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입은 화의 문이라 (2)
정치와 전쟁은 결투와도 같다. 의지와 의지가 맞붙고, 서로 그간 쌓아둔 패를 하나씩 내보이며 겨룬다. 이름 붙이기에 따라 선거라고도, 결투라고도 하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디즈레일리가 보기에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정치인이란, 마치 자신의 손에 들어온 패에 따라 희색이 완연하기도, 창백하게 사색이 되기도 하는 서투른 도박꾼과도 같았다. 도덕이라는 덫을 놓으려다 끌려들어가는 글래드스턴이든, 갈망의 도시 콘스탄티노플과 따뜻한 바다로의 진출로를 위해 난리법석을 떠는 러시아든, 그런 면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다.
“러시아가 정녕 극동 따위를 위해 발칸을 포기하리라 믿으시는지요?”
“하, 그럴 리가 있는가? 하지만 불곰이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미끼인 것은 맞지. 그러니 덫에 발을 들이밀 수밖에 없을 테고.”
조선이야 그렇다 쳐도 일본 북부를 러시아가 얻어내게 되면, 태평양으로의 길이 고스란히 열리는 셈이다. 러시아 정부 내에 그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주장하는 이들이 분명 나올 터.
“글래드스턴 씨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저 투르크인들이 정말 재정지원을 내세운다고 해서 진지하게 내정개혁을 하지는 않을 걸세. 반군을 찍어누르는데 힘을 더 쏟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러시아는 어떻게든 움직일 수밖에 없어.
러시아가 아무리 미련하다고 해도 이를 모를 리 없고, 결국 발칸은 몇 년 내로 다시 적당한 핑계를 붙여 집어먹으면 된다 생각하며 우리 제의를 수락하는 시늉을 하겠지. 제의를 거절한다? 저들이 원래 내민 합의안에서 우리가 더 양보해주었는데 그걸 거절한다면 그때야말로 러시아는 악당이 되는 것이고.”
디즈레일리는 정책을 결정하는 입장에서 러시아에 대해 알아야 할 만큼은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발칸의 슬라브 민족들을 위해 개입한다, 기독교인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다. 이런 겉치레 대의를 진지하게 믿는 자들이 러시아라는 대국의 국사를 결정한다.
그렇게 되면 오스트리아도, 독일도 러시아의 야욕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삼제동맹(三帝同盟)이니 무어니 하면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저의 편으로 묶어두려던 비스마르크의 전략은 실패하고, 영국은 자신의 장기 – 남의 손으로 남의 피 흘리게 하기 –를 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극동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잠시 이권을 내주는 흉내를 낸다 해도 이때 다시 찾아오면 될 터.
“요새 듣자하니 중국도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를 길러낸 모양이던데, 그들까지 동원해서 포위망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봄직 하겠군. 뭐, 이건 아직 구상 단계니까 자네만 알고 있게.”
어쨌든 영국은 러시아에게 양보할 의사를 보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아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는 알려서, 러시아가 영국이 건넨 호의를 배신으로 되갚았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잠시 조선과 일본이 불곰 앞발 위에 놓이게 된다 해도, 나아가 광분한 불곰의 손에 해코지를 당한다 해도 디즈레일리가 알 바는 아니다. (조금 옹졸하기는 하지만, 지난 차관 제공의 건으로 자신에게 망신을 준 조선이 좀 당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감정도 없지 않았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러시아 쪽에 어디까지 공식적으로 제안하면 되겠습니까? 수면 아래에는 얼마나 남겨놓으면 될지요?”
처음에는 자신에게 디즈레일리가 설득된 줄 알았는지 낯을 밝혔다가, 점차 무뚝뚝한 사무용 얼굴로 돌아온 더비 백작이 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잠깐이나마 못마땅한 마음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지만, 디즈레일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제안을 환영함. 이 정도로 짤막하게 발표하지. 물밑으로는 극동 얘기를 전하면서 이 합의로 러시아가 많은 것을 양보하였음을 인정하며, 이에 상응하는 보답의 조건을 논의할 용의가 있음. 이렇게 전하면 적당히 알아들을 테고. 너무 잘 알아들으면 곤란하니까, 감출 것은 감추어서 그쪽 애를 닳게 하는 것도 잊지 말게나.”
“물론입니다. 회신을 받는 대로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더비 백작이 공손히 인사 올리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디즈레일리는 이번 위기가 손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잘 정리되리라는 직감을 받았다. 러시아는 포위되고, 영국의 패권은 공고해지며, 세상의 모든 야만적인 대지 위에 이곳부터 여왕 폐하의 땅임을 명시하는 ‘가늘고 붉은 줄(Thin red line)’이 그어지는 꿈.
솔직히 외부의 적이 있어야 지금의 경제공황으로 인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정략적 판단도 있었지만, 대영제국의 정치인으로서 세계지도를 볼 때면 슬그머니 그런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은 디즈레일리가 그렇게 되기를 꿈꾸었던 것처럼 돌아갔다. 조선과 일본을 먹어치우지 않는다면 아무리 연해주가 번영해보았자 재주 넘는 곰 신세임을 알던 러시아의 고르차코프는, 석연치 않아하는 차르를 설득해 오스트리아의 중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고, 그러기 무섭게 술탄은 영국이 저의 뒤에 있음을 믿었는지 다시 가혹한 무력진압에 나섰다.
물론 불가리아의 반군이 아무리 혹독한 탄압을 당한다 해도 영국의 국익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개입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러시아가 끼어들도록 더 부채질한다면 모를까.
마침내 러시아가 투르크의 합의 불이행을 근거로 – 투르크는 당연히 러시아가 불가리아 반군을 지원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위협하기에 이르자, 디즈레일리는 다음 수를 꺼낼 준비를 했다.
‘디즈레일리 수상, 야당 당수 글래드스턴 씨에게 공개 질의! 누구를 위한 평화운동인가?’
‘명명백백히 드러난 러시아의 야욕! 땅에 떨어진 국가 간의 신의!’
“흐흐, 친애하는 윌리엄(글래드스턴), 언론은 자네만 동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네.”
러시아는 디즈레일리의 예상보다도 더 빠른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극동을 삼킬 준비는 (준비‘만’이라는 게 포인트였다.) 끝내둔 상태였다.
‘러시아, 극동아시아로의 남하 천명! 발칸의 불씨, 극동으로 옮겨 붙나?’
‘러시아의 긴 팔, 중국을 노리다! 공포에 떠는 상하이와 홍콩!’
어쨌든 러시아는 이면 합의를 깨뜨린 뒤였으니, 당연히 극동의 세력균형도 이전처럼 돌아가야 했다. 러시아야 줬다 빼앗는 것은 다섯 살배기 아이도 하지 않을 짓이라며 항의하겠지만, 공식적으로 호의를 배신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영국이다.
“우리 선량한 유권자들이 저렇게 대책 마련을 요구하니, 정부로서도 뭔가 행동을 보여야 하지 않겠나? 러시아를 규탄하고, 위협을 받고 있는 동양 나라들에게는 적당히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제스처를 취해보세나.”
여전히 못마땅한 듯 뚱한 표정의 더비 백작이 말했다.
“이대로라면 전쟁입니다, 각하.”
“그래서 뭐 어떻다는 겐가? 지금 상황이라면 크림 전쟁의 재연일 뿐이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알아서 러시아에게 목줄을 채우지 않는다면 말이야.”
“반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우리에게 해결을 떠넘길 수도 있지요. 각하, 영국은 섬입니다. 다른 나라를 장기말 가지고 놀듯 움직이는 것은 국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하, 외무장관이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나? 게다가 전쟁은 도움이 된다는 말일세. 정확히는, 전쟁의 위협이 도움이 되지. 보수당 지지율은 올라가고, 더 이상 판돈을 올릴 수 없는 러시아는 결국 기죽은 채로 협상 테이블에 나오고.”
경기도 어려운데 무슨 전쟁이냐며 글래드스턴과 책상물림 스펜서, 그리고 그 동양인의 주장에 찬동하는 듯하던 여론은, 평화를 사랑하는 영국의 제의를 거부하고 팽창 야욕을 감추지 않는 러시아의 모습에 손바닥 뒤집듯 돌아섰다.
“요새 런던의 펍에서는 이런 노래가 유행한다지.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징고(Jingo)의 이름으로, 우리가 싸우게 된다면
전함도 있고 병사도 있고 돈도 있다네
곰과 싸운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우리가 진짜 영국인인 한
러시아 놈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얻지 못하리.’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싸움이라면, 이렇게 여론의 축복을 받으며 전쟁 직전까지 나아가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러다가 정말 화약고에 불 붙이는 격이 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그 화약고에 화약이 더 들어차기 전에, 감당 가능할 때 미리 터뜨리는 것도 나쁘지 않잖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디즈레일리는 전쟁광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법.
“지금 전쟁의 위협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나중에는 정말 제대로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르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가 아는 대로 계속 돌아간다면 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몇 년째 조러수호조약의 재개정을 요구하던 러시아 공사 슈트루베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자, 조선의 조야도 한창 시끄럽던 차였다. 늘어가는 도자기 컬렉션에 행복해하던 슈트루베가 갑자기 다른 사람 넋이 들어와 그랬을 리는 없고, 아마 아라사 조정 위쪽 어딘가에서 무언가 바뀌었으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조선이 아라사령 연해주에서 부당한 이익을 취했음을 인정하고, 조선 전역에서 아라사인이 그 어떤 제지 없이 통상할 수 있도록 하며, 조선인이 관헌을 속이는 일이 많으므로 혹 다툼이 일어나면 각 도시에 파견할 아라사 영사로 하여금 주재하게 한다니, 저들이 어찌 우리를 이리 모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다가 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멀리 영길리가 아라사의 패악한 행위를 규탄하며, 필요하다면 총칼로 그 죄를 묻겠다고 나섰다. 물론 나중에 그 공을 논하여 조선에서 베풀어주는 바가 있어야 함을 넌지시 언급하기는 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처음 문호 열기로 한 계기가 아라사 때문이었음을 기억하던 조정 중신들에게는 이만한 낭보가 또 없었다. 귀 얇은 이들이 먼저 그 손을 잡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이제이의 계책이 이루어질 형국이 스스로 갖추어졌으니 어찌 조종의 보살핌이 아니겠습니까? 아라사에게 계고하여, 만일 저들이 강한 형세를 믿고 난행을 거두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는 마땅히 영길리를 끌어들여 의각(犄角)의 세를 갖출 것임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아국의 남방 연해로 말하자면 바다와 땅이 맞닿는 곳이 많아 실로 천혜의 요해(要害)요, 천하의 수사(水師, 해군)를 능히 들일 만합니다. 영길리를 뭍 가까운 섬에 들이면, 뭍의 여러 고을의 풍속이 어지러워지는 일 없이 오직 그 세력으로 인한 이득만을 취할 수 있으니 어찌 상책이 아니오리까?”
물론 구주를 다녀온 자들은 조금 다른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작금의 천하는 실로 난세라, 대서의 나라들은 불측하게도 제멋대로 다른 나라의 정사를 논하고는 합니다. 그저 말뿐이라면 무도한 오랑캐라 치부하겠으나, 능히 이를 뒷받침할 수 있으니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실로 그러합니다. 저들이 정녕 다투는 바로 삼는 것은 대서 땅의 판도이니, 마땅히 병가에서 말하는 허실(虛實)을 가려, 그 참 뜻을 면밀히 살펴야 하옵나이다.”
귀남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무릇 차병(借兵)은 하책 중의 하책이오. 우리 힘으로 우리를 능히 지킬 수 있을지 견주어보지도 않고서 어찌 남의 힘 빌릴 궁리를 하겠소?”
정말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면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지푸라기를 잡겠지만, 귀남이 보기에 이제 (또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이 나라, 이 땅이 그렇게 두 외세 사이에 끼어 두 동강 났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가.
더구나 소련, 아니, 아라사라면 모를까, 영국이라면 그가 88올림픽 하기 한참 전부터 ‘선진국 따라가야 한다’ 할 때 종종 들었던 나라다. 유럽 선진국이라면 설마 그런 소리를 가볍게 했을까, 아무리 무서운 세상이라지만 정말 그 정도로 가볍게 조선을 대할까 싶었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짓밟히기 마련이라고 배웠건만, 아무리 그래도 선진국이라 했는데 그렇게 대놓고 악독한 짓을 할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세상 일 모르는 것이니 정말 그렇게 속이 검다면 어쩔 수 없이 나름의 구명할 방도를 찾아야 하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라도 섣불리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 번쯤 확인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라사는 비록 북방의 근심이라 하나, 연해주 땅에 사람이 왕래한 이래 되려 가까운 이웃이 되었소. 또한 영길리는 만 리 밖 이방이라 하나, 우리의 누습(陋習)을 바꾸는 데 그 재물을 헐어 내어주었소이다.
이런 나라들이 갑자기 다툼은 필히 이유가 있을 것이오. 그런데 두 나라에서 모두 도움 받은 우리가, 그 사연을 따져 싸우는 일을 막으려 해보지도 않고서 가운데서 이익 취할 일만 생각한다면, 천하의 그 누가 아조를 일컬어 도리 아는 나라라 하겠소?”
만약 아무런 연줄도 없이 이런 소리를 한다면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격이겠지만, 귀남은 이미 운현궁으로부터 꼭 그렇지도 않음을 전해들은 바 있었다. 바람 부는 방향은 기막히게 살피는 공사 이호준이, 대원군 분부대로 영국 사정을 알차게 적어 보내고 있던 것이다.
“아라사는 몰라도, 영길리는 그 땅에 학문이 흥성한바 선비도 적지 않다 하오. 비록 코 높고 눈 깊다지만 같은 사람일진대, 개중에 뜻 있는 자 없겠소?”
임금이 무엇을 이르는가 그 의중을 파악한 중신들이 여럿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얼마 전 일본국에 대해서도 이렇게 착한 행실 권면하는 일을 해서 효험을 얻지 않았는가?
비록 그 나라의 북쪽에서 작란하는 사변이 있었다지만, 결국 다툼 없이 끝났으며 결국 일본국도 조선의 예를 따라 저들 나름의 참의원을 둔다 하였으니, (오쿠보 도시미치는 억울해하겠지만) 조선의 신료들뿐 아니라 선비 대다수는 작년 일본의 일이 참으로 잘 된 것이라 하고는 하였다.
“학문이 없다 하여도 바른 심성 있는 자라면 화란(禍亂) 싫어하고 화평을 기꺼워하기 마련이니, 성상께서 이르신 대로 저들이 문명한 나라라면 어찌 싸움에 본뜻이 있겠습니까?”
물론 여전히 이이제이의 계책이 옳다 여기는 자들이 많았지만, 적어도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여야 계책이고 책략이고 베풀 수 있는 것이니 우선 영국의 민심 흐르는 바를 살피자는 데는 대개 동의하였다.
“아라사의 일은 그 조규의 개정을 청하기만 하고 군병 움직이는 바는 없었으므로 그 완급을 헤아리면 아직 시일이 있다 하겠습니다. 마침 영길리 땅에 우리 선비들이 여럿 나아가 견식을 넓히고 또 밝은 도리를 전하고 있으니, 우선 그쪽을 살피고 타이름이 또한 가할 것입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세상에 편들어주는 이 없다 하여도 목청 터져라 외치고 외치는 것이 선비다. 하물며 이역만리에 뜻을 (반절이나마) 같이하는 동지가 있고, 또 본국에서는 그 나라 민심을 살피고 또 타이르라 하니 스스로 삼갈 이유가 없었다.
공사관에 이호준이 전우 이하 선비들을 모두 불러모아 물어보니, 그 사정을 익히 알만했다. 노사학원에서 영길리에 선비 보낸다 하여 김문의 지원 받아 몰려온 화서학원 원생들도 동석하자 공사관이 꽤 북적거렸다. 아무리 학풍과 학통이 다르다지만 지금의 사안은 참으로 엄중하지 않은가.
“소생 살피건대 구 선생(글래드스턴)의 당은 군자의 무리요, 저 적씨(디스레일리)의 당은 소인의 무리라, 구 선생 이르는 말을 보면 주이불비(周而不比)하고 화이부동(和而不同)할 것을 청하니 택하여 편들 만합니다.”
전우가 먼저 발의하자, 다들 한 마디씩 내어놓았다.
“그러나 이 땅에는 사람의 터럭 색과 살갗 색으로 쉬이 낮추고 깔보는 폐습이 있으니, 우리가 나서서 돕는다 한들 도움이 되겠습니까?”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 해도 능히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도성에서 본 바, 지난 한성부 참의대부 추거에서 대부 되려는 이들이 민심 얻고자 꾸민 계책들이 대개 정교하여, 이 땅에서도 택할 만합니다. 우리가 무장(武將)은 못 되어도 능히 모사(謀士)는 할 수 있으니, 어찌 구 선생에게 보탬 될 방도 없겠습니까?”
그리하여 말하는 바를 신보에 싣고, 중요한 번화가에는 글래드스턴 본인이, 그렇지 않은 곳에는 아침저녁마다 (눈길은 확실하게 끄는) 두루마기 차려입고 정갈하게 갓까지 쓴 선비들이 나서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전쟁은 어찌하여 나쁜가.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왜 국익에 이로운가. 색목인들에게 공자왈 맹자왈이 먹힐 리 없다 하여, 대신 전우와 면식 있는 스펜서에게 청해 글을 써 달라 하였다. 그러니 스펜서의 지인들 – 조선 선비들은 ‘뜻 있는 선비’라 여겼지만, 아마 그보다는 그저 디즈레일리와 보수당이 싫었던 것이리라 – 도 한두 마디, 한두 문단, 나중에는 한두 권씩 보태었다.
“공격성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익 극대화를 위해 협력하여 더 높은 복지, 더 훌륭한 삶을 누리는 것 역시 인간의 본성입니다. 후자가 전자의 자연스러운 귀결임은 명백한 사실이지요. 그런데 왜 영국은 반대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어려운 문자 섞어가며 시작했지만, 이 소리 저 소리 섞이고, 또 돌아오는 말 중 취할 만한 것은 덧붙이고 하다 보니 점점 격이 떨어져, 나중에는 시민들의 귀에 쏙쏙 박힐만한 것으로 바뀌었다.
“불가리아에서, 보스니아에서 투르크인들이 반군 진압을 명분 삼아 벌이는 야만적인 폭력을 보십시오. 디즈레일리 씨의 정부는 이를 막기는커녕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부가 과연 여러분의 자유, 여러분의 권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술집의 멋모르는 사람들은 ‘영국의 군함, 영국의 병사, 영국의 돈’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군함은 누구의 세금으로 건조됩니까? 병사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돈을 다 쓰면 설마 수상과 장관들의 금고에서 충당할까요?”
1876년의 ‘반침략 연대(Anti-aggression League)’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황인 몇몇이 뭉쳤다면 그저 구경거리였겠지만, 그 뒤에 글래드스턴이라는 거인이 버티고서, 이번 기회에 보수당 코를 제대로 눌러줄 생각을 하고 달려들었으므로, 당초 대수롭잖게 여겼던 디즈레일리는 불의의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그리하여 슬슬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생각하던 무렵.
“극동을 미끼로 던지다! 익명의 고발자, ‘디즈레일리 수상은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충격의 폭로!”
“영국의 명예는 어디에? 문명의 후견인 존 불(John Bull), 노예주로 전락하다!”
조선의 속담에 이르기를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하였고, 영국 속담에는 벽에도 귀가 붙어있다 하였다. 그 말을 쥐가 옮겼든 벽이 옮겼든 곧 디즈레일리의 심산이 바깥으로 새어나가고야 말았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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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디즈레일리가 언급하는 노래는 19세기 국수주의의 명칭 중 하나인 ‘징고이즘(Jingoism)’의 어원이 된 노래입니다. 징고(Jingo)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징고이즘은 국수주의 중에서도 강경한 대외팽창 위주의 (즉 일단 수틀리면 무조건 쳐들어가서 때려잡자는 식의) 국수주의 경향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이 징고이즘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이 바로 동방위기와 뒤이은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었습니다.
러시아의 확장주의적 행보는 이전에도 한 번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관적인 논리 없이, 주먹구구 식으로, 때로는 현장지휘관의 월권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흔히 부동항 운운하는 것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지정학‘이 시작하면서 대중의 인식으로 굳어졌을 뿐, 러시아의 행동을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당장 위의 러시아-튀르크 전쟁도, 영국은 동지중해 패권 확보가 러시아의 핵심 목표라고 보았지만, 실제로는 범슬라브주의 정서 및 종교적 열정에 휩쓸린 면이 강했습니다.
연해주를 확보하기 이전부터, 동해 진출이 러시아 내 일부에 의해 중요한 전략목표로 언급된 것은 맞습니다. 심지어 극단적인 주장으로는 대한해협을 ‘동방의 보스포루스’로 부르며, 일본과의 교섭 또는 전쟁을 통해 쓰시마 섬을 얻어내야 한다는 발의까지 있었지요. 어쨌든 동해는 태평양을 향한 창구라고 보기에는 틀어막기가 참 쉬운지라, 해양력 투사를 위해서는 쓰시마나 홋카이도, 사할린 중 하나는 제대로 통제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러시아가 디즈레일리의 함정에 넘어가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던 셈이지요.
허버트 스펜서는 지난 화에서도 언급했듯 자유지상주의적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의 사회진화론과는 달리 전쟁에 매우 부정적이었지요. 정확히는 침략전쟁이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발달한 협력의 정신을 약화시키고, 야만과 폭력으로의 퇴행을 일으킨다고 보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이것이 국가의 비대화와 개인의 자유 억압으로 이어진다고 보았고요.
그런 이유로 스펜서는 원 역사에서 1882년에 반침략 연대를 구성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제1차 보어전쟁을 비롯해, 점차 식민지 경쟁이 불붙으면서 확대일로를 걷던 영국의 개입정책에 반대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러나 1차 보어전쟁이 (2차와는 달리) 싱겁게 끝나고 스펜서 본인도 건강이 악화되면서 싱겁게 시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한편, 원래 역사에서 글래드스턴은 1879년 유명한 미드로디언 유세(Midlothian Campaign)를 펼칩니다. 1878년 러시아와 전쟁 직전까지 갔던 디즈레일리 내각의 정책, 특히 외교정책에 날선 비판을 가하면서, 경제공황의 책임을 지고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던 글래드스턴은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작중에서는 쓸데없이 정치 얘기로 말다툼하기를 좋아하는 조선인들의 개입으로 조금 일찍 시작하게 되었습니다만, 원 역사의 미드로디언 유세는 영국 정치사상 최초의 근대적 선거 캠페인으로 유명합니다. 단순히 군중을 대상으로 연설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언론을 동원해 연설 내용, 그리고 (과장된) 현장 반응을 소개함으로써 글래드스턴은 에딘버러 교외의 미드로디언 선거구에서 기록적인 승리를 거두었지요.
존 불은 미국의 엉클 샘에 해당하는 (시기상으로는 존 불이 약 100년가량 앞섭니다), 영국을 의인화한 캐릭터입니다. 이미지가 완성된 뒤의 모습은 신사 복장을 하고 배가 나온 땅딸막하지만 다부진 영국인으로, 종종 속에 유니언 잭이 그려진 셔츠를 입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