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03화 (103/320)

34. 두 북벌 (1)

좌종당까지 신강을 떠나면 눈에 띄지 않기가 어려웠으므로, 이곳 태원(太原)까지 잠행하여 온 것은 공친왕 혼자였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가끔 봄비도 내리고 해야 하건만, 그러기는커녕 산서성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 일변도였다. 심란한 공친왕의 기분을 생각하면 단비는 아니 내리더라도 조금 흐린 편이 낫겠지만, 언제는 하늘이 사람 마음을 알아주던가.

“우순풍조(雨順風調)해야 국태민안(國泰民安)일진대 이제 비바람도 이치를 잃고 나라도 평온을 잃게 되었습니다, 전하.”

어느새 옆에 따라붙은 장지동이 말을 걸었다.

“매년 풍년이 들어 곳간이 가득 차더라도 위정자가 못나면 모두 군량으로 쓰이고, 매년 흉년일지라도 인군이 덕이 있으면 누구도 곳간의 문을 잠그지 않아 배곯지 않는 법일세.”

장지동이 비록 모의에 함께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심복하지는 아니하였음을 이힌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평복하고서 조선으로 떠난 마신이가 횡액(橫厄) 당하였으니, 설마 좌종당이 배신하였을 리는 없고 – 정확히는, 그가 배신하였으면 어차피 거사는 끝난 것과 진배없었으니 애초에 따질 필요가 없었다 – 남은 것은 장지동 혼자였다.

그러나 북경에 남아있는 옹동화(翁同龢)가 몰래 전하기를, 그 외의 다른 계획을 누설한 바는 없는 듯하다 하였으므로, 공친왕도 비로소 장지동이 정말 그를 팔아넘겼다기보다는 따로 복심에 품은 뜻이 있어 그리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전 철도의 일이 불거졌을 때도, 후대로부터 못난 선비라 모멸당할 각오 하고서 조선왕에게 호소하였던 장지동이다.

“전하, 꼭 거병하셔야만 하겠습니까? 물론 지금 아조가 병든 것은 맞습니다만, 그렇다 하여 극약을 마구잡이로 처방하면 환후가 어찌 되겠습니까?”

공친왕 본인도 수십 번 고뇌하였던 바였다. 그러나 결국 답은 한 가지였다.

“그렇다 하나, 이제 연희당에 계신 분(燕禧堂, 서태후)과 이 사람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쉬고 있을 수 없게 되었네. 참으로 망측한 이야기임은 알지만, 자네도 생각해보게. 아조를 위하여 누가 살아남음이 가하겠는가?”

한동안 행랑에 두 사람의 또각거리는 발소리만 울렸다. 마침내 용기를 내었는지, 장지동이 정적을 깼다.

“아마 지금쯤이면 전하께서도 짐작하고 계실 터입니다. 기실 천진의 이중당(이홍장)과 종종 글을 주고받으며 근자의 정세를 논하곤 하였습니다. 곡산(谷山, 마신이)의 일도, 중당이 그처럼 궁벽한 수를 쓸 줄은 몰랐지만 제가 토설한 것이 맞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라가 골육의 다툼으로 혼란해지기 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능히 누설할 수 있었음에도 금궐(禁闕)의 담 안쪽으로 투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곳 태원 땅을 우리 거병의 근거로 내주지를 말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앞뒤가 맞지 않네그려.”

날카로운 질문에 태연한 답이 뒤따랐다.

“전하, 비록 이 장 모가 세상모르는 선비라 하나, 저자의 천한 장사꾼조차 협상할 때는 서로 짐짓 강한 체를 하기 마련임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서태후 전하께서 집정하심에 잘못이 있음도 어찌 아니라 하겠습니까.

그러니 전하께서 직례 옆에 웅거하여 세력을 갖춘 연후에야 비로소 저쪽에서도 진지하게 교섭하려 나설 것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으면 말로는 화합하면서 뒤로는 찌르려 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실지로 이중당에게서 다툼 없이 해결하자는 서한을 받은바, 전해드리고자 이렇게 전하께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공손히 소매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어 바쳤다.

“중당에게 지금 전하께서 어디 계신지, 천산에 가 있어야 할 상군은 또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까지는 발설하지 않았으니 안심하십시오. 그저 중당이 전하께 대신 올려달라 청한 것입니다.”

단매에 뜯어보니 과연 이홍장의 필적이 맞았다.

내용을 살피면 이러하였다. 조선 땅에 가서 교섭한바, 마신이의 의안에 관해 더 억지를 부리지는 않겠으나, 혹 중원에 어지러운 일이 일어나면 동삼성에 나아간 조선인 및 조선의 보호를 받는 국외인을 지켜야 하므로 부득불 군병을 낼 것이라 하였다.

그러니 혹 병장(兵仗)의 힘으로 국정을 뒤엎으려 한다면, 한 번 거사로 마무리까지 끝낼 수 있다면 모르겠으되, 열에 아홉은 실패할 것이요, 그리 되면 외세가 끼어들 뿐 아니라 당장 조선이 동삼성을 낼름 집어먹게 될 것이고, 나아가 지금 천조의 제대로 된 몇 안 되는 군대인 회군과 상군이 모두 다투다 지쳐버릴 테니 또한 대청 전체의 손실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세가 그처럼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 부디 천진에서든 태원에서든 만나 서로 피 흘리는 일만은 없게 하자. 응해주기만 한다면 사사로이 군대를 움직인 일은 천산 오르기 전 비밀리에 수행한 훈련이라 옹호해줄 것이요, 나아가 서태후가 함부로 핍박하지 않도록 조정에서 최대한 힘을 쓰겠다. 이것이 그 골자였다.

“어떠한지요?”

장지동이 공친왕의 눈치를 살폈다.

“ 지금 이중당은 천조가 혼란해지면 조선이 동삼성을 노릴 것이니 망동하지 말라 하지만, 그들이 그리 나온다면 훗날 죄를 물어 토벌하면 될 일이야. 천하를 바로잡는 일에 비하면 외려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아.”

아마 조선이 비빌 언덕 없이 그렇게 나서지는 않을 것이니, 필히 아라사의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친왕 자신은 영국의 힘을 빌리면 된다. 비록 아주개발은행이니 하는 기묘한 제도로 아라사가 발 뻗치는 것까지는 용인했다지만, 대놓고 중원까지 노리는 꼴을 좌시할 영국은 아니니 말이다.

“이 비루한 몸이 죽어 대청이 만만세세 이어질 수 있다면 내 오늘에라도 당장 목숨을 내어놓겠네. 허나 그게 아니지 않은가?”

공친왕이 조금 더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서태후 쳐내고 나도 천자의 윗자리에 앉아보고 싶다’라 답하겠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전하, 물론 전하께서는 참으로 인덕이 깊으시고 지재가 빼어나시니, 가히 금세의 주공(周公) 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허나 그 길에서 창칼로 조정을 뒤엎으시려 한다면, 이것은 주공이 아니라 저 법국 나파륜(拿破崙, 나폴레옹)과도 같은 것 아닌지요? 나파륜은 창칼로 구주의 패자 되려 하였다가 끝내 패망하였으니, 후대에 계고하는 바가 될 법합니다.”

“덕으로써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내 치효(鴟鴞)든 상체(常棣)든 골백번은 지을 것이야. 그러나 이미 그럴 때는 지났네. 사람을 잘못 믿어 신유년(辛酉, 1861)에 한 번 칼 들어 해결할 수 있을 일을 지금까지 끌어왔어. 나 한 사람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천조가 십칠 년을 내리 고통받았다 이 말일세.”

어디서부터가 우국의 심정이요, 또 어디서부터가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인가. 시작은 전자였으되 점차 자신을 옭아매어, 이제는 정말로 빠져나오려야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범의 형상을 취하였으니, 산 하나를 어찌 두 범이 함께 쓰겠는가?

대신 절박하게 따라잡는 장지동을 따돌리고서 자리를 옮길 뿐.

길게 늘어선 행랑을 지나면서, 신강에 머물 때부터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새기고 새긴 지도를 다시 떠올렸다.

본래 계획은, 병력을 모두 여섯으로 나누어 태원부터 흔주(忻州) 사이에 흩어놓은 뒤, 거병할 날이 되면 일제히 출발해 수양(壽陽)에 집결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태항산맥을 넘어 일시에 보정(保定)에 들이치면, 거사의 절반은 끝난 셈이다. 급히 모인 회군을 격파하면, 이를 신호 삼아 북경 안의 군기대신들이 내통했던 대로 혼란을 일으켜 서태후의 도피를 막는다.

분진합격(分進合擊)이라는 것은 병서에서 보았을 때는 그럴듯해 보여도 실제 싸울 때를 생각하면 대개 궁여지책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장지동이 산서순무라지만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모여드는 것을 모두 숨기지는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곳곳에 흩어놓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두 해 전부터 사계의 조화가 불순하니, 여름은 겨울 같고 겨울은 여름 같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농사를 접어야 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므로, 눈치 빠른 이들은 저장한 곡량 있다는 곳으로 떠나고 눈치 없는 이들은 벌써 하나씩 쓰러져 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태원성 한 곳만 해도 빈집이 벌써 수백 채요, 인근의 자잘한 현까지 합치면 말할 것도 없어, 빈 인구만큼 병사들이 숨어들어와 하등 티가 나지 않았다. 천하 전체로 보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거사를 위해서는 고약한 천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큼직한 전각의 문 열고 들어서니, 그 삐거덕 하는 소리에 이힌은 상념을 떨쳐냈다. 미리 와 있던 각 영(營)의 군관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그대들이 그 옛날 사교의 난 때부터 떨쳐 일어나 지금껏 싸워온 모든 것은 오직 대청의 만세토록 이어질 사직을 위함이었다. 이번 거병은 그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니, 좌단(左袒)하는 뜻으로 모두 임할지어다.

우리가 취할 성은 단 둘. 보정(保定)과 북경뿐이다. 그 외의 모든 성은 버려두고, 만나는 적은 적으면 에워싸고 많으면 돌아갈 뿐,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제장(諸將)은 내가 이처럼 누차 강조하는 까닭을 헤아려 살피도록 하라.

명일 축시(1시~3시)에 출성한다. 수양을 거쳐 직례에 도달할 때까지 연이어 이틀은 내리 달려야 하므로, 각 영에서는 오늘 장졸을 배불리 먹이도록 하라.”

“예!”

6만 대군을 모두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하였더라면 만세 선창이라도 했겠다만, 그럴 기분은 아니었다. 대신 여러 장수의 눈에 스치는 결연함을 확인하였으니 그로 족하였다.

“청국의 돌아가는 형세가 예사롭지 아니함은 모두들 들어 알고 있을 것이야.”

“예, 합하.”

결국 그 모든 소동에도 불구하고, 운현궁의 ‘정강계(靖疆契)’ 모임은 이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무관들이 생각하기에, 그렇게까지 시끄러웠는데도 오히려 멀쩡히 유지됨은 필히 이루 말할 수 없는 지엄한 곳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증좌라, 모임마다 보무도 당당히 찾아왔던 것이다.

“성상께서 전교하시기를, 만에 하나 불측한 일이 청국 안에서 일어난다면 또 천하가 혼란해질 터이니 국경을 지키고 나아가 그 밖의 우리 백성도 지켜야 한다 하셨네. 그 옛날 사교의 난이나 도적의 횡행은 강남에 머물고 잘해야 하북(河北)까지 올라올 뿐이었지만, 이제 청국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필히 연경을 노릴 것이므로 성경을 넘어 바로 우리 영역까지 난(亂)이 퍼질 것이야.”

눈치껏 정운구가 이어받았다.

“병법으로 따지자면, 그처럼 난이 닥쳐옴을 미리 알고 있을 때 기다려 방비함은 하책이요, 미리 나아가 물리침으로써 우리 땅의 재액 되지 않게 함이 상책일 것입니다.”

물론 그 눈치 없이 찬동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마침내 천하의 운수가 돌고 돌아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마땅히 동명왕께서 발흥하신 고토를 거두어 우리 것으로 삼게 되었으니, 실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원의 어지러움이 하루아침에 도로 잦아든다면 다행이지만, 하다못해 세 칸짜리 초가를 소제하여도 그 먼지가 반나절이나 지나야 가라앉거늘 어찌 그렇겠습니까? 어명이 내리는 즉시 북변으로 나아가 요하 강물에 말 목을 축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대원군이 예상한대로의 반응이라, 아무리 엄익관(사관학교) 두어 가르친다지만 무부(武夫)의 우직함은 그대로라 여겨 속으로 실소를 감추었다.

“자, 자. 청국이 비록 한때의 원수라 하나 지금은 서로 돕는 이웃이요, 함께 북쪽을 지키는 사이일세. 남의 집 불을 끄러 간다 해 놓고서 그 집에 눌러앉아 있으면 어찌 도리를 아는 자라 하겠는가?”

물론 불난 집에서 패물 한두 점 슬쩍하는 정도야 도리를 벗어나는 건 아니지만.

“잊지들 말게. ‘만일’ 우리가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면 결코 한 뼘의 강토도 탐하여서는 아니 되네. 성상께서 엄연히 이웃 나라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야 한다 이르셨으니, 신하된 자로서 어찌 그 아름다운 뜻을 더럽히겠는가?

오늘 이 모임에서 논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네. 도강(渡江)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노려야 하는가? 강역을 탐하였다는 오명을 쓰지 않고서 군병을 낸 만큼의 이익을 취하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무릇 왕패(王霸)의 갈림은 강역의 넓고 좁음에 있지 않느니.”

그러니 다들 고민에 빠졌다. 군사를 낸다면 마땅히 땅을 정벌하든, 반적(叛賊)을 토멸하든 하는 것이지, 이웃나라를 돕겠다며 팔 걷어붙이되 정말로 어찌하면 도울 수 있을지 – 그리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 생각해보라니, 동전 서너 푼 주고서 저자에 나가 비단 다섯 필 사 오라는 것과도 같지 않은가.

“우선 얻을 수 있는 이익이라면 병마의 조련에 있을 것입니다.”

“조련이라?”

고민하던 윤웅렬이 한 마디 내어놓았다.

“그렇습니다. 대저 병비(兵備)의 옛 제도로는 겨울철 사냥으로써 병마를 조련하였습니다만, 오늘날 양이의 방식대로 짠 군대로 말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여 그처럼 진법 연습하는 정도로는 제대로 조련한다 할 수 없습니다.

금군을 혁파한 것으로 따지면 이제 열 해가 거의 다 되어가고, 연병법으로 십만 병사를 얻게 된 것은 곧 다섯 해가 됩니다. 그러나 아직 한 차례 싸움도 하지 않았으니, 일전에 아라사와 두만강을 놓고 대치하였을 때도 강가에서 서로 노려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을 계기삼아, 북쪽에 날뛸 도적을 때려잡는 명목으로 우리의 내실을 다지면 어떻겠습니까?”

군대를 새롭게 만들어놓고 정작 쓸 일은 없었으므로, 개화에 딱히 기여하는 바가 없다며 눈칫밥 먹던 군부였다. 군부도 개화의 이득을 얻게 해준 것은 금상이었으므로 감히 탓할 마음은 없었지만, 또 금상이 전쟁을 꺼리는 탓에 쓸모없다는 세인의 평을 듣게 되었으니 억울한 면은 있었다.

“고사를 살펴보면, 무릇 의군(義軍)을 칭하는 자들 중 실제로 의(義)를 따르는 이는 적었습니다. 허나 백에 하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들은 민심을 크게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하여 북변에 우리의 무위(武威)를 떨치면서도 오직 도적만을 토멸해 그곳 백성의 원망을 사지 않는다면, 청국인들은 우리의 힘과 더불어 우리의 의로움도 알게 되어, 업신여기지도, 미워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어느새 젊은 무관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서 모임마다 기탄없이 생각하는 바를 내어놓던 홍재희도 어김없이 뜻한 바를 논의에 보태었다. 옆을 살짝 보니 오경석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원군이 듣기에도 그럴듯하였다.

조선이 마침내 이빨을 드러냈다 여기며 한껏 경계하였는데, 와서 하는 일이 현지 관헌과 함께 도적들 때려잡는 데 그친다면 저들의 반응이 어떻겠는가? 이처럼 경계하는 마음의 뿌리를 미리 끊어놓으면 먼 훗날 제대로 북쪽을 도모하게 될 때 필히 도움이 되리라.

“하하, 역시 자네들처럼 헌걸찬 장사들을 모아 의론한 보람이 있군그래. 금번 북벌은, 만약 하게 된다면, 참으로 소출이 크겠어! 하하하.”

곧 계에서 오간 이야기대로 통리아문과 군부에서 상주하니, 임금도 재차삼차 출병하는 뜻을 강조하고서는 그대로 하라 하교하였다.

그리하여 공친왕이 보정성을 들이쳤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곧장 의주로 전신이 한 통 전해지니, 외침인듯 외침 아닌 기묘한 싸움이 이로써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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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산서순무는 1876년 포원심(鲍源深)이 물러난 뒤 증국번의 동생 증국전(曾國筌)이 물려받습니다. 장지동도 나중에 산서순무가 되기는 했습니다만, 이는 1881년의 일이었습니다.

상군의 시작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을 위해 증국번이 호남 일대의 민병대(단련)를 모은 데서 출발했습니다. 남경 탈환 이후 대부분 해산하였지만, 실제로는 회민 반란 진압을 위해 좌종당이 동원한 초용(楚勇)처럼 이름만 바꾸어 옛 상군의 중핵은 꾸준히 유지되었기에,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작중 등장하는 ‘상군’이라는 명칭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원 역사의 청조는 1875년부터 1878년, 길게는 1880년까지 이른바 정무기황(丁戊奇荒)이라 하는 대기근에 시달렸습니다. 산서, 섬서, 직례, 산동, 하남 등 황하 유역 및 그 이북에 심대한 타격을 준 이 기근은, 비축된 곡량이 고갈된 1877년부터 본격적으로 심화되었습니다. 중국 특유의 과장이 있겠지만, 기근 전 인구 백만을 자랑하던 태원부는 기근 후에 인구가 5만으로 줄었다고까지 하지요 (물론 다 죽은 것은 아니고, 대부분 먹을 것을 찾아 유리걸식하였기에 통계에 잡히지 않은 것이겠지만요). 총 사망자는 1천만에서 2천만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청조 인구의 약 2~4%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담으로, 지금까지 계속 나온 ‘직례(直隸)’는 말 그대로 직할령이라는 뜻으로, 수도 주변을 말합니다. 청대의 직례라 하면 북경 주변, 그러니까 북경과 천진, 하북, 산동 일부 등을 포함합니다.

주나라 문공은 문왕의 넷째 아들로, 공자 이래로 유학에서 바라보는 성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역사적 실체야 어찌 되었든, 어린 천자를 보필하여 아직 불안정하던 주(周)의 통치를 안정화하였지요. 그러면서도 천자의 자리를 노리지는 않았기에 (정확히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에) 후대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였음에도 지속적으로 다른 왕족들과의 다툼을 피할 수 없었는데요, 작중에 언급되는 <치효>와 <상체>는 문공이 이를 안타까워하며 지은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두 『시경』에 수록되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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