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서생 (3)
주상이 가례 올린 지도 어언 열 해째, 슬하에 아들만 세어도 둘이라, 엄연히 궐 밖의 사람인 대원군도 그 안사람 되는 중전의 성품이 어떠한지는 대략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사람됨이 인자하여 부덕(婦德) 갖추었으니 가히 성상의 배필 될 만하다는 것은 세인의 평이요, 무언가 응어리진 거창한 욕심을 품고 있어, 가끔 그것이 울화 되어 주변 궁인에게 터져나갈 때도 있다는 것은 아는 이만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첫 원자를 잃을 때만 하여도 심하였던 심화(心火)가, 요 근래는 다소간 잦아들었다 하니, 까닭을 살피면 대개 애꿎은 궁인 대신 그런 욕심을 풀 구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외국 공사의 처들을 궁으로 불러 종종 담소하기도 하고, 또 미 무어라 하는 법국 아낙을 부려, 갈 데 없는 어린아이를 거두어 구휼하고 가르치는 무슨 원(院)을 두었다 하였다.
“중전 가로되, 저의 의붓오라비 승호가 또 행악한 듯하니 그 증좌를 우연히 연이 닿아 얻었다 하였소. 그러나 이런 의안(疑案) 다루어본 적이 드물기에 혹 원통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 경의 생각하는 바를 우선 듣고자 한다 하였소이다.”
하면서 서한 한 통을 건네니, 그 봉지를 보면 정갈한 아낙 글씨로 과연 제게 부치는 편지였다.
“이미 중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모두 직접 들어 알고 있으니, 굳이 이 자리에서 뜯어볼 것까지는 없소. 설마 현숙한 중전이 내 몰래 꾀하는 바가 있겠소이까? 혹 그러한 바가 있더라도, 경이 슬기롭게 잘 해소하여 후에 우환될 거리가 없게 해주리라 내 믿소.”
그러나 목 타는 사람은 대원군이었으므로, 송구함을 재차 고하고서 그 자리에서 겉봉을 뜯어 펼쳐보았다. 살펴보니 겉봉과 달리 안에 써 놓은 것은 언문이었다.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주욱 눈이 글을 따라가니, 의아한 마음이 재차 놀라고, 그저 우연히 얻어들은 소식인 줄 알았던 것이 가히 대사(大事)라 할 만하였다.
내용은 이러하였다. 얼마 전에 러시아 공사관에 손이 찾아왔는데 젊은 아라사인으로 명(名)은 위패라. 그 처 예씨 (베베르의 아내 예프게니야) 말하기를, 종종 공사관에 조선인들이 찾아오는데, 나이든 사람들은 늘상 오는 이들뿐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딱 한 번 지아비가 도성 땅 처음 밟았을 때 찾아온 젊은이가 있다 하였다.
그 자세한 내막을 물으니, 아라사 말이 유창하고 생김새는 말쑥하였으나, 의관은 단정하되 세련되지는 못하였다고 했다. 저의 남편이 조선 땅 고관대작을 상대하기는커녕 무슨 범부(凡夫)를 만나고 있으니 속이 적잖이 상하여 푸념하던 중 나온 이야기였다.
아무리 부덕 모르는 양이 여인네라지만, 그런 이야기를 쉽게 풀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니, 아마 옆에서 살살 구슬리고 타일러, 조심스레 단서를 한 타래씩 끌어모은 것이리라. 확실히 수완이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경이 보기에는 어떠하오? 이것으로 능히 증좌를 삼을 수 있겠소이까?”
“신이 선왕 시절 뜻 있는 이들을 모을 때를 돌이켜보면, 은밀하게 처신하여야 할 소이(所以)가 있는 이는 어떻게든 스스로 숨기고자 꾀를 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중전께서 아라사 위패의 처에게 듣기로는, 비록 남루함을 겨우 면했다 하나 딱히 스스로 숨기지는 않았다 합니다.”
물론 대원군이 이렇게 뒷골목 술수까지 동원할 줄은 몰랐던 시절의 명문가들은, 그저 평복(平服) 차림으로 다니기만 하면 알아보지 못하리라 여기곤 했지만, 요새는 적어도 도성 안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라사 공사관으로 찾아갔다는 자는, 아마 해국(該國, 그 나라)에 머무를 적 나라의 긴밀한 사정을 발설하고서 무언가 확언을 받기 위해 찾아간 것일 듯합니다. 만일 스스로 행적을 내보임만으로 죄 받을 구실이 갖추어지는 이라면 결코 그리 움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수께끼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하였다. 이러한 일에 처하여 당당하게 백주에 활보할 수 있는 이라면, 잃을 것이 적은 자일 터. 일개 서자가 그런 중한 일을 홀로 맡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니 혹 일이 어그러진다 하여도 문중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그만이다.
물론 민승호나 조영하도 저의 집안에서 총명한 서얼을 부려 대신 말 전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므로, 운현궁에 돌아가서 더 확인해보아야 할 것이었다.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일찍이 공안서를 꾸렸으니, 그 일손을 부리면 중전께서 이르신 이 자가 누구인지는 쉬이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곡절이 있어 무엇을 발설하였는지 알아내는 것은 그 연후의 일입니다.”
허나 그보다 더 중한 내용은, 중전이 그 뒤에 따로 덧붙인 말이었다. 물론 중전이 청한 거래에 응하기 전, 그 내건 물목이 과연 상품(上品)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의 나이도 어느새 서른이었다. 그가 다른 배의 소출이었다면, 아니, 서출일지라도 조금 더 한미한 문중에서 났더라면 지금쯤 능히 이름을 날릴 수 있었겠지만, 야소를 원망하든 삼신할미를 원망하든 이미 이승에 떨어질 때 장동 김문의 서자로 태어났으니 어찌하겠는가.
처음 나라에서 서얼의 허통을 명실 공히 시행하겠노라 하였을 때는 정말 새 세상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이 지긋지긋한 고래등 기와집 행랑을 벗어나, 저의 뜻을 펼칠 때가 왔다고 여겼다.
그러니 뭇 어른들이 제지하기를, 비록 재주는 비상하나 위아래를 가리는 도리가 있으니 조금 더 참으라 하였다. 그 ‘조금 더’를 무턱대고 기다리다가는 한 갑자가 지나도 부족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차라리 무과나 준비할까 생각하였다.
엄익관(사관학교)을 새로 새운 이래, 더 이상 무부라 하여도 무식한 까막눈은 거두어 쓰지 않게 되었다 하였으므로, 집안의 ‘제대로 된’ 소출들을 가리지 않고서도 비상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밑바탕을 다지기 위해 저와 같은 서자들 중 이미 무과 나아간 이들과 교제하고, 술 좀 넘어가면 넌지시 요새 나라의 무인들이 무엇에 힘쓰고 있느냐 물었다. 그랬더니 저의 동무들 중 재주 좀 뛰어나다는 이들은 다들,
‘혹시 아는가... 무릇 병가의 일이란 싸우기 전부터 이길 방도를 마련하여야 하는 법. 아, 물론 아국이 어디와 장차 싸울 일이 생기리라는 건 아니니 추호도 오해 말게나.’
이러고 있으니 자못 의심스러웠다. 취중에 툭 나온 실언이라면 또 모르겠으되, 하필 용렬하여 자리만 차지하는 자들은 그런 기미가 없고 저의 발치쯤 따라올 듯한 자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말꼬리를 흐리니,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짜 맞추어, 그 빈자리를 얼추 헤아릴 수 있었다.
‘북벌!’
고리타분한 존주(尊周)의 대의가 아니라, 정말로 대국과 맞서 싸울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정도라면, 비록 문과로 출세하지 않는다 하여도 충분히 사나이 삶을 걸어볼 만한 큰일이 아니랴!
다만 그가 요새 젊은 무관들과 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몸종도 능히 알 수 있으리라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으니, 높은 하늘의 별만 보다가 발아래의 넝쿨을 보지 못한 격이었다. 하루는 집안 어르신들의 부름을 받고서 전동의 어디 대가로 향했더니, 아뿔싸.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았던 장동 김문의 중심, 김병학과 김병국 두 사람이 떡하니 있지 않던가.
“네가 면양(沔讓, 김응균) 어르신의 서자 가진이냐?”
누구 면전에서 거짓을 고할까. 가뜩이나 언짢은 목소리였다.
“예, 그러합니다.”
“근자에 무관과 선달의 무리를 벗삼아 자주 노닌다고 들었다. 그 모임에서 불측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여 부른 것이야. 그 일이 무엇인지 내 짐작치 못하겠냐만, 알더라도 깨닫지 않고, 보더라도 담아두지 않아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네 어찌 그리 횡행하여 집안의 우환될 일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말이더냐?”
김병학은 매섭게 다그치고,
“일신의 재주가 뛰어나다 들었다. 어디 떨칠 구석이 없나, 여기저기 비집고 들어가다 보니 이번 일도 일어난 것이겠지. 비록 나라에서 허통을 하였다 하나, 우리 문중을 생각하면 꼭 출사(出仕)만이 옳은 길은 아니니라.”
김병국은 옆에서 살살 달래었다.
그리하여 저의 총명한 머리 잘못 놀린 죄를 받아 멀리 해삼위로 사실상 정배되었으니, 마음속 분은 풀리지 않았다.
물론 정말 진지하게 서양 학문을 배우게 할 생각이었다면 대신 구주로 보냈을 것이니, 실상을 따져보면 그저 머리 식히고 오라는 뜻일 터. 아라사의 사방 백만 리 강토 중 벽촌인 해삼위에 제대로 된 스승은 있을 리 없고, 대신 다른 거족들 따라 김문이 성급히 연 이런저런 사업들을 관리하면서 스스로 배우라는 지시를 받고 북녘으로 쫓겨 갔다. 그리고 그가 일생일대의 실수 (어쩌면 마지막 실수)를 한 것도 그곳이었다.
아마 장동 김문의 이름을 듣고서, 그 집안의 젊은이가 직접 파견되어 왔다는 데 호기심 가진 당국이 눈여겨본 것이었으리라. 조선말 유창한 아라사인이 친한 척하며 다가오니, 세상에 대한 울분이 한 순간 말실수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생각해보니, 어쨌든 조선이 장차 국운을 떨치려면 청국과 어떤 시점에서건 결별을 해야 할 것이고, 혼자 힘만으로 그러기에는 무리가 따르니 이익을 함께 하는 벗을 곁에 두어야 하기 마련이라, 그 계기를 마련하는 일도 따지자면 충군애국의 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주제넘게 그런 짓을 해도 되느냐, 네가 한 짓이 정녕 애국이라 할 수는 있겠느냐 하는 의심과 죄책감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계속 짐이 되었다. 이름 남기려다 조선의 진회(秦檜)로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러나 그럴 때면 또, ‘네깟 것이 무얼 안다고 감히 그랬느냐’ 하는 김병학의 얼굴이 눈앞에 선하여 오기가 절로 북받쳐 오르는 것이었다.
한양에 돌아온 뒤로 직접 러시아 공사관을 다녀왔던 것 역시 무슨 거창한 재화로 보답을 받고자 함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을 계속 갉아먹는 이 의심에 대해 확답을 받기 위함이었다.
“베베르 선생, 이것이 정말 러시아뿐 아니라 조선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요?”
선량한 얼굴의 베베르는 당연히 그렇다고 장담을 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 사람 탈을 쓴 승냥이를 데려다놓아도 똑같은 답을 하지 않았겠는가?
수심 가득 찬 채로, 저의 옛 벗들 몇몇과 또 술자리를 하고서 돌아가는 길. 심란한 마음 달래주기는커녕 더욱 부채질하는 찬 가을바람이 어깻죽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무심결에 뒤를 보았더니 그림자가 둘이라, 하나는 저의 것일진대 나머지 하나는 어디서 붙었다는 말인가? 인정 칠 때까지 이제 한 각이나 남았을까 싶었는데 뒤를 바짝 쫓는 것을 보면 떳떳한 심산은 아닐 것이었다.
우선 발걸음을 좀 재게 하여 치고나가려 했더니, 이번엔 길목 맞은편에 그림자의 짝패인 듯한 자 두엇이 서서 막고 있었다. 근래 포도청이 경무서로 바뀌고 도성 골목이 확 트이면서 가뜩이나 왈패들 벌이가 시원찮아졌다지만, 전동 바로 옆 전석동(<石+專>石洞) 골목에서 이런 짓거리를 하다니 어지간히 급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정 안되겠다 싶으면 김문 이름 팔아서 지나갈 궁리를 하고 정면으로 다가갔더니, 나오는 말이 의외로 공손하였다. (물론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았지만)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묻는 이는 뉘시오?”
개중 우두머리인 듯한 중늙은이에게 물으니, 의외로 그 옆에 선 젊은이 – 저보다도 젊어 아직 앳된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 – 가 답변하였다.
“공안서에서 일하는 이용익(李容翊)이라고 합니다. 결코 선생을 해하고자 멈춰 세운 것은 아니니, 심려치는 마시길 바랍니다.”
사람 의심하는 법을 요 근래 몸소 배우던 김가진이었으므로, 그 ‘해하지 않는다’ 하는 말에 실낱만큼이라도 진실이 담겨있을까 의심하였지만, 그 의심하는 틈을 타 억센 손아귀가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합하, 공안서에서 김 모를 붙잡았다 합니다. 그쪽에서 기록하는 절차를 마치고서 곧장 대령한다 하였으니 이제 한 식경 안으로 당도할 듯합니다.”
“알겠네.”
안동수가 짤막하게 보고하고 도로 문 닫고 나가니, 일순 여닫는 사이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밝은 달이 비추었다.
얼추 정황을 확인해보니, 서얼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불만을 품고서 저지른 일인 듯하였다. 만약 그러하다면 정말 저의 모임에 간자(간첩)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아라사 역시 그저 전해들은 이야기를 최대한 꾸며서, 은밀하게 의심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리라.
그러므로 아라사가 이렇게 얕은 수작을 부리는 것은, 정말 조선과 청의 분란을 일으키기보다는 저의 이목을 강제로라도 끌어다 저들 황제의 편으로 삼으려는 심산일 것이다. 그러니 ‘어디 얕은 수작을 부리느냐’ 하며 역으로 핍박하여도, ‘단순히 오해이므로 없던 일로 하자’ 하며 달래어도 될 일이다.
얼마나 새어나갔는지는 이제 공안서 구실아치들이 잡아올 그 김가진이라는 녀석을 족쳐보아야 알겠지만, 일이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못 이기는 양 아라사의 손을 잡음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듯했다. 외려 이번 일로 고개 숙이고 들어가면 저들은 – 마치 자신이 그 옛날 백락내에게 했던 것처럼 – 있지도 않은 목줄 채운 것으로 착각하고서 절로 허점을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일보다 더욱 고민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앞서 임금이 전해준 중전의 글 말미에 실린 청이었다.
말하기를, 어차피 이번 일이 새어나가면 누가 붙잡혀 들어오든 세간의 이목은 민승호에게 실릴 것이라 하였다. 여염의 무리들이 보기에는 일을 둘러싼 겉보기 정황이, 민승호가 북변으로 쫓겨난 원한 품고서 외세에게 국사를 누설하였다 생각하기 쉬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용렬하고 바라는 바에 비해 일신의 재주가 한참 부족하다 하지만, 어쨌든 외척이요, 그것도 바로 자신과 이어진 사이라, 차라리 공식적으로는 민승호가 실언하여 이 모든 오해가 일어난 것으로 청국에 변명하고 사안을 마무리지음이 어떻겠느냐, 하는 청이었다.
고의가 아니라 사석에서 실언하였다고 둘러대고, 적당히 그 주변에 감시로 붙여둔 이들의 증언을 곁들이면 의심은 할망정 크게 꼬투리는 잡지 못할 터. 이번 기회에 남의 눈치 보지 않고서 실직(實職)에서 완전히 떼어놓아 실직(失職)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이처럼 하였을 때 중전이 얻는 바는 무엇인가? 본론은 여기서부터였다.
‘이 부족한 사람이 과분한 성은을 입어 국모의 자리에 올랐으니, 대원위 합하께서 보천욕일(補天浴日)하는 공을 세워 나라의 동량을 바로세운 덕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허나 무엄함을 무릅쓰고 어리석게 붓을 놀려 여쭙건대, 먼 훗날 합하께서 자리를 내려놓으시게 된다면 갑작스러운 일을 만나 온 나라가 근심하게 될 것이니 이에 대비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근심을 만나게 되면 성상의 배필로서 마땅히 음덕(陰德)으로 도와야 할 것이니, 청컨대 합하께서는 마음 쓰시는 일을 이어받을 자로서 저를 또한 염두에 두어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저의 아들에게 군밤장수를 죽이고서 간교한 술수와 음흉한 심계를 꺼리지 않는 철인이 되라 주문하였더니, 엉뚱하게도 저의 며느리가 그렇게 되겠다고 나서는 상황인지라, 좋고 나쁘고를 떠나 처음에는 참으로 우습게 되었다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청을 받았으니 답을 하여야 할 일이고, 주상에게 물어보니 중전이 그런 청을 넣었음을 또한 알고 있다 하였다. 권세 욕심에 울화가 나날이 쌓여간다는 중전을 애틋하게 여겨서 그리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신이 지금처럼 어진 임금으로 남기 위해서는 누군가 대신 그림자 되어야 함을 알고서 그런 것일까? 참으로 속을 알 수 없는 아들이었다.
허나 어찌 되었든, 친족까지 먹잇감으로 내던질 수 있는 중전이라면 필요할 때 손을 쓰지 않는 폐단은 없지 않겠는가 여겨, 은근슬쩍 마음이 중전의 청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다. 중전 말마따나, 자신이 언제까지나 살아서 음으로 권세 휘두를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저의 사후 그 권력이 여기저기 흩어져 없어지느니 차라리 임금 곁에 있는 사람의 손에 뭉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물론, 자신이 그 힘을 가볍게 넘겨주리라 여긴다면, 그렇게 순진무구한 생각을 품는 버릇부터 뿌리를 뽑을 수 있도록 잘 가르쳐주고 이끌어야 하겠지만.
운현궁 당도하자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온전히 깨달은 김가진이 노안당에 들 무렵까지도, 대원군은 어찌하면 시아비로서 며느리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한창 고민하고 있었다.
--- *** ---
김가진의 부친 김응균의 호는 찾을 수 없어, 작가의 창작으로 갈음하였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베베르의 아내 예프게니야는 인성 면에 있어서 좋은 평을 내리기는 어려운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특히 외교관의 아내였음에도 그렇게 처신하였음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지요.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초대 공사로 부임한 베베르는, 아내와 알자스 출신의 가정부 손탁 부인(손탁호텔로 유명하지요) 등 여러 식구를 대동하고 왔습니다. 상기한 것처럼 꽤 성공적으로 정착한 손탁 부인과는 달리, 예프게니야는 서울 주재 공사관 가족들과 자주 다투었고, 때로는 험담과 악의적인 소문으로 남들을 괴롭히곤 했습니다. 특히 독일 공사 페르디난트 크린(Ferdinand Krien)과 사이가 좋지 않아, 각종 성추문을 퍼뜨리곤 했지요.
작중에서 딱 한 장면 등장한 이용익은, 원 역사에서는 보부상으로 지내면서 특유의 상재로 자본을 모아, 단천 금광에 투자하여 거금을 손에 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연후에 한양에 진출, 민씨 척족에 연줄을 대려고 머무르고 있던 중 임오군란이 터지고, 여차저차 하여 고종의 신임까지 얻게 되지요. 하지만 이 역사에서는 1854년생인 그가 금광에 투자하기도 전에 대원군이 보부상들을 저의 편으로 쓰게 되면서, 얼떨결에 공무원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한편, 원 역사에서도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 이후 납치되어 천진에 머무르는 동안 명성황후에게 쓴 한글로 편지를 쓴 바 있습니다. 여성들이 언문(한글)을 많이 쓰기도 했거니와, 제 머릿속 생각으로는 청에 유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안상의 고려도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좌우지간, 해당 편지를 보면, 정적이면서도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라는 기묘한 상황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문구만으로 보면 ‘네가 이겼다. 나는 여기서 죽을 듯하니 집안 대만 이어지게 해다오’ 하는 항복선언입니다만, 권력욕에 불타는 대원군도, 능력은 몰라도 권력욕이라면 대원군에 비해 모자라다고는 할 수 없을 명성황후도 아마 저 말을 곧이곧대로 쓰거나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