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92화 (92/320)

30. 밝은 덕을 밝히다 (3)

신작로 닦인 고을이면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신보를 받아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국헌(國憲)을 새로 세우겠다, 장차 이를 바탕으로 나랏일의 전범을 삼고 작게는 풍속을 올바르게 하겠다 선포하는 윤음의 소식은 오래잖아 양근 일대에도 전해지게 되었다.

화서 문하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어느새 벽계에 모여들어 대책을 논의함을 그들 사이의 상도로 삼았다. 물론 벼슬길 나간 이들을 제하면 다들 그 근처에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난 번 스승님의 문집을 둘러싸고 다툼이 있던 이래로 이러한 전교가 내렸으니, 생각하기로는 면암이 아뢰어 이러한 윤음이 있게 되지 않았는가 싶구려.”

좌장 격은 역시 김평묵이었다. 아무래도 스승의 집에서 이런 모임을 가지기는 저어되어, 새로 지은 강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우리는 모두 오로지 참된 학문을 벗삼아 초야에 머물고 있을진대, 이번 부르심에 바로 나아간다면 세인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그저 더 높은 벼슬 제수되기를 노리며 엎드리고 있었을 뿐이라 비웃을 것입니다.”

나이로 보나 목소리 크기로 보나 김평묵 버금가는 유중교가 좌중을 대표하여 말했다. 김평묵이 슥 훑어보니 고개 끄덕이는 이들이 태반이요, 나머지도 낯으로 수긍하는 뜻을 밝히고 있었다.

“성재(省齋) 존형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의 고매하신 명성에 어찌 누가 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겉으로는 그렇지만 속마음까지 살피자면, 아마도 부담스럽고 두려워하는 면이 더 클 것이다. 이미 운현궁에서 북벌 운운하는 소리에 한 번 농락당할 뻔하였던 김평묵은 더욱 그랬다.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이들은 이미 조정에 출사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이 남았을 뿐이다. 물론 마음 같아서야 높은 자리에 나아가고 싶지만, 국헌의 대업에 그들이 얼마나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끽해야 역시 고루한 선비였다며 망신이나 당하고 말 것이다.

차라리 나라에서 갑자기 모두 상투를 자르고 호복(胡服) 입으라는 식으로 강짜를 부렸다면 명분이 그럴듯하니 반발하고 나섰겠지만, 이렇게 나와서 너희 재주를 한 번 펼쳐보라 하면 또 저어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밖에서 보면 세상 원망하기는 원망하는 대로 해 놓고서, 정작 동아줄 내려올 때는 안 잡으니 한심한 노릇이겠지만, 두려워하는 마음을 완고한 지조로 포장할 수 있는, 체통이라는 그럴 듯한 핑계까지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리하여 제헌의 일을 말로 꺼낸 지 한 달이 넘도록 산림에서 호응이 없었으니, 최익현으로서는 참으로 민망할 따름이라 용안을 뵐 낯이 없었다. 그래도 신하 된 자로서 자신이 헤아린 벽계의 사정을 아뢰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 얼추 자신이 생각하는 곡절을 말로 올렸더니, 그제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음을 깨달은 임금 역시 절로 표정이 굳었다.

귀남이 보기에도, 서울 올림픽 하던 즈음에 누가 와서, 장차 군밤 대신 다른 군것질거리가 인기를 끌 것이니 업종을 바꿔보아라, 하면 선뜻 나서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지금껏 해오던 것만큼 재미를 못 볼까 두렵고, 또 새로 밑천을 마련해야 하니 그 또한 지난한 일이라, 아무리 배운 사람들이라지만 그런 심리가 어디 다르겠는가.

그러나 때로는 문제가 절로 풀리기도 하는 법이었다.

계해년 환국을 전후하여 조선국 조정의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 정사에 관여하는 기구의 수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아니하였다. 빠짐없이 늘어나는 씀씀이에 한 해 벌어 한 해 채우는 나라 곳간이라지만, 나가는 양이 늘어나는 만큼 또 들어오는 양도 덩달아 늘어났으므로, 관원의 수를 늘리는 정도야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구가 불어나고 관원 머릿수도 많아졌지만, 장동 김문과 풍양 조문이 전횡하던 시절 의정부와 비변사를 떠나갔던 권세는 도로 돌아오지 않았으니, 창창한 젊은이들을 거두어들여 저의 수족으로 부리는 임금이 한 움큼 떼어 갔고, 처음만 하더라도 그저 말잔치 벌이고 그칠 듯하던 참의원이 또 한 움큼을 가져갔으며, 나머지 부스러기는 고스란히 통리아문으로 들어갔다.

분명 참의원은 왕업을 보좌하는 것이 전부요, 통리아문은 양이와 교섭하고 기물을 들여오는 것이 소임의 끝이다만, ‘산의 높음은 중하지 않으니 신선 머물면 명산이라 (山不在高 有仙則名)’라는 말마따나 그 뒤에 박규수와 대원군이 있었기에 그 비중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금상께서 국헌을 새로이 세우자 하교하셨다니, 파고들 틈새가 어찌 없겠습니까?”

조정에서 김문의 위세를 지키기 위해 고위직을 내려놓을 수 없는 (물론 내려놓고 싶어하지도 않았던) 형과는 달리, 공조판서 자리처럼 광통이도국 일에 도움 될 만한 실직을 전전하던 김병국이 저의 형과 이야기 나누던 중 문득 꺼낸 말이었다.

“교토삼굴(狡免三窟)이라 하였던가. 이제 미덥잖게나마 굴 둘은 파 두었으니, 이제 새로 하나쯤 더 팔 때도 되었구나.”

하나는 전국에서 벌이고 있는 토목의 업이고, 다른 하나는 재동 박규수에게 대어둔 연줄이다. 그러나 결국 아무리 돈벌이를 하여 대원군이 환국 때 털어간 가산을 도로 가멸차게 만든다 하여도 돈은 돈일 뿐 권세가 되지 못하고, 재동 박규수로 말하자면 일단 저들 편이라지만 여전히 그의 조부 연암을 닮아 (김병국이 보기에는) 저의 재간을 엉뚱한 명분을 위해 쓸 때가 없잖았다.

“산림을 끌어들여 우리 가세를 보함은 계해년 이래 바라마지않던 일이었는데, 이제 비로소 기화를 얻었군요.”

“그렇지. 아무래도 조만간 경기 일원에서 어디 좋은 터를 알아보아야 하겠구나.”

처음에야 임금이 지나가듯 던지는 말인가 하였지만, 최익현이 그럴듯하게 여기고 또 서양 나라의 법도 들여오는 일에 항상 몸 달아있는 자들이 크게 호응하였으므로 어느새 구상이 그럴듯하게 갖추어지고 있었다.

백성들끼리 다투는 일이나 토지, 재화가 손을 옮기는 일은 모두 따지자면 잡률(雜律)에 지나지 않으므로 율관들을 데려다 한 번 가다듬으면 끝날 것이지만, 상감이 말하는 법이란 그 이상의 것이었다.

즉 나라의 지도리 될 만한 법도를 국제(國制) 운운하며 주먹구구로 할 것이 아니라 글로써 못박아 후대의 전범으로 삼자 하는 것이었으니,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요, 깊게는 앞선 기천 년의 전적을 상고하고, 넓게는 천하 만방에 유사한 예가 있는지 살펴 잘된 것은 들이고 못된 것은 경계하여야 할 일이었다.

이처럼 사안이 중하므로 요새 그 성정 죽이는 시늉을 한다지만 속에 들어앉은 승냥이 기질은 그대로인 대원군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 것은 뻔하였다. 허나 그런 대원군이라도, 이 제헌(制憲)의 대업에 손을 대지 않고 그저 뜻있는 선비들이 대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정도의 일에는 트집을 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조금 가산을 터는 시늉을 해서 서적을 갖추고, 필요하다면 몇몇 선비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구주 각국을 시찰하며 배울 수 있도록 도와야겠지. 네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우리 사정이 족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이지 않더냐.”

광통이도국의 일을 하면서 공학원(工學院)을 제물포에 세웠으니, 학교를 만드는 일은 결코 낯설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양회(석회) 공장과는 달리 사실상 사람과 책값만 나갈 것이요, 얻는 것은 수많은 인재들을 데려다 은근슬쩍 저의 편으로 삼는 이익이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이익은 아니요, 도움 되는 명분을 세워 주는 데 지나지 않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운현궁에서 나서서 무어라 하지도 않을 터.

“다만 걱정되는 바라면, 저 서생들이 우리가 암만 손을 내밀어도 잡지 않는 것이다. 금일 차대에서 들어보니 적어도 화서 선생 문하에서는 작당하여 출사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 듯하던데.”

막상 나랏일을 돕고 제헌하는 대업에 기여하겠다며 학교를 세우겠다 하여도 고장난명(孤掌難鳴)의 형국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말짱 헛수고가 된다, 그런 헛수고를 요 근래 몇 차례나 (물론 운현궁이 나서서 가로막은 탓이 컸지만) 해 왔던 김문의 형제로서는 결코 낯선 곤경이 아니었다.

그래도 상대가 능구렁이 대원군이나 조금 번듯한 구렁이 박규수가 아님이 어디겠는가. 아무리 명망 높은 이항로의 제자들이라 한들 백면서생인 것은 변함이 없으니, 조금 고민하던 끝에 김병국이 곧 방안을 내어놓았다.

“무릇 서생이라 하여도 서로 편 지어 다투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작게는 예법부터 크게는 인물(人物)의 성정을 놓고서도 생각하는 바가 갈리기 마련이지요.”

“그건 그렇지. 내 듣기로 노사 선생(기정진) 문하의 선비들 외에도 근자에는 간재(艮齋, 전우)라는 이가 목소리 높여 선정들의 글에 의의(疑義) 붙이기를 스스로 금치 않는다 하더구나.”

아무리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농락하는 데 흥선대원군이 대가라고는 하지만, 그 근원을 따지자면 장동 김문만한 곳이 또 있겠는가. 암암리에 전해 내려오는 처세의 방도 중에는 남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켜 이득을 취하는 것도 있기 마련. 김병국이 씩 웃자, 마음이 통한 그의 형 병학도 함께 웃었다.

“그나저나 이름은 무어라 함이 좋겠습니까? 서원이라 하기에는 그 제도가 너무나 다르고, 차라리 형께서 구주에서 보셨다는 대학원(大學院)의 법도를 따왔다 함이 나을 듯하겠습니다만.”

“그 정도야 우리 손을 잡으려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정하게 함이 가하겠지. 스스로 드러내어 얻을 수 있는 바가 없지 않더냐.”

“흐흐, 그러면 곧 연통을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크게는 나랏일에 도움이 되고 작게는 가세에 보탬이 되니 이 어찌 좋지 않으냐.”

간만에 전동 김병학의 집에 웃음소리 퍼졌다.

하필 지난번에 다들 불러모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이런 일이 터졌으므로, 사사로이 동문들을 벽계로 불러모으기도 저어되는지라, 김평묵은 대신 유중교 한 사람만을 저의 집으로 불러 대책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서한의 봉지를 보니 보낸 이는 다름아닌 장동 김문의 김병국이었다. 꽤 오래 전이라지만, 스승 생전 임술년(1862)에 스승을 무고하기까지 하였던 장동 김문이니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별 생각 없이 서한 집어든 유중교의 눈이 편지의 글을 따라 우에서 좌로 눈이 옮겨갈수록 점점 휘둥그렇게 변해갔으므로, 김평묵 역시 자신만 이번 일을 비상하게 여기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하는가.”

“후우... 보통 큰일이 아니군그래. 김문의 말예들이라면 능히 이런 책략을 꾸밀 만도 하지만..,”

요지는 이러하였다. 듣기로, 성상의 부르심에 응하지 아니하면서 내세우기를 학문이 일천하여 국사에 외려 어지러움만을 불러들일까 두렵다 하였으니, 그 학문을 닦을 수 있도록 크게 상서(庠序, 학교)를 일으키겠다. 서원에서 하듯 원생을 가르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연구하여 밝은 도를 밝히고(明明德), 그 배운 바를 나랏일에 보탤 수 있도록 거들어줄 테니, 이곳에서 먼저 절차탁마(切磋琢磨)한 뒤 비로소 국헌의 대업에 손을 대면 그 또한 가당한 일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내세운 핑계를 고스란히 들어 설득하니 할 말이 없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글의 말미에 덧붙인 몇 줄이었다.

“‘신하된 자로서 지존의 뜻을 드높힘은 천하의 마땅한 도리라, 성상께서 귀하게 여기신 화서 선생의 문하에서 이를 거들 자가 없다면 부득불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니 부디 한량없는 마음으로 용허하여 달라’라...”

일국의 의정대신과 판서인 두 형제가, 아무 벼슬 없는 선비 김평묵에게 보낸 편지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겸양하는 글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뒤의 구린 속내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다른 이라 함은, 아무래도 저 간재를 말함이겠지?”

“그뿐이겠나. 나라에서 선비를 높인 지 몇 년인데, 저처럼 부른다면 응하려 하는 자가 한둘이 아닐 걸세.”

지난 번 최익현이 내려왔을 때처럼 모두 한 곳에 모여서, 속된 권세에 놀아나지 않겠다 약조했다 하더라도 막상 닥치면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하물며 이렇게 은근하게, ‘조선 땅에 선비가 너희뿐인 줄 아느냐’ 이르고 있으니 어떠하겠는가.

“겉으로는 순수하게 권학(勸學)하는 뜻이니 무어라 할 수도 없고, 또 겸양하자니, 우리 스승님의 뜻을 서툴게 반박하는 이들이 학통(學統)의 사사(士師) 노릇하게 될까 두렵군.”

당장 스승의 글을 모아 『화서아언』을 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반박하는 글을 내었던 전우다. 그런 이가 김문의 손을 잡아, 나라의 으뜸가는 선비라 불리고 그 명망으로써 국법(國法)까지 좌지우지하게 된다면, 스승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고야 말 것이다.

“자네도 그리 보는가.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찌할 바 없군그래.”

그리하여 김평묵과 유중교는 스승의 사당에 곡절을 고하고 마침내 김병학 형제의 손을 잡기로 하였다. 미리 다른 제자들에게 연통을 돌렸더니, 차라리 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할지언정 권세와 타협할 수 없다는 이들도 있고, 화씨(和氏)의 벽옥(璧玉)처럼 참된 도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보는 자가 있을 것이므로 더 기다리자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태반은 유중교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수긍하였다.

“성인께서도 나라의 정사를 들으셨습니다. 우리가 어찌 거기에 비하겠냐만, 세부득이하니 겸양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스스로 단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침내 이항로의 아들 되는 이박까지도 김평묵과 뜻을 같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양근리 산골에 갑자기 학원(學院)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미 제물포에 경일학당이 있으니, 어찌 우리 스승이 법국인만 못하겠느냐 하여, 스승의 아호를 붙여 이름하기를 화서학원이라. 대체 무슨 심산이지는 몰라도, 우선 남이 하는 일이면 훼방부터 놓자 생각하는 대원군도 이에 질세라 전우와 기정진 문하의 서생들을 그러모아 충청도 가야산 자락에 노사학원을 세웠다.

상황을 전해들은 임금이 또 전교하기를, 이왕 이렇게 된 것, 삼 년의 말미를 주어 스스로 공부하게 하고 그 뒤에 비로소 학식 높은 선비들을 초빙해 국법을 고치고 새로 제헌(制憲)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막상 학원 차린 선비들이 알아보니, 비슷하게 국제를 마련한 나라가 서양 땅에 한둘이 아니라 하였다. 어찌 해동의 문헌(文獻) 고고한 나라로서 다른 나라의 예를 따를 생각을 하겠냐만, 그러다가 다른 학원이 선수를 쳐서 ‘덕의지의 국제는 여차하고 법국 국헌은 여차하다’ 하게 되면 바로 세인들이 두 학원의 학업 이룬 바를 견주게 될 터였다.

자신이 망신당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학원의 이름에 스승의 아호를 붙였으니 어찌 정진하기를 멈추겠는가? 그리하여 다른 나라의 글과 사정을 배워야 하니 저들끼리 무리를 갈라, 누구는 법제를 공부하고, 누구는 그 나라의 말과 글을 배우며, 또 누구는 다른 나라의 선비들로 그 주장한 바에 배울 점 있는 이를 가리자 약조하였다.

또 그러다 보니 여전히 하찮은 말단의 일이지만 부득불 농학이니 병학이니 하는 것도 다루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몇몇 열정 넘치는 선비는 스스로 배우겠다 나서고, 도저히 그럴 엄두 나지 않는 이들은 대신 저의 주변에서 총명한 서자를 데려와 그로 하여금 배우게 하였다. 어쨌든 ‘모 학원에서는 가르치는 도리를 다른 학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하여 세인들이 흉보지 않게 하는 일이야말로 중하지 않겠는가.

결국 남보다 더 나아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여기까지 이르는 원인이 되었으니, 멀찍이 바라보던 최익현으로서는 나라 안의 학풍이 일신됨을 기껍게 여기면서도, 결국 호학(好學)하는 마음보다 호승(好勝)하는 마음이 더 깊은 곳에 있었음을 보고 씁쓸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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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언급되는 말은 중당 시기의 문장가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산의 높음은 중하지 않으니 신선 머물면 명산이요, 물의 깊음은 중하지 않으니 용이 있으면 신령하다 (山不在高有仙則名 / 水不在深有龍則靈)’는 그 첫 두 절이지요,

후반에 언급되는 ‘공자께서 나라의 정사를 듣다’라는 이야기는 『논어』 <학이>에 보입니다. 여러 나라를 떠돌던 공자가 도착한 나라에서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 듣는 것을 보고 (즉 구직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 ‘구하여 된 일이냐’ 물어보자 제자 자공이 답하기를, 공자는 군자다운 덕으로서 정사를 듣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이 구하여 듣는 것과는 다르다고 대답하는 대목입니다. 비판적으로 보면 ‘내로남불’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지식인의 현실 참여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고민을 다룬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헌법이라는 말은, 다른 대부분의 근대적 어휘가 그러하듯 일본에서 기원하였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헌법’이라는 말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냥 나라의 법을 지칭하였을 뿐 최상위의 법이라는 의미는 없었습니다. 원 역사에서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1899년 『대한국 국제』의 경우, 본래 국제(國制)라는 말이 나라 고유의 제도 또는 관습을 이르던 데서 기원하였습니다.

원칙적으로 동아시아 전근대의 법령은 율령격식(律令格式), 즉 형법인 율과 행정법인 령, 그리고 조정의 명에 의해 수시로 율령을 가감하는 격, 그리고 율령의 세부 시행규칙인 식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부르는 이름은 조금씩 달라졌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거대한 법원(法源), 즉 대명률이나 경국대전 등의 큼직한 법전을 두고 그것을 왕명과 각종 판례를 바탕으로 조금씩 더하고 빼나가는 양상은 그대로 유지되었지요.

그러나 이런 체계성이 곧 근대적 법치주의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가 하면 오히려 그렇지 않았습니다. 법은 어디까지나 예, 그리고 더 나아가 유교윤리 일반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조금 더 단적으로 말하면 조선시대의 법은 예를 어기는 행위를 방지하고 필요시 처벌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베풀어 죄인의 처우를 임의로 가볍게 하거나, 나라에 천재지변이 닥치거나 경사가 있을 때 대규모 사면령을 내리는 등의 일도 정당화될 수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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