대개 희랍 제가(諸家)와 야소(耶蘇)의 말을 넘지 않습니다. 그 뜻을 살피면 대개 번잡하여 가감할 바가 많으나, 그 본의는 곧 인의에 있으므로 얼핏 우리의 도학과도 닮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사적을 살펴보면 당초의 아름다움은 흐려지고 오직 나라를 나누고 서로 싸워 해치는 데 온 힘을 다하였으니, 비록 그 가운데서 온갖 재주가 나오고 물산이 풍족해졌으나 풍속은 더욱 각박해졌습니다.
그런데 천지의 운수가 크게 돌아 이제 동쪽 땅에서도 가장 동쪽인 우리 강역에 아름다운 조화가 갖추어졌습니다. 옛 법을 지키되 고수하지 않고, 새 문물을 들여오되 맹종하지 않으니, 이러한 형국은 작금 천지에 오직 이곳 청구(靑丘)에만 있는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였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뒤의 첨언이 섬뜩하였다.
‘다른 이웃 나라들은 아직 그러한 도를 얻지 못하여 절로 쇠미해지고, 멀리 서양 나라들은 오직 저들의 화포와 전함으로 자그마한 이익을 놓고 다툴 궁리에만 힘쓰고 있으니, 장차 동양의 병폐는 스스로 나라가 무너지는 데 있을 것이요, 서양의 병폐는 저들끼리 싸워 마침내 함께 망하는 데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마땅히 먼저 도와 기를 모두 얻은 우리가 나서서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덕한 나라들은 자신의 실덕을 모르니, 오히려 우리를 경계하고 도리어 억누르려 할 것입니다. 이런 나라를 힘으로라도 깨우치지 않는다면, 어찌 왕업(王業)을 모두 이루었다 하겠습니까?
인군(人君)이 죄지은 자에게 벌을 내림은 오직 풍교(風敎)를 밝히고자 하는 뜻에서 나오는 것이니, 결코 인명을 해치는 것을 기쁘게 여겨서가 아닙니다. 흥국부도(興國扶道)의 대업도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 무슨 허황된 소리이더냐!”
학원에서 훈도로 있는 저의 아들 영조(崔榮祚)가 보내온 글을 보고서 경악한 최익현의 한 마디였다. 그 글을 직접 가져온 – 중요한 편지는 우정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주고받음이 반가의 예의로 굳어지고 있었다 – 둘째아들 영학(崔永學)은 그저 고개 숙이고 있을 뿐.
근래 듣기로 여러 벌열의 자제들이 저의 집안 어른들도 모르게 이런저런 모임을 꾸려서 나랏일을 사사롭게 논하던 중 크게 곤경에 처했다 들었다. 그나마 그의 아들들은 저들끼리 학원에서 모임을 만들면서 늦게나마 저들의 작당한 사실을 고하기는 하였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곳이 어떤 곳이냐. 여느 서원도, 향교도 아니다. 이 아비의 스승께서 쓰시던 아호를 딴 학원이란 말이다. 그런 곳에서 어찌 그처럼 편벽한 잡설을 내어놓을 작당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아무리 서양 물 (조선 샘물만 못했다)을 많이 먹었다지만 최익현은 여전히 골수 선비라, 감히 가친 말씀하시는데 아들이 토를 달 만큼 가풍이 가볍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듣는 영학의 목젖이 불끈대는 것이, 필히 대꾸할 말이 턱밑까지 올라온 듯하였다.
“후. 그래,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거라.”
“아버님, 저희 무리가 이러한 설을 가볍게 세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성상께서 밝고도 어진 정사를 펼치신다 하여도, 지난 번 아라사가 외압을 가한 것처럼 나라 밖에서 우리를 노리는 무리들을 모두 제어하기 전까지는 참된 화평과 복락이 있기 어려울 것이라, 동무를 모아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나온 것입니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으련만.
“그래, 너희 말대로 우리 조선이 정학의 아름다움과 기물의 빼어남을 모두 얻었다 치자. 그렇다 한들 우리의 강역은 삼천리에 지나지 않고, 백성의 수는 대국은커녕 이웃 일본보다도 적다. 무릇 예의를 아는 나라라면 이를 알고 스스로 만족하여야지, 너희 말대로 날뛴다면 그것이 어찌 군자의 나라겠느냐?”
“옛적 주(周)는 백리지방(百里之邦)으로 분연히 일어나 천하를 호령하였습니다. 우리가 인의를 갖추고 병기의 위엄을 완비한다면, 민총(民總, 호적)을 불림은 하루아침의 일이요 강역을 넓힘은 달포의 일이 될 것입니다. 한 번 그렇게 세를 얻으면, 마치 눈덩이 굴러가듯 누구도 멈출 수 없을 것이니 장차 천하 만방에 널리 교화를 베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자신이야 스승이 출사를 권유하였기에 여기까지 왔다지만, 그래도 자식들에게는 끝까지 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고자, 배움을 원껏 궁구하고 나오라며 학원에 들이밀었다. 혹 법국 유학을 가고 싶으면, 아직 그곳에 아는 이들 남아있으니 말만 하라고도 얘기해두었다.
그런데 학문을 깊게 다지기는커녕 어설픈 식견으로 세상을 바꾸어보겠다며 설치고 있으니, 따지고 따지자면 자신의 부덕 아닌가. 차라리 배운 것이 도학뿐이라면 고루할지언정 뭔가를 바꾸겠다며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또 서양 학문만이 머릿속을 점유하고 있다면, 그저 조선 땅의 묵은 인습을 바꿀 생각만 하였을 터. 둘 다 모두 애매하게만 배워놓으니 이런 결론에 당도한 것 아니겠는가.
‘흥국부도(興國扶道)’라! 나라를 일으켜 도를 돕는다 하였으니 멋모르는 우활한 선비들은 좋다고 따르고, 도리의 일은 몰라도 저의 곳간 채우는 일에는 밝은 명문거족들은 그럴듯한 핑계라 여겨 앞에 내세울 만하였다.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결국 그가 파리에 머물던 시절 듣고 보았던 케케묵은 확장주의 아닌가. (전우의 말을 들어보니, 근래 영국에서는 아예 ‘임페리얼리즘(제국주의)’이라 따로 말을 만들었다 하는데 꽤 그럴듯한 표현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저들 믿는 야소나 살갗의 빛깔 대신 고매한 정학의 도의를 내세우는 것 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의 아들들이 그런 꼭두각시놀음의 앞잡이 되는 것은 감내할 수 없었다.
“물론 작금의 천하가 무도하지 않으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선뜻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 안에도 나름의 의리가 있고, 또 그 안에 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야. 이를 모두 살피지 않고서 나만 옳다고 한다면, 이 어찌 정도라 하겠느냐? 그저 삿된 욕심 차리는 구실이 될 뿐이다.
이 아비가 할 말은 이뿐이니, 너의 형에게도 돌아가 잘 전하도록 하거라.”
“내 가배라도 한 잔 내오게 하겠소.”
결국 밤새도록 영학에게 저의 형 몫까지 얹어서 훈계를 하느라, 그러잖아도 피로에 젖었던 최익현이 오늘따라 더욱 피로해보임을 눈치 챈 귀남이었다.
군밤 장사철이 한 해에 석 달이라 치면, 귀남이 지금껏 조선에 와서 보낸 군밤 철도 족히 쉰 달은 넘겼을 것이다. 처음에야 전례 없던 일이라 황송해하던 신료들도, 요새는 어제 군밤의 남발을 내심 부담스럽게 여기고는 하는 듯했다.
물론 신료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본인이 고신(告身, 직첩) 반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주상의 군밤이 질렸습니다’ 하고 곧이곧대로 토설할 리는 없겠지만, 군밤 굽는 것만큼이나 그 군밤 받아가는 손님들 낯빛도 오래 살핀 귀남이 어찌 모르겠는가.
더구나 요새는 밀가루도, 설탕도 쉬이 구할 수 있으니 군밤 말고도 내려줄 감미로운 먹거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귀남 생각에는 여전히 저의 군밤이 훨씬 맛있었고, 아마 객관적으로 따지면 그렇겠지만, 받는 신하들 입장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니, ‘어제’ 먹거리와 ‘어사(御賜, 임금이 내림)’ 먹거리는 받을 때의 무게 자체가 달랐다.
그리하여 요새 귀남은 종종 원기 보양하라는 뜻으로 이것저것 달달한 먹거리들을 신료에게 챙겨주고는 하였다. 한창 기운 없어하던 중전의 군것질거리 챙기느라 주전부리 실력만 오른 숙수들을 채근하면 그럴듯한 물건이 나오기도 하였다. (얼마 전에는 한 숙수가 우연히 전생의 자판기 커피 맛을 내는 데 성공한바, 두둑하게 포상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감히 성려에 누를 끼쳤으니 죄가 크다 하겠습니다.”
“암만 죄가 크다 하여도 지금 경의 고생스러움만 하겠소.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최익현이 고생을 하는 까닭은 이러하였다.
마침 나랏돈 궁한 판에, 신설한 국제를 따라 아문과 기존 육조를 의정부 아래로 합치자는 논의는 참으로 반가운 것이었다. 물론 사람이 크게 빠지지는 않으니 나가는 국록은 그대로겠지만, 관아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만 하여도 절약되는 수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만큼 온갖 세세한 조정에 수공이 들어간다는 점이었는데, 의정부 아래 육조와 통리아문 아래 12사(司)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업무는 그대로 소관 하에 두고, 저 업무는 넘기고 해야 하는데, 벼슬하는 사람이 늘 그렇듯 (실제로는 일(事)의 일(一)자도 싫어하지만) 저의 소관에서 일을 빼어가는 것은 꺼리기 마련이었다.
자연히 싸움이 붙게 되고, 그 사이에서 중재하는 것은 육조의 옛 관헌들도 저의 편으로 여기고 아문의 새 관료들도 저들 사정 알아준다 여기는 최익현 뿐이었다. 그러니 요새 매일 숙직하다시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던 차에 오랜만에 찾아와서 그런 소리를 늘어놓았으니, 최영조와 영학 형제는 뜻하지 않게 불효를 저지른 셈이었다.
“헌데 지금 그대를 보니 그저 아문과 육조를 합하는 일로만 심신이 곤한 것은 아닌 듯하구려. 혹 그대도 이번 학사의 일 때문에 마음쓸 일이 있는 것이오?”
어찌 거짓을 고하랴. 저자에서 군밤장수 노릇 하다 보면 절로 그리 되는 것인지, 아직 수염도 다 나지 않았을 적부터 묘하게 정곡을 찌르는 재주 있으신 주상이다. 더구나 그 옆에 운현궁이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마음고생하는 사정을 최대한 줄이고 줄여 간략하게 아뢰었다.
“허어. 학도들이 배우고 익히는 데 마음을 기울이지는 못할망정 그러한 잡설로써 일시의 즐거움을 얻으려 한다니 안타까운 일이오.”
학교에 갔으면 공부를 해야지, 대관절 무슨 모임이니 뭐니 하는 것은 왜 만든다는 말인가. 물론 데모라도 하는 것이 술 마시고 새벽에 골목 한 구석에서 돗자리 시늉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지금 인재 한 명이 아쉬운 시점에서 그렇게 동아리 만들고 이런저런 소란 일으키는 것은 귀남의 마음에는 영 들지 않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맞는 소리인 듯한 – 정확히는 그의 전생에 종종 들었던 듯한 – 풍월 읊는 자들은 나았다. 만악의 화근 공산당 아래에서 작당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얘기해봐야 무엇하겠는가.
“모두 저희 서생들이 용렬하여, 부자의 도로써 모두 보듬지 못하니 생기는 폐단 아니겠습니까. 성상께서 교학의 풍을 드높이신 지 오래건만 아직도 그리하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음. 저 학도들이 그러니까 배움이 깊지 못하여 외려 날뛴다, 그런 말이오?”
귀남이 생각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이 학생이어도 그럴 것 같다 – 물론 어디까지나 실제 경험이 없으니 지레짐작이었지만 – 싶었다. 물론 최익현 같은 천생 서생이야 배움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여기겠지만, 결국 그의 세상에서도 대개 학교를 나오는 이유는 직장을 얻기 위함이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도학의 배움과 바깥세상을 보는 식견이 일천하여 그런 것이니,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있으나 그 정도를 잃어 치우치고야 만 것이라 하겠습니다. 도학으로 말하자면 선정(先正)의 말씀이 쌓이고 쌓여 함부로 잡설을 내놓을 수 없지만, 양학(洋學)은 또 그렇지 않으니 얕은 배움으로 이런 설도, 저런 설도 지어서 퍼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흠, 그러면 배움의 길로 돌아가게 만들면 우선은 해결될 일이겠구려.”
최익현의 말을 듣고 보니, 떠오르는 방도가 하나 있었다. 배울 여건 모두 마련해주었더니 헛바람 들어간 소리를 하는 서생들이 살짝 얄밉기도 하여, 귀남은 이렇게 하교하였다.
“내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과거가 너무 쉬워서 그런 것이 있을 듯하오. 성현의 말씀뿐 아니라 시무의 대책들, 양이의 학문, 그리고, 흠. 아예 산학(算學)까지 넣는다면, 벼슬을 위해 공부하던 이들은 다시 배움의 길로 돌아가고, 그들이 양학을 배워 통달한다면 그대가 이른 것처럼 얕은 배움으로 세간을 어지럽히는 무리도 스스로 삼가게 되지 않겠소?”
새로 세운 국제에서도 임금이 직접 법령을 발의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비록 상참이나 윤대에서 내린 하교는 아니었지만 곧장 이러이러한 윤음 내렸다 하는 소식은 참의원으로도 퍼지고, 학원으로도 퍼졌으며, 운현궁까지도 들어갔다.
물론 그렇게 학문 통달한 이들이 벼슬길 나아가지 않고 다시 저들이 마음대로 내놓은 학설을 들고 와 떠들어댄다면 다시 나라의 골칫거리가 되겠지만, 우선 그렇게 되기까지의 시일은 벌어둔 셈이었으니, 아무리 낮추어 평한다 하더라도 고식(姑息)은 얻은 셈이었다.
“옳거니! 그리하면 되겠구나!”
학원 쪽의 근심이 그렇게 잦아들 계기를 얻었다는 소식 들은 대원군이, 공산당의 일에 있어서도 같은 이치로 해결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무릎 탁 친 것은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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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교수(敎授)는 그 연원이 오래된 말로, 일본에서 들어온 번역어가 아닙니다. 서울 내의 사학(四學)에 교수를 두고, 후에는 향교에도 각 1인씩 교수를 두도록 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 반면 오늘날로 따지면 조교수 정도에 해당할 훈도의 경우 우리 일상어에서 거의 사라졌지요. 지방 향교의 기준으로 교수는 문과 급제자, 훈도는 생원·진사를 각각 자격으로 삼았습니다만, 이후 향교가 유명무실해지면서 그런 구분 역시 흐려졌습니다.
조선의 과거제는 순기능만큼이나 역기능도 많이 있었지요. 흔히 잦은 부정을 그 폐단으로 인식하는데, 물론 그것도 있었지만 의외로 지위가 높지 않은 응시생들의 급제율이 조선조 내내 일정 이상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을 보면 결코 치명적인 문제점은 아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필요한 인재를 필요한 만큼 얻어낼 수 없다는 데 있었지요. 시골의 유지나 부농쯤 되어도 적당히 뇌물과 부정행위로 생원·선달 정도까지는 쉽게 올라갈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과거 급제자가 지나치게 양산되어 결국 과거와 실제 관직생활이 유리되는 폐단이 생겼습니다.
특히 고종 연간 초에는 왕실의 위엄 강화를 위해 각양각색의 이유로 부정기 시험을 치렀고, 대원군은 숫제 선파(璿派, 왕실)에 대한 특별시험을 상설화하여 친위세력 양성을 도모하기까지 했습니다. 조선 역사상 최연소 급제자(이건창, 13세)와 최고령 급제자(정순교, 85세)가 모두 고종 연간에 나왔던 것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조선의 지식인들 역시 이런 폐단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유형원부터 시작해서 (조금 더 거슬러올라가면 조광조의 현량과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학자들이 다들 과거제도의 혁파를 주장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지요. 과거제와 별도의 선발 제도를 양립하는 안부터, 아예 과거제도를 전면 폐지하는 안까지 다양한 방안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적으로, 근대적인 관리 임용시험보다는 오히려 언뜻 보기에 더 원시적으로 보이는 천거제를 대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과거제 등장 전 중국에서 시행하였던 천거제가 명확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았기에, 천거를 받아 등용된 인재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를 천거한 관리도 처벌받는 연좌제 등을 통해 이를 보완한다는 발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산림에 대한 별직 제수를 제외하면 이러한 천거제도가 주류를 이룬 적은 없었습니다만 (조선 후기의 향천법鄕薦法 등, 제도적 시도는 꾸준히 있었습니다.), 과거제 대안으로서의 천거제에 대한 꾸준한 선망은 개화기까지 이어졌습니다. 훗날 유길준, 박영효 등은 여기에 서양식 지방자치제를 결합해 현회제 (조선식 향회와 근대적 지방자치단체 의회의 중간쯤 되는 제도입니다), 의정대신 천거제 등을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전면 폐지되면서 제정된 인사 관련 법제인 전고국조례(銓考局條例)와 선거조례(選擧條例, 여기서 선거는 우리가 아는 그 선거가 아니라, 천거와 비슷한 뜻입니다.) 등에서는 근대적 관료시험과 추천제가 혼합된 양태를 인재 선발 방식으로 명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사제도의 기틀은 갖추어놓았지만 정작 실제 시행에 필요한 규정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고, 마침내 10년이 지난 1905년에야 일본을 모방하여 보통문관시험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연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