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16화 (116/320)

38. 달을 가리는 구름 (2)

보름 다가오니 창덕궁 위에 달은 휘영청. 억만 창생을 보듬는 음덕(陰德)의 큰 보배요, 월궁 항아(月宮姮娥) 노니는 터전이라. 담장 기와 따라 밝은 빛 비추니 번뜩이기가 흑단과도 같았다.

“달빛이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그 풍광 감상하는 임금 귀남의 마음에는 근심 가득하니, 풍광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국제의 일로 여전히 심려가 많으신 것인지요.”

“그리 잘 드러나더이까.”

국제 자체로 말하자면, 어떻게 짜였든 그저 저의 아들이 왕 노릇 못 하게 되는 일만 없도록 하게끔 하면 그만이라 사실 별 감상이 없었다. 신료는 물론이요 들리는 풍문으로는 외국인들도 꽤 그럴듯하게 여긴다 하니 잘 되었다 하고 넘어가려는 무렵, 쏘련, 아니, 아라사인들이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신첩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마음만이라도 고맙구려.”

이번 생에 들어와 좀처럼 성내는 일이 없던 귀남이 간만에 노여움을 한껏 베풀어, 접견하러 온 그 베베르라는 젊은이가 말도 제대로 붙여보지 못하고 저의 나라 공사와 함께 쫓겨나다시피 궐문을 나선 것이 바로 오늘 낮의 일이었다.

기억을 되돌려보면 이러하였다.

난데없이 베베르가 찾아와서는, 백번 송구하다 아뢰고서 저의 상관에게서 전해받은 말을 옮겨 새기는데, 그 내용이 참 뭣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 국제가 그대들 보기에는 지나친 바 있어 고쳐야 한다, 이런 말 아니오?”

배움으로 말하자면 전생보다 외려 이번 생에 학문이 더 깊으니 (물론 그것도 그리 깊은 건 아니지만), 국제인지 헌법인지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는 몰라도, 서양 개념을 옮겨왔다는 자유니 권리니 하는 말은 알고 있었다.

지난 생에서는 분명 이 자유라는 것이 참으로 귀한 덕목이요, 간악한 북괴가 항상 해치려 노력하는 물건이라 배웠다. 온갖 사람들이 ‘내 자유’니 ‘내 권리’니 하면서 저 편한 대로 하는 것이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예, 그렇습니다, 전하.”

우물쭈물하던 베베르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고서 뭐라 말하려는 사이, 함께 찾아온 주한 러시아공사 슈트루베가 짐을 대신 짊어지겠다는 듯 나섰다.

“신하들에게 이르시어 헌법을 만드셨으니 분명 유럽 국가에 뒤떨어지지 않는 개명된 통치라 하겠습니다만, 바로 그 유럽 나라들을 보면 법을 악용하여 저들 마음대로 행패를 부리는 무리가 적지 않습니다. 러시아 역시 그런 폐해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요.”

물론 베베르나 슈트루베처럼 러시아 내에서도 외국 물 많이 먹은 이들은 지금의 차르가 내세우는 자유주의 기조에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속내를 내보일 때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조선과 러시아가 맺고 있는 우호를 증진하고 장차 협력을 가일층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이간질할 자들이 끼어들 틈새를 미리 막아야 한다는 것이 저희 정부의 입장이 되겠습니다.”

허나 귀남이 말뜻을 곱씹고 나서 나온 답변은 냉랭하였다.

“아니, 유럽 국가들보다 못하지 않다면서 고쳐야 한다니, 그 무슨 이야기요?”

난데없이 찾아와서는 지금 너희 헌법은 지나치게 자유를 숭상하니 바꿔야 한다 얘기하는 격 아닌가. 아무리 베베르가 갖은 외교적 수사와 공손함으로 덮으려 하여도 그 본뜻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버지 대원군의 공산당이 – 적어도 아직까지는 – 이름만 그런 흉악한 것인 반면, 러시아 외교관들은 대놓고 자유는 해로운 것이라 하니, 자유는 좋은 것이고 공산은 나쁜 것이라 배워온, 그리고 딱히 더 배울 것도 없이 당장 전화 속에서 사무치게 그 교훈 느낀 귀남이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살펴보면 귀국과 우리 조선은 참 다툰 일도 많고, 서로 도운 일도 많았소.”

“예, 전하. 지금껏 보여주신 신의에는 다시 한 번 감사를...”

“헌데 우리가 나서서 귀국을 겁박한 적은 없었거늘, 귀국은 외려 툭하면 우리를 괴롭히려 하니, 그 연유가 무엇이오? 육 년 전 두만강 가에서 총부리 겨눈 것이야 그렇다 쳐도, 그 다음에는 내 생부가 무관들을 모아 일을 꾀했다며 무고하려 하고, 이제는 우리가 한 나라로서 백성과 사직을 위해 법을 세우려 하니 또 거기에 간여하고.

그대 나라는 아무리 추운 북쪽에 있다지만, 나라 넓이로는 천하의 제일인 것으로 아는데, 우리 조막만한 나라에 또 무슨 이익이 있다고 그렇게 괴롭혀 뭘 얻어가려 하는 것이오?”

반절은 진심으로 꾸짖는 것이고 – 슈트루베든 베베르든 넋의 나이로 따지면 그보다 한참 젊은이들 아닌가 – 반절은 한 번 찔러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끝내 나이 이기지 못하고 얼마 전 은퇴한 무라비요프나 북경에 있는 이그나티예프 같은 이들이라면 대놓고 협박으로 시작할 테니 비위 맞춰주는 척하며 속내를 살필 수 있었지만, 이렇게 팔자 사나워 가운데에 낀 이들은 아무리 흔들어본다 한들 실속이 없었다.

“전하. 저희 러시아는 그저 친우의 나라 조선이 항상 신의 있는 벗으로 남기를 원할 뿐입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을 재차 올리게 되었습니다만... 본국에서는 여전히 이번 국제가 현 상태보다 더... 음, 진중한 내용으로 수정되지 않는 한 향후 조선국과의 협력을 재검토할 수도 있음을 전해왔습니다.”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군사개입 소리는 꺼내면 안 되겠다 느낀 베베르가 살얼음 밟듯 대꾸했다. 정말 이러다가 한 판 붙어보자는 얘기로 흘러가게 되면, 두만강 놓고 국경분쟁 벌이던 시점보다 군사적으로 딱히 더 나아진 바 없는 러시아 극동으로서는 여러모로 곤란하였던 것이다.

“그대 나라가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찌 신의를 논하고 수호를 논하겠소? 차라리 힘으로 겁박하여 빼앗겠다면 모를까, 그저 말로써 그대 나라 뜻에 따르라 하니, 가볍게 세운 국제도 아닐진대 어찌 함부로 고칠 수 있겠소이까.”

귀남이 보기에 여기서 더 빼었다가는 이 고생 겪어가며 헌법을 세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싶었다. 그러므로 결국 베베르가 가운데서 암만 타이르듯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말해도 논의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패(베베르) 그 자가 무슨 악의 품고서 그렇게 하였겠소. 그저 그들 조정의 신료들이 나라의 대계를 짬에 있어 실기(失機)하였던 것이겠지. 그저 단호히 대처함으로써 그 잘못을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러나 도합 백 세 넘긴 삶의 감이라 해야 할까. 중전에게 토로하면서도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께름칙함이 아내 자영에게도 전해졌던 것일까.

“허나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이제 늦봄이라기보다는 초여름이라, 밤바람도 싸늘하지 않고 선선하여 문도 창호도 모두 열어두었다. 주상과 중전의 합방이 꼭 그런 합방은 아님을 이제 알 사람은 다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운현궁을 제외하면) 밖으로 발설할 각오를 그 어떤 궁인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처럼 드러내놓고 말 터놓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아무리 상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당장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데 하등 도움 되지 않으니.

“그야... 저들이 무슨 수로 우리를 해코지하겠소? 해삼위에서 우리 백성을 쫓아낸다면 당장 그들 고을이 텅 빌 것이요, 군병에 호소한다 하여도 당장 여의치 않을 터인데다 영길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한창 열심히 경연에서 국사 논하던 시절, 대원군이 인재로 점찍어 경연관으로 들여온 ‘사총(四寵)’ - 어윤중, 김윤식, 김홍집, 김옥균 - 에게서 귀동냥으로나마 들은 풍월 있던 귀남이 답했다.

“허나 세상 만사가 항상 여의(如意)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비하는 방책을 미리 마련함이 가할 것입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 딱히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물론 이제 조선이 자신이 즉위하던 시절처럼 서양 나라가 군사 몇십, 배 몇 척 몰고 온다 해서 흔들릴 체급은 아니게 되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서양 나라를 괴롭힐 수단이 있느냐 하면 딱히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저들 사이를 잘 헤쳐나오면서 그들의 꾀한 바에 분탕질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절묘한 씨름꾼이나 수박(택견)꾼처럼 그네들 힘과 위세를 빌려쓰는 격이었지 않던가. 정면으로 부닥치면 그들을 협상으로 이끌어낼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비록 우리가 마땅한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내 말한 것처럼 아라사도 마찬가지요. 우선은 사세를 살피되, 저들이 그저 말로만 크게 세를 꾸민 것일 수도 있으니 지켜만 볼 일이라 하겠소.”

지아비 주상이 그렇게까지 단언하는데 굳이 재론함은 부덕(婦德)도 아니거니와 처세하는 도에도 어긋날 터.

허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아라사가 압박하여 그 입헌(立憲)이니 국제니, 임금 권세 나눠주는 시늉하는 것을 아예 접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하는 심산 있던 자영이었으므로, 임금 귀남과는 다른 이유로 뒷맛이 썩 상쾌하지 아니하였다.

운현궁 권세야 비록 시작할 때는 주상의 친부요, 대리청정의 권한은 없어도 사실상 섭정하는 자리라는 데서 출발하였다지만, 지금은 옛 익문사인 공안서가 있고, 또 천하장안 패거리가 있으며, 오경석이 살림 꾸리는 공산당이 있다. 대원군 공언하기로는 언제고 자신이 물러날 때 되면 자영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겠다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공언일 뿐.

그러니 자영이 정말로 가진 것이라고는 – 여흥 민문과의 연줄은 대원군의 약조 받아내겠다며 스스로 걷어찼으니 - 곤전(坤殿, 중전) 자리 하나뿐이요, 주상이 국사를 스스로 처결하므로 그 곤전 자리 위세도 결국 편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그 편전의 위엄을 나누어 의정부 이하 육조에도 조금, 멀리 구름재 건너편 인왕산 자락 참의원에 또 조금, 그리고 이제는 형조와 사헌부에서 덜어내고 새로 뽑기도 하여 차린다는 사법원에 또 조금. 이렇게 나누어 준다 하였으니 남는 것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준비할 시간이 약간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리고 대원군의 눈과 귀를 벗어나 저의 재간 부릴 요량이 조금이라도 되었더라면, 역모라도 하나 꾸며서 참의원의 정당 하나쯤 쳐내고 그 자리라도 차지하였을 것이다. 아무리 아라사가 멀리 있고 또 영길리니 덕의지니 하는 나라만큼 재보 풍성하지 못하다 하나, 밀어주기로 작정하면 이곳 조선에 세력 하나 못 꾸리겠는가?

“그리 말씀하시니 신첩도 마음이 놓입니다. 허나 혹 이번 일이 성심을 어지럽힐 뿌리가 남는다면, 굴근(掘根, 뿌리를 뽑음)하는 데 미력이라도 보탬이 도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상께서는 뿌리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주상은 마음에 없는 듯한 미소로 응대하였다.

침전에 촛불 꺼지고, 여하간 외풍은 외풍이므로 말하지 않았지만 시위하던 나인과 내시들이 알아서 문과 창호를 하나씩 맡아 닫았다. 마지막 문 닫기 전 주상에게 지밀상궁 연씨 – 새로 가려 뽑았다 – 가 침석(寢席)의 편안함을 여쭙고서 하직 인사를 올렸다.

그 미처 닫지 못한 문 사이로 달빛이 들어왔는데, ‘이만 물러가거라’ 옥음 내릴 무렵, 지나가던 구름이 무심히 달을 가렸다.

아무리 아라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도, 곰살궂고 예의 바른 청년 위패는 주상 이하 뭇 신료들이 꽤 괜찮게들 여기던 터였다. 그리하여 아라사가 무도한 요구를 하였다는 소식은 바로 퍼지지는 않고 느리게, 또 조금은 보드랍게 바뀌어서 퍼졌다.

그러나 곧장, 원문 그대로 퍼졌다 한들 아라사를 규탄하는 여론이 잠깐 일어났을 것을 제하면 별반 반응에 차이는 없었을 것이었다.

“이보게, 아라사가 우리네 국제가 저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칠 것을 청원하였다는데, 들었는가?”

“물론 들었고말고. 신보에 근래 종종 올라오지 않던가. 뭐, 그 국제의 초본으로 말하자면 강상(綱常)에 온전히 맞지는 않는 조항이 적잖았으니 나라도 온당치 않게 여겼겠지만, 그 대의는 참 아름답지 않은가? 그걸 들어 트집을 잡으니 옳지 못한 처사도 그런 것이 드물지.”

“암, 나 역시 동감일세. 그나마 트집 잡은 것이 아라사이니 망정이지, 다른 나라였으면 곤란할 뻔하였네. 다 어려운 와중에도 열성조의 보우가 있는 덕 아니겠는가.”

아라사가 비록 대서 여러 강국과 어깨 나란히 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영길리니 불란서니, 또 덕의지니 하는 나라들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고 여기는 것이 도성 백성은 물론이요 어지간히 서양 사정에 밝다는 서생 사이에서도 두루 퍼진 견해였다.

물론 북변에 직접 닿았고 그 땅에 나아가 경영하는 나라 사람들이 적지 않으므로, 조금 처지는 나라라 할지언정 미리견 같은 나라보다는 중하겠지만 그뿐. 처음, 그러니까 선왕 대에 막연히 북쪽의 무서운 나라. 그 청국에서 영토를 뭉텅 떼어간 나라라 여기었던 것에 비해 훗날 밝혀진 연해주의 모습이 영 시원찮았으므로, 아라사라는 나라는 덩치가 클 뿐 실속은 적다고 은근 우습게 여기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들의 나라 조선도 요새는 예전과 같지 않아, 구습을 없애고 개화의 풍속을 널리 떨치며, 새로운 문물을 저들의 요긴한 살림살이로 삼으니, 비록 가볍게 북벌 운운하던 시절보다야 철들었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어지간한 대서 나라 바로 아래 정도까지는 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적잖은 사람들의 다소간 헛된 공상 들어간 생각이었다.

그러니 아라사가 설령 국제의 일로 공연히 트집을 잡는다 해서 뭘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심산으로 가볍게 흘리고 넘어가는 것은 비단 귀남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허나 무릇 통상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해 양날의 검이라. 자신의 요구가 묵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그나티예프가 당장 본국에 청하여 아시아개발은행의 조선 및 조선인 보유 자산에 대한 추가적인 투자를 무기한 유보할 방침을 받아내자 사정이 확 바뀌었다.

마침 미리견에서 시작해 전 구주를 뒤흔들던 불황의 그림자도 올해 들어 조심스레 걷힐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그간 그 꽉 잠긴 금고에서 조금씩 새어나오던 금이 극동에 투자되던 것이었는데, 이제 다시 호황의 조짐 보인다 하니 유럽의 자산가들은 대신 다른 건질 기화 없는가 하고 중동에도, 중앙아시아에도, 또 남미와 아프리카에도 기웃거리기 시작하던 차였다.

그런데 러시아와 극동의 작은 어떤 나라가 사이가 좋지 않아, 그 아시아개발은행이라는 곳에서도 당분간 투자를 보류하겠다고 공포하니, 다른 투자자들 보기에는 어떻겠는가. 모르기는 몰라도 신용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발표하는 러시아도 사실 그렇게까지 신용이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이 겪을 첫 번째 – 그러나 결코 마지막은 아닐 - 공황이 이렇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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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근대 용어가 메이지 일본에서 번역되어 조선에 들어왔고,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 글과 말에 남아있습니다만, 또 상당수는 일본이 아니라 중국을 통해 수입되기도 했습니다. 작중에 나오는 권리만 하더라도, 다름아닌 『만국공법』에서 처음 쓰인 것이지요.

작중 조선의 헌법, 특히 그 초안으로 말하자면 당대 분위기에 비추어보아도 상당히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성인권이나 보편선거 같은 것이 대표적이지요. 당장 근대적 헌법조차 미비하였던 나라가 적지 않은 판국이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적 상황이 당시 서구 문명 자체가 덜 ‘계몽’되었기 때문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19세기 초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자유주의 운동에서 많은 혁명적 발상이 배태되었지만, 기득권의 이익과 상충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받고자 19세기 내내 갈등과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때로는 말로, 그리고 (주로 말로 할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나라에서) 총과 폭탄으로 싸움이 벌어져, 20세기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당장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도 그렇게 암살당한 인물 중 하나지요. 러시아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앞장서서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명군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농노해방령(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어지간하면 나오는 얘기입니다), 지방의회(젬스트보) 설립 등등, 업적이 많습니다만, 근대화와 산업화는 결국 체제 내외의 불만을 불러왔습니다.

특히 원 역사에서 동방위기 당시 오스만 투르크에게서 엄청난 영토를 전리품으로 획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878년 베를린 회의로 인해 그 대부분을 상실하는 외교적 대실패(러시아의 관점에서)를 겪으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고, 덕분에 비교적 한가하게 남의 나라 헌법을 가지고서 이렇게 관여할 여유도 생긴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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