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달을 가리는 구름 (1)
막 동 트는 묘시(卯時, 오전 5시~7시)께 비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온종일 퍼붓다 잦아들기를 되풀이하였다.
허나 그 적시는 땅이라 해 보아야 이제 도성에는 몇 곳 되지 않았으니, 도로에 포장을 한 곳은 물론이요 그저 다지기만 한 곳이라도 서양서 배워온 솜씨로 길을 닦자 진창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건 말건 비야 때 되면 내렸다가 또 때 되면 그치는 것이라, 잦아드는 사이 잠시 숨 돌리겠다는 양 멀리 관악산 허리춤에 가서 하얗게 휘감고 있었으므로, 참으로 그 정취 그윽하였다.
“거 보십시오. 아무리 속설이라지만 믿을 구석이 있어 지금까지 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에이, 하루가 빗나갔지 않은가.”
최익현이 반쯤 농담으로 말 꺼내니 뒤낭이 코웃음으로 받았다.
5월 10일은 태종대왕의 기일로, 필히 이날 태종우(太宗雨)라 하는 비 내려 봄철 가뭄을 해소하여 준다고 알려준 바 있었다. 헌데 오늘은 11일이요, 어제는 종일 쾌청하였으니, 뒤낭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보다 나 좀 도와주게. 국왕 전하의 허가도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또 그새 문의가 들어왔습니까?”
“후, 말도 말게. 물론 이번 헌법의 일이야, 이 나라를 위해서도, 또 문명과 진보를 위해서도 참 잘 된 것이라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만큼 호들갑 떨 건은 아닐 텐데...”
『대조선국 국제』가 반포된 지 달포나 되었을까. 허나 그 전부터 이미 신보로 온갖 소란은 다 떨고 있었고, 여러 학원이 들고 온 초본(초고)은 물론, 초야의 선비들이 올린 각종 상소까지 합하여 시끌시끌하였으므로, 이미 주변 나라에서도 촉각 곤두세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아무래도 언론에게 만만한 것은 정부 관료가 아니라, 코뮌 사람들 귀국할 때 따라가지 못하고 – 돌아간들 호구할 방도도 없었다 – 한양에 남아 적십자사 대표 겸 (소일거리로) 교사 노릇하는 뒤낭이었다.
그리하여 제물포는 물론이요 북경이나 상해, 요코하마 등지의 외국인 언론사 기자들이 찾아와 이번 헌법 제정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대체 조선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급진적인 개혁노선을 천명하고 있다고 보느냐 연일 물어보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어디서 소문 듣고 왔는지, 얼마 전에는 무슨 버드(Isabella Bird)인가 하는 유명한 여행가도 찾아와 저에게 면담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최익현에게 찾아가 통사정했더니, 대범하게 국왕에게 건의하여, 특별히 나라 안 이야기를 적당히 외국인에게 알려주어도 된다고 윤허를 받아왔다. (영문 모르는 귀남과 신료들은, 잘은 몰라도 우리 국제가 참 대단해서 천하 만방의 찬탄을 받는 것이라 제멋대로 단정하였던 것이다.)
“뭐 더 설명할 것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보편선거나 여성 인권 보장 같은 것은 결국 끝에 가서는 빠졌으니 더 얘기할 것이 없고, 삼권분립이나 언론의 자유 정도는 유럽 기준으로는 딱히 새로운 소식도 아닐 텐데요.”
때를 만났다 싶으면 우르르 몰려들어, 듣는 이의 거북함 따위 개의치 않고 할 말은 모두 하는 것이 조정암(靜庵, 조광조) 이래 사림의 고질이다. 다행히 금상은 성정이 하해와 같아 언로가 트이다 못해 육조거리만큼 된다 하더라도 ‘허허’ 너털웃음으로 넘어가겠지만, 개항 전부터 벼슬살이를 하던 나이 지긋한 중신들이 보기에는 경악스러운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제의하는 선비들 역시 세간에서 평하는 것처럼 마냥 우활하기만 한 자들은 아니라,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서 하는 얘기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지,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배를 뭍으로 올려버리겠다는 기세이지 않던가.
‘무릇 제도라 함은 시일이 오래되면 폐단이 따르기 마련이니, 이에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때로 손수 발의하시어 본 국제의 절목을 고치도록 하유하실 수 있으시니라.’
그리하여, 국제 맨 마지막에 이렇게 명시하고서 그 아래에는 참의원에서도 삼분지 이가 동의하면 개정을 발의할 수 있다고 덧붙였으니, 이번에 사의(私議)로 올린 조항을 정 국제에 넣고 싶다면 초야에서 나와 참의원의 의제로 올리라 하는 뜻이었다. 물론 딱히 내칠 이유가 없던 것들 – 백성의 평등이나 교육권 보장, 삼권분립 같은 것들 - 은 고스란히 집어넣었지만.
“자네도 생각해보게. 이 나라 조선 왕국이 문호를 연 이후로 끼어드는 일마다 심상찮은 일이 터지지 않았던가? 당장 1871년 그 소동 속에서 자네가 활약한 것도 그렇고 – 나야 고마운 일이었지만 - 그 ‘손-비’들이 영국 글래드스턴 씨와 손잡고서 난리통 벌인 것도 그렇고. 그러니 언론의 과민반응을 마냥 탓할 수는 없는 것이라 이 말일세.”
물론 정말 조선이 잘나서 무얼 했다기보다는, 여기저기 사달 날 만한 곳에 발 들이고서 쓸 만한 빌미나 핑계 마련해준 것이 전부였지만, 어쨌든 관여한 것이라면 관여한 게 맞았다.
“뒤낭 형 말씀을 듣고 보니 그랬던 듯도 합니다. 그렇다 치고, 제가 어떤 질문에 답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물어봤던 것이지만 아직도 아리송한 면이 있는 질문이라네. 그래서 이 나라는 입헌군주국인가, 전제군주국인가?”
설령 뒤낭이 조선말에 통달하였다 해도, 정작 저 ‘입헌군주국’이라는 말 자체가 없으니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프랑스어에 능통하면서 저와 교분도 있는 최익현 한 사람만 붙잡을 수밖에.
“그야 둘 다 아니지요, 애초에 그 둘의 구분은 서양에서 나온 것인데, 아예 임금과 백성의 도의가 다른 이곳 조선에 끼워 맞추려 하니 가당한 이야기입니까?”
최익현으로서도 금번 국제(國制)를 둘러싼 국제(國際)적 소동에 대해 섭섭한 면이 없지는 않았다. 당장 국제 조문에 ‘백성’만큼 자주 나오는 ‘신민(臣民)’만 하더라도, 신도(臣道)라는 것이 무작정 군주의 뜻을 따르는 데 있지 않다고 설명하여 주었건만 정작 말을 옮길 때는 그 의미를 쏙 빼놓고서 옮기지 않았던가.
“후, 나인들 모르겠는가. 허나 날 괴롭히는 작자들로 말하자면 반드시 둘 중에서 확실한 답을 얻어내야겠다며 달려들고 있다네.”
뒤낭이 푹 한숨 내쉬었다.
“따지자면 전제군주국이지만, 오직 나라 안 만백성의 이로움과 덕을 위해서 그 무한한 권력을 행사한다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만백성의 이로움이니 덕이니 하는 개념이 법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말이야. 당장 첫 번째 조항과 두 번째 조항이 어긋나지 않는가?”
군주의 ‘무한한 위엄과 권세’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나누어주겠다 말하니, 뒤낭으로서는 암만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율배반에 지나지 않았다.
“법이 아니라, 유학에서 말하는 도덕이지요. 굳이 따진다면 입도전제(立道專制)라 해야 할까요?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그것 역시 군주 한 사람이 모두 다 할 수 없으니 백성의 대표와 유능한 관리에게 맡긴다 하는 것입니다.
다만 국왕 전하께서는 인사의 권한을 유지하시니, 따지면 불신임도 가능할 것이고, 말씀하신 것처럼 헌법 해석에 충돌이나 모순이 있다면 역시 국왕 전하의 성단에 맡기는 것이지요. 흠,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나서 보니 입도전제보다는 차라리 군민공치(君民共治)라 함이 가하겠습니다.”
서양 말을 진서로 옮기기 위해 학원의 여러 서생들이 몇 달을 고생하였음을 생각하면,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말하고 나서 최익현 자신이 보아도, 여전히 머리 긁적이는 뒤낭의 심정에 약간이나마 공감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삼권분립이라는 제도를 들여와서 참의원의 자리를 공식화하고, 서양 정부의 행정부의 편제를 따라 통리아문을 나누어 의정부 의하 육조로 재정비하며, 기존 기구들을 일부 떼어내고 산림의 선비를 채용하여 사법원, 그러니까 사법부를 설립하려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뒤에 대원군과 박규수 사이의 은근한 수싸움이 있었음은 최익현도 대강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런 나라의 속사정까지 드러내 밝힐 필요 있겠는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대략 여기까지일 듯합니다. 이 이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결국에는 유학 경전 이야기 없이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형님은 물론이요 형님을 괴롭히는 유럽인들은 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뭐, 조선 땅에서 가장 유럽 정치에 밝은 사람일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 이상은 어렵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 좌우지간 고맙네. 내가 아는 선에서 대충 둘러대는 것에 비하면 그래도 하늘과 땅 차이 아니겠는가.”
“도움이 더 되어드리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허나 뒤낭이 걱정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었다.
“하지만 뒷일이 걱정되기는 하는군. 이 일로 나 한 사람만 수고로우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결국 저 편한 대로 해석하게 되겠지. 그리고 자네도 알겠지만, 글쎄, 이 헌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적어도 유럽에는 그리 많지 않을 듯허이.”
조선의 헌법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유럽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유럽 바깥에 나와 있는 유럽인들도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북경 러시아 공사관에서 심란함에 잠 못 이루는 이그나티예프 공사도 그런 유럽인 중 한 명이었다.
“엥이... 통찰력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으니, 이래서 요즘 젊은 것들이란...”
한성에서 베베르가 보내온 전문을 구기며, 혀를 차는 이그나티예프였다. 불운한 종이를 옆으로 휙 던졌다.
말하기를, 이번 조선국 헌법에 영국의 입김 닿았다 의심하는 것은 지나친 것으로, 그저 열정 넘치는 선비들이 지나치게 나선 결과였고 그나마 대부분 숙고의 과정에서 반려되었다 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이 엉뚱한 짓을 벌이는 것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니,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듯 면밀히 감시하되 불필요한 경계심은 필요 없지 않겠느냐 건의하는 것이었다.
“동양 사정에 밝은 젊은이라 하여 한양에 보내놓았더니만... 후...”
동양식 전제군주정 국가가 어느 날 갑자기 헌법을 만들겠다 설치더니, 얼마 후 도입하였다는 소식 들어와 내용을 들여다본즉 영락없는 자유주의자의 농간이었다. 심지어 그 원안은 한 술 더 떴다.
이것이 절로 일어난 조화겠는가? 그럴 리 없었다. 판단의 단서는 이미 베베르가 주기적으로 보내오는 보고 곳곳에 들어있었다.
이 모든 난리의 시초가 된, 대학(학원)의 유학생들부터 생각해보자. 그들이 어디를 다녀왔던가? 하필 영국이다. 거기서 쥐죽은듯 가만히 서책만 파다 온 것도 아니요, 글래드스턴 편에 서서 열심히 동방문제의 해결을 호소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돌아와서 자연스레 내놓는 것이, 자유주의 헛물 가득 든 이 자칭 헌법이라는 물건이었다. 그나마 아직 (이그나티예프가 보기에는) 세상에 상식이 살아있어 가장 터무니없는 조항들은 빠졌다지만, 결국 군주의 권한을 제약하는 내용은 고스란히 들어갔다. 물론 초장에 군권이 무한하다고 언급하고 있다지만, 제정의 과정을 살핀다면 겉치레일 공산이 컸다.
곧장 펜을 들어 한양으로 보낼 지시의 초안을 써내려갔다.
눈 뜨고서 우위를 영국에 넘겨주는 것은 그만할 때가 되었다. 지난 중국 쿠데타에서도 어떠하였던가. 일리, 그 조막만한 땅에 연연하다가 결국 난리가 일어나는 것을 방관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사이 영국은 챙길 것을 모두 챙겨갔다. 영악하게도, 이홍장이 이끄는 신정부에게 흥정을 거는 대신, 후일 공친왕의 만주 지방정부와 다시 다툼이 일어날 때 공친왕의 편을 들지 않는 조건으로 동철의 지분을 헐값에 뜯어간 것이다. 아무리 지난 동방위기 이후 글래드스턴의 목소리가 커져 조만간 총리 자리를 탈환할 듯하다고는 하나, 윗선이 누구든 영국인들의 그 모진 재주는 어디 가지 않았던 셈이었다.
듣기로는 그 대가로 영국 본토에서 건조되는 신형 철갑선 몇 척을 인도해주기로 하였다지만, 홀로 과반을 차지하던 청 정부의 지분이 이로써 상당히 줄어, 이제 영국이 프랑스 이하 다른 국가들과 힘을 합치면 떳떳하게 동철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값으로 따지면 참으로 헐하다 할 수 있었다.
물론 아시아개발은행을 놓고서도 허덕대는 러시아 쪽의 상황을 고려하면 미리 알았더라도 영국처럼 개입하지는 못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였으나, 적어도 자신이 여기 북경에 와 있는 데 이처럼 무기력하게 당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껏 은밀히 러시아의 편으로 만들어놓았다 여기던 조선에, 서생 몇몇이 영국 유학을 다녀오더니 난데없는 자유주의 헌법을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의 배후에는 영국이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바,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선제적 조치로써 러시아의 주도권을 확립할 필요가 있음.
귀관은 주조선 공사와 협력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고 결과를 보고할 것.
첫째, 이번 제헌으로 흥선 대공을 비롯해 국왕 주변의 인물로 불만을 품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됨. 이들을 귀관이 조직하고 있는 친러파에 포섭하여, 이번 헌법에 반대하도록 유도할 것.
둘째, 이번 제헌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본국이 상당한 불만과 불안을 품고 있음을 조선 국왕에게 전하여, 국정 노선에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낼 것.
셋째, 위 조건의 달성을 위해 군사개입이나 아시아개발은행을 통한 제재 등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도 허용함. 단, 실제로 이러한 조치를 취하고자 할 경우 사전에 본관에게 연락하여 허가를 득할 것.’
모난 돌이 정 맞는 것은 결국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난 돌이든 둥근 돌이든, 정으로 때리게 되면 돌도 아프지만 정도 나름대로 아린 법. 때리는 석수야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그 정이라 할 수 있는 베베르는 참으로 난처한 지경이었다.
이그나티예프의 지령대로 하였다가는 역풍만 맞을 것이 명백하였다. 허세와 자존심이라면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 너희 헌법이 잘못되었으니 고치랍신다 하였다가는 곧장 반대편으로 뛰쳐나갈 것이 뻔하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나라 때문에 골탕 먹은 이웃이 한둘이던가.
그리고 군사개입이라, 말은 거창하지만 당장 몇 년 전 두만강 국경에서 분쟁 일어났을 때조차 제대로 조선을 압박하지 못하였던 러시아가 무슨 개입을 한다는 말인가. 더구나 여유만 있으면 중앙아시아에서 병력을 뺄 수 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일리와 아프가니스탄을 놓고 계속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군사에 문외한인 베베르가 보더라도 무리일 것이 분명하였다.
게다가 친러파의 조직이라는 대목에서는 더욱 답답할 뿐이었다. 차라리 미리 지시를 받고서, 이번 헌법의 일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하였을 때 이러이러하게 처리함은 어떻겠느냐 하고 넌지시 일러줄 수 있었더라면 모를까, 다 지난 일을 놓고서 고쳐놓으라 하니 가당한 일인가. 당장 이번 헌법이 대원군의 개입 없이 이루어졌으리라 볼 수 없는 판국에서 대체 누구를 더 포섭한다는 말인가. 국왕 옆에 대원군 말고 또 다른 야심만만한 인물이 있지 않고서야...
그래도 우선은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차르의 충실한 신하답게 다음날 창덕궁으로 향할 채비 하는 베베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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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대한국 국제』 역시, 3년이라는 준비기간을 거친 작중의 국제에 비하면 훨씬 급하게 제정되었지만, 나름대로 타국의 헌법을 따라 취사선택한 것이 보입니다. 조재곤(2018)이 면밀히 분석하고 있듯, 몇 개조 되지 않는 간략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프로이센, 프랑스(루이 18세), 프로이센, 일본 등등 다양한 나라의 전제주의 관련 조항을 들여와 입맛대로 가다듬었음이 보입니다 (“『대한국 국제』의 분석과 각국 헌법”, 한국근현대사연구 84호).
결정적인 차이는, 선비들이 주도하여 각국 자유주의 헌법 및 정치사상에서 이것저것 (과도할 만큼) 따온 작중의 국제와 달리 『대한국 국제』는 전제주의 관련 내용만을 따왔다는 것이겠지요.
친정 후 자신의 권력 극대화를 꾀해왔던 실제 고종에게는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작중 귀남의 걱정과 마찬가지로 이는 왕권(황권)이 무너짐과 동시에 일본의 침탈을 막을 제도권력이 송두리채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을사조약 체결을 최대한 막아보려 고종이 ‘이러한 일은 공론에 맡기지 않고 처분할 수 없다’ 운운하자 이토 히로부미가, ‘귀국은 헌법에도 명시된 바 전제국인데 황제의 재가만 있으면 되었지 무슨 공론이 필요한가.’ 하며 말문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희비극의 한 장면이라 할 만합니다.
작중의 해괴망측한 헌법이 지향하는 것과 가장 유사한 원 역사의 사례를 찾아보자면, 유길준의 군민공치론 (작중에서는 최익현이 엉겁결에 먼저 그 이름을 써 버렸습니다)이 있겠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근대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적 유학의 관념적 보루를 지켜보려던 시도의 산물이라 하겠는데, 결국 현실로는 입헌군주제의 모방 시도로 이어져 고종의 반발을 불러왔지요.
지나가듯 언급된 이사벨라 버드는 결혼(1880년) 이후의 이름인 이사벨라 비숍으로 더 유명하지요. 대표작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쓰기 전 이미 1870년대부터 록키산맥 트레킹, 하와이의 마우나로아·마우나케아 등반 등 활발한 여행 및 저술활동을 했으며, 원 역사에서는 1878년부터 1880년까지 동아시아를 순회하였지요. (여기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의 집필 배경이 된 마지막 여행 당시 이미 나이가 환갑을 넘긴 뒤였습니다 (대체 남편이 얼마나 타박을 주면 그 나이 되도록 해외를 전전하느냐며 한국인 아주머니들이 동정을 표했다는 얘기도 글에 나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