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만세불변의 법도 (1)
무인년(1878)도 이제는 그럭저럭 저물어, 아침마다 서리로 하얀 담벼락이 눈에 띄었다. 내리자마자 녹아 없어졌다지만 첫눈도 꽤 내렸겠다, 다가오는 겨울을 능히 짐작할 만하였다.
벌써 찬바람 부는 것이, 영 겨울 같지 않던 – 물론 지난 생 막바지의 겨울보다야 훨씬 추웠지만 – 지난해와는 다를 듯했다.
그러니 이 아침부터 인사 올리러 찾아온 세자가 유난히 기특해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아바마마, 소자 문안 올리옵나이다. 간밤 기체후 강녕하시었나이까?”
하고서 또박또박 읊으니, 여간 귀엽지 아니하였다.
“그래, 세자도 간밤에 무탈하였느냐. 날씨가 추워지고 있으니 고뿔(감기) 들지 않게 조심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자연스레 뒷말이 따라왔다. 잔소리라면 잔소리겠지만 말하는 사람은 그런 자각이 없고 듣는 이도 아직 철이 없어 딱히 꺼리지는 않았다.
“근래 글공부는 어떻더냐? 『천자문』을 거의 끝냈다고 들었다. 내년 정월이면 입학례(入學禮) 행하고서 제대로 공부를 시작하게 될 터이니, 지금 그 기틀을 튼튼하게 다져놓아야 훗날 곤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귀남이야말로 사가(私家) 시절 오경석을 스승으로 모실 때 온 마음으로 학업에 매진한 일이 거의 없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또 제가 못한 일을 남에게 시키고자 할 때가 있지 않던가.
“예, 아바마마. 소자 정진하여 장차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만 하여도 글공부 어렵다고 칭얼대었던 세자가, 이제는 제법 늠름하게 답변하였다. 물론 말하는 투로 보니 이 또한 스승들이 애써 가르친 말인 듯하였다. (아마 지난 번 칭얼댄 이야기가 세자시강원까지 새어들어갔던 탓이리라.)
“그래. 참 기특하구나. 혹 근래 부족하거나 원하는 것은 있더냐?”
하니 여기서부터는 시강원에서 미리 가르친 바 없는 것이라, 가감없이 속마음 담은 답변이 나왔다.
“절기가 다시 겨울이 되니, 소자 아바마마의 군밤이 그립습니다.”
작년에는 그저 밤 달라고 했던 아이가 이제는 딴에는 그럴듯하게 꾸며서 말하였지만, 속내는 그대로였다.
“하하. 그러하더냐. 허나 아직 문안을 모두 드리지 못하였으니 지금은 안 될 일이다. 금일 시강원에서 가르치는 바를 일찍 심득하여 마친다면 내 구워주도록 할 터이니, 힘써 공부하도록 하거라.”
“예, 아바마마.”
입꼬리가 하늘 향해 올라간 세자가 공손히 절을 올렸다.
물러가는 세자를 보면서 문득 귀남은 생각에 잠겼다.
희미해질지언정 잊히지는 않는 지난 생의 기억으로는, 저 아이가 이 나라의 마지막 임금이 될 터였다. 정확히 무슨 연고로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그 아비인 이 몸의 원 주인이 쌓은 망국의 업(業)에 함께 끌려들어간 것이리라.
딱히 뭔가 잘 했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근래 머리 굴려서 – 정확히는 저 아래에 있는 신료들의 머리가 돌아갈 때까지 그들을 굴려서 – 이런저런 창안도 하고 조언도 하였더니 나라 모양새가 적어도 몇 해 사이 망하지는 않을 듯하게 되었다.
그렇게 여유가 조금 생기니, 이대로 죽 나아가 저의 아들까지 누구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서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세자의 자질에 대해 들어보면 나오는 얘기가 썩 안심되지는 않는 것이라, 시강원의 우두머리 자리를 겸하고 있는 홍순목에게 하루는 그 지재(智材) 어떠한가 물었더니 나오는 답이 이러하였다.
“배우고 익히시며 또 질정(質正)하시는 것이 참으로 지극한 예덕(睿德)에 닿으니 아름답기를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가히 성인의 자질이라 하겠습니다.”
즉, 머리가 좋으냐 물었다니 ‘사람은 착하다’ 하는 답변이 나온 것이므로, 적어도 글공부 머리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헌데 자신이야 부족한 것을 보완해줄 대원군도 있고 또 아직은 불안하지만 중전도 있으며, 얼마 전에 중국 건너가서 크게 활약하고 온 믿음직한 젊은 신료들도 있으니 안심이지만, 세자의 대에 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직 창창한 나이니 그런 걱정이 시기상조라 하겠지만, 그래도 당장 발등의 불 꺼지니 그런 걱정이 새삼스레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훗날 그 이완용 같은 자가 나와 아들을 속여 저의 권세를 탐할 수도 있는 일이고 (영국 공사 이호준이 아낀다는 아들 완용이 설마 그 이완용인가 싶어 반신반의하고 있는 귀남이었다.), 아니면 사람 좋은 것을 유약함으로 받아들이고서 그 자리를 노리는 못된 자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어디 다른 신하 앞에서 꺼낼 수는 없는 노릇. 처음에 멋모르고 잠깐 화제로 꺼냈다가 다들 몸서리치는 것을 보고서는 이 임금 자리 지키는 이야기가 어디서 함부로 낼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여실히 알게 된 귀남이었다. 그나마 그의 의중을 아는 최익현이 차대할 적에 넌지시,
‘국제(國制)를 법으로 정하도록 하교하시면서 내리신 삼 년 기한이 거의 다 되었으니, 이로써 치란(治亂)과 흥망을 가르고 만세토록 조종의 기틀을 지킬 단초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비로소 한 가지 방안이 떠올랐다. 권신이나 간신이 두렵다면, 아예 법으로 그 전에 그러한 자의 발호를 막아버리는 방법이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에야 그저 선비들 마음 쓸 일 만들어주고자 꺼냈던 헌법의 일이 또 이렇게 돌아오는 셈이었다.
한 번 해보라는 듯, 대원군이 중전에게 내명부 안의 눈과 귀를 모두 넘겨준 것이 지난 여름의 일이었다. 물론 대원군 팔을 비틀어 빼앗은 것이 아니므로, 미리 다 안배를 하여 그 안에서도 다시 중전을 따르는 시늉 하면서 운현궁에 몰래 동정 전하는 자가 없지 않겠지만, 어차피 시간은 중전의 편이니 차차 솎아내거나 마음을 돌려나가면 될 일이었다.
여하간 이제 안심하고서 지아비 성상과 정사를 논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합방이 근래 조금 잦아졌다 한들, 어차피 겉으로 보기에는 후궁도 따로 들이지 않을 만큼 금슬 좋은 두 사람이므로 누가 문제로 삼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사정을 이미 대원군의 언질로 알고 있었던 귀남은, 낮 동안 내내 논하였던 정사를 또 중전의 입으로 들어야 하니 싫증도 조금 나기는 하였지만, 또 신나서 이야기하는 중전을 보면 그런 마음이 풀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근래 듣기로, 총리대신이 재동에 종종 왕래하고 서신도 주고받는다 들었습니다. 전임 총리대신 박규수와 긴히 논하고자 하는 바가 있음이겠으나, 때가 때인만큼 유심히 볼 일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말하는 내용은 때로는 천하의 대사요 때로는 나라 안의 기무(機務)라, 여간내기가 아니고서는 신나게 얘기하기 어렵겠지만,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싶어 지금껏 심화(心火) 겪어왔던 민자영 아니었던가.
“허, 거 국제의 일이 벌써 여기저기서 의론되는 모양이구려. 조정에서 당당하게 꺼내는 이는 없던데.”
“그야 정해진 기한이 아직 당도하지 아니하였으니 겉으로 드러내기에는 시기가 이른 탓이지 않겠습니까. 허나 신첩 듣건대 이미 물밑에서는 개화당과 공산당은 물론 학원의 선비들까지 서로 오가며 편을 가르고 있다 합니다.”
“편을 가른다? 어떻게 가른다는 말이오?”
“국본(國本)을 높이는 뜻을 바로 하여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게 하여야 한다는 쪽이 하나요, 문무 백관과 백성의 힘쓰는 바를 앞에 밝혀 왕업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쪽이 또 하나라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대원군의 입장은 전자였다. 어떻게 되찾은 종실의 위엄인데, 고작 벼슬아치와 참의원 대부들에게 다시 내어준다는 말인가.
그리고 대원군이 그리 자리를 잡으니, 본의 반 타의 반으로 박규수는 반대쪽에 서서, 인군(人君)의 정사는 홀로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밑바탕을 면밀히 밝혀야 한다는 뜻을 암암리에 여기저기 펴고 있었다.
학원의 선비들이야, 그 외에도 손봐야 할 조항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서양의 법전에 있는 말을 어찌 옮길지, 그리고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지를 놓고 아직도 머리를 싸매고 있었지만, 당장 정국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는 나라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만큼 중한 일이 없던 것이다.
그런 사정까지 자신이 나름대로 헤아린 바를 섞어 설명하자, 귀남이 곧장 물었다.
“그러면 중전은 어찌 생각하시오?”
예전 같았더라면 화들짝 놀라며 감히 그런 말을 어찌 입에 담겠느냐 했겠지만, 이제는 귀남의 성정을 익히 알아 자신이 한 말로 쉽게 죄를 주지는 않을 것임이 명백하였기에 잠깐의 본능적인 거리낌을 누른 뒤 바로 답할 수 있었다.
“전하, 신첩이 아녀자의 몸으로 함부로 논할 수 있는 바는 아니나, 감히 아뢰건대 국헌(國憲)으로 제왕의 위엄을 명명(明明)케 하는 것이야말로 중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늘이 백성을 낳고, 이를 다스리기 위해 임금을 내렸으니, 백성이 있고서 임금이 있는 것이지만, 또 백성이 임금을 저들의 마음대로 세워서도 아니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미 갖추어진 제도이므로 정당 세우는 놀음에 어울려주고는 있지만, 대원군은 애초에 참의원이 지금처럼 나라의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영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자영 역시 그런 생각은 매한가지였다.
물론 금상이야 딱히 고집 세게 뭔가를 밀어붙이기보다는 우선 설득하고 꼬드겨서 결국 자신의 뜻한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성정이었으니 크게 탈은 없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더구나 지금 그저 여항의 공론을 모아 상주한다는 명분만 가지고서도 저리 기고만장할진대, 만에 하나 서양의 몇몇 나라에서 한다는 것처럼 정말 국법을 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손까지 댈 수 있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릇 위엄이란 인(仁)만으로는 세울 수 없고 의와 예가 함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국제의 일도, 신료들이 본분을 넘는 단서를 주게 된다면 자칫 군신의 의리가 흐려져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근원이 될 것입니다.”
훗날 – 민자영은 기어코 그 날이 오게 만들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 운현궁에 빈 자리 생기고 그 안의 권세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면, 지금 박규수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는 도성의 거족들, 그리고 도움 되는 바는 없으면서 말은 많은 족속들이 걸림돌이 될 것은 명백하였다.
“허나 실제로 나라 돌아가던 것을 살피면, 꼭 그런 것도 아니지 않았소? 조종의 일을 살펴보면, 옛 성인에 견줄 만한 분들이 많으셨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고, 또 후대에는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오.
조종의 은덕이 깊어 내 주변에는 다행히 중전 그대와 같이 빼어난 이들 많아 걱정이 없지만, 만약 나중에 외척이나 권신이 발호하여 임금의 위엄을 대신 휘두를 작정을 하게 되면 그때는 국헌이 오히려 그들을 돕는 성벽과 같이 될 터이니, 어찌 온당하다 하겠소?”
‘중전 그대와 같이’ 소리에 발그레해진 볼이 귀여웠지만 할 말은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권신을 쳐내지 못하면 그대로 문제지만, 미리 막아내기 위해 피를 볼 각오를 해야 하는 것도 귀남이 보기에는 문제였다. 그 옛날, 이제는 철종이라는 묘호도 받은 이원범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군밤 달라고 조르는 철부지 아들에게까지 그런 위험한 자리를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그날 밤 내내 합방은 합방이되 머리 아픈 토론만 하고서,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던 귀남은 다음날 내내 가배(커피)를 입에 대어야 했다.
바로 이렇게 머리 아픈 일이 많은 자리이니, 임금의 권한 정도는 조금 내어주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물론 지금도 어지간한 일은 신료들이 알아서 한다지만, 그래도 책임이 자신에게 오롯이 돌아온다면 그 무게가 결코 작지 않을 터.
“... 하여, 지난 여름과 가을에 걸쳐 제물포에 들어온 청국인들을 우선 여러 제조국에 나누어, 우리 공장(工匠)으로 하여금 그 솜씨를 보고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선정국을 새로 두기 전 변통하는 조처로, 선정국을 둘 고을이 정해지고 터를 닦게 되면 다시 논의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쏠려 있으니, 업무 보고를 하러 들어온 이유원의 목소리도 멀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요새 재동 박규수네에 종종 오간다는 얘기를 어제 들었던 것이 떠올라, 이유원이 말을 마치자마자 물었다.
“군국의 기무에 이처럼 힘쓰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오. 그나저나 요 근래 국제 정하는 일로 종종 의론하는 이들이 있다던데, 총리대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그런데 그 말을 꺼내자, 이유원의 낯빛이 ‘국제’ 뒤로 낱말 하나 나올 때마다 창백해지더니 막판에는 아예 사색이 되는 것이 아닌가.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실로 대죄를 범했사옵나이다!”
“아니, 무슨 죄를 말하는 것이오?”
“감히 신하된 자로서 지극히 높으신 자리의 위엄을 사사로이 논했으니, 어찌 죄가 없다 하겠습니까?”
분명 박규수야, ‘열성조의 다른 분들이시라면 모를까, 금상께서는 결코 이런 이야기에 노여워하지 않으실 것’이라 장담하였지만, 이유원이 보기에는 그것이야말로 세상 모르는 소리였다. 세상 어디 임금이 신하들이 자신의 머리 위에 설 궁리 하고 있다는데 가만히 내버려둔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둘이 있을 때 꺼내었으니, 필히 가운데서 얘기가 새어 운현궁에 들어가고, 운현궁은 다시 어떻게 주상의 귀에 그 말을 전한 것일 터. 차라리 이실직고하여 물고 날 것을 유배로 줄이기라도 하자며 넙죽 엎드렸다. 매도 청하여 먼저 맞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공공연히 상참이나 조회에서 공박당하는 것보다야 지금 밝히는 편이 나으리라는 잔머리였다.
“비록 세세한 문구로써 국헌을 글로 새기는 의론까지는 닿지 아니하였으나, 서양 나라들이 어찌 군왕을 세우고 또 어찌 군신의 의리를 정하는지를 우리의 사정과 견주었으니, 국론이 어지러워질 단초를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초야의 유학일지라도 가볍게 논하여서는 아니 될 일인데, 나라의 중신으로서 망령되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으니 참으로 잘못이 무겁습니다.”
듣는 임금 당혹스러울 만큼 하는 자아비판에, 귀남도 그제야 돌아가는 사정을 얼추 짐작했다.
“그러면 법으로써 군주의 위엄과 그 한도를 정하여야 한다, 그런 얘기라도 한 것이오?”
“그, 그렇습니다.”
벌써 삼수갑산이나 흑산도쯤 정배되면 다행이라 여기던 이유원의 귀에, 총리대신 경력 일곱 해 동안 듣던 중 가장 뜻밖의 것이라 할 만한 옥음이 전해졌다.
“아니, 좋은 이야기인데 왜 죄를 청하는 것이오? 어디 조금 더 얘기해보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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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 – 그리고 언급은 안 되었지만, 이 역사에서도 아마도 – 가장 먼저 헌법을 둔 비서구 국가는 오스만 투르크였습니다. 동방위기로 인한 혼란 속에서 즉위한 술탄 압뒬하미드 2세가 젊은 개혁파들과 함께 추진했던 1차 헌정기(1876-1878)에 헌법이 제정되고 의회제 선거도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그 다음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의 메이지 헌법은 훨씬 지난한 과정을 거쳐 제정되었습니다. 신정부가 그 앞의 ‘신’자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유민권운동이 국회개설운동, 헌법제정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민간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정하면서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한 고민 끝에 1889년 헌법을 공포하기에 이르렀지요. 거의 10년에 가까운 다툼과 고민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메이지 헌법에 비하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청 역시 최후의 개혁기에 헌법을 제정한 바 있습니다. 1908년 공포된 청의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은 메이지 헌법을 모방하는 한편 (당장 제1조부터가 ‘만세일계이며 영원히 군림’하는 대청 황제를 명시하고 있지요) 의회를 두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내용 또한 담고 있었습니다. 물론 잘 아시다시피 이 헌법이 뭔가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이미 시기를 한참 놓친 뒤였지만요.
원 역사의 대한국 국제는 작중 시점에서 약 20년 뒤에 공포되었고, 앞의 세 헌법에 비해 훨씬 전제주의적 성격이 강합니다. 총 9개조의 짤막한 내용 덕에 근현대사 교과서에도 원문이 종종 실리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만, 무한하고 불가침한 황권, 그리고 ‘항만세 불변하오실 전제 정치’를 강조하고 있지요. 그 외에도 군 통수권과 입법, 사법, 행정, 인사의 권리 등등을 명시하지만 국민의 권리에 있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