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10화 (110/320)

36. 은세계 요지경 (2)

아무리 조정의 신료들은 나라에 저장해둔 재보가 없다며 살림 빠듯한 것을 한탄한다지만, 어쨌든 조선 팔도의 부(富)로 말할 것 같으면 십오 년 전과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요, 아직 제대로 추산하는 이는 없다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달라지는 면이 있으니 어지간한 식자라면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백성 개개인으로 말하자면 사정이 또 복잡미묘하였던 것이, 물론 예전처럼 끼니 걱정하는 일이야 줄었다지만 대신 사는 것이 각박해지고, 그들을 괴롭히던 관아의 잡세는 없어졌다지만 대신 세금 자체가 껑충 뛰어버렸다.

제물포에서 쏟아지는 포목은 안사람들이 부업으로 쏠쏠하게 소득 올리던 길쌈을 폐하게끔 만들었고, 명전법이 시행되면서 전호(佃戶) 노릇 하지 않고 오롯이 저의 땅만 부쳐서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지만 대신 전세 포흠(逋欠, 탈세)은 옛적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더구나 동리에서 무지렁이 집안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두메산골 아니고서야 자식 중 머리 알찬 아이 하나쯤은 서원에 보내야 했다. 아니, 요새는 두메산골일지라도 별반 다를 바 없었으니, 연병법 이래 병정들이 순회하며 착호(捉虎)에 힘쓰면서 이제 호환(虎患) 무섭다 핑계 대기도 어려워진 것이다. 더구나 면세전 없어진 서원들은 인근 백성을 토색질하는 대신 제 발로 찾아오는 원생들의 집안 살림 거덜내기를 택하였으니, 그 또한 고스란히 부담이었다.

요컨대 소출 는 만큼 지출 늘었다 하는 것은 나라만의 사정이 아니라 어지간한 백성 사정이기도 하였으므로, 나라가 한 집안과 같다는 말이 엉뚱하게도 들어맞는 실정이었다. 예외라면 본래 가멸찬 가산 자랑하던 이들과, 본래 협호(挾戶)나 고공으로 지내다가 이제 공장이든 금점·은점(광산)이든 번듯한 일자리 얻어낸 이들 뿐이리라.

“대저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되면 요행을 바라게 되기 마련입니다. 힘껏 일하면 배 주릴 걱정은 없지만 대신 매일 힘써 일하지 아니하면 도로 배 주리게 되니, 얼마 모으지 못한 가산이라도 털어 혹 그럴듯한 기화(奇貨) 없는가 두리번대는 것이지요.”

요 근래 공부에 바쁜 중전을 위해 간만에 밤 구워서 찾아온 귀남에게 민자영이 말했다. 물론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곁으로 치우기는 했지만, 언뜻 보니 수랏간에서 진상한 가배와 신보가 나란이 놓여 있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얼추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러잖아도 조정에서도 논의가 되던 바요. 이를 마땅히 구휼해야 하는가를 놓고서 말이오.”

“휼민(恤民)의 아름다운 제도는 한 해 농사를 망쳐 걸식(乞食)하는 백성이나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그저 재부 늘릴 욕심에 요행 바라고 움직이던 이들에게까지 구제하는 은덕을 베풀 필요가 있겠습니까?”

귀남이 중전의 말을 듣자하니 그 무어냐, 전생에는 남 얘기였던 재테크인지 무언지 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전생의 그처럼 항상 살림 빠듯하던 경우야 어쩔 수 없었지만, 같은 노점상들 중에도 자투리 돈을 악착같이 그러모아 목돈 만드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고 (대개는 그저 소문이었지만), 또 그의 말년에 나타났던 젊은 노점상들은 요새 누가 은행에 저축을 하느냐며 이름도 해괴한 데 돈을 붓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올해의 이 은 소동은 신보 구독하는 이들에게도 참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당색 따라서 은근히 탓하는 대상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도성의 뭇 신보에도 은값이 폭락하여 참으로 걱정이다, 어디어디 동리 사는 아무개 생원은 모아둔 가산을 모두 날리고 졸지에 빚더미에 앉았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연일 실렸다. 세상 소식이 빨라진 통에 어지간한 고을에도 은을 사들이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었으니 실로 팔도 전체의 근심이라 해도 무방하였던 것이다.

“조정에서 나온 얘기가 바로 그러하였다오. 더구나 실지로 패가망신하여 거리에 나앉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고, 대개는 모아둔 재산을 날린 셈이라 하나 그뿐이라, 이들을 구휼하는 전례를 남기면 외려 후대에 좋지 않은 전례가 될 것이라고들 하더군.”

“선왕들께서 구휼의 법도를 만드신 까닭은 오직 백성을 가엽게 여기는 어진 마음에 있으니, 이것이 검소한 풍속이 배격되는 소지를 만들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그 은원위법이라는 것을 시행하든, 군비를 튼실하게 하든, 나라의 수용(需用) 매인 일이 적지 않은데 어찌 함부로 구제하겠습니까?”

모르는 이들이 들으면 그 금슬 좋다던 금상과 국모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맞는가 의아해할 정도로 건조한 문답이었다. 그러나 쌓이는 심화(心火) 풀 곳 없어 그간 산 채로 말라가는 모양새였던 중전이 요 근래 운현궁과 서신 주고받기 시작한 이후로는 오랜만에 활기를 찾았으니, (물론, 활기와 별개로 퀭한 눈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귀남으로서는 그저 고맙고 또 다행스럽게 여길 뿐이었다.

“엥이, 사들이려면 차라리 금을 살 것이지, 왜 은을 사들여서 이 모양인지, 쯧쯧.”

혀 차는 귀남이었다. 정말로 은으로 치부(致富)하는 방법이 있었더라면, 그가 살던 미래에도 금괴 대신 은괴를 사람들이 사들이고 있지 않았겠는가? 지난 생을 살아가면서 듣고 접하던 – 그가 겪은 불황만 해도 몇 번이나 되었던가 – 대로, 그저 막연히 금이야말로 귀한 것이라 여기던 귀남으로서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허나 왜 하필 은에 투기하였는가 이해되지 않는다 해서 그 안타까운 심정이 남의 일 같지 않던 것은 아니었다. 당장 자신부터가 지난 생의 젊었던 시절 그처럼 발버둥쳤던 것도 같은 심리였다. 지금 가지고 있는 데 만족하지 않고 뭔가 더 해보고자, 비정한 세상에게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며 싸움 걸던 것 아닌가.

그러니 혀를 차는 심정에 담긴 것은 일말의 동정이라. 조정 중신 말마따나 고스란히 구제해 줄 수는 없겠지만, 혹 백성들은 백성대로 본전이라도 건지고 조정은 조정대로 얻는 바 있도록 해결하는 방도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금은은 그저 사람이 값을 매기기에 귀할 뿐이지요. 만일 대국이 은 대신 금으로 거래의 편리함을 삼았더라면 저자의 누가 은을 사들이려 했겠습니까?”

“혹 좋은 생각이라도 있소?”

“딱히 방안이라 하기에는 부끄럽습니다만, 우선은 놀란 민심을 달래야 할 것입니다. 근래는 조운을 기선으로 하니 벌써 삼남에서 거둔 미곡이 조창(漕倉)에 들어차고 있습니다. 이것이라도 내어서 은과 바꾸어주면, 거둔 은이 어디 가지 않으니 훗날 쓰임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귀남이 듣기에도 나쁘지 않은 방안인 듯했다. 아예 개화당에서 발의하였다는 대로 나라의 전정(錢政)을 뜯어 고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적당한 값만 매겨 쌀과 은을 바꾸어준다면 괜찮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얘기를 상참(常參) 때 꺼냈더니 (물론 중전이 제안하였다는 얘기는 빼고서) 또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신 호조판서 김병시 아뢰옵나이다. 이르신 방안이 실로 상책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광흥창(廣興倉)에 세곡이 쌓였으니, 이를 풀고 저자의 은을 거두어들인다면, 나라 전체로 보았을 때는 들이는 만큼 내보낸 격이 되어 총액에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곡은 나라 안에서만 통할 뿐이요, 은은 천하 만방에서 두루 쓰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값으로 따지면 증감이 없다 하여도 쓰임새로는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문중이 이재에 힘쓰다 보니 본인도 그쪽으로 견문 트게 된 김병시가 운을 떼자, 곧장 반박이 들어왔다.

“전하, 지금 호판이 진언한 바는 혹 편드는 마음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참의원에서 개화당이 근래 은원위의 제도를 들이자고 제의하였는데, 지금은 민심을 위무하기 위해 은을 들이고 곡식을 내어준다 하지만, 또 때가 바뀌면, ‘이미 은을 이처럼 거두었는데 어찌 가만 내버려두겠는가’ 하며 필히 개화당이 발의한 대로 할 것을 주청할 것입니다.

허나 이는 결코 일석(一夕)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니, 반드시 그대로 나라의 살림을 곤궁하게 할 것입니다. 때가 지나면 제자리를 다시 찾겠지만, 그 사이 피폐해질 군정(軍政)을 생각하면 또 가볍게 처분을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좌의정 한계원 역시 따지고 보면 운현궁이 뒤에 있었으므로 공산당의 편을 드는 셈이었다.

“전하, 물산의 값이란 호가(呼價)하기에 따른 것으로 때에 따라 바뀌는 법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은을 거두어들이면, 자연스레 저자에 남은 은도 본래 값을 되찾을 것이니 호판이 아뢴 것과 같이 그대로 시행함이 가할 것입니다.

더구나 좌의정은 군정의 흐트러짐을 말하였는데, 이미 굳건히 세워진 것이 어찌 가볍게 피폐해지겠습니까? 이제 북변의 일이 안정되었으니, 병비의 일을 폐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항상 위에 올려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치고 들어오는 것은 예조판서 심순택이었다.

“신 대사헌 강로 아뢰옵나이다. 이미 개화당이 은원제의 일을 그 안에서 이야기한 지 시일이 지나 이미 가항(街巷)에 소식이 퍼졌는데, 조정의 신료들 역시 그것을 믿고 가산을 내어 은을 사들인 자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예조판서가 어찌 그런 사사로운 마음으로 진언하였겠습니까만, 또 그 아래의 신료들로 말하면 사정이 같지 않을 수 있으니 면밀히 살필 일이라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런 사사로운 마음이 들어가 있었기에, 심순택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미곡이란 백성을 능히 먹일 수 있는 것이니, 역대에 걸쳐 상평(常平)과 광혜(廣惠)의 법도를 세워 풍흉(豐凶)에 따라 시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금은과 같은 귀물은 그렇지 않으니, 지금 은을 헐하게 사들여 곡식을 흩뿌린다 하면, 결국 백성의 어려움을 틈타 이익을 취하는 것이 됩니다. 나라가 비록 누룽지 한 덩어리만큼이라도 이익을 사사로이 얻으려 하면, 장차 실덕(失德)하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民之失德 乾餱以愆)."

“전하, 백관의 행실을 바로잡아야 할 대사헌이 현혹하는 말로써 난언을 퍼뜨리니 실로 온당치 못하다 하겠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면전에서 주는 면박에는 다시 면박으로 받아치기 마련. 분기로 얼굴 붉힌 고관들이 하나둘 늘어나, 어전임을 잊는다면 곧장 고성 오갈 듯하게 되었다.

험악한 분위기는 젊은 신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재(一齋, 어윤중) 형님, 윤대(輪對)에서 또 이번 은가(銀價)의 일에 대해 상언하셨다 들었습니다.”

뜬금없이 총리대신 이유원의 부름을 받고서 궐외로 발걸음 옮기는 와중, 멀리서 알아본 김옥균이 그를 붙잡더니 곧장 물었다.

“옳게 들었네.”

“뜻을 함께하신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후, 국용 쓰이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왜 군문에서 빼지 못하여 안달이 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은을 사들이면 안 된다고 진언하였다는 얘기만 듣고서 어윤중도 저의 편이라 단정한 김옥균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정색한 어윤중의 낯빛이라.

“그 무슨 말인가? 당연히 나라 살림이 빠듯하면 그쪽부터 줄여야 하는 것이지. 괜히 성현께서 병식신(兵食信)의 순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야. 내가 아뢴 것은, 이미 서양 나라들이 은 대신 금으로 화폐의 제도를 세우고 있으니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얘기였다네.”

“아니, 그야말로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라 안에서 금은 적잖이 나지만 은은 그에 못 미치고, 이미 영길리와 덕국을 필두로 모두 금을 쓰고 있네. 해삼위에서 들리는 말로는 조만간 아라사도 그리 고친다 하고. 그러니 우리가 옆 청국처럼 은에 기대면 곤란하지 않겠나. 그저 한동안 운산 광산의 소출을 바다 밖으로 넘기지만 않으면 될 일인데.”

당연히 그러려면 그 금으로 사들일 수 있는 것을 못 사들이게 되는 셈이다.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어디서 그 부족분을 차감하여야 한다고 아뢰었을 지는 뻔하였다.

고작 동삼성에 소풍 한 번 다녀온 것을 가지고 북방이 안정되었다고 하니 김옥균은 기가 찰 뿐. 고루한 대신들이라면 모를까 어윤중까지 이러면 안 되지 않겠는가? 절로 언성이 올라갔다.

“성집 형님, 지금 천하의 대세가 결코 안온하지 않습니다. 재보가 부족하다면 남에게서 취할 생각을 해야지, 어찌 우리 안을 스스로 갉아먹는다는 말입니까?”

아시아개발은행이니 하는 기구가 아라사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수단인 동시에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족쇄임은 김옥균뿐 아니라 다른 젊은 신료들 중 식견 있는 이들은 얼추 아는 바였다.

그러나 그 족쇄가 오래 갈 것인가 하면, 김옥균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보고 들은 바대로라면, 언젠가 다시 치고 나올 러시아다. 그때가 되면 결국 믿을 것은 총칼인데, 고작 백성 몇몇이 생각 없이 은 사들이기에 가산을 가져다바쳤다 하여 벌써 국방의 일에서 힘을 뺄 생각을 하다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균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경연에서 그렇게 아뢰면 될 일이지 않은가.”

“당연히 그리 아뢰었지요. 그랬더니 하교하시기를 참으로 취할 만하다 하셨습니다. 북방의 일이 잠시 가라앉았다 한들 병비를 내려놓을 수는 없는 일이니, 처분할 방도를 마련하시겠다고 이르셨습니다만.”

“정녕 그리 전교하시었단 말인가?”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의아하다는 투였다.

“형님, 제가 어찌 이런 일로 농을 하겠습니까?”

“아니, 분명 내가 윤대에서 진언하였을 때는, 은을 쌓아두고서 나라의 재보로 삼을 생각은 없다 하셨는데?”

어리둥절하게 여기던 차, 앞서 큰소리 나는 것을 들었는지 지나가던 김윤식도 끼어들었다.

“허, 이 사람들아. 궐내에서 그리 목소리를 높이면 되겠는가.”

나이로 따지면 거의 저의 스승 유홍기와 비슷한 김윤식이 지긋하게 꾸중하니 김옥균도 비로소 과하였음을 깨달아,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상하네그려. 내가 마지막으로 듣기로는 백성들을 구제하려 은을 미곡으로 바꾸어주겠다 하셨던 듯한데?”

“참말이십니까?”

“내가 어찌 이런 일로 농을 하겠는가?”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 똑같이 돌아오니, 김옥균도 어안이 벙벙하고, 두 사람 모두 황당해하는 것을 본 김윤식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금시초문인 모양이군그래? 참의원 앞에 모여 난동 부리던 이들도 소식 듣더니 천세 몇 번 외치고서 흩어졌다네.”

도성 사람들이 억울할 때면 모여드는 곳이 참의원 앞이라지만, 이번에는 – 지난 번 도중(노조) 소동의 기억이 생생한 탓이었는지 – 작정하고 모여들어 참의대부들이 오가기 어려울 만큼 운집하였다 들었다. 도성뿐 아니라 인근에 은 사들였던 이들이 모두 모여, ‘다 너희들 때문이다’, ‘우리 집 송아지 물어내라’ 운운하며 따지고 들었는데, 도성의 잡배들만 있었다면 곧장 육모방망이 휘둘렀겠지만, 차림새만 보아도 동리에서 목소리깨나 내는 듯한 이들이 섞여있으니 공안서로서도 곤란하였다.

다행히 그런 소동이 더 커지기 전 윤음이 내렸으므로, 대원군으로서는 또 아들 덕을 본 셈이었다.

“아니, 그러면 대체 어심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나인들 알겠는가? 좀 기다리면 알게 되겠지.”

그리고 김옥균은 그 방안을 알게 되었다. 언쟁이 어물쩍 끝나고 그대로 아문으로 향한 어윤중이, 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돌아와서는 김옥균 그를 찾은 것이다.

“자네와 내가 함께 청국에 가게 되었다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 저 말을 몇 번 하게 되는가, 은근히 생각하며 물었다.

“내 총리대신 대감에게서 듣기로, 상감께서 이르시기를 고균 자네는 병비를 참으로 중히 여기고, 일재 그대는 국용을 항상 아깝게 여기니 두 사람이 함께 가면 될 듯하다 하셨다더군.”

아무리 아랫사람들이 은근히 가볍게 여긴다지만 어쨌든 총리대신인 이유원이 두 사람을 친히 부른 것은 범상한 일은 아닐 터.

“백성들에게서 사들인 은을 들고 청국에 가, 제조국을 돌면서 병기든 사람이든 도움 될 이들을 모두 데려오라는 어명일세.”

생각해보니 백성 구제는 구제대로, 모은 은은 은대로, 국방의 일은 국방대로 처리하는 묘안이었다. 화폐 개혁이 어떻게 하면 옆 나라 털어오는 궁리로 이어지는가 생각해보면 도저히 그 가운데에 무슨 궁리가 있었는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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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조정에서 회의를 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그 사이 새로 중앙정계에서 두각 드러낸 인물들이 출연하였습니다.

심순택은 다른 쟁쟁한 인물들에 비하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한제국 망국 직전까지 수구파 원로로서 중심을 지킨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민씨 척족들이 다시 득세할 때 처음 영의정으로 기용되어 자리를 지켰으며, 갑오개혁 당시 친일내각이 수립되자 물러났다가 아관파천 후 복귀합니다. 대한제국 선포 당시 형식상으로 고종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청하는 역할도 맡았으며, 초대 의정대신을 역임합니다.

보수파 영의정을 오래 지내면서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받을 만큼 고종의 신임을 얻은 중신이었지만, 성향이 성향이다 보니 주로 개화파가 일으킨 이런저런 사건의 뒤처리 외에는 눈에 띄는 치적이 없어 오늘날 기억에서는 상당히 잊힌 편입니다.

김병시는 ‘병’자 항렬에서 볼 수 있듯 안동 김씨입니다. 장동 김문의 김병학·김병국 형제보다는 젊은 편(1832년생. 참고로 김병학이 1821년생입니다.)으로, 어떻게 보면 정치적으로 장동 김문의 마지막 후예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문과 합격은 1855년이지만 고종 즉위시 벼슬이 고작 이조참의에 불과할 정도로 김문의 실세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김병국이 1850년 급제 후 1857년에 판서까지 오른 것을 생각해면 좋은 대비가 됩니다.) 사람됨도 – 물론 그 시기 인물평이라는 것이 그렇듯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 다른 김씨들과는 달리 검소하고 주변 인물들을 배려하는 성품이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김병국과 비슷하게 온건 보수파에 가까웠습니다. 유교적 정치관념을 고수하면서도 어느 정도 동도서기적 관점에서의 개량은 받아들이는 쪽으로, 이후 개화 정국 속에서도 수구파 내각에 지속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개혁 후 군국기무처에도 한 자리 얻기도 하는 등, 처세에 능한 모습을 보였지요. 이후 친러내각 수립시 다시 중심으로 복귀해 심순택의 뒤를 잇는 2대 의정대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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