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은세계 요지경 (1)
가을은 참의원에는 참으로 바쁜 계절이다. 특히나 절기도 슬슬 상강(霜降)께 접어들면 그간 차일피일 미뤄두었던 의제들을 도로 꺼내어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 과장 보태면 매일 모여든다고 할 정도였다.
“뭐, 아무리 개화의 도를 따른다, 시무의 대책을 세운다 운운하더라도 천지간 음양 조화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지.”
“그러게 미리미리 해둘 것이지, 엥이... 츳츳. 국록 받는 대부들이 어찌 저리도 굼뜨단 말인가.”
참의원 앞 새로 생긴 다점(茶店)에 마주앉은 유홍기와 오경석이 안부라도 묻듯 말을 주고받았다. 법국 조정이 요새 시끌시끌해 환국이 일어났다 하였으므로, 옛날 공사(公社, 코뮌) 작당에 곁가지로 끼었던 이들은 벌써 짐 싸서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운영하던 점포의 직원들 중 눈치 빠른 자들은 이렇게 배운 재주를 써 먹고자 딴살림 차려 나오고는 하였다.
“여하간 서리 내리고 날 추워지면 모이기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아직 법궁(경복궁)도 수축하지 못하였는데 참의원을 먼저 큼직하게 고쳐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야 그렇겠군. 당장 대원위 합하께서도 양관(洋館) 모양새를 따와 운현궁 안에 새로 전각을 지으려 하고 계신다만 차마 하지 못하시는 판국이라네.”
도성에 높은 건물이 아예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어서, 당장 운종가만 하더라도 옛 육의전 건물을 필두로 옥상옥(屋上屋)마냥 한 층을 더 올린 집이 적지 않았다. 선혜청 창고 옆 법국인 골목이나, 성저 마포나루 근방에 새로 짓는 집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허나 이는 도성 기준으로 외진 동네 얘기고, 안국방이나 정선방·가회방처럼 지대도 높은데 궁 옆이기까지 한 곳이라면 성상 계신 곳을 내려다보는 무엄함을 범했다는 핑계로 탄핵하기에 안성맞춤이라, 또 사정이 달랐다.
그러니 새 참의원 건물을 대강 어찌 지을 지까지 정해두었다 한들 경복궁 공사가 적어도 첫삽이라도 뜨기 전까지는 답이 없어, 그저 크기만 할 뿐인 지금의 참의원 마당에 옹기모여 의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자, 어쨌든 저 안에서 다투는 것만 기다리다가는 해를 족히 넘길 터이니, 시작해보도록 하세나.”
“그러세. 우선 중한 논의는 이것일세. 이번에 아문에서 탁지(度支)의 일에 관해 꾀하고 있는 바가 있는데, 은을 원위(元位)로 삼아 장차 화폐의 근본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네. 나아가 금납(金納)하던 것도 고쳐서 미곡이나 무명 대신 오직 돈으로만 세금을 걷는 것이지.”
개화당의 중진 세 사람이 갈라서면서, 오경석과 유홍기의 사이도 절로 소원해졌다. 허나 서로 거슬리는 바 있으니 더는 막역하다 못할지언정, 어쨌든 옛 정을 모두 버릴 수는 없는 것이고, 참의원 안에서 어찌 다투든 그 밖에서 은밀히 협의해야 할 때가 있었으므로, 통리아문 벼슬 내려놓고 개화당의 녹사 자리 얻은 유홍기와 공산당 녹사 오경석은 각각 재동 박규수와 운현궁 대원군의 명 받들어 이렇게 종종 만나곤 하였다.
“마침 나라 안에서 금은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근래 구미 열국의 사정을 살피면 은은 헐해지고 금은 귀해지고 있으이. 이럴 때를 만나 은으로써 모든 주화의 근본을 삼으면, 바야흐로 재정의 다스림을 얻을 수 있을 테지.”
“이보게 대치(유홍기), 아무리 값이 헐해졌다 한들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닐세. 나라 안의 모든 동전에 맞추어 은을 구비한다면 전곡(錢穀)이 적잖이 들 것이야. 반드시 어딘가에 들어가는 국용(國用)을 줄여야만 할 터인데...”
그 원위의 제도(은본위제)가 무엇인지는 얼추 들어 알고 있던 오경석이 지적하면서 말을 흐렸다. 노림수가 무엇인지가 보였던 것이다.
“동삼성의 일에 매듭이 지어졌으니, 이제 군부에 들어가던 것을 더 급한 쪽으로 돌림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참의원에 제대로 된 정당 – 자신들이 붕당(朋黨)이 아니라 엄연히 성상의 정사를 돕기 위해 모인 무리임을 강조하고자 박규수가 붙인 이름이었다 – 이 생긴 이래로, 가장 목소리 높여 싸우는 일이 바로 나라의 재정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야 나랏일을 말하는 데 어찌 그런 상스러운 것을 거론하는가 하면서 점잖게 임하는 참의대부가 많았지만, 그런 데 구애받지 않던 옛 산당(山黨) 사람들이 대놓고 예산을 받아가 저의 군현에 광통이도국이 다리를 놓게 하기도 하고, 우정국이나 전신국을 놓기도 하는 등 낼름 이익을 챙겨가 버리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향회의 천거를 받아서 오든, 도성에서 행한 것을 본받아 어설프게나마 자체적으로 진행한 추거(선거)에 따라 뽑혀오든, 결국 저의 군현에 도움 되는 바가 없으면 – 그리고 자신은 빈손인데 옆 동네에서는 챙겨오는 바가 있다면 – 비난 받을 것이 뻔하였다.
그리고 오경석 그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개화당이 천하가 고식(姑息)일지언정 평안을 되찾았다며 재정을 혁파하려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을 노리고 들어온 셈이었다.
“하하, 그렇게 벌족과 민려(民黎, 서민)의 마음을 모두 얻어가겠다 그 말인가? 역시 환재 어르신 수완도 여전하군그래.”
아직도 신보에서는 종종 북녘에서 ‘자랑스러운 조선 팔도의 건아들’이 세운 공적을 떠들어대고는 하였다. 끽해야 도적 무리 소탕하고, 혹 못된 마음 품는 이들 없도록 억누르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오히려 그러하였기에 마음껏 원하는 색을 칠해 포장할 수 있던 것이다. (당장 오경석 본인도 거기에 한몫 거들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아무리 군부가 참 잘 하였다, 군병의 힘이 실로 대단하니 나라의 자랑이다. 이렇게 여기는 백성이라 할지라도, 막상 그 군대를 먹이기 위해 저의 곳간을 헐라 하면 반발부터 하고 나설 것이다.
반면 지금 유홍기가 전한 개화당의 은원위 계획을 살피면 어떠한가. 좋든 싫든 지금 조선의 가장 중요한 교역국은 청국이고, 그 청국은 전조부터 은을 모든 거래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또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처음 쌀 팔아 동전 마련할 때 한 번 수고하면, 이후 곡식으로 낼 때 온갖 태가잡비(駄價雜費)를 면할 수 있으니 이익이 될 수밖에 없다. 개화당 입장에서는 저의 기반인 명문거족들에게 유리하면서도 뭇 백성에게 생색까지 낼 수 있는 것이었다.
“흠, 흠. 우리 당이 무슨 노림수가 있겠나? 그저 나라의 흥업(興業)과 백성의 식산(殖産)을 돕는 것만을 걱정할 뿐일세. 나라에서 법폐(法幣)의 값어치를 보장함은 곧 백성에 대한 신의를 지킴이니, 성가퀴에 군졸 세우는 것보다 중하지 않겠는가.”
물론 요새 당의 일에 바빠 서양 서적을 예전만큼은 자주 보지 못하는 오경석조차 알 정도로 서양 나라의 전정(錢政) 제도를 따와야 한다는 말이 이전부터 있기는 하였다. 통리아문 있던 시절, 백래(벨레)가 열심히 가르침 베푼 덕에 이제 재정과 회계의 갖은 일에 능한 서리들이 발에 치이게 되었으니 비용만 마련된다면 어렵잖게 시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지금 이 시국에 이렇게 의표를 찌르고 들어옴은, 소싯적 어울릴 때부터 지략 하나는 빼어나던 유홍기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함이 오경석의 의심하는 바였다.
“되었네, 이 사람아. 나이 먹더니 의뭉스러운 것만 늘어서는. 그래, 자네 말대로 이루어지게 되면 개화당이 얻는 것은 많겠지. 헌데 그러면 우리 쪽에 무언가 보태주는 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더니 돌아오는 말이 걸작이었다.
“허허, 편의 보아달라고 청한 것이 아니라, 장차 이런 말을 꺼낼 것이니 알고 있으라 했을 뿐이네. 이미 여항의 알 만한 이들은 조금씩 은을 사들이고 있을 터인데, 그대들 공산당이 반대하여 은원위의 일이 공(空)으로 돌아간다면 민심이 어찌 되겠는가?”
“별 얕은 수를 다 부리는군그래. 그깟 전정의 술수로 무슨 마음을 얻겠다는 것인가?”
서화부터 협잡질까지 참 재주 많은 흥선대원군이지만, 혼자서는 참 못하는 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집안 살림이다. 금상 즉위 이전에도, 도성 뒷골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게 되면서 티는 내지 못해도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던 터였다. 허나 그 전에는 툭하면 부인 민씨에게 씀씀이 헤프다 타박도 듣고 하였던 것이다.
물론 대원군 생각에야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이니 잠시 그깟 동전이나 무명이 손을 떠난다 한들 후에 빼앗아오면 그만이다 싶었지만, 어쨌든 장사와 돈벌이 얘기로 말하자면 하다못해 수하 하일평보다 못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은원위인가 하는 제도를 정녕 갖춘다 한들, 갑자기 동전이 생겨 주조의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이번에 군공을 세운 무관들의 마음이 운현궁으로 향하면서 자연스레 공산당 또한 허리를 펴게 되었으니, 이를 시기하여 그런 수작을 벌임은 아닌가 싶군.”
“허나 합하,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닙니다. 마땅히 대처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이대로 날 추워지면 참의원 모임도 올해는 공치는 것이야. 우리 당 의원들을 시켜, 이런저런 핑계 대어가며 시일 보내라 하게나.”
나랏돈이 들어오자마자 나가서 국고에 마제은 한 덩이도 놓일 일이 없다고 하지만, 이는 그 경영이 방만하여서가 아니요, 세금으로 걷는 만큼 고스란히 비용으로 나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매일같이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무슨 국(局)이니 양행이니 하는 것들이 수를 불리고, 나라에서 보태주지 않아도 스스로 공장 세우겠다며 나서는 이들도 있으니, 길게 보면 나라의 부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지금 조금 견디다 보면, 군비로 내줄 수 있는 양도 절로 늘어날 것이요, 반면 지금 저쪽이 밀고 들어온다 하여 금방 내어주게 되면 이것이 전례 되어 계속 군의 족쇄가 될 것이다.
군대의 쓰임이 줄었으니 군비를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것 정도는 대원군도 예상하고 있었다. 비 온 뒤에 땅 굳는다 하였던가, 오히려 그럴 때 굳건히 무관들의 편을 들어준다면 군부의 마음을 오롯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리 요새 금력(金力)이 군력(軍力)보다 위에 있다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엇, 동농(東農, 김가진) 어르신 아니십니까?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저 일하는 공안서에 앉아 그간 밀린 서류를 정리하던 이용익 앞에 김가진이 불쑥 나타났다. 모든 힘을 끌어 모아 태연자약한 표정을 갖추고서 그를 맞이하였다.
지난 번 아라사의 일로 김가진을 붙잡은 이래 언제고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은 예측하고 있었다. 기껏 잡아서 운현궁으로 데려갔더니, 이게 웬 걸,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사지 중 하나 이상 부러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장육부 모두 멀쩡하게, 제 발로 운현궁을 나섰다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더 청천벽력과 같았던 것은, 바로 그 김가진이 운현궁 주인되는 분의 수족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대원군이야 쓸 만한 패라고 여겨 그리 한 것이었지만,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또 꼭 그렇지도 않아, 소문만 무성하였다.
붙잡힌 그 자리에서 논리정연하게 시무를 논하여 대원위 합하를 탄복케 하였다더라. 내놓은 계책이 신묘하여 대원군이 손수 포승을 풀어주었다더라 (포승 묶은 적도 없던 이용익은 억울할 뿐이었다.) 등등. 언젠가 자신이 올라가고 싶었던 그런 자리에 김가진이 단번에 올라간 셈이었으니 부럽기도 하고 배 아프기도 하겠지만, 기실 가장 큰 것은 앙심 품은 김가진이 해코지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자신이 어디 상하게 때린 것도 아니요, 저의 기억으로는 최대한 예를 갖추어 대하였던 듯하지만 사람이 원망하는 마음 품는 것은 참 쉽지 않던가. 그때 자신이 알기로는 그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어느 대갓집 서자라 하였으니, 저도 모르는 새 모질게 대하여 원한을 쌓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새 듣기로는 새로 공안서 일을 ‘돕게’ 된 운현궁의 수족이 어지간히 성격이 깐깐하다고까지 하였으니, 제 팔자를 탓할 수밖에 없는 노릇. 정말 해치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제대로 괴롭혀주거나 곯려줄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여전히 얼굴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김가진이 자신이 일하는 방문을 열고 불쑥 들어오자 곧장 모골이 송연해지고 일각이 여삼추(如三秋)처럼 느껴졌다.
“이름이 이용익이라 하였던가?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신수가 훤해졌군. 요 근래 재화를 조금 만진다는 얘기가 운현궁 행랑에 돌더군. 하여, 묻고자 하는 바가 있어 찾아왔네.”
분명 공치사처럼 건네는 인사말로 시작했건만 왜 이승에서의 죄목 읊는 염라처럼 보인다는 말인가. 차라리 이실직고하면 매는 덜 맞을지도 몰랐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저 일하면서 인정(人情) 조금 받은 게 다입니다요! 절대로 곡직(曲直)을 비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다면서 사실 죽을 죄가 아니라고 변명하니 참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마구 주워섬기는 말이 튀어나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아, 그런가? 누구보다 청렴하여야 할 공안서 사람이 그랬다니 참 마음이 아프군.”
“그, 그것이...”
눈앞 아득하니 앞에 보이는듯 말듯 하는 저것이 삼도천(三途川)인가 싶었다.
“그러니 잘못을 갚는다 생각하고 털어놓아 보게나. 은을 꽤나 긁어모은 모양이던데...”
혹시나 개화당이 은원제를 제안하고 나선 데 뒤 구린 면이 있는가 조사해보라는 지시 받고서 나온 김가진이었다. 보통 그런 일은 등잔 밑이 어둡기 마련이므로 운현궁 드나드는 이들에게 탐문하는 데서 시작했더니, 아직 스물 조금 넘긴 젊은이가 이재에 귀신같다는 소문이 있어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보자마자 마치 대낮에 나타난 두억시니 본 것처럼 얼굴이 백짓장 되어 있는 말 없는 말 다 털어내는 게 아닌가.
“그게... 공안서 급료가 적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족하게나마 돈 불리는 재주는 있어서 이것저것 곁가지 돈벌이로 모아둔 쌈짓돈이 있었습니다요. 헌데 저자에 도는 소문에 조만간 나라에서 크게 은을 사들인다 하여, 값이 오를까 싶어 그 쌈짓돈을 조금 풀었습죠.”
“그런가? 그러면 그 소문은 어디서 들었지?”
“그... 아문에서 서리로 일하는 박아무개라는 자가 있는데... 하지만 저는 며칠 전에 손 떼었습니다!”
이렇게 술술 털어놓아주니 얼마나 편한가.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지만, 굳이 고쳐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여 그대로 놓아두기로 하면서 귀 기울이는 김가진이었다.
“참의원에서 공산당과 개화당 사이에 싸움이 붙어서, 근시일 내에 은을 사들일 일은 없을 것이요, 아예 없던 일이 될 공산도 크다 합디다. 다행히 소문이 빨라서 제 돈은 건져서 되팔았습니다만, 아마 지금쯤이면 거의 돈 날려먹은 사람들도 적잖을 겝니다. 무, 물론 제가 거기에 거들었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고요.”
“무어라?”
대원군도, 박규수도 모르는 사이 도성 저자에 끼었던 거품이 터지고 있으니, 이 또한 개화를 하면서 생긴, 나라 안에 전례 없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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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지나가듯 언급된 프랑스의 ‘환국’은 1877년 헌정위기(Crise du 16 mai 1877)를 말합니다. 이미 부르봉 왕가 내에서 지지하는 분파가 갈려 내분을 겪고 있던 왕정복고주의가 힘을 잃게 된 사건으로, 이로 인해 완고한 복고주의자 마크마옹은 사실상 실권을 잃고 결국 1879년 초 사임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1878년부터 해외로 추방 또는 유배된 파리 코뮌 구성원에 대한 사면령이 검토되기 시작했지요. 결국 1880년에는 총사면령이 내려지기에 이르렀는데, 작중 ‘프티 파리’ 사람들은 벨레의 참의대부 당선으로 어쨌든 프랑스의 국격을 높였다는 평을 듣는지라, 원 역사보다 호의적인 여론에 힘입을 수 있을 듯합니다.
복층 한옥이 거의 없는 이유는, 흔히 궁궐보다 높게 지으면 안 된다는 제한이 있어서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실제로는 난방의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2층에 구들장을 올릴 수는 없었으니까요. 온돌 보급 이전에는 2층 한옥도 많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작중 언급되는 육의전의 경우,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복층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창고로 쓰기 위한 다락 느낌이 강합니다.
지금 남아있는 운현궁 양관은, 1907년 대원군이 아끼던 손자 영선군 이준용(고종의 친형 이재면의 아들입니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이 지은 건물입니다. 이준용이 여러 차례 고종·순종의 대안으로서 주목받았던 점을 고려하면, 다분히 고종을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허나 작중에서는 대원군이 수구가 아닌 개화 노선을 타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배경 속에서 양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조세를 동전으로 내는 금납이 활성화되기는 하였지만, 모든 조세를 동전으로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지방재정 차원에서의 각종 잡세와 운송비(태가잡비)가 붙었기 때문에 현물화폐인 쌀이나 잡곡, 그리고 포목 등을 통한 납부는 조선 말까지도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서 금속화폐는 비록 널리 통용되었을지언정, 도성을 넘어서면 주된 경제활동의 수단으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쌀을 대량으로 거래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용하는 일종의 재화에 가까웠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부 방언에서 쌀을 사는 것을 “판다”라고 하고, 반대로 쌀을 판매할 때 “산다”라고 뒤집어 말하는 것은, 기본 화폐인 쌀을 주고 교역을 편리하게 해주는 일종의 상품으로서 돈을 구입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작중 시점에서 세계의 대세는 금본위제입니다만, 아직 표준이 아니라 대세일 뿐입니다. 금과 은의 공급량 변동으로 이전의 복본위제(금+은)가 흔들리고, 신흥국 독일이 프랑스에서 뜯어낸 배상금을 밑천으로 금본위제를 전면 시행하였지만,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도 이제야 막 은화발행을 금지하거나 금지를 검토하는 정도입니다. 물론 영국처럼 훨씬 이전부터 금본위제로 이행한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
반면 조선의 제1교역국 청은 역사와 전통의 은본위제 국가지요 (물론 근대 이전에는 은 자체를 화폐로 쓴 것이니 엄밀히 말해 ‘본위제’라 보기는 어렵겠지만요). 19세기 말 은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청 역시 재정일원화와 더불어 금본위제 이행을 검토했지만, 현실적 한계에 부딪혀 우선 은원(銀圓) 중심의 근대적 은본위제 시행 및 재정일원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은량(銀兩)의 공식적인 폐기는 1933년에야 이루어지게 됩니다.) 일본 역시 메이지 초기에 은화만을 사실상 통용하는 방식으로 명목상 복본위제, 실질적 은본위제를 시행하였으며, 이후 1885년 잠시 은본위제를 도입한 뒤 1897년에야 금본위제를 채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