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두 북벌 (4)
천자의 자리란 하늘 아래에서도 으뜸가는 것이니, 북신(北辰, 북극성) 에워싸고 도는 별들과 같이 천하 만물이 그를 중심으로 돈다. 북경 앞까지 밀어닥친 서양 군대가 팔리교(八里橋)를 피와 불꽃으로 메운 것을 보기 전까지는 공친왕 이힌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천하까지는 아니어도 북경까지는 정말 천자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지 않았는가 싶었다. 북경을 버리고 퇴각한 회군의 뒤를 쫒는 대신, 서로군과 중로군도 차례대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린 천자가 서태후의 치마폭에 휘말려 열하로 몽진하였으므로, 이겨도 이긴 게 아니요, 북경을 얻었지만 천하의 대권은 더욱 손아귀에서 멀어지고야 말았다.
“마파람(남풍)인지 된바람(북풍)인지, 바람 불어가는 방향을 알 수 없으니 화살 한 대도 날릴 수 없구려. 그저 잦아들어 조용해지기를 기다릴 뿐이오.”
안타깝다는 듯 – 정말 안타까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홀로 자금성 지키던 동태후가 입성한 자신에게 했던 말은, 지금 북경 내의 민심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동태후와 조정의 (남아있는) 고관대작들도 이를 알진대, 어리석은 듯하면서도 조정의 풍향만은 귀신같이 알아채기 마련인 백성들이 어찌 이를 모를까. 그러므로 분명 상군은 승자로서 이 자랑스러운 도시에 입성하였건만, 대청 만세 하며 한어로 외치는 이도, 다이칭 구룬의 영광을 만주어로 소리치는 이도 없었다.
“계고(季高, 좌종당), 효달(孝達, 장지동), 미안하오. 내 그대들을 볼 면이 없구려...”
멀리 서쪽에서 거사의 성공 소식만을 기다릴 좌종당이 눈에 선하였고, 끝까지 나라의 명운을 판돈으로 삼아 싸워서는 아니 된다며 만류하던 장지동이 절로 생각났다.
“전하, 북양대신 이홍장이 입성하여 전하를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조용히 다가온 시종의 말에 상념을 겨우 떨쳐내었다.
밑천이 모두 드러났음을 놀리듯, 천천히 영정하에서 병력을 뒤로 물린 이홍장은 북경 바로 옆 통주(通州)에 진을 쳤다. 여기서 한동안 더 나아가지 못하는 공친왕의 사정을 알고서 그랬던 것이리라. 그러니 다시 총탄과 포화 대신 말과 꾀로써 다툴 때가 돌아온 셈이었다.
“들라 하라.”
자신의 저택, 이곳 공왕부가 멀쩡하게 남아있었음을 알았을 때는 적잖이 놀랐다. 서태후라면 자신의 모반이 명백해지자마자 모두 불살라 없앴을 줄 알았던 것이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마음을 먹었다가, 이홍장의 만류 – 실제로는 아마 강압이었을 것이다 – 로 겨우 마음을 돌렸으리라.
“그간 강녕하시었습니까. 신강 땅에 계시면서 혹 귀하신 몸이 쇠하지는 아니하셨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만, 이제야 기우였음을 깨닫습니다.”
분명 며칠 전까지 총칼로 싸운 군대의 수장이라기에는 너무나 우호적이었다. 그 뒤에 무언가 노리는 바가 있음이 확연히 드러날 만큼.
“실은 전하를 뵙고자 하는 이가 있어, 대동하여 찾아뵈었습니다. 우선은 잠시 물러나 있을 터이니 회포를 푸시지요.”
누구 얘기인가 싶었더니, 지팡이 짚고 다리 절룩거리며 나타나는 이 있었다. 조선 땅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마신이였다.
그의 숨이 붙어있음에 놀라 전하러 온 소식에 앞서 그간의 사정을 물었더니, 답하는 내용이 참으로 놀라웠다.
조선인이 총을 쏜 것으로 꾸미고자, 공사관 끄나풀을 시켜 제물포의 미리견 총포상에게서 수창(手槍, 권총)을 사들이게 한 것이 이홍장의 패착이었다. 그런 잡무를 그가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그로 인하여 손에 익지 않은 병장을 다루던 장문상이 가슴팍을 노리되 제대로 납탄을 박아넣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어설프게 개수한 손택빈관의 객실이 영 추웠기에 겨울 겉옷을 벗지 않았던 것도, 피 흘리며 죽어가기 전 양의들이 달려와 곧장 병원으로 데려간 것도 구명(救命)의 다른 단초였다. 어쨌든 탄환 세 발이 들어맞기는 하였고 개중 하나가 무릎을 꿰뚫어, 여생을 지팡이에 의지하게 되었지만, 그러니 목숨 건진 것이 어디인가. 처음 정신 차렸을 때는 마신이 본인조차 반신반의할 정도였다.
“허나 구차한 목숨을 어찌 붙였는가 하는 것이 지금에 와서 어찌 중하겠습니까? 당면한 사직의 일이야말로 급하다 하겠습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공친왕의 입에서는 한숨부터 먼저 나왔다.
“그래, 어찌하면 좋겠는가?”
차라리 싸움에 져서 물러났다면, 패장(敗將)의 도리에 따랐을 것이다. 당장 정병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니, 자신의 아래서 싸운 상군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저의 목 하나만을 가져가라 했겠지만, 또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
“계속 싸우려면 싸울 수야 있겠지. 빈 보위에 누군가를 올리는 것 정도야, 굳이 내가 참람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 하여도 이미 전례가 있으므로 족히 할 수 있는 일일세.”
그의 친형 이주(奕詝, 함풍제)의 아들 자이슌(載淳, 동치제)의 대에서, 그 옛날 태조(누르하치) 대부터 이어 내려온 적통(嫡統)은 끝이 났다. 남은 것은 – 공친왕 자신을 포함해 – 가깝고 먼 방계에 불과한데, 이미 금상을 옹립하며 서태후가 무리한 수작을 부려 전례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꺼리는 마음은 면할 수 없었다. 마신이 역시 그런 심정을 눈치 채고서 맞받았다.
“허나 할 수 있다 하여도 그 값을 쉬이 치를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 그러니 내 지금 이러는 것 아닌가.”
천운이 따르지 않아 거사는 사실상 무위로 돌아갔다지만, 어쨌든 그와 상군 6만 대군은 직례의 반절을 두 달 만에 휩쓸지 않았던가. 서양 나라들과 교섭할 자격은 충분히 입증하였으니, 대가를 치루겠다고 손을 내밀면 저들이 내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너무나 군위(軍威)를 떨쳤기에, 되돌릴 수도 없으실 터. 병장을 내려놓으신들 자희태후께서 내버려두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제대로 보았군. 그러니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어, 고심하는 중이라네.”
양이의 배가 발해를 메우면, 어찌 강남에서 모병하여 증원군을 모을 수 있겠는가. 그리 되면 공친왕 본인이 무리해서 새로 천자가 되든, 아니면 적당한 사람을 내세우든 할 수 있겠지만, 그 대신 양이의 꼭두각시 조정이 될 것이요, 중흥의 기틀이 될지도 모를 동철의 지분 역시 모두 넘겨야 할 것이다. 대놓고 반기만 들지 않았을 뿐, 해를 넘길수록 북경으로부터 멀어지는 여러 성(省)들의 민심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서태후가 자신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아마 촌음의 고민 없이 바로 용상에 오르고자 뒤탈 걱정할 것 없이 모든 수를 다 썼을 것이다. 허나 오히려 그랬기에 공친왕은 그 길을 갈 수 없었다. 그는 서태후 같은 자와는 달랐다. 아니, 달라야만 했다.
한 번 더 나오는 한숨을 체통을 생각해 억지로 눌러 담았다. 그러나 천하를 걱정하여 순순히 물러난다 한들, 이 일을 잊을 서태후가 아니지 않던가. 오밤중에 자객을 보내든 독을 넣든, 자금성의 여인들 사이에서 비전되는 모든 술수를 동원하여서라도 자신을 파멸시키려 들 것이다. 공친왕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신강 땅에서 꾸는 한바탕 백일몽이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실은, 조선 땅에서 요양하는 동안, 그 국왕이 문안을 핑계로 제안한 바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더 뿌리를 내리기 전 시의적절하게 마신이가 흐름을 끊었다.
“그래. 늘 엉뚱한 소리를 하던 조선왕이니, 외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는 구명의 수가 될 수도 있겠지. 들어나 보세.”
대국의 분란은 곧 천하의 어려움이라 호소하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딴집 살림 차려 나가는 것은 어떻겠느냐 하였다. (무엄하게나마 귀남이 속으로 생각하기에는, 끽해야 형수와 시동생 싸움에 그 난리법석을 떨었는가 싶었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지금 동삼성에 조선군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 수효는 많지 않으나 그 군세가 정예하여, 비적 따위를 토벌한 것이 이제 석 달이 채 안 됩니다만 벌써 위엄을 세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처럼 기반을 닦아놓았으니, 그 뒤를 이어 무탈하게 그 땅을 지키고 일굴 이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조선왕의 제의였습니다.”
공친왕 그가 아는 서양 나라라면, 그런 상황에서 철군의 조건으로 뭔가 이권을 뜯어내려 했을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만약 입장이 바뀌어 청이 조선의 집안다툼이 끼어들었더라도 그러하였을 터. 그런데 엉뚱하게도 화해를 주선하고 있지 않은가.
“동삼성... 이라.”
“만일 가시게 된다면, 상군을 끌어다 쓸 명분이 더는 없으니 전하만의 군영을 새로 꾸려야 할 것이요, 사람도, 물산도 부족하니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조선이든 아라사든 바깥의 힘을 빌려야 할 것입니다. 허나 어떻게든 기반을 마련하신다면, 장차 종실의 기업이 아무리 세파에 흔들린다 한들 끝내 무너지지 않을 보루가 될 수도 있겠지요.”
아마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공친왕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것이 오십년이 되었든 백년이 되었든, 대청의 마지막 기둥 하나까지 좀 슬고 문드러지게 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공친왕 자신이 거병함으로써 그 낡은 기둥 중 몇몇에는 숫제 불까지 붙었으니, 어찌 책임이 없다 하겠는가.
“허허... 못 보던 사이 두목지(杜牧之, 두목)가 되어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권하러 돌아왔는가. 하기야, 내 상군을 몰고 왔으니 따지자면 서초패왕(항우)과도 멀다고는 못 하겠군.”
주공 되어보려다 졸지에 항우 꼴이 되었다는 자조에, 마신이는 위로할 말을 딱히 찾지 못하였다.
“아! 중화(中和)를 얻으면 예법이 절로 갖추어지고 만물은 생육(生育)하니 뭇 성인은 이를 귀히 여기었다, 그러나 짐이 부덕하여 이를 잃었으므로, 비로소 크나큰 흐트러짐이 생기고 골육의 다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주인 돌아온 자금성 태화전(太和殿) 앞을, 낭랑하게 조서 읊는 소리가 메웠다.
”그러나 하늘의 보우는 성대하니 천하 만민을 무휼(撫恤)하고, 조종의 은덕은 두터워 태산에 견줄 만하구나! 간특한 무리가 성총을 배신하고 오직 대업을 무너뜨리고자 획책하였음이 오늘에 이르러 드러났도다.”
고심 끝에 공친왕은 마신이의 말에 따를 것을 결단하였다. 이홍장 역시 지금까지 앞에 내세웠던 녹영군과 팔기군이 동나고 저의 회군 피가 흐르게 되는 것을 꺼렸기에, 마신이가 귀띔해준 것처럼 흔쾌히 받아들였다. 작변한 일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씌우고 조용히 넘어갈 방도 또한 있다 하였는데, 서태후가 어린 황상과 함께 환궁한 뒤에야 그 전모를 모두 알게 되었다.
그 옛날 증국번이 마신이를 감시하기 위해 옆에 붙여두었던 장 모라 하는 사내가 고스란히 이홍장 손으로 넘어가, 마신이가 조선을 끌어들이기 전 그의 목숨을 거두는 술수에 쓰였다고 들었다. 허나 조선왕의 친부 흥선군도 여간내기는 아니라, 곧장 수하를 풀어 그를 붙잡았다.
아마 배후가 이홍장임을 실토했겠지만, 여기서 이홍장의 얄팍한 수가 또 들어갔다.
‘그 장문상이라는 자는 말투를 들어보니 하남(河南) 사람이더군요. 조선 역관들이야 북경 관화만 알고 있으니 어디 소통이 온전히 되겠습니까? 다행히 합비(合肥) 사람인 제가 있어, 그 자가 실토하는 것을 빠짐없이 살펴 진상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하필 반신(叛臣) 이홍조(李鴻藻)와 저(李鴻章)의 이름자가 비슷하여, 하마터면 원통한 일을 당할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사교(태평천국)와 염군의 난으로 중원의 반절이 혼란하던 시절부터 마신이를 따라 종군하였던 장문상이니 관화를 제대로 못 할 리가 있겠는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엄연히 음운이 다른 두 글자를 잘못 말할 리 있겠는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지만 자신이 떠날 북경 조정은 이미 이홍장 손에 들어갔으므로 누가 나서서 뭐라 할 수도 없을 터였다.
“공친왕 이힌은 반신 이홍조의 흉계에 속아, 오직 사직을 위하는 마음으로 거병하여 경사(京師)에 들어왔다. 그러나 천운이 있어 마침내 그 진상을 깨닫고 스스로 병장을 내려놓았으니 비록 그 죄가 작지 않다 하지만 결코 역심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능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조종이 일어선 용흥지지(龍興之地)를 맡기니, 이를 지키고 또 일굼으로써 마침내 공으로써 죄과를 모두 덮을 수 있도록 힘쓸지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신 이힌, 분골쇄신하여 이 은혜의 만분지일이라도 갚겠나이다!”
이홍장은 마치 선심 쓰듯, 동삼성의 장군 자리를 폐하고 대신 동삼성총독(東三省總督)을 새로 두어 공친왕 그의 자리로 굳혀두겠다 하였다. 치소 봉천이야 북경에서 고작 천릿길. 어쩌면 조선왕의 제의가 없었더라도 이홍장 자신이 나서서 비슷한 제안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솥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사냥개라면, 숲의 사냥감이 다 떨어질 일이 없게 만들면 될 일이다. 공친왕 자신을 놓아주기로 결정하였으니, 서태후는 등 뒤가 따가워서라도 이홍장의 무력에 계속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영문 모르고 있다 고스란히 당한 이홍조까지 죄를 얻게 되면, 공친왕과 좌종당마저 떠난 조정은 그야말로 이홍장 한 사람의 차지다.
이제 떠나야 할 사람인 공친왕은, 승자가 된 이홍장이 신유년(1861) 정변으로 집권한 자신과 서태후 두 사람보다 더 나라를 잘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것 외에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준비한 기간으로 따지면 두 해, 싸움을 벌인 시일로만 따지면 석 달이 걸렸던 내홍(內訌)은 공친왕의 추방 아닌 추방으로 끝났다. 천하가 뒤바뀌지 않고서는 그가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에, 적잖은 만주 고관들도 공친왕의 뒤를 따랐다. 뜻있는 이들은 본인이 나서고, 우유부단한 이들은 혹 또 서태후와 공친왕이 싸우게 될 때에 대비해 연줄이나 대어놓자는 생각에 아들 한둘 정도를 붙였다.
새 조정에 자신의 설 자리가 없을 것임을 알던 마신이 역시 뒤를 따르고, 상군 중에서도 몇몇 영이 끝까지 섬길 것을 맹세하고서 따라붙었다. 행렬이 장대하여 모르는 이가 보면 패장 아닌 패장의 조촐한 여로가 아니라, 그 옛날 분봉(分封)하던 시절 제후의 발걸음으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따지고 보면 주공께서도 곡부(曲阜) 땅을 받으셨지. 말한 대로 이루어졌으니 원망할 것도 없겠군그래.”
“그리고 그로부터 오백 년이 지나 그 땅에 중니(仲尼, 공자)께서 나오셨지요. 허나 작금의 난세에 오백 년의 시일을 꼭 채울 것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통주(通州) 지나 산해관으로 향하는 길에서 자조 섞인 허탈한 말을 던지니, 길동무 자처한 마신이가 뼈 있는 대꾸로 받았다.
“그래. 내 말을 가볍게 하였군. 이제부터 하나씩 일구어 나가면, 자네 말대로 무언가 천하에 보탬 될 일을 해낼 수도 있을 것이야.”
이제부터가 대업의 참된 시작이었다. 대청이 다시 위기를 이겨내고 번영하게 된다면 세인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잊혀갈 대업이요, 끝내 고꾸라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면 만인들의 마지막 터전, 말 그대로 만주인의 나라(滿洲國)를 세울 기반이 될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공친왕 그의 남은 일평생 바칠 만한 값어치는 있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마침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 데 정신 팔린 이홍장도, 자신의 결단을 애써 정당화하는 공친왕도 생각하지 못한 면이 있었으니 직례 바깥의 대소신료와 백성들에게도 눈과 귀가 있다는 것이었다.
저마다 군영 갖추어 각 성의 방비를 획책하던 순무와 총독들은, 서양 총포와 교관을 들여온 군대가 태평천국이니 염군이니 하는 반군은 물론이요 팔기군과 녹영군까지도 능히 제압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끝내 북양대신 이홍장도 상군의 위세에 눌려 공친왕을 처단하기는커녕 벼슬 주어 살려보내지 않았던가. 반면 그런 세력 없던 이홍조는 잘못 하나 없이 역적이 되어버리고, 그를 따르던 청류파들은 산산이 조각나 누구는 함께 죄를 받고 누구는 초야에 영영 묻혀버렸으니, 강남의 고관들이 보기에 이 일의 교훈은 명백하였다.
반면 높으신 나리들의 어려운 사정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던 백성들 사이에서는, 동삼성에 조선군이 들어왔는데 도적을 때려잡고 그 꿍쳐둔 양곡과 저들의 군량을 내어 농사 망한 이들과 직례에서 넘어온 유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더라 하는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건너뛸 때마다 곱절이 되어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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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말-민국초 학자 장상문(장샹원, 張相文)이 지은 『장문상전』은 장문상의 고향이 현 허난성 루양(여양, 汝陽)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홍장은 그로부터 약 – 중국 기준으로는 ‘고작’ - 500km 떨어진 안후이성 허페이(합비) 사람이고요. 두 곳의 방언 모두 오늘날의 방언분포 기준으로는 관화(보통화)의 영역에 속하지만, 당연히 한국어의 방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표준중국어와는 거리가 멀겠지요.
특히, 허페이 일대의 관화 방언은 하강관화(下江官話, 장강 하류의 관화) 또는 강회관화(江淮官話, 장강과 회수 사이의 관화)라 하여, 관화의 방언 중에서도 가장 알아듣기 어려운 축에 속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章, zhang1)과 조(藻, zao3)의 구분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홍장이 작정하고 둘러대면 딱히 반박하기는 어려웠을 듯합니다.
원 역사의 동삼성총독은 훨씬 후대인 청말신정 시기인 1906년에 설치되어, 초대 총독으로 경친왕 이쾅(奕劻)의 아들 자이전(載振)이 부임하게 됩니다. 그 전에는 전에도 몇 번 나왔던 것처럼 각 성에 장군을 두었지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행정과 군사, 경제 등의 제반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입니다. 더구나 작중에서 완전히 원수지간으로 돌아선 서태후와 공친왕의 관계를 생각하면, 적어도 한동안은 완전히 남남으로 지낼 듯합니다.
맨 처음에 지나가듯 언급된 동태후(자안태후)는, 비록 서태후나 공친왕에 비하면 존재감이 미약합니다만 작중 시점에서 엄연히 황실의 공식적인 큰어른이었습니다. 애초에 서태후라는 별칭도 자금성 동쪽에 처소가 있던 동태후에 빗대어 만들어진 것이지요. 신유정변 이후 정국에서 공친왕·서태후와 함께 삼각체제를 이루었지만, 총리아문을 통해 개화 관련 행정권력을 휘두른 공친왕이나 정치적 수완이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뛰어났던 서태후에 비해 여러모로 밀리는 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력이 부족했을 뿐, 어쨌든 동치제 이전의 황제인 함풍제의 정실부인 (서태후도 태후로 책봉되기는 했지만, 이는 동치제를 낳은 뒤의 일로 본디 후궁 출신입니다)이라는 점에서 강력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동치제도 생모 서태후보다는 동태후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 이 두 요소를 이용해 서태후를 종종 견제하고는 했지요.
중간에 언급되는 두목은 만당(晩唐) 시기 시인으로, 해하(垓下)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가 끝내 오강(烏江) 건너기를 포기하고 자결한 터를 찾아 ‘권토중래’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작중 공친왕의 상황과도 일정부분 겹치는 감이 있지요.
지난 화에도 언급되었던 주공은, 봉건제를 시행하던 주나라의 제후답게 본인의 영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제나라(강태공으로 유명한 강상이 봉해진 곳입니다) 옆에 있는 공자의 고향 노(魯)나라지요. 그러나 주공은 노나라의 경영 – 말이 경영이지, 실제로는 개척과도 가까웠을 듯합니다 – 은 자신의 큰아들 백금(伯禽)에게 맡기고. 본인은 중앙 정계에서 어린 왕을 보필하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