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96화 (96/320)

32.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서생 (1)

남쪽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 혹독한 겨울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울 필요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누리지 못하는 호사가 바로 백야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오밤중에 해가 떠 있을 뿐인데 무엇이 아름다우냐. 그저 낮인지 밤인지 애매한 박명이 끝없이 이어질 뿐이지 않으냐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반박에도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백야의 아름다움이란 그저, 북녘 땅에 틀어박혀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이들이 스스로 달래기 위해 내어놓은 변명에 불과할 수도 있다.

상념에 빠져, 이제 슬슬 끝물 접어드는 백야의 햇빛이 넘실대는 네바 강에 비추는 것을 보던 고르차코프 공작은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그나티예프 백작이 접견을 청하고 있습니다, 공작 각하.”

“들라 하게. 차도 좀 내어 오고.”

오래잖아 늙은 공작의 지시대로 사람도 차도 모두 들어왔다.

“각하. 갑작스러운 청에도 접견을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개 숙이며 이그나티예프가 인사를 건넸다. 항상 콧대 높은 그가 이렇게 공손하게 대하는 사람이라면 – 교회의 문턱 안쪽을 제하면 – 러시아 인민의 주인인 차르 알렉산드르 2세, 그리고 고르차코프 공작, 이렇게 두 사람을 넘지 않을 터.

“별 일 아닐세. 자네도 늙어보면 알겠지만 이 정도 햇살에도 잠을 이루기가 쉽지는 않거든. 그러니 남은 시간에 일이라도 더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 무슨 일인가? 여독도 여독이지만 당장 내일의 알현을 위해서라면 얼른 끝내고 쉬어야 할 텐데.”

“실은 그 때문입니다. 폐하께 아뢰기 전 미리 말을 맞추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보다 동방 위기가 순탄하게 풀려버리면서, 원래대로라면 별 성과 없이 끝나야 했을 콘스탄티노플 회담은 거의 반 년 일찍, 그리고 성과 가득한 채 마무리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보고하기 위해 임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이곳까지 직접 이그나티예프가 올라왔던 것이다.

“오? 논란 될 만한 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양보를 끌어낸 듯하더니, 아니었나?”

물론 이만한 사안이 아니었더라면 전보의 시대에 굳이 이그나티예프쯤 되는 거물이 직접 움직일 이유는 없었을 터. 교섭의 내용이라면 고르차코프 역시 전달받아서 깊게 들여다본 지 오래였다.

“말씀하신 바가 맞습니다. 물론 불가리아의 영토에 있어서 조금 양보를 해야 하기는 했습니다만, 대신 투르크인들에게 확실한 고삐를 채워두고 왔지요.”

물론 주전파였던 이그나티예프로서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차라리 전쟁에 호소했더라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투르크군을 몰아내고 발칸 전역을 석권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아직도 영 허탈하였던 것이다.

“지도에 눈이 붙어있는 것을 보니, 아직 그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군그래?”

노련한 고르차코프가 놓칠 리 없었다. 속을 들킨 이그나티예프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동루멜리아와 마케도니아 대신 카르스를 얻어낸 것이 과연 잘한 결정인가,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의구심이라면 버려도 좋아. 어차피 과욕이었네. 전쟁을 치러서 당당히 전리품을 얻어낸 것도 아니고, 발칸에서 양보하고 카프카스에서 조금이나마 더 받아낸 정도면 잘 한 일이야. 요행히 영국이 한 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잘못하면 1856년의 악몽(크림전쟁)이 재연될 수도 있지 않은가.”

전쟁으로 얻어낸 것을 뱉어내라 영국이 요구했다면 정말 전쟁을 불사해야 했겠지만, 사실 이번 합의의 가장 큰 원인은 영국 내각 내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난 덕분이지 않던가. ‘평화적 목적’ 하에서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루스 항행의 자유.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를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발칸 민족들의 높은 자치권 보장 등. 막대한 전비를 치르지도 않고 이 정도 이익이라면 오히려 만족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게다가 영국이 직접 나서서 빚쟁이 노릇을 해주겠다 하니, 어리석은 투르크인들이 반발하려 해도 뒷배가 없게 된 셈이지 않은가. 실로 하느님의 보살핌이 있던 게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서 내놓는 결론도 대개 비슷했다. 개중에는 차르의 자유주의적 개혁 덕분에 러시아가 다른 열강들의 신임을 얻은 것이라는 이들도 있었지만, 또 반대로 신앙을 지키기 위한 불굴의 의지 덕에 이교도들의 양보를 이끌어냈다고 가져다붙이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저 영국인들이 과연 순순히 물러날지는 모르겠습니다. 발칸에서는 문명과 자유 운운하며 양보하는 시늉을 했지만, 그만큼 중앙아시아와 극동에서 반드시 다시 얻어낼 생각을 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그렇게 되겠지요.

신뢰할 만한 정보에 따르면, 야쿱 벡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곧 중국군이 일리의 지척까지 진군하게 되겠지요.”

부하라와 히바에서의 모험, 그리고 바로 뒤에는 북경에서의 협상 성공으로 외교부 내 입지를 다진 이그나티예프다. 아직까지 현지에 연줄 한둘쯤 남아있는 것이 당연했고, 현지 관료의 월권 정도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러시아에서 그런 정보가 고르차코프까지 올라가지 않는 것 역시 (다른 나라에서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야심찬 중견 관료라면 저의 소매에 그 정도 패는 숨기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이미 코칸드는 차르 폐하의 통치를 받아들였네. 중국인들이 보이고 있는 성과가 물론 훌륭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중앙아시아에서 우리의 패권에 도전하지는 못할 것이야.”

당장 지난 겨울의 일이었다. 코칸드 측의 마지막 저항을 무너뜨린 뒤, ‘러시아의 신민이 되기를 원하는 코칸드 인민의 간곡한 요청’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 페르가나 주를 설치하지 않았던가. 혹시 영국이 반발하지 않을까 약간은 걱정했지만, 다행히 발칸의 일에 신경이 쏠린 탓인지 별 문제 없이 영국도 러시아의 기득권을 인정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로서는 각하의 말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발칸에서의 다툼이 결판이 나기 무섭게 영국인들이 대신 극동 국가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우리를 막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듣기로 중국의 이번 원정에 최대의 지원을 한 것 역시 영국이라 하더군요. 이번에 극동에서 우리의 세력을 보장하겠다며 설립을 제안한 아시아개발은행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1856년의 재발을 막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이대로라면 곧 모든 남쪽으로의 길이 막혀버리게 될 겁니다.”

그야 수완가 공친왕이 좌종당에게 합류하여 외채를 끌어다 쓴 덕분이었지만, 그 외채의 태반이 공친왕과 친분 있는 영국 외교관 올콕의 주선으로 들어온 것이었기에 오해함직한 정황이 만들어지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또 무슨 위험한 모험 얘기를 꺼내려는가 생각하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던 고르차코프도, 얘기가 여기에 이르게 되자 비로소 관심 – 보다는 걱정 – 이 동하기 시작한 듯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다고 치세. 하지만 공식적으로 우리는 이번 일로 많은 것을 얻어내었어. 그 중 태반이 곁가지와 껍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얼른 내실을 다져서 제국의 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도 적지 않네. 당장 자네가 말한 아시아개발은행의 건도 그렇고.”

내걸기로는 극동의 번영과 모든 관계국의 국익 증진을 목표로 하는 아시아개발은행이었다. 겉으로나마 극동 국가들을 존중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으니, 일방적인 이권 침탈로 간주되어 영국 같은 참견꾼들을 꼬이게 할 여지는 없었지만, 문제는 정말로 침탈을 해야 할 때 역으로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덩치만 불렸지 내실이 없는 러시아 극동과 중앙아시아의 입장에서는 힘겨루기를 멈추고 숨을 고를 필요도 있던 것이 사실인지라, 형세가 고착되기 전 뚫고 나가야 한다는 이그나티예프의 말만큼이나 우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한다는 고르차코프의 생각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니 우리도, 차르 폐하의 개명되고 자비로운 통치에 다소 맞지 않는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우리의 앙숙 영국을 모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자 찾아온 것이지요.

적어도 현 상황이 극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한, 우리는 지금 영국이 하고 있는 것처럼 문명의 변방에 있는 국가들을 존중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도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그런 나라 안에 우리 러시아와 이익을 함께하는 세력을 육성할 필요가 있지요.”

찻잔 위에 헛되이 김이 맴돌고 있었다. 열변 토하는 이그나티예프의 잔과 경청하는 고르차코프의 잔 모두 사정은 동일하였다.

“저의 판단으로는, 적어도 한동안 영국이 중국 정부를 지원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대한 중국의 집권세력에게 불리하게, 그리고 우리에게 유리하게끔 상황을 변경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 조선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흠, 확실히 지금의 조선 정부는 어느 쪽도 편들지 않겠다는 듯 기민하게 움직여왔지. 지금 자네 말은 그들 조정 내의 무게추를 움직일 자신이 있다는 얘기인가? 뭔가 그럴듯한 방도가 있으니 폐하께 아뢰기 전 상의하고자 찾아온 것이겠지.”

“예, 말씀대로입니다.”

그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멀리 동쪽 조선에서는 알려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꼭 이런 일은 자신이 있을 때 일어난다는 말인가.

“전하, 불측한 풍문이 저자에 돌고 있습니다. 혹시 들어 알고 계시는지요?”

공식적으로는 항의를 위해 찾아온 흠차대신 모창희의 속마음이 그러했다. 신미년(1871) 처음 부임해 왔을 때는 어리석은 군중이 난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옆 영국 공사관으로 도망하여야 했고, 마침내 귀국길이 열린 지금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익명의 투서가 접수되어 처리하지 않고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슨 풍문을 이름인지, 나로서는 쉬이 알 수 없구려.”

“흠흠, 다름이 아니라, 전하의 생부 되는 대원군께서 사사로이 무관들을 모아, 불온한 모의를 하고 있다는 풍문입니다. 누군가 저희 공사관에 투서하였기에 근래에 은밀히 확인하였더니, 약간이나마 의심되는 바 있어 감히 여쭙게 되었습니다.”

그 ‘불온한 모의’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귀남은, 이전에 대원군이 어느 장맛날 제게 와 청국을 정벌하는 계획을 세우겠다고 고해바쳤던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허, 대국과 우리가 예와 의로써 서로 대함이 햇수로 따져도 이백 하고 오십 년은 족히 넘겼을 터인데, 이제 와서 둘을 갈라놓으려 하다니 필히 흉적의 농간이 있는 것일 듯하오. 내 마땅히 이 일의 진상을 살펴 그 끝을 드러낼 것이니, 흠차대신은 그리 알고 물러가도록 하시오.”

“예, 전하. 모쪼록 지금까지 수호한 예에 비추어 어그러짐이 없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아무리 속으로 귀찮다고 여긴다 해도 공사(公私)의 구분까지 어지럽힐 정도는 아니었던 모창희가, 은근한 위협, 그리고 제발 그런 위협의 실무자가 자신이 되지 않도록 어련히 처리해달라는 간절한 청을 담아 말했다.

모창희가 떠나자마자 급한 기별을 받고 입궐한 대원군은 곧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태가 이리 되었으니 내 최대한 막아낼 궁리를 해 보겠소.”

그러나 아직 한없이 어려 보이는 이 스물다섯살 주상이 얼마나 막아줄 수 있겠는가? 없는 사실을 꾸며 무고한다면 모를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임금의 걱정 어린 설명을 듣고 나올 때는 이미 마음이 가을철 풍랑 이는 인당수와도 같았다.

‘내가 어리석었다...’

익문사를 공안서로 고치면서, 자연히 사람이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도성에서도 그리할진대, 나라 밖에서는 어떻겠는가.

그 옛날, 나라의 대권을 쥐락펴락한다는 자들이 이렇게 일을 어설프게 도모한다며 비웃던 시절이 있었다. 장동 김문을 무너뜨릴 궁리 하던 때만 해도, 언제고 자신이 그런 비웃음의 대상이 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건만.

그 때 자신에게 붙기로 한 김문 끄나풀들을 의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이 다시 딴마음 품을 때면 미리 알아차리고서 먼저 입막음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심복인 천하장안 네 사람이 도성 사대문 안에 손닿지 않는 곳이 없었으므로, 그런 자신감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라의 문이 열리고, 그간 머물던 우물 밖에 무시무시한 용과 호랑이가 서로 물어뜯고 있음을 보았다. 고작 도성 주름잡는 주먹패 따위로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그의 아들인 임금이 없었더라면, 뒷골목 왈짜가 여기까지 올라올 일도 없었을 터. 갑자기 그간 북벌 같은 소리 하면서, 덕의지 같은 강군을 만드니, 아라사와 싸워 제압하니 하는 말을 꺼내왔던 자신이 우습게 여겨졌다.

문득 마음 답답하여, 이제 막 운현궁 앞 구름재 비탈길 오르려 하던 가마를 멈춰 세웠다.

“내 오늘은 걸어 올라가려 하니, 너희 교군은 먼저 돌아가도록 하여라.”

호위하는 무관 몇몇과 천덕기만 남기고 천천히 고개를 올라갔다. 분위기가 흉흉함을 아는지, 인적 드물지 않은 대로임에도 아는 체하는 자가 없었다. 그 덕분이라 해야 할까? 따로 가갈하지 아니하여도 절로 앞이 트여 막힘이 없었다.

고개 드니 무심하게 파란 가을 하늘이 눈에 들어오고, 멀리 북악산 자락 향해 올라가는 바람이 그의 뺨을 훑었다. 마치 정신 차리라며 누가 툭툭 치는 듯해, 다시 마음을 부여잡고 자신과 아들 주상을 구할 방도를 고민하였다.

당연히 누군가 발설하였던 것이리라. 하지만 누가 허투루 입을 놀린 것일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으로, 누구를 위해 그리한 것일까? 제가 지금까지 지어온 죄업이 작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오히려 콕 집을 수 없을 만큼 발설하였을 법한 자들은 수없이 떠올랐다.

여기저기 자잘한 술기를 배워 문중의 일에 보탬이 되라며, 명문거족의 서얼들이 요 근래 구주 곳곳으로 보내지고 있음을 대원군은 알고 있었다. 정식으로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는 학원의 선비들만큼은 못한 신세지만, 그들 중에도 총명한 자가 한둘쯤이야 없겠는가. 아마 저의 신세 고쳐보겠다며 양이의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손을 잡으라는 것 자체가 문중의 뜻이었을 수도 있다. 박규수의 반남 박문이야 이미 얻어놓은 세력이 있으니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자신에게 원한 깊은 장동 김문은 물론이요, 은근슬쩍 찬밥 신세 된 풍양 조문도 악에 받쳐 그런 짓을 하기로 마음 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말 그대로 대만 이어주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간택을 받자마자 내쳐진 여흥 민문은 또 어떠한가? 반절은 대원군의 자의로 한 것이요, 나머지 반절은 저들의 처신이 잘못되었던 탓이라지만, 사람은 무릇 저의 잘못은 티끌로 보이고 남의 잘못은 대들보로 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상과 자신의 사이가 쉽사리 이간질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님을, 도성 안에서 승냥이의 마음 지닌 이들이라면 마땅히 알 것이다. 백락내(벨로네) 그 자가 처음 서쪽 바다에 와 분탕치던 시절부터, 자신을 향한 어심은 흩어진 바 없었다.

자신의 아들을 대신하여 용상에 앉을 법한 이들은 장동 김문과 풍양 조문이 지난 반백년을 싸우면서 모조리 대가 끊어졌으므로, 굳이 추대한다면 결국 자신의 다른 아들 중에서 골라야 할 텐데, 임금과 자신을 모두 끌어내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까지 물갈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일이 그럴 만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자신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만 하면 될 일이고, 정 일이 안 풀리게 되면 한 몇 년쯤 숨죽이고 있을 각오도 했다. 하지만 임금은 면이 조금 상할지언정 그대로 왕위를 지킬 것이므로, 확실한 뒷배를 하나쯤 두지 않고서는 오히려 더 적을 많이 만드는 격이 될 터.

그러므로 우선은 그 뒷배가 어디인지, 연경인지, 피득혁인지, 아니면 하다못해 왜국 동경이나 영국 윤돈인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운현궁 도달하니 깍듯하게 인사 올리는 외국인 청년이 하나 있어, 대원군이 그런 고민으로 머리 아파할 일을 줄여주었다.

“대원위 합하께 인사 올립니다. 이번에 북경 공사로 부임하신 이그나티예프 백작 각하를 돕고 있는 러시아의 외교관, 베베르(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라고 합니다.”

--- *** ---

원 역사의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을 통해,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발칸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과욕을 부렸다가 다른 열강들의 경계를 사게 되면서, 1878년 베를린 조약에서는 얻어낸 권리의 상당 부분을 뱉어내야 했지요. 물론 전쟁 전에 비하면 얻어낸 바가 없지 않았지만, 어려운 살림에 전쟁까지 일으켜가며 뜯어낸 전리품이라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습니다. 고르차코프 공작은 자신의 최대 실책으로 평가하였고, 개혁군주였던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역시 이 일로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사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기는커녕 위기가 막 심화되려는 시점에 글래드스턴이 디즈레일리의 외교정책 노선을 비틀어버리면서, 러시아가 힘을 쓰기도 전에 뭔가를 얻어내는 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다고 해도, 적어도 들인 공에 비하면 확실히 많이 받아낸 셈이지요.

그리고 1875년 겨울부터 1877년까지 이어진 열강 사이의 중재 시도가 영국을 믿은 투르크 측의 일방적 거부로 인해 좌절되었음을 생각하면, 원 역사보다 조기에 영국이 국가부채를 이용해 투르크에 목줄을 채울 구상을 하게 되면서 후환의 불씨도 상당히 줄어든 셈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원 역사에서도 좌종당의 성공적인 야쿱 벡 진압은, 일시적으로 중국의 힘을 과대평가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침탈을 당해도 추산하기에 따라 세계 1~3위의 GDP를 지녔던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이었으므로 (유럽 국가들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잠재력을 발휘하기 직전이었던 탓이기도 합니다만) 합리적인 평가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좌종당의 전략 탓에 발생한 착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전쟁 수행 과정을 보면 전근대판 전격전이라 할 만큼 빠르게 진행되었기에, 그 전의 오랜 준비기간을 모르는 외부 관측자의 시각으로는 청조의 양무운동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거든요. 물론 원 역사에서는 청불전쟁으로 그 실상이 일정부분 노출되면서 금방 거두어진 평가입니다만.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는 19세기 러시아 확장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던 외교관으로 평할 수 있습니다. 특히 1860년 2차 아편전쟁 전후처리 과정에서 연해주를 뜯어내는 데는 그의 영향이 지대하였으며, 그 전에는 중앙아시아에서, 그리고 동방위기 당시에는 발칸에서 러시아의 확장을 추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원 역사의 산스테파노 조약 체결 역시 그가 관여했던 것이었지요.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지요. 1865년 대학 졸업 직후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원래대로였다면 지금 하코다테와 요코하마 부영사직을 거치고 톈진 영사로 근무하고 있어야 합니다. 동양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젊은 나이에도 동양 외교의 최전선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물론 베베르 본인의 자질도 있었지만, 당시 러시아의 극동 진출 의욕에 비해 실제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외교관이 부족했던 현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러시아는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급격한 산업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원 역사에서는 1880년대 초반부터 시장 및 무역항으로서의 극동의 가치가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부족한 해군력으로 인해 제대로 개입할 수 없는 일본과는 교역을 확대하고, 대신 육로로 직접 왕래할 수 있는 조선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고개를 내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민을 제외하고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거의 모두 있”는 연해주의 저개발된 현실 (당시 총독이던 코르프의 표현입니다)로 인해, 제대로 된 세력 투사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