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01화 (101/320)

33. 산의 짐승이 다하기 전 (2)

한성 거리를 새벽 어스름 뚫고 달리는 이 있었으니 바로 장문상이었다. 새로 길을 내면서 이전의 그 구불구불하고 장정 한 사람이나 제대로 지나갈까 싶던 골목이 싹 말끔하게 바뀌었으므로, 다니기는 편하되 외려 남의 이목 피하여 다니기는 어려워졌다.

그래도 일찍이 주변을 둘러본 보람은 있어, 그리 헤매지 않고서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옛날 전장 누비던 시절의 기억이 쓸데없이 떠올랐다. 몸 주인이 무어라 생각하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의 수면 위에 떠오르니, 곧장 자신이 납탄 세 발을 쏘아넣은 그의 의형 마신이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 형, 딱히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소.’

따지자면 은(銀)이 사람 팔자 망치는 원수이지 않겠는가. 기껏 아편 퍼지던 때 겨우 참았더니 대신 쌓이는 것은 도박 빚이었다. 그리하여 난 끝나자마자 마신이에게 작별 고하고 군문 떠난 것이 실수였는가 하고 후회하던 중 어쩌다 상군(湘軍) 군교의 눈에 띄어, 다름 아닌 증국번에게 직접 쓰임새 있는 패라고 인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마신이가 이곳 한성에 부임하였을 적부터, 천진과 조선을 오가는 연락책 겸 밀정 노릇을 하였다. 처음 약조하였던 대로, 마을 하나는 통째로 살 법하였던 그의 빚은 곧 눈 녹은 듯 사라졌다. 그러나 한 번 이렇게 편하게 돈 버는 버릇이 돌아오자, 그 옛날 염군 무리 따라 도적질하던 못된 습성이 되살아나, 다시 정직하게 일하기보다는 비슷하게 기회를 노려 한탕 할 생각이 앞섰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않겠소. 배후가 누군지는 나도 모르지만, 여하간 어차피 나 아니더라도 누군가 와서 똑같은 일을 했을 테요.’

물론 마신이에 대해 쌓인 정이 없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의리니 인덕이니 하는 것은 지체 높고 배운 어르신들이나 따지는 것이지, 그와 같이 밑바닥 겨우 면한 사내에게는 귀하게 여기더라도 더한 귀물이 눈앞에 놓이면 당장의 호구를 위해 갈아치울 수 있는 물건이었다.

증국번이 병사한 이후에는 그대로 끈 떨어지나 했더니, 그 막료로 있던 중 누군가가 나서서 그 끈을 도로 동여매었더란다. 자신이야 어차피 늘 만나던 중간 담당자만 만날 뿐이니 맨 위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앞서 옛 정인(情人) 핑계 대고 색주가 사이에 알아두었던 빈집에 잠시 머물다가, 때를 엿보아 제물포까지 가서 배 타고 떠나가면 그만이다. 잠시 그림자 사이에 서서 숨 고르던 장문상은, 잠깐이나마 이 마지막 한 번의 일로 일약 부자 되어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하였다.

그때, 멀리 반대편 대로에 제복 입은 군졸의 무리가 코쟁이 의생 두엇을 대동하고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가는 방향을 보면 마신이 머물던 손택빈관 쪽이었다.

혹시 그가 손을 잘못 써서, 목숨줄을 확실히 끊지 못한 것일까? 처음 제물포에 내렸을 때 거사에 쓰라며 받아온 육혈(六穴) 수창(手槍, 권총)은 영 손에 익지 않았다. 그래도 요상하게 생긴 것이 양창(洋槍, 서양 총)은 맞으므로, 비록 어두운 가운데 가까이서 갈기느라 가슴팍에 제대로 꽂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마신이 한 사람의 명을 가르기에는 족하였을 것이라 여겼다.

어쨌건 마신이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으니, 거기서 절명하였든 아니면 피 흘리며 까무러쳤든 암만 용한 양의(洋醫)라도 되살려낼 리야 있겠는가 싶었다. 그리고 설령 살아나더라도, 자신은 보상만 받고 고향 돌아가 떵떵거리고 살면 될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한양 색주가가 누구의 손아귀에 있고, 그 색주가 주인은 또 누구의 아래에 있는지를 알았더라면, 그런 의기양양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빼어난 후학과 연이 닿아 가르칠 수 있게 됨은 아성(亞聖, 맹자)께서도 이르신 군자의 복락이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스승으로서 얼마나 즐겁고 보람찬 일인가?

적어도, 서책에서 배운 대로라면 그러하여야 할 것이지만, 지금 참의원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볼작시면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하였다. 요즘 부쩍 노쇠함을 체감하는 박규수로서는 미간을 부여잡을 뿐.

“마 대인은 아국과 대국 사이에서 참으로 많은 공을 세운 금세의 명신(名臣)인데, 경조(京兆) 한복판에서 끔찍한 일을 당하였소! 굳이 청국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일을 당한다면 천하의 어떤 나라든 원통하게 여길 것이외다.

더구나 흠차대신 모 공이 밝힌 것처럼, 근자에 무관들이 모여 수상한 모의를 하기도 했다지 않소이까? 장차 대국과의 수호와 우의를 생각해서라도 마땅히 저들의 청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오.”

개화당의 당론은 어쨌든 청국에게 협조하자는 것이었다. 분명 운현궁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내막을 모두 알 수 있겠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겉으로 보이는 사정만 가지고 사리를 판별할 수밖에 없는 법.

이때다 싶었는지 모창희는 평소 쌓였던 불만을 모두 털어놓을 심산인지 강경한 말을 매일 쏟아내었다. (이번 의안(疑案)으로 가뜩이나 밀렸던 퇴임 일정이 더 미루어졌다는 데서 나오는 짜증도 있었을 것이다.) 도성 대부분의 사람들 – 심지어 많은 신료들에게조차 – 비밀이었고, 정말 중신이라 자처할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나 암암리에 ‘그런 모의가 있다’ 정도로 알려져 있던 대원군의 계 이야기를 전면에 꺼낸 것도 그러한 뒤틀린 심사의 발로였을까.

여하간 겉으로 보기에는 청국이 노발대발할 사유가 차고도 넘쳤으므로, 청국과의 교역, 북쪽 땅 개척하러 나아간 조선인들의 안위, 그리고 나날이 진척을 보이고 있는 제철소 공사까지, 청국과 사이 틀어지면 좋을 일 하나 없음을 아는 개화당으로서는 어지간하면 양보해주자 하는 것을 당론으로 삼았던 것이다.

문제는 그가 당론으로 정하자 해서 젊은 참의대부들까지 동의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무릇 개명한 나라 사이의 사귀는 도리는, 그 사이에 약조한 바를 굳게 지켜 서로 어기지 않음에 있습니다. 마 대인이 변을 당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 하여 이처럼 아국을 겁박하기를 일삼는 대국의 언동도 온당치는 않습니다. 힘의 강약에 압도되어 그릇된 청을 받아들인다면 어찌 개화를 꾀하는 나라라 하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다시 공산당 의원 몇몇이 반박하였다. 얼마 전 벨레가 나이를 이유삼아 사직하였다지만 그가 설파한 이상론은 적지 않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던바, 여전히 그 뒤를 따르려는 자들이 있어 공산당의 당론과는 또 반대되었다.

“그리하다 나라 사이의 언쟁이 화포로 주고받는 다툼으로 번지게 되면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신미년(1871) 이래 연병법(練兵法)으로 우리 해동의 수많은 장정들이 군적에 올라 변방을 지키고 있는데, 이들의 죽고 사는 일을 어찌 가볍게 논하겠습니까?”

물론, 대부분의 만민공산당 대부들은 – 열이면 열 운현궁에서 넌지시 이른 바가 있었을 것이다 – 굳건히 대국에 맞서야 함을 주장하였다.

“마 선생은 엄연히 벼슬하지 않는 서생의 몸으로 변을 당하였소. 그러므로 그 조사하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 관헌이 오직 스스로 처분하고, 혹 의혹이 남는다면 역시 우리 관헌에게 물어 정황을 밝히면 될 일이오.

또한 모 대인은 아국 무관들이 사사로이 공모하여 대국을 침노할 논의를 하였다 하는데, 그러면서 증좌는 제대로 내놓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공연히 욕되게 하는 것이오. 비록 대국과 우리의 사이가 각별하고 또 중하다 하나, 옳고 그름은 분명히 가려야 할 것이외다!”

대개 이러한 말이 신보 타고 퍼져, 도성 백성들을 열광하게도 하고 근심하게도 하였다. 이렇게 말로써 공박하는 일도 하루이틀을 지나 어느새 정축년(1877)이 될 무렵.

“조선은 그 문헌을 갖춤이 중원에 뒤떨어지지 않고, 또 지극한 예(禮)에서 벗어나지 않아 천하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우리 태종(홍타이지) 황제께서 신위(神威)를 떨치신 뒤에야 비로소 신복하였다.

그 이래 지금까지 섬기는 도리를 다해왔는데, 양이가 준동하여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매, 대청은 큰 은혜를 베풀어 조선으로 하여금 자주지국으로서 다른 대서의 나라와 함께 설 수 있게 해주었으니, 누대에 걸쳐 쌓아온 도타운 믿음과 성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조선이 이를 버리려 하고 있으니, 당장 대국의 대신이 참살을 당하였는데도 오직 나라 안의 일이라 우기고 있으며, 그 관리들은 스스로 그 죄를 청하지 아니하고 있다. 이처럼 실덕(失德)한 관헌이 있는 나라에 우리 백성이 여럿 가서 통상의 일에 힘쓰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애처로운가! 마땅히 천조의 군병으로써 이들을 보호하고 위무하여야 할 것이다.”

그 뒤에 덧붙여, ‘비록 조칙(詔勅)이라 하나 널리 알려 조선의 만백성을 효유토록 하라’라고 하였으므로, 곧 도성의 여러 신보에 고스란히 저 말이 실려 퍼지게 되었다.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조정은 ‘오직 나라 간의 예(禮)를 지킬 뿐이다’ 한 마디 뿐, 그 외에는 조용하였고, 공산당은 여차하면 일전도 불사하겠다며 입장을 무르지 않으니, 애 타는 박규수는 간만에 성상의 용안 뵙기를 청하게 되었다.

늘상 나누기 마련인 반가운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전하, 밝으신 덕으로 나라의 문호를 열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만, 아직 기틀이 잡히기에는 많은 시일이 남았사옵나이다. 그런데 아직 그 묘목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건만 벌써 대풍(大風) 불어오니, 가벼이 생각해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나 또한 그리 여기고 있소. 경 또한 함께 한 햇수가 적지 않으므로 알 것으로 믿소.”

옛 추억을 되살리겠다며 간만에 군밤 굽던 임금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살짝 고개 올려 용안을 살핀 박규수는 그러나 도리어 답답한 심정이 곱절이 되었다.

“신이 어찌 어지신 성심을 모르겠사옵나이까? 그러나 이번 일을 당하여서는 그러한 인덕을 베푸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신의 눈이 흐려진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래 저자에서는 조만간 청병(淸兵)이 들이닥친다 하여 걱정하는 백성이 많다 들었소. 그러나 지금이 아니라면 하지 못할 일이 있기에, 미어지는 마음을 부둥켜안고 굳게 가운데를 지킬 뿐이외다.”

귀남의 머릿속에 처음 마신이의 피격 소식을 듣고 놀라 대원군을 불러들였을 때 주고받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박규수 말마따나 둘 사이가 적잖이 깊기도 하였고, 또 지금쯤이면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이라도 설명해주어야 뒤탈이 없으리라 생각하였으므로, 미리 그간 사정을 한 타래 정도 알려주기로 작정하였다.

“기실 처음 일이 벌어졌을 때 내가 아는 몇몇은 이번 기회에 요양까지 쳐들어가자 상언하더이다. 물론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놀라 들이킨 숨소리가 안도의 한숨 되어 흘러나왔다.

“내 돌아가는 사정을 온전히 꿰고 있다고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대국 조정에 파당이 나뉘어, 장차 큰 싸움이 있을 것임은 들어 알고 있소. 그대 또한 얼마쯤은 알고 있으리라 믿소만.”

말 그대로 얼마쯤은 알고 있었다. 당장 그 옛날 연행(燕行)길에 공친왕을 직접 만나기까지 했던 박규수 아니던가.

“이르신 대로입니다. 신이 일전에 만난 공친왕으로 말하자면 그 사람됨이 차분하고 심산이 깊어, 급하고 위태로운 길을 택하지는 아니할 성정이라 보았습니다만, 사세가 여차하게 되었으니 필히 곡절이 있었을 듯합니다.”

천자가 오랑캐 군대를 피해 급히 열하로 이어하였을 때, 홀로 남아 담판을 지은 사람이 바로 공친왕이다. 대국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비록 같은 만인 사이의 싸움일지라도 필히 구주 나라들이 끼어들 것임을 모를 리 없다. 아마도 이번 다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

저들은 동철에 청국 지분이 가장 많다는 것을 아쉽게 여기면서도, 더 많은 자금을 부어 이를 바꾸기는 저어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공친왕의 편을 드는 대신 헐값에 서태후의 지분을 사들일 생각이리라.

청에 기대어 – 조금 더 속되게 이르면 등쳐먹으며 – 치솟는 조선의 국세에 놀라고, 그것을 방치하다 못해 방조하는 서태후에게 한 번 더 놀란 공친왕이 반드시 집정하고야 말겠다고 각오를 다졌음을 알 턱 없는 박규수로서는, 이러한 이치를 모르지 않을 공친왕이 왜 우격다짐으로 권력을 쥐려 하는지 쉽사리 헤아릴 수 없었다.

“그렇소. 가까운 사이끼리 다투는 데는 필히 그런 곡절이 있기 마련이지. 그러니 절박한 심정에 우리에게까지 손을 뻗친 것 아니겠소?”

그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에서 단서들이 절로 짜 맞추어져, 서로 아귀가 맞게 되었다. 마신이가 변을 당한 것이 공친왕과 서태후의 다툼 탓이라고 하면, 그가 조선 땅까지 굳이 와서 청하였을 일 – 그리고 반대편 서태후가 극악한 수를 써서까지 막으려 했을 일 – 은 뻔하였다.

그리고 청하였을 일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하책(下策)에 지나지 않음도.

“전하, 신은 물정에 어두우니 함부로 입을 놀림을 부디 용서해 주시옵기를 바랄 뿐입니다. 감히 생각건대, 작고한 마 대인이 어떤 이익을 내걸어 무엇을 청하였든, 혹 받아들이셨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내치셔야 할 것입니다.”

대원군이라면 아마, 예측불허의 서태후보다 냉철한 공친왕이 다루기 편하다고 여겨, 이번 기회에 이권이라도 뜯어낼 생각에 마신이가 제의한 것을 받아들였을 듯싶었다. 어쩌면 지금, 청국이 조선에 험한 소리 하는 것을 묵묵히 받고만 있는 것도 그 계획의 일환일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공친왕이 꾀하고 있을 대업이 성공하여, 자금성 주인이 뒤바뀌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냥개가 사냥꾼이 되면, 자신이 사냥개였던 시절을 기억해줄 것인가? 오히려 더 지독하고 집요하게 조선을 괴롭힐 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만만한 대원군은 혹 그런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여기겠지만, 조부 대부터 중원을 드나들며 그 땅의 저력을 체감하던 박규수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하하, 걱정 마시오. 나 또한 골육 간에 피 흘려 대국 전체에 큰 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다툼의 소지를 없앨 생각을 하고서 많은 도움을 받은 끝에 계책을 마련했다오.”

전말을 전해들은 박규수의 주름 많은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나라 사이에 오해가 쌓이고 또 묵어 지금과 같이 우의에 흠결이 생김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국은 대국의 우려를 십분 이해하며, 이번 의안의 처리와 관련하여 청국이 군병을 보낸다면 기꺼이 한성 근교에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살펴보니, 대국 조정의 큰 은혜를 받아 그 기틀인 동삼성에 나아가 경영하던 우리 백성들 역시 종종 원통한 일을 겪고 있지만 두 나라 관헌 모두 이를 돕지 않아 참으로 안타까운 지경에 처하였다고 한다. 만주의 대업이 일어난 땅에 그런 상서롭지 못한 사정이 일어나, 대국의 체통에 흠이 되고 있으니, 어찌 은혜 입은 나라로서 가만히 보고 있겠는가?

이에 우리 또한 올바르고 그릇된 일을 바로잡고자 심양과 요양, 훈춘 등지에 조사단을 보내려 한다. 비루하고 음험한 무리를 징치하기 위해 군사의 위엄을 갖추어야 할 것이니, 대국에서는 한량없는 아량을 베풀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전보로 우선 전해진 조선의 응답을 받아 본 이홍장의 손에, 애꿎은 탁자 하나가 부서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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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마신이와 장문상이 등장하였을 때 언급했던 것처럼, 장문상이 마신이를 암살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이론이 분분합니다. 후속조사를 위해 파견된 증국번이 워낙 (아마 고의적으로) 수사를 졸속으로 처리하였기 때문이지요. 치정문제, 생활고 등등 다양한 이유가 야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영화화도 몇 번 되었고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역시 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장문상은 어쨌든 도적 출신의 연줄 없는 사람이었고, 대의보다는 당장 잠시 평안을 되찾은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했을 것이니까요.

여담으로, 작중에서 조선인 개척민들이 나아가 열심히 개간하고 있는 (또는, 청의 등골을 으스러뜨리고 있는) 남만주 일대는 흔히 간도(間島)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이는 중국이 아니라 조선에서만 사용하던 지명입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조금은 서글픈 사연이 있는데요, 문헌에 따르면 1877년 두만강 중류의 종성·온성 일대 주민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개간을 하면서 그 땅을 간도라고 부른 것이 시초라고 합니다. 당장 먹을 것은 없고, 눈앞의 어른거리는 땅은 강 건너편이니, 연길 쪽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지류와 두만강 사이의 땅이 사실은 두만강의 하중도라고 억지를 부렸던 것이지요. 이후 도강한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남만주 일대를 침탈하려던 일본이 여기에 주목해, 남만주 전체가 간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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