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산의 짐승이 다하기 전 (1)
“아아, 이것은 기차라는 물건이다. 놀라지 말거라.”
“노형은 같이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아직도 날 순 촌놈으로 아시우?”
그러나 정말로 우렁찬 소리 내며 움직이는 저 쇳덩이에 내심 놀랐던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장문상은 저의 의형 마신이에게 볼멘소리를 할지언정 딱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러건 말건 인천역을 떠난 기차는 무심하게 기적 소리 내면서 동쪽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인석아, 우리 대국에도 저기 상해 같은 데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물건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해서 무에 부끄러울 게 있더냐?”
몇 리 쯤 미리 놓아서 시범을 보일 심산으로, 이화양행(怡和洋行, 자르딘-마테슨 社)의 영국인들이 상해에 미리 가져다둔 자재가 있었더랬다. 천진에서 북경까지 깔 정도의 양은 되지 않는다 하여, 동철에서는 그 자재를 써서 제물포부터 한성까지 가는 철도를 먼저 놓기로 결정하였다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대국이 조선보다 뒤쳐짐은 또 거북한 일이니, 처음 영국인들이 제안하였던 대로 상해에도 몇 리쯤 놓기는 했다.
조선인들이 청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요, 아직 동철에 저의 사람이 충분히 침투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이홍장의 농간이 있었을 것이련만, 장문상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문상이 네가 갑자기 배에 뭘 놓고 내렸다며 시간을 끌지만 않았으면 지금쯤 저 수레에 타고서 편하게 도성으로 가고 있었을 텐데, 츳.”
마신이는 도광(道光) 연간 초에 태어났으니 이제 슬슬 나이가 예순 바라볼 즈음이다. 그러나 나이 먹을수록 외려 수더분함은 더해져,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동네 푼수인줄 알고 넘어가기도 할 듯하였다. 어쩌면, 그것을 알기에 더욱 그런 기질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소탈함 덕분인가, 이듬해 원단 즈음하여 – 그러니까 이제 한 달도 채 안 남았다 – 도로 복귀한다는 모창희 대신 아직도 마신이가 대청 흠차대신인 줄로 아는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 중한 일이 터질 때마다 조정의 수족 되어 직접 수차례 찾아왔던 것도 그런 오해를 북돋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으리라.
그래서 그런가, 도성 자주 드나드는 자들 중 간혹 알아보고서 서툰 한어로 인사 올리는 자들도 있었다. 관복 입고서 위엄 차리고 있었더라면 누가 감히 그랬겠냐만, 평복(平服)하고서 서 있으니 그의 성품 아는 조선인들이 별 거리낌 없이 다가올 수 있던 것이다.
“허, 퍽 알아보는 사람이 많소. 나는 백날 돌아다녀도 인사는커녕 조선말로 욕지거리나 안 들으면 다행인데. 그나저나 정말 관원이 알아보면 어찌하시렵니까?”
“옛날에 네 녀석이 한 말마따나 청진사(모스크) 자리 알아보러 왔다고 둘러대면 되지 않겠느냐. 천주교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요새 동삼성에는 그 천도교라는 교의 세가 무섭다던데, 까짓 거 우리 청진교(이슬람)라고 못할 건 없지.”
어쨌건 군기대신 이홍조가 손수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로 지적하여 잠시 벼슬 내려놓고 있었으니, 지금 조정에서 딱히 맡은 일도 없었고, 정말 야인으로서 조선 땅을 간만에 밟은 셈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뭍에 내리면서 해관 통과하던 즉시 자신이 왔음이 도성 곳곳에 알려졌을 것이므로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물론, 장문상에게는 그냥 농으로 둘러대었지만.
그렇게 투닥대며 한 시진을 기다린 끝에, 다음 열차를 타고서 노량진에 도착하니, 아닌 게 아니라 벌써 나와서 기다리는 이 있었다.
“통리기무아문 당상으로 있던 오 모가 마 대인을 뵙습니다. 오시는 길은 평안하셨는지요?”
유창한 한어였다. 박규수가 총리대신 하던 시절 그의 옆을 지키며 통역 노릇도 하던 이였음을 기억해내었다. 그 사이 둘 사이가 틀어져, 박규수 반대편 흥선군 쪽에 섰다고 들었는데, 사정이 어찌 되었든 낯빛은 여전히 말짱하였다.
“물론이오. 철마가 원체 날래게 달리니, 이거 성내 들기도 전에 여독이 모두 풀리게 생겼구려.”
너스레 떨며 인사하고서 은밀히 한 마디 보태었다.
“짐작하였겠지만 중대사가 있어 은밀히 왔소. 운현궁으로 바로 데려다 주시오.”
색주가에 그간 통정하였던 창기(娼妓) 있어 인사나 하겠다며 장문상은 눈치껏 떨어져 나가고, 마신이만 남아 곧 대원군과 마주 앉게 되었다. 언제고 한 번 따져보았더니 대원군도 도광 원년(1820) 생이라, 따지면 그와 별 차이도 없었지만, 갈수록 세월과 더불어 수더분해진다는 평 듣는 자신과는 달리 그 형형한 눈매는 그대로였다.
“대원위 합하, 곧추 말씀드리겠습니다. 혹 근자 신강 이리(일리) 땅에서 일어나는 다툼 소식을 전해 들으셨는지요?”
“우리 성상께서 마음 쓰시는 바는 곧 천하의 안녕에 거드는 일 뿐이니, 도움 안 되는 이 사람이 도움 되려면 마땅히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른 흉적 아고백(야쿱 벡)을 잡아 진중에 효수하여야 할 텐데요.”
“흠, 흠. 그 일에 관하여, 어떤 귀인(貴人)께서 이르시기를, 높이 나는 새라 한들 하늘에 떠 있는 한 어찌 보이지 않겠느냐. 단언컨대 화살 없어 쏘지 못함은 아니라 하셨습니다.”
오경석이 통역하자, 잠시 미간 찌푸리며 대원군이 생각에 잠겼다.
적국이 무너지면 모신(謀臣)은 죽어야 한다. 바로 그 모신인 동시에, 필요에 따라서는 임금을 위해 다른 모신을 쳐내야 하는 대원군이 모를 리 없는 이치다. 고금의 명신들 또한 어리석지 않아, 똑같은 이치를 돌려서 말하곤 하였으니, 높이 나는 새 잡으면 곧바로 궁색해질 사람이 지금 청국에 얼마나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공친왕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그리고 마신이쯤 되는 사람이 몰래 찾아와 돌려서 이야기하는 까닭은 또 무엇이겠는가? 결코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아하는 서태후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공친왕이다.
만약 서태후가 조종의 옛 도리를 굳게 지키겠다며 공친왕과 척을 졌더라면, 오히려 공친왕이 무엇을 하든 자신의 권력에는 위험될 소지가 없었겠으나, 철도를 놓는다 하며 어느새 개화의 대열에 합류해버리면서 다시 공친왕은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와중에 공친왕이 군공 세우러 서쪽으로 떠나버렸으니, 실패하고 강역이 한 뭉텅이 떨어져나간다 해도 곤란하지만, 뜻을 이루어 땅을 되찾아 돌아오면 더욱 곤란해지는 것이었다.
심산이 그에 이르자마자 대원군은 밝게 되물었다.
“그러면 그 귀인께서는 산에 짐승의 씨가 마르기 전 무엇을 이루려 하심인지요? 마 대인께서는 혹시 들으신 바가 있으십니까?”
“비록 합하와 나이가 별반 차이 없다 하나, 이 마 모는 소싯적 섭생(攝生)을 잘못하여 벌써 머리가 흐려지고야 말았습니다. 합하께서 먼저 짐작 가는 바를 말씀해주시면, 떠오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수수께끼 놀음을 할 생각일 리는 없고, 우선 공친왕이 획책하고 있는 일에 함께 할 의사가 있느냐 묻는 것이리라.
“하하, 사람 나이가 환갑이면 가히 천수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 또한 곧 회갑(回甲)이라, 예전 같지 않답니다. 그러나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는 적심(赤心)은 온전하니, 혹 그러한 일이라면 금방 떠오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귀인께서 이르시던 말씀을 옮기면, 마지막으로 큰 사냥감을 잡게 되면, 마땅히 세운 공에 따라 고기를 나눌 것이라 합니다. 공 없이 그저 주인이 선심 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때에 맞추어 당당하게 응당한 몫을 취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큰 사냥감이 자금성 안에 머무르고 있음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 그러나 자칫하면 지금껏 싸움 없이 쌓아온 성과가 일순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라, 지금도 청국에 기대어 적잖은 이익을 얻고 있는 입장에서 굳이 공친왕의 손을 들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러나 지금 조선이 취하는 것이 ‘응당한 몫’이냐 하면 또 그것은 아니라, 물론 청국에 몇 번 도움을 준 것은 맞지만 사실은 제일의 번국으로 남기기 위해 미리 그 값을 내어준 것과 같았다. 비록 지금은 철도와 제철소의 일로도 신세를 지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심양과 훈춘을 열어준 일 또한 은덕이라 하겠지만, 그것을 베푼 사람이 사람인 이상 지난 변발 소동에서처럼 언제든 거두어가겠다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조선이 청국을 마치 다른 대서 나라들처럼 뜯어먹을 만한 체급이 되기 전까지는, 청국의 우두머리가 어리석고 변덕스러운 사람인 것보다는 대원군 자신처럼 음흉할지언정 이해(利害)의 분별이 명확한 사람인 편이 나았다.
“이르시는 말씀에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몰이꾼과 미끼 중 어느 쪽에 일손이 부족한 것인지요?”
“아직 사냥터에 범이 한 마리 있어, 다른 곳으로 꼬여내기 전까지는 토끼는커녕 청서(靑鼠) 한 마리도 고개를 내밀지 않을 것입니다.”
굳이 조호이산(調虎離山)할 계책을 세워야 하게 만드는 범이라면 북양대신 이홍장밖에 더 있겠는가. 근래 청국 조정에 파당이 거하게 나뉘었다는 이야기가 허언은 아닌 모양이었다.
“허나 그 발톱이며 이빨에 당하면 오장육부가 남아나지 않을 터인데, 어찌 미끼를 가볍게 자처하겠습니까? 괜히 이곳 해동에서 범을 일컬어 산군(山君)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그렇지요. 사람 상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지요. 그러니 멀리 옆 산에서 꽹과리와 징으로써 소란만 일으켜도 족할 것입니다. 그리 하고서 몸 성히 빠져나오는 것은, 이미 이곳 땅에 그런 재주로 이름나신 거사(居士)가 한 분 계시지 않습니까?”
엉뚱한 짓으로 사람 눈길 끄는 것은 확실히 금상, 나아가 요 근래 조선 전체의 특기가 되어가는 듯하였다. 지금까지는 의도치 않게 그리 하였다지만, 이번에는 정말 작정하고서 연경 서태후의 눈길을 끌어달라는 얘기였다.
그 과정에서 정말 싸움이 붙어 압록강 안쪽까지 불똥이 튄다면, 그건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 믿는다. 이런 말까지 내포되어 있음은 쉽게 헤아릴 수 있었다.
“허어, 그런 거사께서 계신다면, 속인(俗人)들의 살육하는 일에 관여하려 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그 옛날 무후(武侯)를 등용하기 위해서도 초막을 세 번이나 들려야 했다는데, 영험한 거사시라면 시일이 더 걸리지 않겠습니까? 부족한 이 사람도 한껏 힘써볼 터인즉 대인께서는 말미를 조금만 주시지요.”
“아, 물론입니다. 그때가 되면 아마 여전히 기연가미연가한 이야기가 구름 걷힌 뒤의 달처럼 드러날 것도 같습니다.”
조선 땅 구경을 위해 왔다는 것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몇몇 운 좋은 대신들은 서양인들과 교섭하면서 구주 구경도 한다던데, 마신이 본인은 도저히 그럴 연이 닿지 않았으니, 하필 자신이 떠나자마자 한성 한 구석에 구주인들 사는 동네가 생겼다는 소식 듣고서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그렇다고 북경에 머물 때는 보는 눈이 있으니 – 이미 그러잖아도 적이 많은데 찌를 구석을 더 늘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 점잖은 시늉을 관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야인 되어, 그저 지나가는 대국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는 지금은 또 이야기가 달랐다.
그런데 마침 지난 가을에 법국인 손택(孫澤)이라는 여인이 객잔, 아니, 빈관(賓館)을 열었다 하여 투숙할 작정을 하였다. 미리 연락하여 방도 치워놓으라 했겠다, 가배라는 뜨거운 콩즙을 장문상이에게 먹여 골탕먹일 생각도 했겠다, 여러모로 기대되는 밤이었다.
그런데 조선 속담에 이르기를, 소문난 집 잔치에 먹을 것 없다 했던가.
“아니, 여긴 그냥 기와집 아닌가?”
“아하하, 그렇습니다. 그래도 행랑에 방 트고 침상을 놓았으니 구주의 여염집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요. 보시다시피 문풍지니 창호지니 하던 것도 싹 걷어내고 벽과 유리로 갈았지 않습니까.”
한어 아는 일꾼이, 저의 핑계가 군색함은 아는지 해명하고서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실은 손씨 마님께서 조선에 오시고서 거의 바로 새집 짓기에 들어갔습니다만, 워낙 성대하게 짓다 보니 이듬해 여름에나 끝이 난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구주인이 운영하므로 당연히 빈관의 모양새도 구주와 같으리라 단정하였던 것은 자신이었다. 고작 몇 달 만에 번듯한 건물을 지었을 리 없지 않은가.
꼭 그렇게 사소한 일들을 간과하였다 뒤통수를 맞고는 하는 것은 못된 버릇이라, 그 덜렁거리는 기질을 고쳐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늘상 생각만으로 끝나곤 하였다. 뭐, 어쩌겠는가.
그리하여 마당에서 천방(카바 신전) 향해 절 올리고서, 다음날에는 꼭 본국에서 도망해온 법국인들이 모여 산다는 동네에 가서 구경을 하리라 다짐한 뒤, 다시 마음을 다잡고서 대원군이 마음을 정했을 때 자신이 아는 것 중 어디까지 일러두어야 할지를 생각하였다.
진즉에 적화(迪化, 우르무치)는 떨어졌고, 마치 염소를 몰듯 야쿱 벡은 천산 산 속으로 몰리고 또 몰리고 있다. 이대로 몰아서 은근슬쩍 아라사가 집어먹은 이리 일대까지 넘어가게 만드는 것이, 그가 아는 공친왕과 좌종당의 목표였다.
혼란을 틈타 이리 한가운데 영원(寧遠, 이닝)을 집어삼킨 아라사는 예상보다 빠른 천병(天兵)의 진군에 놀라, 이리 근방의 군영(軍營)이 크게 늘었다 들었다. 그래봐야 수천에 지나지 않겠지만, 구주 군대의 매서움은 정예한 상군(湘軍)이라도 정면으로 당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병(兵)이란 싸우지 않고 이김을 가장 빼어난 경지로 칭하니, 화전(和戰)을 병행하여 우선 아라사와 교섭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두 해 동안 사막을 돌파하였던 것처럼 몰래 천산을 돌고 뚫어서 이리를 삼면에서 둘러싼다. 물론 아라사에는 약하게 보여야 하므로, 이는 기밀로 하여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한다.
여기까지가 조정에 보고된 계획이었다. 서태후로서는 눈엣가시 공친왕이 군공을 세우는 것도 보기 싫고, 그렇다고 물려받은 강역을 원수 같은 아라사에게 공으로 내줄 수는 없으니, 아마 둘 다 실컷 싸우라는 생각으로 어깃장을 놓아 협상이 진전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한편, 기껏 조종의 성헌(成憲)과 법도를 지킬 줄 알았더니만, 그저 돈으로 양이 부리는 맛에 빠진 서태후에게 실망한 자들이 없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은 이홍조와 같이, 그저 양무파가 잘 나가는 것을 질투하여 이홍장을 공격하였던 자들이었으므로, 서태후의 마음이 확실히 서양의 문물을 들이는 데 있음을 알자 편을 바꾸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대신 그들은 말을 바꾸어, 자신들은 처음부터 동도(東道)로써 서기(西器) 들이는 일에 찬동해 왔으며, 은근히 딴 목소리 내는 공친왕과 좌종당, 그리고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 체 하면서 간을 보는 마신이 자신이 바로 나라의 위망(僞妄)한 무리라고 소리 높여 꾸짖어대었다. 그런 편가르기야말로 정말 별 생각 없던 자신을 공친왕의 편으로 못박는 계기가 되었으니 참 얄궂은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청류에 속해 있던 장지동처럼, 경사(京師)의 어지러움에 실망하여 외직으로 물러난 이도 있었다. 하필이면 그 자리가 산서순무(山西巡撫)라, 이번 대업의 핵심이 될 터였다.
이유인즉, 사실 남몰래 천산을 오르고 있을 상군은 삼삼오오 흩어져 산서로 향할 것이요, 그곳에서 일찍이 포섭된 장지동의 비호를 받으며 직례의 남쪽을 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이 계획대로 난리인지 아닌지 애매한 움직임을 보이며 북양대신 이홍장과 그 막하의 군대의 이목을 끄는 동안, 이리에 있어야 할 공친왕과 좌종당이 갑자기 나타나 상군을 이끌고서 금궁(禁宮)을 들이친다. 이것이 적어도 마신이가 아는 선에서는 계획의 전모였다.
조선을 끌어들이는 일에는 마신이만한 적임자가 없어, 홀로 가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좌종당과 장지동의 걱정에도 직접 설득하려 나선 터였다. 확실히 오늘의 일에 비추어보니, 논하는 사안의 중함이 중함이니만큼 자신만한 사람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대원군이 선뜻 믿지 않았을 듯했다.
작은 일에는 덜렁댈지언정 큰 일에서는 이처럼 얼추 잘 맞아떨어지니,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다고 은근히 자찬하면서, 슬슬 누우려던 순간, 누군가 밖에서 마루 밟는 소리가 났다.
“문상이냐? 방이 그리 넓지 않다고 해서, 네 독방을 따로 잡아놓았다. 녀석, 고작 기생집 갔다 온다면서 해 떨어질 때까지 무얼 하고 온 것이냐?”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차라리 옛 방식대로 창호지 바른 문이었다면, 외풍이야 잘 들어올지언정 그림자라도 비추어 누가 있는지 알겠다만, 소리만 들리니 알 도리가 없었다.
답답한 사람이 나서야지 별 수 있겠는가. 문 열며 또 농을 던졌다.
“녀석, 얼마나 회포가 깊었기에 말도 못하고 있더냐? 문상아?”
겨울밤을 뚫고 난데없는 총성이 세 번 울려, 답변을 갈음하였다.
--- *** ---
토사구팽은 흔히 한신(韓信)이 한고조의 천하통일 이후 모반죄에 얽혀 죽음을 맞이할 때 한탄한 말(“‘교활한 토끼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가 삶아지고, 높이 나는 새가 다하면 좋은 활은 숨겨지며, 적국이 무너지면 모신은 죽는다’라 하더니, 과연 사람들 말처럼 되었구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출전이 더 오래되어 『한비자』 <내저설좌하(內儲說左下>에 토끼와 사냥개 얘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사기』에 수록된 월나라 왕 구천의 세가에는, 명신 범려(范蠡)가 잠적하기 전 한 말로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숨겨지고” 라는 구절이 앞에 붙어있지요.
한신이 했다는 한탄은 (적잖은 사서에 기록된 ‘옛 사람들의 말’이 그러하듯) 정말 그가 한 말이라기보다는 태사공 사마천이 인물의 성격을 감안하고 전하는 야사를 첨삭하면서 창작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비교적 점잖은 <본기>나 <세가>와는 달리, <열전>은 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지요. (그래서 읽는 후대인 입장에서는 더 재밌기도 합니다.)
청의 신강 재정복은 한국 근현대사에도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신강 재정복과 뒤이은 일리 분쟁을 계기로 청은, 그 전까지 유지하던 다원적인 전근대 제국 체제 (만주족, 한족, 몽골, 티벳, 위구르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통치)를 포기하고, 보다 근대적인 (완전히 근대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조선 역시 제일의 번국이자 사실상 자주국으로서의 지위가 확보되던 상태에서, 그저 속국으로 격하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베트남 북부에 대해서도 동일한 시도를 하다가 청불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지요.
일리(한자로는 이리) 지역은 청에 속하기는 하지만, 천산산맥 너머에 있는데다가 카자크인이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청의 이민정책 추진에 따라 한족도 많이 이주하였습니다.). 천산산맥에서 나오는 빙하 녹은 물 중 일부는 서쪽으로 흘러내려 일리 강을 이루는데요, 이에 따라 천산산맥의 두 줄기 사이에 척박한 중앙아시아에서 비교적 거주와 농경, 목축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 갖추어졌습니다. (천산산맥이 대충 ⊃ 모양을 이루고, 일리 지역은 그 두 줄기 가운데에 해당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막상 팽창은 했지만 정작 쓸 만한 땅은 별로 없던 러시아령 중앙아시아에서는 그러므로 결코 중요성이 낮은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원 역사에서 손탁 호텔은 한참 뒤인 1902년에 세워집니다. 베베르의 소개로 경복궁의 양식 요리사로 들어간 앙투아네트 손탁에게 고종이 황실 토지를 하사하자, 여기에 2층짜리 호텔을 지은 것이지요. 물론 속설과는 달리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아닙니다만, 여러모로 기존 호텔보다는 ‘격식 있는’ 곳으로 받아들여졌기에 많은 외교관과 지식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습니다.
작중에서는 베베르의 친러시아파 육성 계획 때문인지 졸지에 개업하게 되었네요. 그리고 개업하자마자 흉사를 겪게 되었으니, 북경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할 판입니다.
여담으로, 앙투아네트 손탁은 독일인으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 간혹 성도 독일식으로 (원래 독일식 성이 맞기는 합니다) 존타크로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난 화에도 썼듯 알자스 출신이고, 1854년생이니 태어났을 때는 프랑스인이 맞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원 역사의 손탁호텔을 애용하였던 것은 프랑스와 벨기에 외교관들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