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달을 가리는 구름 (3)
“도움이 되지 못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두 해 전 부임한 영국 공사 플렁켓(Francis Richard Plunkett)은 성품 온량하여 아문의 신료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았다. 허나 그런 이조차 ‘언제고 운현궁에 차나 한 잔 하러 오라’ 초대하여 도와줄 방도를 물었더니 이렇게 일언지하에 끊는 것이었다.
“허, 아라사가 우리를 이처럼 내모는데 귀국의 손길을 바랄 수 없다 하면, 곤란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구려.”
씁쓸한 대원군의 대꾸. 속에는 이대로 아라사가 기세 올리는 것을 방관할 테냐는 은근한 격장지계(激將之計)가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격장지계도 상대가 장수일 때나 쓸모가 있는 것.
아무리 플렁켓이 사람 좋다지만 거대한 대영제국 전체를 생각하면 한낱 서리에 지나지 않으니 그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
“물론 지금 조선의 경제가 어려움에 처한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지에 불 붙인 것이 비록 러시아의 비합리적인 요구라 할지라도, 화약은 이미 그 아래서 쌓이고 또 쌓였던 것이지요.
차라리 무역제재나 봉쇄로 귀국이 어려움에 처했더라면 우리 영국 역시 모든 힘을 다하겠지만, 이번 일은 러시아만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세상 모든 나라의 불경기에 우리 영국이 나서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동방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든 영국과 러시아를 갈라놓는 근본 원인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으므로, 두 나라의 신경전에서 기인한 이번 사태를 두 나라의 갈등을 이용해 풀겠다는 대원군의 심산이 완전히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다.
허나 애초에 이 아시아개발은행이라는 전례 드문 구상을 과감하게 밀어붙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극동의 곁가지라 할 수 있는 조선과 일본에서 러시아의 이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되, 군사적으로 무언가 헛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묶어놓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그러니 글래드스턴 같은 이상주의자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현실적인 외교관이라면 러시아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군대를 움직이는 대신 금융제재를 내세웠다는 데 고무되어, 마침내 불곰을 길들였다고 여길 법했다. 조선이 그 과정에서 조금 고생을 한다고 하면, 그저 개인의 양심에 따라 조금 고통스러워하고 말 일이다.
“그리고 귀국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이 정도 불경기는 사실 공황이라 하기도 어렵지요. 그 동안 호황 일변도였기에 충격이 클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렁켓의 말마따나, 지금의 공황은 이름 그대로 두려워하고 황망해하는(恐慌) 것이 더 컸다. 아무리 조선이 경제를 개방하고 산업화에 발 걷어붙이고 나섰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 근본은 농사짓는 데 있고, 개방된 경제도 사실 공장 짓는 밑천을 융통해오고 기기를 들여오는 것 외에는 대개 청국과 일본을 상대로 교역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고 있으니, 외국에서 들어오는 투자가 끊겼다 하여 당장 나라가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허나 이 정도로도, 지금까지 실패라는 것을 모르고 꾸준히 성공의 열매만 취해오던 조선의 풋내기 산업가와 자산가들에게는 심대한 충격이었다. 아시아개발은행에서 자금을 들여오든, 외국 공사관을 통해 알선 받은 쪽에서 들여오든, 어떻게든 빚 내어 밑천 마련하면 조만간 모두 갚을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단번에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그 환상에 기대어 방만하게 운영해오던 그들의 사업도, 이대로 불황이 계속되면 조만간 그리 될 터였다.
그러면 이들이 누구를 탓할까. 나라의 살림살이 (즉 저들의 살림살이)가 그럴듯해 보여도 실은 이처럼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셈이었는데, 이를 가벼이 넘기고서 국제 같은 고담준론에 빠져 있었다고 원망하는 것이었다.
처음 국제 반포되었을 때 멋모르고 환호하던 것도 잠깐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때마침 강상 어지럽히는 일이라며 초야에서 탄식하던 옛 서생들도 적지 않아, 그런 자들 몰려있는 시골 군현은 시골대로, 자산가들 많이 있는 대읍(大邑)은 대읍대로 민심이 썩 좋지 않았다.
“이번 일에서 아라사에게 직접 무어라 할 수는 없다니 그 사정은 대략 알겠소이다. 그러면 지난 번 노비제의 일에서 그리하였듯 잠시 그대 나라의 재보로써 우리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없겠소?”
아무리 오랜 정적이라지만, 이재(理財)의 일을 비롯해 국정 꾸려가는 전반에 있어서는 박규수와 개화당 사람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원군이었다. (지난번 은 소동으로도 한 번 더 알게 되었지 않던가.) 지금의 사태를 어찌 해결해야 할지 오경석을 보내 의견을 구하니,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은 뭇 사람들이 불안하여 곳간을 열지 않아 생긴 것이므로 나라에서 먼저 국고를 크게 헐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국고는 또 어디서 충당한다는 말인가. 조정의 재정 역시 취약하기는 매한가지라, 그나마 늘어나는 산출에 의지하여 꾸려오던 살림에 갑자기 구멍이 나게 생겼으니 그런 민심을 달래기도 여의치 않았다. 하필 금본위제를 준비한다고 금을 나라 밖으로 내지 않던 중에 이런 일이 덮쳤으니, 양이 속담에도 재액은 항상 동무를 끼고 온다던가.
“거듭 사과드립니다만 그 역시 곤란한 일입니다. 아시아개발은행을 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극동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것이지만, 또 러시아와 저희 영국 사이의 이해 조정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시아개발은행을 우회해서 저희가 직접 재정지원을 한다면, 결국 저희 쪽에서 그 합의를 먼저 깨버리는 셈이 됩니다. 그런 지원이 저희 정부와 의회에서 통과된다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차라리 그 옛날 백락내(벨로네)처럼 제 욕심 가득한 사람이라면야, 저 가운데 들어 있는 욕심을 눈치 채고서 어떻게 발 걸어 자빠뜨릴 수 있을까 고민이라도 하였겠지만, 진심으로 곤란해하는 것이 눈에 밟혀 어찌할 수 없었다. 분명 처음 개항할 때만 해도 백락내니 박극(파크스)이니 하는 야심만만한 이들이 왔었는데, 정말 어진 사람이 어진 사람을 부르는 것인지 요새는 꼭 저의 아들 닮은 위패 같은 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알겠소. 뭐, 우울한 이야기만 하려 귀한 시간을 내어달라 청한 것은 아니니 이 정도로 해둡시다.”
이대로 가면 대원군 자신만 우울해질 터이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손쓸 도리 없어 답답히 여김은 아니요, 비장해둔 수를 벌써 꺼냄이 안타까워 그리하였던 것이었지만.
아라사는 겁박하고 영국은 미덥지 못하니, 결국 자력으로 어려움을 모면할 꾀를 내어야 하겠다. 그런 연통이 운현궁으로부터 도달하자 귀남 역시 고민에 빠졌다.
“대체 왜 그렇게 괴롭히지 못하여 안달이 나 있는 것인지 모르겠구려.”
중전에게 그간의 진행된 소식을 전해주며 귀남이 답답함을 토로하였다.
그저 자식 걱정에 꺼낸 헌법의 일이 여기까지 커질 줄 알았겠는가. 그러나 일전에 애먼 위패(베베르)에게 역정 내었던 것처럼, 툭하면 조선을 괴롭히는 아라사에게 좀 어지간히 하라고 깨우쳐줄 필요도 있었던 것이라, 영길리 공사 만난 뒤 대원군이 제안한 방도가 솔깃하게 들리기도 하였다.
“복수는 불반분이니(覆水不返盆, 엎지른 물), 우선은 아라사를 대하는 계책을 세워야 할 듯합니다. 운현궁에서 진달한 계책은 어찌 되는지 신첩이 들어도 될지요?”
“이르기를, 저들이 우리를 노려 저들 아래에 둘 흉심을 내려놓지 않으니, 우리 또한 능히 저들을 괴롭게 할 수 있음을 보여 이를 억눌러야 한다 하였소.”
귀남이 생각하기에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구는 것은, 품은 욕심이 많아 저의 뜻한 바를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라면 대개는 상대의 주먹도 꽤 맵구나 하는 것을 눈치껏 알아채게 되고서야 비로소 스스로 삼가곤 하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라면 모를까 아라사에게는 감정 좋지 않은 귀남이었으니, 흥선군이 제안한 이 방법에 자연히 마음이 끌렸다.
“물론 나라의 온 힘을 따지면 우리가 아라사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적어도 저들의 연해주 땅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그 땅에 나아간 우리 상고와 공인을 부려 일제히 철시(撤市)케 하면 저들 역시 사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조치를 물리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계책의 전모요.”
“허나 그리한다 하여 아라사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분하게 여기어 날뛰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운현궁에서 이르기로는 그리 된다면 영길리가 부득불 끼어들 수밖에 없으니, 그 전에 아라사가 스스로 삼갈 공산이 크거니와 설령 일이 어그러진다 한들 기댈 방편이 있는 것이라 하였소.”
지금이야 별 일 아니니 네 선에서 알아서 하라며 방관하는 영국이지만, 아라사가 분기탱천하여 숫제 조선을 집어삼키겠다며 날뛸 정도로 판국이 커져 버린다면, 끼어들 수밖에 없을 터.
“거기에 더하여, 지금 여러 백성이 곤궁한 지경에 처한 것도 모두 아라사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 있으니 어지러운 민심을 달래는 한 가지 방편을 얻을 수 있다고도 하였소이다.”
무릇 불행을 남 탓으로 넘기면 한결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얕은 수라고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확실히 효험이 있을 듯하였다.
허나 이리 되면 피차 감정의 골이 깊게 패여, 장차 아라사의 약점을 조선의 강점으로 삼아 언제고 더 큰 이익을 취하려던 당초의 생각이 완전히 꿈속 이야기가 되는 것이니, 대원군으로서도 이런 상황이 아니면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애초에 사람 싸우고 다치는 것을 꺼리는 귀남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주저하는 마음의 한 조각을 읽은 것일까.
“자칫 나라와 나라 사이가 완전히 갈라져 다시 붙을 수 없게 되는 것을 꺼리시는지요?”
“그렇소. 아무래도 사람이 남의 허물은 잘 보아도 자신의 잘못은 잘못이라 여기지 않기 마련이니, 우리 백성들이야 타이르고 위무할 수 있다 하여도 장차 아라사가 원망하는 마음을 품을까 두렵구려.”
그때 문득, 사태가 여기에 이르기 전 자영이 말하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중전 그대가 또 다른 계책이 있다 하지 않았소?”
나름대로 짜낸 생각이 고스란히 잊힐 줄 알았던지, 중전의 낯빛에 희색이 감돌았다.
“정황을 살펴본바, 대원군이 아뢴 것처럼 이번 일은 결국 영길리와 아라사가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데서 기인하였으니, 두 나라가 화해하기 전까지는 계속 이러한 일이 생길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조선은 영길리가 드나드는 바다와 맞닿고, 북변으로는 아라사와 직접 붙어있으니 더욱 어려움이 있습니다.”
몇 번쯤은 마음속으로 홀로 되뇐 구절일 것이다.
“그러니 두 나라가 화해하여 천하에 어지러움을 없게 함이 가장 좋을 것이나, 이는 우리 힘으로 홀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니 계책에 속하지 못합니다.”
“허나 언제까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러니 대원군이 아뢴 대로 한 번쯤 우리도 나름의 수완 있음을 보일 것도 가할 것이나, 신첩 생각건대 이는 두 나라 모두 우리가 자신의 편이라 여기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만일 성상께서 채택하여 주신다면, 능히 그리할 수 있는 방편이 있을 듯합니다.”
이야기하는 바를 들어보면, 지난 번 북벌 고변 사건으로 조선이 저들 편이 된 줄 알았던 아라사가, 이번 국제의 일로 다시 의심을 품게 되었으니, 아예 개화당을 끌어들여 그럴듯한 친아((親俄, 친러)파 모양새를 차리자는 것이었다. 박규수부터 시작해 그 당의 굵직한 사람들로 연해주에 발 걸치고 있는 이들이 많으니, 대원군의 책략대로 이들을 아라사를 노리는 올가미로 쓸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화해의 거간으로 삼을 수도 있는 셈이었다.
그러면서 넌지시 하는 얘기가, 여흥 민문도 그 안에 적당히 끼어 있으니, 아라사도 귀남 자신이 중전을 통해 여기 개입하고 있다 여기어 의심을 쉬이 거둘 것이라 하였다.
지난 번 대원군과 가까워지고자 민승호를 팔아넘긴 일로 자영과 민문 사이가 소원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중전이 손을 다시 내밀면 이를 내칠 만큼 그세 가세가 확 편 민문은 아니다. 더구나 중전이 직접 나서서 아라사와 이어준다는데, 아무리 민문이 지리멸렬하고 인재 적다지만 그것을 거절할까.
“실제로도 국제의 일을 되살펴보면, 처음 학원과 초야의 선비들이 상주한 초안에서 그 내용이 황당한 것들을 참의원이 많이 쳐내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모두 개화당의 일이었다 한다면 저들 아라사인들이 솔깃하게 여길 것입니다.”
물론 민자영 딴에는 저의 욕심과 부군 귀남을 위하는 마음을 모두 만족시키는 길이라 생각하여 내놓은 얘기였지만, 이 계책을 듣는 사람이 대원군이었다면 곧장 그 뒤에 대원군뿐 아니라 개화당에도 저의 친정 식구들을 이용해 끈을 만들어놓으려는 수작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만큼의 눈썰미는 없지만 대신 아내가 어떤 사람으로 원 역사에 기록되었는지를 대충은 아는 귀남 역시, 잘은 몰라도 뭔가 의뭉스런 구석 있음은 알 수 있었다.
“젊은 신료들이 상참할 때 내게 아뢰기를, 지금의 이 전란(錢亂, 공황)이 가라앉기 위해서는 결국 나랏돈을 푸는 수밖에 없다 하였는데, 설령 능히 그리 할 여력이 있다 하더라도 단기일 내에 진정되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소.
지금 중전의 방도를 택하든, 운현궁이 낸 꾀를 택하든, 사안의 한 국면만을 단정히 할 뿐이니 나로서는 하나를 취하고 나머지를 버리기가 참 어렵구려.”
귀남이 머리 굴려 이해하기로는, 대원군이 낸 방법대로라면 아라사에게 역으로 억지를 부려, 연해주를 인질 삼듯 하여 한 발 물러서게 하는 것이니, 모든 것을 아라사 탓으로 돌려 민심을 가라앉힐 수는 있을 것이었다.
반대로 자영이 말한 것처럼 아라사의 당초 의도(로 추정되는 바)대로 대원군이 힘을 잃고 자칭 친아파 개화당이 득세하는 모양새를 갖춘다면, 아라사는 저들 원하는 대로 되었다며 좋아하기는 하겠지만 백성들이 보기에는 조정이 양이에게 무릎 꿇은 모양새라, 그 법국과도 싸워서 ‘이겼’고 얼마 전에는 동삼성 땅을 평정하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와서 다시 굴욕을 참자 함은 무슨 영문이냐며 더 날뛸 듯하였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든 경제는 계속 어려울 것이라지 않은가. 원 세상의 말로 해석해주어도 모를 일이니 지금 여기서 신료들이 화폐의 출납이 여차하고 물산의 소출이 여피하다 이른들 잘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원 세상에서 나라의 경제가 어려울 때는 아이엠에푸인지 하는 데서 돈을 꾸어왔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물론 정 급하게 되면 금모으기라도 해야 하겠지만, 백성들의 소중한 패물을 털어내는 것보다야 우선 다른 데서 융통할 방법을 고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니, 두 계책을 모두 취함이 상책일 듯하오.”
한 식경쯤 고심하던 끝에 마침내 옥음이 내렸다.
“어찌 둘을 동시에 취하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나라 안의 사정을 국외에서는 잘 알지 못하잖소? 이번 사태도 따지고 보면 말이 다르고 땅이 달라 제멋대로 짐작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지. 그러면 실타래를 풀 단서도 여기에 있지 않겠소?”
하고서 자신의 발상을 어설프게나마 일러주니, 듣는 자영 머릿속에서도 얼추 얼개가 맞아떨어져, 간만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실로 빼어난 발상이십니다. 밝은 달도 지나가는 구름에 가리고는 하는데, 이르신 것처럼 허허실실의 방책을 베푼다면 어찌 공효가 없겠습니까?”
북경에서 조선 소식 기다리던 이그나티예프에게 한양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 발 편지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그 무렵부터였다.
‘존경하는 이그나티예프 백작 각하, 소관은 최근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러시아-조선 관계를 진심으로 우려하는바 이 글월을 올립니다.’
그 필두에 있는 것은 무라비요프가 은퇴한 뒤 블라디보스토크의 터줏대감 자리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펠드가우젠이 보낸 장문의 글이었다.
‘지난 이십 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 지금, 수많은 좋은 벗들의 청원에 힘입어 이렇게 연락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점입가경이었다.
‘최근 조선이 불황에 빠져든 원인이 조러관계의 악화로 아시아개발은행이 조선에 대해 제재를 가한 것임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악화의 원인이 최근 조선 왕국이 반포한 자유주의 헌법 때문임을 알았을 때 소관으로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는데, 참으로 치명적인 오해가 우리 제국의 국익을 훼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러대기를, 정말 영국에 포섭된 것인지, 아니면 (안타깝게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렇듯 해로운 서유럽의 사상에 오염된 것인지는 몰라도 헌법에 해괴한 조항들이 많이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 언론에 보도된 초안에 비하면 훨씬 합리적이고 보수적인 방향으로 수정이 이루어졌다 하였다.
만약 초안을 낸 것이 친영파라면, 이를 수정한 것은 친러파이거나 적어도 친러로 포섭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일 텐데, 정작 이그나티예프가 제재를 가하면서 전자가 아닌 후자에게 피해가 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헌법 초안에 서구식 조항을 넣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공산당이라 합니다. 비록 한때 우두머리가 국왕의 친부인 흥선 대공이었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는 어떤 당무도 맡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1871년 파리를 점령한 폭도의 잔당이 그 당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은 각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기로, 바로 그 공산당이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이 우리 러시아에 있다고 공공연히 선동을 하고 있으며, 이미 실제로 다가온 경제불황은 조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 연해주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해주의 선량한 조선 상인들은 공산당이 아니라 대부분 온건하고 합리적인 개화당 – 친러파 혹은 잠재적 친러파임을 기억해주십시오 – 의 지지자들입니다.
우리 러시아의 국익, 그리고 문명과 평화에 이로운 이들은 버리고, 그 반대되는 이들에게만 힘을 실어주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칫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조선이 영국이나, 다른 위험한 자들의 편으로 돌아서는 참화가 벌어지려 하고 있으니, 부족한 소관도 이렇게 무엄하게나마 청원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제재가 ‘조선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바람에 연해주를 먹여살리는 조선인들이 기를 못 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마지막을 보니 아무르학회 학회장 겸 극동개척위원회 위원장 표도르 부세(Федор Ф. Буссе), 그리고 그 이하 연해주 전역의 자칭 유지의 서명이 함께 연명으로 있었고, 얼핏 보니 다른 편지들도 도톰한 것이 대개 비슷할 듯했다.
문명의 발전과 평화라는 거창한 표어를 진심으로 믿는 얼간이들, 조선인들 대상으로 짭짤한 소득 올리면서 그 표어를 진심으로 믿는다고 우겨야만 하게 된 자들, 그리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조선에 이해관계 얽힌 이들 – 개중 정말로 조선식 ‘인정(人情)’ 받은 이들도 적지 않을 터였다 – 등이 모두 달려들었을 테니, 아마 펠드가우젠도 어쩔 수 없이 제 손목 움직여 글을 썼지만 정녕 저의 손으로 쓴 것은 아니었을 테다.
차라리 조선인들이 직접 난리를 쳤더라면, 저 멀리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랬을지언정 쉽게 넘길 수 있었겠지만, 러시아인들, 그것도 최근 급격히 성장하며 차르의 기대를 받고 있는 연해주의 러시아 국민들이 이 청원을 극동 바깥으로 꺼내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제길. 나도 이제 늙은 것인가.’
아직 창창한 40대이건만, 오늘따라 관자놀이 지끈거리고 눈은 침침한 듯했다.
이럴 때만 혼자 날뛰는 상상력은, 이 소란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그대로 올라갔을 때의 장면을 질끈 감은 눈꺼풀 안쪽에 투영해주었다.
그의 라이벌 슈발로프(Петр А. Шувалов) 백작의 기분 나쁜, 그 사람 깔보는 웃음이 그려졌다.
‘아, 물론 이그나티예프 백작의 재능은 인정해야지요. 변방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추구하고 또 얻어내는 데는 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얻어낸 이익을 지켜내는 일이라면... 하하, 전쟁에서 용맹한 장수가 따로 있고, 현명하고 뛰어난 재상이 따로 있는 법이지요. 이번에 극동에서 올라온 청원만 보아도 말입니다.’
친러 세력을 키우기는커녕 도리어 영국 편만 늘려놓고, 러시아의 입지는 제 손으로 삽질해 파헤쳐놓았다는 모함이 금방 만들어질 것이다.
‘허, 중국 내전에서도 손 놓고 있더니, 이제는 조선까지 적으로 돌려놓았군. 자네가 그렇게 장담하였던 러시아의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
중국 내전에서 수수방관하였다는 오명을 벗어보고자 벌인 일이 이렇게 돌아오면 참 그런 아이러니도 없을 것이련만, 정말로 슈발로프 백작의 뒤를 이어 이렇게 한숨 쉬는 고르차코프 공작의 모습이 그려지자 모르는 새 소름이 좍 돋았다.
굳이 따지면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친러파와 반러파의 대립으로 이그나티예프의 눈을 속여넘긴 것이었지만, 어쨌든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물론 자금 조달에는 약간의 시일이 걸리겠지만, 지난 번 조치는 곧 해제될 것이며 개발은행의 업무 역시 조속히 정상화될 것임을 말씀드리고자 찾아뵈었습니다.”
대체 무슨 수를 부려서 이렇게 이그나티예프의 심경 변화를 이끌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실 조선도 그렇고 이 국왕도 그렇고 나름 마음에 들어하던 베베르로서는 일이 끝났음에 안도할 뿐이었다. 전해 듣기로는 연해주 유지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던데, 조선이 어떻게 그들을 저들 편으로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참 대단한 수완이었다.
“정말 고맙소. 다 그대 위 공이 가운데서 열심히 화해를 위해 노력해준 덕 아니겠소이까.”
국왕의 너털웃음이 그의 안도감을 더해주었다. 물론 아시아개발은행의 제재는 그저 공황에 불씨 붙이는 역할만 했을 뿐이니, 그 상흔이 모두 없어지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었지만, ‘잠시의 오해로 인한 불미스러운 일’을 묻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한동안은 투자에 상당히 관대해질 전망이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민심도 덩달아 안정을 되찾았다. (정작 농사만 짓고 사는 백성들조차 그런 소식에 일희일비하였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러나 가만히 문명개화를 추진하던 나라가 러시아의 한 고관 마음대로 위기에 처할 뻔 하였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젊은 서생들에게는 깊이 새겨졌다. 나라의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온건한 마음다짐부터, 기필코 그런 굴욕을 저들에게 돌려주어야 하겠다는 과도한 열정까지, 대원군과 공산당의 선동이 남긴 후과가 적지는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시베리아와 맞닿아 있는 작은 나라가 친러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시베리아 곳곳의 정치범 유형수들 중 몇몇은, 우랄 산맥 서쪽으로 가는 마차편을 알아보는 대신 연해주로 탈출할 방법을 고심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예상치 못한 결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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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의 공황은 원 역사의 일본이 1870년대 말 ~ 1880년대 초에 겪었던 혼란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사후 그의 경제정책을 이어받아 식산흥업 노선을 유지한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재정정책, 서남전쟁으로 인한 예상 외의 재정지출 등으로 호황 가운데서 재정난의 위험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81년 오쿠마의 실각 이후 새로 대장경으로 취임한 마츠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는 정부재정의 긴축을 통해 재정 건전화를 추진하였습니다. 한창 긴축재정을 유지하며 불량화폐를 처리하는 등 바쁘게 추진되던 재정정책은, 임오군란으로 청과의 무력충돌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른 군비지출 급증, 세계 경제와의 통합으로 인한 불안정성 증가 등으로 인해 난국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른바 마츠카타 디플레이션이 일어나, 1882년과 1883년 사이 미곡과 생사의 가격이 반토막나는 등 극심한 경제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미가 하락으로 많은 농민이 본인의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해, 이후 미군정기까지 일본의 고질병이 된 농촌문제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원 역사 일본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작중 조선은 펀더멘탈은 조금 더 강하지만, ‘멘탈’은 부족하다 하겠습니다. 개화 초기를 제외하면 급격한 정부주도 산업화 대신 민간 중심의 점진적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청과 일본, 러시아 연해주와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세계적인 경기변동으로부터도 조금이나마 더 안전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쿠보 도시미치나 오쿠마, 마츠카타 같은 전문적인 경제정책을 펼 수 있는 고위 관료의 부재, 그리고 개항 후 성공 일변도였던 국내경제로 인한 경험 부족 등은 경제의 소프트웨어적 측면에서 취약성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 이사벨라 비숍은 서울에 머물던 중, ‘공론(Public opinion)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땅에서, 공론을 갈음하여 민심(Popular feeling)의 돌풍이 부는’ 현상을 흥미롭게 관찰했습니다. 항상 말수가 많고 특히 정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조선총독부에서도 주의깊게 바라본 현상 중 하나였지요. 작중에서도 그런 경향이 조금이나마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