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배우고 때로 익히면 (1)
천지간에 일찍이 없던 조화가 조선 팔도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도 반올림하면 어언 스무 해째다.
성세에는 인군이 홀로 힘쓰고 난세에는 뭇 백성이 고루 고난을 겪지만, 둘을 오가는 그 사이의 시기에는 가운데 낀 벼슬아치들이 고생하기 마련이었다.
허나 그것은 성상 전하와 운현궁, 참의원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경직(京職) 이야기지, 외직(外職) 나와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양근 군수 박선양(朴宣陽)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요새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국제의 일에 따라 내정을 뜯어고치면서 팔도의 부·군·현을 장차 크게 정리한다 하였다. 종사 이어진 지 근 오백 년을 거치며 군현의 경계가 난삽해져, 붙어있는 마을인데 하나는 이 고을, 다른 하나는 치소가 족히 백 리는 떨어진 다른 고을. 이런 경우도 있었고, 또 고을은커녕 크기로 보면 읍 하나도 안 나올 현이 있는가 하면, 어지간한 도(道) 반절만한 고을도 있었다. 이를 모두 고친다 하니 결국 그 일 떨어지는 곳은 그 고을 관아였지만, 양근을 옆 지평(砥平)과 합치는 건은 아직 발의만 되고 실제 시행은 멀리 후순위로 밀려 있었다.
그뿐이랴? 요 근래 미곡과 토지의 값이 널뛰기를 하고 있으니 멀리 인천부처럼 공장 많은 동네는 고생하지만, 양근처럼 여전히 호구 대부분의 업이 농상(農桑)에 있는 곳은 해당이 없었으며, 또 경흥이나 의주, 동래처럼 국외인들이 많이 오가는 고을은 나라에서 항상 지켜보지만 양근은 거기에도 들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그가 있는 양근이 어떤 고을인가. 근래 들어 나라에 학풍 크게 일어난 곳이 여럿이지만 그 중 으뜸가는 곳이 화서학원 있는 이곳이다. 그들 비위만 맞추어주면 수령칠사(守令七事) 중 학교흥(學校興) 하나는 날로 이루어지는 것이 편리함의 또 다른 하나였다.
그런데 오늘 벌어진 일을 보니, 관할하는 고을 안에 학교가 있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서생이라면 공부를 해야지, 왜 하필 바다 건너 조선 땅에 와서 이 난리를 친다는 말인가?”
미간 꽉 조이고서 저의 앞에 대령한 그 편산(가타야마 센 片山 潜)이라는 왜인에게 묻자, 당당한 조선말로 답이 돌아왔다.
“저쪽이 먼저 제가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 분을 모욕하니, 배우는 사람으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올해 나이 약관이나 넘겼을까. 덩치는 작아도 꽤 기세는 당찼다. 물론 한껏 부어오른 왼쪽 눈가는 그 당찬 기세를 반절쯤 깎고 들어가는 면이 있었지만.
“배우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의의(疑義)를 빠짐없이 궁구하여 학문의 일가를 이루어야 하지 않소! 스승을 추앙한다면서 그 부족한 점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오히려 스승의 허물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니 어찌 그러고도 선비라 하겠는가!”
함께 동헌 마당에 불려와 있는, 입술 부르튼 젊은이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이름이 박은식(朴殷植)이라 했던가.
“그래, 말 잘했소. 선생이 먼저 『마씨잡변(馬氏雜辯)』 같은 글을 써서 돌리니 후학 자처하는 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
예전 같았더라면 어디 감히 원님 앞에서 저들끼리 고성 주고받느냐며 호통이라도 쳤겠지만, 나라에서 신법을 편 이후 (박선양 생각에는 폐단으로) 상감 한 분 외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도 사람 없다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한 명은 국외인이요, 한 명은 화서학원 원생이라. 무슨 연줄 있을지 모르니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자, 자. 둘 다 진정들 하고, 어쨌든 일의 경위를 살피면, 편산 네, 아니, 그대가 먼저 찾아온 것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일찍이 말씀드린 것처럼 소인은 인천 경일학당의 학도로 평소 마 선생(마르크스)의 글을 접하여 흠모하고 있었는데, 이곳 화서학원에서 학사(學社)를 꾸렸다는 소식을 듣고서 찾아왔습니다. 헌데 찾아와서 보니 그 모임에서 마 선생의 논의를 제대로 다루기는커녕 잡스럽게 공박하는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마 선생이라 하면, 공산당에서 존숭까지는 아니어도 그 말에 일리 있다 인정하는 서양 서생일 것이다. 정국에 밝다고는 할 수 없는 박선양도 알 정도면 꽤 유명하다 해야 할 것이었다.
그가 듣기로 그 마 선생의 궁구하는 바는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위정자를 폐하는 무도한 일이 어찌 일어나고 또 그것을 어찌 막을 것인가 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니, 비록 양이라지만 세태에 맞는 학문이기는 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깊이 들어가면 또 다른 얘기가 있겠지만, 그저 신보에 나오는 말 이상으로 파고들 생각은 없던 박선양이었으므로 그 정도려니 지레짐작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음, 이 자강사(自彊社)에서 논학회(論學會)를 열었는데 서로 다투다가 싸움이 붙어 끝내 주먹다짐까지 하게 되었는데, 박 유학이 먼저 손을 대었고.”
“예, 그것은 참입니다만, 먼저 목소리 높인 것은 저 편산입니다. 정녕 우리 모임에서 오가는 말에 반박할 구석이 있었다면 정교한 말과 정연한 이치를 들고 와야지, 막무가내로 우리는 그르고 저는 옳다 하니, 젊은 혈기에 순간 선비답지 못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둘 사이의 악감정과 무관하게, 자신이 뭔가 떳떳치 못한 일을 했다는 자각은 서로 있으니 다행이었다.
“흠흠. 본관이 생각하기에 이번 일은 그저 두 학생이 서로 배움의 열기가 지나쳐 그만 정도를 벗어난 것이라 하겠네. 물론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 서로 의론하고 의심되는 바를 나누어 해결함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상한(常漢)처럼 주먹질을 하면 체통이 어찌 되겠는가.
누가 사람을 해치려는 악의를 품고서 저지른 일도 아니니 국법을 상고하지는 않겠으나 부디 이 말을 마음에 새기기를 바라네.”
더 길게 다루어보아야 머리만 아파질 일이다. 말로는 학생의 열의를 존중해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빨리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허나 그러건 말건, 나가는 길에 다시 두 사람의 싸움에 불 붙으니 소리가 박선양 앉은 마루까지 전해왔다.
“흥, 우리 자강사 모임에 다시는 끼어들지 않는 편이 그대 부모께 효 다하는 길일 게요. 앞으로도 기억해두시오.”
“선생이야말로 못다한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 인천부 경일학당에 얼굴 비추기 바라오. 이 사람의 비슈(備州) 주먹에는 국경이 없으니.”
끝내 아전이 ‘자, 자, 여기서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하고 좋게좋게 달래어 동헌 밖으로 내보낼 때까지도 둘의 언쟁은 계속되어, 박선양의 머리를 더욱 지끈거리게 하였다.
“좌우지간 우리 자강사 사람들은 이번에 낸 『마씨잡변』에서 한 글자의 가감도 없이 그대로 나아가 그 학설의 허황됨을 밝힐 것인즉 각오하고 있으시오!”
“그대들이야말로 마 선생의 깊은 뜻을 체득하기는커녕 그 겉만 보고서 어설프게 헛발질하며 공박하는 시늉만 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소! 이 천하를 능히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일진대 낡은 관습과 견해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안쓰럽지 않은가!”
청운의 꿈 정도는 머릿속 다락방에 접어넣고서, 자신도 그냥 어디 서원이나 차릴까 생각하게 되는 박선양이었다. 물론 원님 노릇의 묘미가 송사 처리라지만, 앞으로 이런 송사가 더 생긴다고 하면 얼른 국제에 따라 사법원이 생겨서 대신 처리해주었으면 하게 되는 것이었다.
“공부하는 서생으로 다들 일신의 지재는 지니고 있을 터이니, 헛된 짓에 힘쓰지 않도록 일러 깨우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요 근래 저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니, 대책을 강구하여야겠다 싶어 운현궁 찾아온 오경석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대개 열기에 치우쳐 정교한 배움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위태함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주상이 자신의 꾀와 중전의 헌책한 바에 모두 귀를 기울여 아라사로 하여금 돈줄 막겠다 한 것을 철회하게 하였다지만, 한 번 무뎌진 나라 공상(工商)의 위세는 쉽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자신이 불 지핀 감정은 그 사이 할 일 없는 유학(幼學) 사이에서 열렬히 타올라,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서 무슨 학사 모임을 만드네, 학회를 열어 널리 배움을 나누겠네 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별 실없는 일도 다 하는구나 여기고서 그냥 지나갈 생각이었는데, 오경석이 보기에는 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대개 배움 짧은 젊은이들이 성현의 학문은 가볍게 여기고 오직 양이의 배움과 시학(時學)에만 힘쓰다 보니, 자칫 이단(異端)에 치우치지 않을까 걱정되는 바입니다.”
개화당의 창당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오경석이 하기에는 참 기묘한 말이었지만, 저들 학도들이 논한다는 소리가 경악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이단이라! 학풍을 일으키니 벌써 양묵(楊墨)의 폐단이 일어나는 것인가, 허허.”
물론 그 심각함을 알 리 없는 대원군은 여전히 대수롭잖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세상을 어지럽히는 폐해가 그 둘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우선 두 이단이 함께 일어난 것은 그 시절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대개 한쪽은 우리 당이 마씨의 글에서 이름을 따온 데 착안하여 그 이론을 끝까지 밀고나가야 한다 주장하고, 다른 쪽은 그것은 잡설이니 마음을 두면 아니 되며 오직 나라의 힘을 키워 다른 이들을 제압하여야 한다 하는데, 둘 다 의론이 지나쳐 자칫 무엄한 지경에 이를까 두려울 뿐입니다.”
“뭐, 그래보아야 벼슬도 못한 서생들 아닌가. 대개 그 때는 다들 허무맹랑한 잡설에 쉬이 빠지기 마련일세. 나 또한 그 또래일 때는 도참이나 풍수의 설이 그럴듯하다 여겼다네. 뭐, 요새는 저자의 이야기꾼들도 알 만큼 유명한 얘기기는 하다만.”
말은 맞는 말이요, 대원군 이야기도 사실이었다. 한창 불우하던 시절, 스승 추사의 가르침 외에 혹시 다른 길이 있을까 여기던 차에 부모를 연달아 여의었으니, 마음이 외줄 타며 까불거리는 광대마냥 요동쳤다. 그리하여 그의 말마따나 외도(外道)의 방술에 혹하여 여기저기 명당 찾아보러 얼마 안 되는 가산까지 헐었던 것이다.
결국 묫자리의 영험함인지, 아니면 정말 인생사가 새옹지마인 것인지, 그때 이후로 가난에 시달리다가 서화라도 팔아야겠다 싶어 김문에 손 벌린 일이 지금 여기까지 이어졌으니, 그 파란만장한 이야기의 한 토막이라도 족히 『축수편(逐睡篇)』 같은 야담집에 실릴 만한 것이었다.
환국 후 위세 얻은 뒤에도 그런 무엄한 말이 저자에 떠돈다 하여, 언제고 천하장안을 풀어 그런 말을 누설하였을 법한 자들의 입단속을 시킬까도 잠시 고민하였지만, 차라리 그렇게 자신과 성상을 둘러싸고서 신묘한 낭설이 떠도는 편이 외려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여겼기에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대개 그런 어지러운 이야기들은 힘으로 잡아 누르려 하면 더욱 요설(妖說) 되어 날뛰기 마련이라네. 물론 정말 사정이 급하다 하면 어떻게든 막아야 하겠지만, 지금 우리 종실이나 당이나 그 정도로 위태하지는 않잖나.”
“예, 이르시고자 하시는 뜻은 익히 알겠습니다. 허나 말씀하신 것처럼 사정이 언제고 급해질 수도 있으니, 마땅히 미리 안배하는 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경석이 그 정도까지 말하니, 적당히 손 써 두는 정도까지는 해 둠직하다 여긴 대원군이 잠시 생각하던 끝에 답을 내렸다.
“그 마씨의 설을 따른다는 자들은 우리 당을 따르다가 그쪽으로 흘러들어갔든, 우리가 비호해주리라 믿고서 그 아래에 숨어들었든 하였을 테지. 그리고 그 반대쪽에서 자강 운운하는 무리들은 아마 뒤에 개화당 당여들이 있을 것이고.
지금 미리 어떤 학원 원생들이 무슨 모임을 꾸렸는지 정도는 알아두어도 딱히 손해 볼 일은 아닐 듯하네. 내 개화당 쪽에는 사람을 풀어 수소문해볼 테니, 역매 자네가 이 마학(馬學) 하는 서생들은 알아보도록 하게나.”
“저 백송 보러 오신 것이 그 옛날 환국 이래로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몸이 쇠하고 나니 옛적 생각만 공연히 떠오르는군요.”
이제 내년이면 대원군도 회갑이고, 박규수는 고희(古稀) 훌쩍 넘긴 지 오래다. 물론 둘 다 스스로 부르기로만 뒷방 늙은이요, 실제로는 나라의 재상에 비할 만큼 여전히 중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만큼 사안이 가볍지 않아 이렇게 직접 찾아뵙게 되었소이다.”
그야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중동(仲冬) 엄동설한 속에서 직접 찾아왔겠는가. 오늘이야 날 푸근해 잠시 창호도 열어두어 마당의 백송 구경도 한다지만, 그래도 그 옛날 어명을 빌어 말 한 마디로 산림의 거유 이항로도 오라가라 하였던 대원군이 직접 찾아옴은 예삿일이 아닐 터.
“도성 벌열의 자제들이 저들끼리 모여 나랏일을 논하는 모임이 있다 들었소. 비단 그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요, 저 학원에도 있고, 심지어 조정의 젊은 신료들 중에도 사사로이 계(契)니 사(社)니 하는 것을 이루었다 하더이다.”
“허허, 대개 그 나이 또래에는 저의 지음(知音) 찾아 이리 모이고 저리 모이고 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다가 저의 재주로 일문(一門) 이루면 그치고, 또 정말 마음 맞는 이들끼리 계속 교유하고, 그렇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대원군 본인도 처음 오경석이 찾아왔을 때는 저런 반응이었다.
“그러나 나랏일을 논하는 것이 그저 경세치용의 바른 법도만을 의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직을 운운하고 천명을 거론하니, 자칫 지나쳐 화란의 뿌리가 될까 걱정이외다.”
아무리 국제로 못 박아 나랏일에 공론이 보탬이 되니 마음 닿는 대로 모여 뜻을 나누어도 된다고 하였다지만, 그래도 저런 일은 함부로 입 밖에 내어서는 아니 되는 것. 더구나 거족의 자제들이 모여서 그런 궁리를 하고 있다고 하면, 누가 보아도 좋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흉참한 일을 꾸몄다고 덮어씌우려면 언제든 덮어씌울 수도 있거니와, 정말 저들 잘난 줄만 알다 보면 실제로 그런 의론까지 닿을 수도 있는 일.
“실은 그래서, 음, 선생 몰래 내 부리는 이들을 시켜 어떤 이들이 그 모임에 드나드는지 알아보게 하였소이다. 뒤늦게나마 양해를 구하는 바요.”
하고서 조그만 수본(쪽지) 하나 내어주니, 곧장 사안의 심각함을 알게 되었다. 화서학원에 자강사라 하는 학도들 모임 생겨서 저들끼리 글과 돈을 모아 철 바뀔 때마다 신보도 내고, 그럴듯하게 서책도 내고 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런 모임이 이곳 개화당 자제들 사이까지 퍼졌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김옥균, 홍종우처럼 어차피 지금 조정에서 겉돌기 쉬운 이들이야 그렇다 쳐도, 아직 세상 영문 모를 금릉위(박영효)는 언제 박규수 저도 모르는 사이 저런 모임에 끼어들어단 말인가?
“위안이 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선생의 당은 나은 축에 드오. 개화당 아래에서는 나라 안 젊은이들만 끌어들이고 있지만, 찾아보았더니 공산당 그늘 아래는 더욱 심하였소.”
알고 보니 얼마 전 양근군에서 화서학원 서생과 드잡이질 했다던 편산이라는 작자부터 시작해, 공부하러 찾아온 왜인 학도들은 물론, 실제로 일본 땅에서 벼슬 하는 이들, 신보 내는 이들 등등이 줄줄이 엮여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한다는 말을 살펴보면, ‘지금 조선의 공산당은 무늬만 공산당이니, 속히 민중의 혁명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국경을 넘어 무산계급을 결집시키기 위한 연대의 방도를 마련하여야 한다’ 운운하였으니, ‘유자(儒者)의 짐을 지어 천하 만방에 참된 개화를 베풀어야 한다’ 정도에 그치는 개화당 쪽 젊은이들보다 더하면 더하였지 못하지는 않았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것이 이럴 때 쓰라 하여 있는 말씀은 아닐 터인데, 참 무서운 일입니다.”
“선생 말씀마따나 참 안타까운 일이오.”
졸지에 발각되어 버린 서생들에게도 과연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인가, 하면 조금 더 두고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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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행정구역 지도를 보면 유독 두드러지는 현상 중 하나가 군현의 어지러운 경계입니다. 월경지(당시 표현으로는 비입지飛入地)나 땅거스러미(당시 표현으로는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 등이 워낙 많았고, 그러다 보니 뜬금없이 바닷가에 월경지를 거느린 함경도 온성과 경원, 수령의 치소가 있는 곳보다 오히려 월경지가 더 넓었던 평안도 순천, 그리고 바다 건너 흑산도를 거느린 전라도 나주 등 악명 높은 사례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먼저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부곡, 소, 향 등의 특별 행정구역이 그대로 주현과의 연결을 유지한 채 조선으로 넘어온 경우, 여말선초의 혼란 속에 인구이동이 일어나 새 정착지가 본래의 고을 소속으로 들어간 경우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월경지를 더 만드는 경우도 있었는데, 근대 행정체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작중에 나온 것처럼 각 군현의 특산물 목록을 바꾸는 것보다 특산물이 나는 지역을 해당 군현에 편입시키는 것이 더 낫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조선 조정도 이런 불합리함을 아예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수취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 현상유지를 원하는 재지사족과 향리들의 은근한 저항 (특히 대읍에 소속된 것이 작고 궁벽한 읍에 소속되는 것보다 여러모로 유리하였습니다) 등으로 인해 끝내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지요.
이후 대한제국을 거치며 조금씩 우리에게 익숙한 행정구역의 구획이 이루어져 (일전에 어떤 독자분께서 지적해 주신 것처럼, ‘양평(양근+지평)’도 이때 만들어집니다), 일제강점기 초에 이르러서야 완성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다시 현지의 사정을 무시한 채 지도만 보고 경계를 획정하는 폐단이 발생하였지요.
한편 1870년대도 슬슬 끝에 달하게 되면서, 새로운 세대가 하나씩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박은식은 1859년생입니다. 가계가 한 번 영락하였다가 그 조부의 대에 겨우 다시 가세를 일으켰지만, 아버지가 서당 훈장이었을 정도로 썩 넉넉하거나 현달한 집안은 아니었지요. 본 역사에서는 지금쯤 남인의 학통을 이어받아 경기도 광주에서 공부에 힘쓰고 있을 때입니다. 이후 1885년에는 화서의 제자인 박문일을 스승으로 모시고 성리학을 배우게 되는데, 작중에서는 그것이 5년 당겨진 셈입니다. 과연 성리학을 제대로 배우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요.
한편, 작중에서 1872년에 사이온지 긴모치가 기념품으로 챙겨간 빨간 책 한 권의 나비효과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를 놓고 박은식과 주먹다짐을 한 가타야마 센은 일본의 초기 사회주의자 중 한 명입니다. 비록 일본 내에서는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지만,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움직였지요. 원 역사에서는 도쿄에서 식자공으로 호구하면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있을 때입니다만, 여기서는 어쩌다가 인천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다음 편에 조금 더 풀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에 한탄으로 나오는 후생가외는 본디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니, 뒤따르는 이들이 지금 우리만 못하리라고 어찌 여기겠는가 (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라는 공자의 말입니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안연을 보고 했다고 전해지는 구절이지요. 즉, 정말 후학들이 두렵다는 것이 아니라, 후학의 자질을 칭송하고 스스로 분발하여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정말 무슨 짓을 벌일까 두려운 젊은 학생들에게 하는 이야기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