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04화 (104/320)

34. 두 북벌 (2)

심상하지 않은 흐름의 시작은, 늘 그렇듯 난민이었다. 뜬구름처럼 흘러 다니는 자들의 입을 타고, 공친왕이 거병하였으므로 곧 좋은 세상이 열릴 것이다 하는 소문, 이미 공왕부 어딘가에 두터운 생살부(生殺簿) 있어, 북경에 입성하는 순간 족히 성 안을 발목까지 채울 만큼 피가 흩뿌릴 것이라는 소문.

“공친왕 그 자가 모반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지금이 아니고서는 또 언제 군권을 잡겠는가? 지금껏 혼자 고고한 척은 다 하더니,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었어...”

“태, 태후 전하. 참으로 망측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언(謠言) 퍼뜨린 자를 잡아 본보기로 극형에 처하였으니 곧 여항(閭巷)의 백성들은 평온을 찾을 것입니다.”

서태후의 혼잣말 들은 이홍조(李鴻藻)가 애써 당황한 마음을 감추며 곁에서 아뢰었다. 모친상 마치고 복직한 것이 언제인데 이런 날벼락이 떨어졌으니, 비록 벼슬은 병부상서라지만 군문과는 거리 먼 서생인 – 그리고 이를 자랑으로 여겨온 – 이홍조로서는 겹으로 황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 경은 공친왕, 아니, 역도 이힌의 편을 드는 것이오? 뜬소문일 리가 없소. 물론 도성의 민심을 가라앉힘도 가당한 조치지만, 그보다 적의 수효는 어찌 되는지, 지금 그 선봉이 어디에 닿았는지를 먼저 알아야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소!”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서태후 자신이 공친왕이라 하여도 이런 상황이면 모반을 할 성싶었거니와, 또 실제로도 공친왕이 (만에 하나) 아라사를 무찌르고 이리를 되찾아온다면 어떻게든 핑계삼아 숙청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때마침 내시 하나가 들어와 고하였다.

“태후 전하,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 이홍장 입시이옵나이다.”

“들라 하라.”

조선을 위무하고 의안의 전말을 밝히겠다는 약조까지 받고서 천진으로 돌아온 이홍장이 이곳 자금성에 이른 까닭은, 필히 공친왕과 유관할 것이었다. 그런 정황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남김없이 미리 아뢰었어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충군의 도리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마 도성과 조정에 말이 흘러들어가 막 시끄러워질 때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평소 이홍장의 하는 짓을 못마땅히 여기던 이홍조의 의심하는 바는 그러하였다. 아마 서태후 역시 그런 의심을 드러내지는 않아도 심중에 두고 있을 것이었다.

“마치 때맞은 비와도 같이 왔구려. 경이 보기에 역도의 군세와 그 동태는 어떠할 것 같소?”

“공친왕 전하는 신강 땅에 있다 보고하고서 몰래 직례의 근방으로 왔을 것이므로, 필히 그 군세는 급히 모은 향용(鄕勇, 민병대)이거나, 급히 신강에서 돌려온 병사들일 것입니다. 전자라면 아무리 수가 많아도 한 번 기세가 꺾이면 돌이킬 수 없는 무리일 것이며, 후자라면 오랜 행군에 지치고 또 몸을 가볍게 하였기 때문에 마필은 물론 포조차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을 듯합니다.”

분명 서태후는 ‘역도’라 칭하였건만, 이홍장은 여전히 존칭을 고수하였다. 서태후와 이홍조 모두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치밀한 그가 말실수를 하였을 리는 없으니, 노리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그러나 태후 전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공친왕은 분명 군재를 지니고 있으니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신이 직례를 지키고 있음을 알면서도 저리 움직임은 필히 비장(備藏)해둔 술수가 있음이니, 무엇이 허(虛)이고 무엇이 실(實)인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만반의 대비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신이 천진에 돌아오자마자 미리 조처한 바인즉, 사사로이 군병을 움직인 일에 뒤늦게 죄를 청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확실히 공친왕은 서쪽에서든 남쪽에서는 쳐들어오고 있는 것이 맞았다. 그러니 이홍장 역시, ‘나와 내 군사가 아니면 누구를 믿을 것이냐’ 하며 이렇게 충심 가장한 협박을 가하는 것이리라. 그 본심을 편린이나마 드러내었으니, 이홍조의 표정은 바로 굳었고 (물론 한편으로는, 그가 그 동안 그렇게 이홍장을 난신(亂臣)이라며 공박하였던 것이 허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아 묘한 쾌감도 있었다.), 서태후의 의자 팔걸이는 여인답지 않은 갑작스런 압력 가해져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내 어찌 천조의 동량인 그대에게 그러한 죄를 묻겠소? 부디 우리 천조의 대업을 위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열과 성을 다해주기를 바랄 뿐이오. 또한...”

“급보! 급보입니다!”

총애하는 환관 장공희가 땀 흘리며 급히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족히 무엄하다고 꾸짖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장공희가 직접, 그리고 다급히 전할 소식이라면 가벼이 여길 수는 없을 터.

“공친, 아차. 역도의 수괴가 무엄하게도 격문을 이곳 경조(도성)와 여타 관아에 보내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양이의 말로 옮겨 각 공사관에도 전하였다 합니다.”

난민 사이에 간자(간첩)가 한둘 쯤 있으리라는 것은 장수라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어디에 보냈느냐에 있었다.

본인이 당장 구주 외교관 여럿과 친분이 있기도 하니, 지지를 받고자 그리 움직임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허나 지금 북경 안에 있는 공사관이라면 구주의 것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한양에서 조선왕과 서로 약조한 바 있으니, 이제 곧 조선군은 난리를 핑계 삼아 압록강을 넘을 것이다. 막을 수 없는 흐름은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려야 하는 법.

“나라 안의 어지러움을 바깥에 널리 알린 격이니, 반드시 후과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어디가 되었든 공친왕은 직례의 남서를 통해 경사를 노릴 것인데, 그러니 동삼성의 방비가 약해졌으리라 여기고 뭇 양이가 준동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아라사가 있고, 또 영국 역시 공친왕과 친분이 있으니 이를 기회삼아 요동을 노릴지도 모릅니다.”

자금성 안의 다툼이라면 누구든 꺾고 정점에 오를 자신이 있지만, 저 천안문 바깥의 사정으로 말하자면 눈앞에서 자신을 겁박하지 않는 듯 겁박하는 이 거한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서태후다.

차라리 다른 나라, 그러니까 아라사나 영국, 하다못해 조선이나 일본이 쳐들어왔다면, 나라를 지켜야 저의 복록과 권세도 지킬 수 있으므로 청류든 아니든, 상군이든 회군이든 모두 머리 맞대고서 나름대로 공 세울 궁리를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 왔듯 환관들을 수족으로 부려 이간질하고, 저의 편을 만들고, 또 다른 쪽을 끌어와 균형을 맞추고, 이렇게 해서 언제든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 테다.

허나 막상 지금처럼 저들끼리 편 갈라 싸우게 되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이제 이빨 드러낸 이 맹수에게 어쩔 수 없이 매달릴 수밖에. 공손히 고개 숙이는 이홍장이었지만, 그 키로 인해 말려올라간 입꼬리가 서태후의 눈에도 들어왔다. 반드시, 언젠가는 저 미소가 지워지는 꼴을 보겠다고 다짐하는 서태후였다.

“북양대신,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일전에 태후 전하께서는 현명한 결단을 내리시어, 조선왕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때가 되면 나아와 북방을 지키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저들이 이제 번병의 도의를 다하도록 끌어들임이 어떻겠습니까?”

날 가물 무렵 기우제 지내고서 비 내리면, 사람들은 기우제의 효험이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서태후가 허락 여하와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들어올 조선군이라면, 이홍장 자신에게 보탬 되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조선이 구하지도 않은 출병의 승인이 뒤늦게 자금성에서 이루어지는 동안, 북경으로 가는 길목 지키는 보정에서는 한판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에는 급히 달려온 상군이요, 다른 한편에는 성을 지키는 회군과 녹영군이 대치하고서, 나름대로 악 쓰며 불질하니, 단말마에 쓰러지는 자, 어디 사지만 으스러져 죽을 때까지 비명 지르는 자. 다그치는 자. 울부짖는 자. 하나도 빠짐없이 치열한 전쟁터 형상을 갖추었다.

“막아라! 막아야 한다!”

“놈들은 총통이 없다! 쉴 새 없이 쏘아 진영을 무너뜨려라!”

비록 요 근래는 천진에만 머무느라 얼굴 보기 어렵다지만, 직례총독을 겸하는 이홍장의 본래 치소는 이곳 보정이다. 이홍장의 또 다른 본거지인 셈이니 회군도 적지 않게 있어, 수효로만 따지면 녹영군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한편 성을 삼면으로 에워싼 상대로 말할 것 같으면, 물론 신강 정벌을 위해 급히 늘린 병력이 다수라지만, 그렇다 하여도 당장 얼마 전까지 실전 거친 병사가 많고, 공친왕이 끌어다 온 차관 덕에 탄탄하게 단련된 상군의 정예는 비록 머릿수는 상대적으로 적어도 솜씨는 매서웠다.

이홍장이 멀리 북경에서 짐작한 것처럼, 고작 열흘 만에 태원에서 이곳 보정까지 달려왔으니 기력은 성할 리 없다만, 공친왕은 무모한 도박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다 수가 있었다.

“사다리 든 놈을 먼저 노려라! 사다리만 막으면 이긴다! 커헉!”

“총통! 총통 뭐 하나! 네놈들이 그러고도 내 영(營)의 사람이더냐! 얼른 저쪽을, 흐악!”

거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녹영군 장수들과는 달리, 회군의 무관들은 배웠던 재주 한껏 발휘하여 이리저리 몸짓을 하고 있었으므로, 상군의 선두가 성으로 달려가며 시선 끄는 사이 눈치껏 뒤따라온 양창(洋槍, 라이플) 사수들의 날카로운 눈매에는 너무나 잘 띄었다.

“젠장! 거기 너! 성을 돌면서 말을 전해라! 놈들의 양창대(洋槍隊)가 우리쪽 무관들을 노리고 있다!”

마침내 지휘하던 이들이 한 대여섯쯤이나 쓰러졌을까. 그나마 눈치 빠른 군교(軍校) 하나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머리에서 반 뼘쯤 위로 총알 튀는 소리가 났다.

“모두 고개 숙이고, 화포 쏠 때만 몸을 세워라!”

“사다리! 사다리다!”

지휘관이 먼저 자라목 하고 있으니 군졸들이 고개 내밀 엄두를 낼까. 물론 회군에도 양창 사수는 있었으니 그들이야 고개 내밀어 총 쏘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나머지는 고작 성가퀴만 보고 있다가 뭔가 걸쳐지는 소리가 나면 그때야 움직였다.

“늦기 전에 밀어라!”

“올라왔다! 뚫리기 전에 막아!”

용맹한 무관 하나가 대도 들고 불쑥 달려나가, 올라온 상군 병사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보았느냐! 놈들은 모두 지쳤다! 이대로만... 헉!”

말 마치기도 전에 뇌수 튀기면서, 바로 곁에 쓰러져 고혼이 되었지만.

창칼과 사다리 든 자들이 무얼 하든, 양창 든 자들은 다른 이들이 무얼 하든 한쪽은 풀숲에 엎드리고, 다른 쪽은 성가퀴에 몸 맡기고서 탄환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되니 아무래도 화망 촘촘한 쪽은 상군이었다.

“총통! 총통 뭐하나! 놈들 양창대를 노려라!”

“양창대가 안 보입니다! 어디 서 있다는 말입니까!”

“더 잘 찾아봐라! 없을 리가 없지 않더냐!”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총알이요, 날아가는 것은 목숨이라. 기껏 덕국에서 들여온 비싼 화포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놈들이 물러간다!”

“만세! 대청 만세!”

갑자기 아래에서 들려오는 함성이 팍 줄어들었다.

“이때다! 전원 방포하...”

그리고 환호성 지르던 이들도, 오늘의 마지막 전공 세워보려던 자들도, 후퇴하는 상군을 엄호하는 양창대의 일제사격에 모두 바람구멍 뚫린 채 다음날 해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날 밤, 주인 없는 직례총독부원(直隸總督部院)에 간소하게나마 차려놓은 회의실에서는 논쟁이 오고갔다.

“저들이 미리 뿌린 격문에 따르면 십만 대군이라 하는데, 반으로 잡아 오만이라 하여도 우리의 열 배입니다. 병법에도 열 배면 능히 성을 포위할 수 있다 했습니다. 이대로는 오래 버틸 수 없어요.”

“유 대인, 그렇다 한들 어찌 나라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소?”

“방 대인, 오늘 싸움만 보더라도 우리 회군의 전사자만 거의 이백에 달하고, 그 중 서른 가까이가 대소 군교에요. 놈들의 양창대가 그렇게 매서운데, 대인의 녹영군은 고작해야 궁시나 낡은 조총이 전부 아닙니까?”

“흥, 유 대인 쪽도 내 보니 그 비싼 화포 들여와서 거의 쓰지도 않던데? 우리에게만 무어라 할 것은 아닌 듯하오만.”

회군 5개 영의 우두머리 유자빈(劉字斌)과 보정의 녹영군을 이끄는 방평광(龐平洸)이 한치도 물러나지 않고 다투니 참석한 부하들도 노기등등. 당장이라도 의자 박차고 일어날 기세였다.

“바로 그 화포가 있었기에, 오늘 놈들이 제대로 대형 갖추어 밀려들지 못한 게지요! 오만 명이 일시에 들이쳤더라면 우리가 오늘 정말 막아낼 수 있었으리라 믿으십니까?”

“물론이오! 보아하니, 놈들은 군장을 가볍게 꾸리느라 그저 급히 만든 사다리가 전부인 듯하오. 허나 이곳 보정의 성벽이 어떤 성벽이오? 그 옛날 조송(趙宋) 시절부터 쌓아올려 지금까지 왔소. 영영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이중당께서 원군 보내실 때까지는 능히 버틸 수 있소이다!”

잔인한 우연일까, 방평광이 그 말 마치자마자 우렛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겨우 정신 되찾을 무렵, 다른 병사들도 모두 정신을 차린 것인지 저마다 비명 지르며 뛰어다녀, 굳이 누굴 보내 사정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성벽이 무너졌다!”

“놈들이 곧 몰려온다! 피해라!”

“도망쳐야 해!”

“남쪽엔 놈들이 없다! 모두 영훈문(迎薰門, 남문)으로!”

그 대충 만든 사다리란, 금방 부서지도록 가볍게 만든 것들이요, 낮 동안 사다리 들고 몰려든 자들은 사실 그 옆에서 조그만 보따리와 곡괭이 들고 조용히 성벽에 다가선 이들을 가리기 위해 목숨을 던지며 달려든 것이었다.

곡괭이로 성벽 밑동에 낸 구멍에 끼워 넣은 조그만 막대는 바로 조선 땅에서 요새 광산에 쓴다던 낙씨작약(諾氏炸藥, 다이너마이트)이요, 얼기설기 만든 사다리가 부서져 성 아래에 쌓이니 도화선을 은밀히 감추었다.

물론 무슨 짓을 하는지를 미리 알았더라면 회군도 바보는 아니므로 뭔가 대처하였겠지만, 고개만 내밀면 바로 양창대의 먹잇감이 되어버리니 어찌하겠는가.

그리하여 상군이 밤에 몰래 다가가 불화살 날리니 곧장 불 번져, 방평광이 자랑한 근 구백 년 된 성곽이 하룻밤새 폐허로 변하게 되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유 대인, 유 대인! 방도가 있겠소?”

언제 매도하였냐는듯, 절박하게 달라붙은 방평광을 떼어놓으며 유자빈이 말했다.

“후, 어렵겠지만, 미리 이럴 때에 대비해 이중당께서 보내주신 계책이 있었소. 적은 지금 무너진 성벽으로 밀려들고 있을 테니, 우리 회군은 도망하는 시늉을 하다가 우회해 적의 뒤를 치겠소.”

뭐라 토를 달고 싶어도, 녹영군을 데리고 밤중에 적을 공격하기는커녕 기동하는 것조차 불가능함을 모르지 않았던 – 아마 지금같은 순간이라면 문루 나서자마자 고스란히 흩어져버릴 것이다 - 방평광은 그저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내 남은 군졸을 수습해, 최대한 이곳 총독부원이라도 지켜보겠소.”

“모두 말에 올라라! 성을 빠져나간다! 대포는 아쉽지만 포기한다!”

총독부원 나서자마자 목소리 키워 지시 내리니, 부관 하나가 물었다.

“대포를 포기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적의 배후를 치고 다시 돌아오는 계책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멍청한 녀석. 그게 진심이었으리라 믿느냐? 북양대신 각하께서 내리신 밀명은 이것이다. ‘처음에는 힘껏 싸우되 여의치 않게 되면 지체 없이 병력 보존하여 퇴각할 것.’ 우리가 그분 속뜻을 감히 헤아리겠냐만, 적어도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예, 대인. 소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명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공친왕이 거병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보정이 떨어지고, 곧 공친왕이 군세 몰아 북경으로 치달리니 온 세상의 이목이 쏠렸다. 처음에는 공사관이 긴긴급급(緊緊急急) 네 글자를 앞에 붙여 보낸 전신으로, 그 다음에는 북경에서 상해 거쳐 들어온 영자신문으로 소식 접한 조선도 이는 마찬가지라, 그날 부로 의주 고을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은 활짝 열리고, ‘천세’ 연호하는 백성들 뚫고서 제복 차려입은 군대가 북쪽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동삼성을 지키러 오셨다는 겁니까?”

여전히 제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던 건너편 안동(安東)의 지현(知縣)은 어안 벙벙하여 물어보았다. 자신이 있는 동안에 이런 병란이 일어날 줄은 알았겠는가? 열심히 뇌물 바쳐가며 이 자리 땄을 때는 그저 조선과의 교역으로 돈방석 앉을 생각만 했던 것이다.

“물론이오. 이는 성상께서 명하시고 귀국 북양대신이 함께하는 일이니, 잘 살펴주기 바라오.”

그에 답하는 것은 이쪽 부대-침공군?-를 이끄는 한성근이었다.

“하지만 소관은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거 이래도 될지...”

이제는 용만(龍彎) 일대에도 심심찮게 보이게 된 기선 오가고, 기선에 실린 물자에 자리 내어준 병사들은 쪽배 타고서 대국 동삼성에 ‘쳐들어갔다.’

그러나 청국이 적은 아니요, 그 땅에서 곧 난리 칠 도적이야말로 바로 적이라 하니, 나라 선비들의 이백오십 년 묵은 염원 북벌이라지만 막상 강 건너자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막막하였다. 마침 소란 듣고서 관아에서 뛰쳐나온 지현이 있기에, 도강을 알리기도 할 겸 찾아갔더니 그쪽도 넋이 나가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른 나라에 군대 몰고 들어가 하는 첫 번째 작전행동이 입국신고였다면, 사실 이 지현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런 반응을 보임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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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는 영 시원찮게 나온 이홍조는, 실제 역사에서는 청류파의 거두로, 이홍장과 좌종당 등 양무파 공통의 정적이었습니다. 함풍제부터 광서제까지 세 황제를 모시면서, 향용 출신으로 입신한 양무파의 대척점에 섰지요. 작중에서야 서태후가 철도의 일을 계기로 수구 노선을 엉겁결에 버리게 되면서 붕 떴고, 졸지에 정적 이홍장과 손을 잡기에 이르렀지만, 원 역사에서는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며 (물론 서태후의 정치적 의도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소신있게 할 말은 하며 살았지요.

특히 동치제 생전 원명원 수축 시도에 지속적으로 반대한 것이나, 무능한 충허(작중에도 이전에 두어 번 나왔습니다.)가 일리 전체를 러시아에 넘기고 배상금까지 물어주는 내용의 리바디아 조약을 체결하자, 극렬히 탄핵해 바로 조약을 개정하도록 조정의 시책을 바꾸는 데 성공합니다.

그 외에도 평소 서화에 능해 오늘날까지 명성이 전합니다. 이름이 심지어 한자까지 이홍장과 비슷해서 친척으로 오해를 받습니다만, 둘은 전혀 혈연상 관계가 없습니다. 인명용으로 쓰이는 한자만 간추려도 족히 5천자는 넘겠지만, 중국 인구를 생각하면 오히려 겹치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하겠습니다.

좌종당의 상군은 프로이센제 드라이제(Dreyse) 소총을 비롯해 여러 서구식 소총으로 무장했습니다. 이는 물론 회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작중에서는 압도적인 수적 열세로 인해 힘을 잘 쓰지 못했지요.

1841년 프로이센군에 의해 도입된 드라이제 소총은 후장식, 그러니까 총구가 아니라 총의 뒤쪽에서 바로 장전하는 방식의 혁신적인 소총이었습니다. 병사 개개인의 편리성을 떠나서, 무엇보다 장전할 때 중력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서거나 쪼그려야 했던 전장식 소총과는 달리 엎드려쏴 자세로 지속적인 사격이 가능했지요. 원 역사에서 프로이센이 승승장구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

한편. 1860년대 말 발명된 다이너마이트는 보불전쟁에서 바로 군용으로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원 역사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세계대전급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저 때를 제외하면 군용으로 별로 쓰이지 않았지요.

그러나 비교적 안전한 폭발물이라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요소였고, 특히 아직 이류 열강이던 미군 같은 경우 싸게 운용할 수 있는 화력지원 및 대함무기로 다이너마이트를 발사하는 소구경 화포(잘린스키 포, 심즈-더들리 포 등)를 꽤 운용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다이너마이트 순양함' 베수비우스 같은 괴작도 있었지요.). 다이너마이트도 TNT 등 이후 세대의 폭약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분명 군용으로 쓸 유인이 있던 셈입니다.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을 거치며 크게 성장한 회군과 상군은 본래 청의 정규군인 팔기와 녹영군을 밀어내고 사실상 정규군의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사실상’이라는 말이 붙는 것은 이들이 실제로 근대적 국민군이라기보다는 전근대적 관료제와 중첩된 (이홍장을 생각하면 편합니다) 군벌에 가까웠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이들을 묶어주던 중앙 정치조직으로서 청이 붕괴하면서 중국은 군벌이 난립하는 대혼란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녹영군 역시 청일전쟁 패배 이후 제대로 된 근대적 군대 편성이 시도될 때까지 명맥을 이었습니다. 사실상 민경부대나 헌병에 가까워져, 주요 요소의 경비와 치안유지 수준의 임무만 맡았습니다만, 어쨌든 남아는 있었지요. 흔히 이 시기의 청군으로 이홍장의 회군 정도만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이들 향용 출신 부대가 군사력의 핵심이라 해도 곁가지로 다른 요소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훨씬 큰 규모로 운용되곤 했습니다. 당장 원 역사의 좌종당도 신강 정벌에 12만 대군을 동원했지요.

페어뱅크(1980)의 고전적인 추산에 따르면, 1871년 시점 회군의 총 병력은 4만 5천에 달했으며, 지역별로는 섬서(20,000), 직례(13,500), 강소(4,500) 등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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