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밝은 덕을 밝히다 (2)
재동 박규수의 집을 나서면서, 최익현의 머릿속에는 그 옛날 방황하던 시절 몰래 구해다 읽었던 『남화경(南華經, 장자)』 한 도막이 떠올랐다.
장자가 노나라 애공(哀公)을 만났는데, 애공 가로되, 이 나라에 선비는 많으나 방사(方士. 도사)는 적다고 비꼬았다.
그러자 장자 대꾸하기를, 정말 그렇게 선비가 많다면, 그 의복에 합당한 유학의 도를 행하지 않으면서도 유자의 복식을 하는 자를 사형에 처한다고 해 보라며 꼬드겼다. 무슨 생각인지 애공이 그대로 행했더니, 닷새 안으로 나라 안에 유학자는 단 한 사람이 남았을 뿐이었다.
장자 말하기를,
“노나라 안에 유자는 한 사람뿐이니, 어찌 많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선비를 중히 여기겠다 하였고, 사화와 사화 끝에 권신들을 몰아내고 정말 선비들이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만 따져도 족히 삼백 년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박규수를 만나, 자신이 벽계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혹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있느냐 물었더니, 그렇게 답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그들은 나라에서 성학(聖學)을 멀리한다 말하는가? 지금 나라에서 배움을 숭상하고 선비를 높임이 실로 고금에 드물거늘...”
어쨌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그러하였다. 사실, 최익현이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현실의 한 면이기도 했다.
“지금 나라에 서원이 몇 곳인가. 그런 서원 중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바를 그대로 이어 아름다움을 지키는 곳도 있지만, 학문을 크게 발흥하여 주변 백 리에 글 모르는 백성이 없다는 곳도 있다네. 또 개중에는 농학(農學)을 일으켜 고을에 배곯는 이 없게 하겠다는 곳도 있지! 이처럼 선비들이 나아와 나라에 큰 쓰임이 된 것이 과연 몇 해 만이라는 말인가?”
백성들을 모아 가르친 것은, 향안에 오른 사족들끼리의 싸움에서 밀려난 이들이 세를 모으기 위해 하였던 일이었으며, 서얼과 면천된 가노들 중 총명한 이를 뽑아다 제물포나 원산 같은 곳의 학원(學院)이니 공원(公院)이니 하는 기술 가르치는 곳에 보냄은 그저 저와 문중의 토지에서 소출을 늘리기 위한 궁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향전(鄕戰)이라 할 만큼 처절하게 싸워대면서도, 관에 이르기로는 모두 권학(勸學)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지키는 일이라 둘러대어 왔던 향반들이라, 이처럼 저의 잇속만 챙기면서도 겉으로 드러내기로는 선비다움의 극에 달하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유풍(儒風)을 이어간다, 아름답게 한다 운운하는 자들 중 진실로 그 의복에 어울리는 자가 몇이겠습니까? 이야말로 정(鄭)나라 음악이 아악(雅樂)을 몰아내는 격이지 않습니까? 마땅히 조처하는 바가 있어야 하지 않을지요?”
부쩍 주름 늘어난 박규수의 이마에 주름이 더 잡혔다. 답답함인지, 궁색함인지, 깊게 파인 주름이 펴질 때까지 불편한 정적이 꽤 오래 감돌았다.
“면암 자네가 내게 온 것은, 일전에 내 총리 자리에 있을 때 용하변이(用夏變夷)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전국 선비들을 설복시키려 하였음을 떠올렸기 때문이겠지.”
“실로 그렇습니다.”
“내 뜻에 찬동하여 찾아온 이들만 하여도 적지 않네. 자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이야기지만, 향촌의 범속한 자들을 제하고 우리 개화당에 함께하려 하는 자들만 센다 하여도, 성학의 명맥을 이어가기는 충분할 것이야. 옥과 돌이 하루아침에 뒤바뀜은 애통한 일이지만, 지금과 같은 비상한 시기에 어찌 모두를 감싸 안을 수 있겠는가?”
용하변이라, 말은 참 그럴듯하여 최익현도 처음에 솔깃하게 여긴 바 있었다. 요컨대 오랑캐의 기물은 이롭지만 그 기물을 쓰는 자들은 무도하니, 도의를 지키는 조선이 하루빨리 개화하여 그런 기물을 올바르게 쓸 수 있도록 교화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시무(時務)에는 맞는 논변이지만 또 이기(理氣)의 깊숙한 논변으로 다룰 것 같으면 꼭 들어맞지는 않는 것이었다. 당장 저 용하변이의 논의를 저 맘대로 쓰려고 하였던 대국의 오랑캐 천자들부터가 이를 잘 보여주지 않았던가.
“결국 이(夷)를 고치다 보면 화하(華夏) 역시 변할 수밖에 없겠지. 나 또한 그때는 애써 눈을 돌리려 하였지만 지금은 차마 아니라고 둘러댈 수 없게 되었어. 하지만 또 어떻다는 말인가? 우리 문중에서 세운 제지국(製紙局)에서 값싼 종이가 나와 서책이 헐해지고, 요치원과 요척원이 세워져 한성부 노인들이 장수하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네. 그러니 옳고 그름을 굳이 가른다면, 미안하네만 벽계 산속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것이 가당할 것이야.”
라틴어 격언으로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Exitus acta probat)라 하였으니, 지금 박규수가 하는 말이 대개 그러하였다. 그 나름대로 한 사람의 선비로서 고뇌하던 끝에 내놓은 결론일 터. 아무리 생각하여도 어렸을 적부터 몸에 밴 유학과 지금 양이의 기물이 맞지 않으니,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여기면서 어물쩡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권세도, 가산도 있는 박규수와 여타 개화당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그 양이의 기물 들어올수록 설 자리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어찌하여야 하는가. 선비 노릇은 겉치장이요, 저의 곳간이 차기만 하면 만족하는 향반들은 그렇다 치자. 누군가는 도통(道統)을 이어받아 나라에서 정학(正學)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할 텐데, 겉치장 선비와 거짓 선비만 남게 되면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박규수의 결론은, 그 거짓 선비라도 남는 것이 아예 선비 자체가 남지 않는 것보다는 남지 않느냐.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건질 수 있는 이만 건져서 넘어오라, 하는 것이었다.
말하는 박규수 역시 결코 가볍게 던지는 말은 아니었는지, 미안하고도 어딘가 켕기는 마음이 낯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최익현 역시 더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소생 역시 또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베풀어주시는 마음에 응당한 보답을 하지 못하여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개화당 안에 선비들 자리를 마련해주고, 당론에서도 조금 내어줄 수 없겠느냐 설득하려던 최익현은, 결국 한숨만 는 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전우가 말한 것처럼 유당이 정말 제대로 정당을 꾸려 승부를 보겠다 하면, 대원군 같은 권력도, 박규수 뒤 세도가들 같은 재력도 없는 이들이 망신만 당하고 쫓겨날 것은 명약관화였다. 그렇다고 선비들이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나 거창한 대의가 있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조용히 퇴물이 되어 물러난다면 모를까, 스스로 흙탕물에 뛰어들고서 소득도 없이 무너지게 된다면, 그 때야말로 조선에 제대로 된 선비들의 설 자리는 없어지고야 말 터.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성총(聖聰)을 흐리게 할 각오를 하고, 다음 번 차대에서 아뢸 마음을 품었다.
일국의 임금이 손수 군것질거리를 만드는 것은, 참으로 위엄 떨어지는 일이다. 군밤 굽는 것이야 저의 손으로 굽지 않으면 제 맛이 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다른 일들이야 당연히 남을 시키고 저는 얻어먹기만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예컨대 지난 수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올해부터 마음껏 맛볼 수 있게 된 우유, 그리고 우유 덕에 제대로 – 즉 그 옛날 노인정에서 맛보던 프림과 설탕 듬뿍 넣은 맛 – 된 커피가 그러하였다.
쇠젖이란 본래 귀한 사람의 병구완 할 때나 소량을 구해 쓰는 것이지, 본디 송아지의 몫인 것을 빼앗아 먹는 격이라며 대간들이 말렸던 시절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 (이 몸의 키가 도통 클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일까?) 그런데 임금 눈치보기는 참으로 기민한 김병학이 하루는 나서서,
“신이 법국에서 보니 그 나라에는 새끼에게 물리지 않아도 젖이 나오는 유우(젖소)가 있었습니다. 그 가죽을 보면 하얗고 또 검은 얼룩이 있어 우리의 반우(斑牛, 칡소)와는 다른데, 이 품종을 들여와 키운다면 어질지 않은 일은 줄이면서 또 보양하는 법도를 마련할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여 근교에 목장을 차리겠다 나섰던 것이다. 그때가 한창 도로 까느라 바빴을 때였을 텐데, 어찌어찌 잘 처리하여 올해는 이렇게 우유와 설탕 범벅인 커피, 아니, 가배를 흠상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중궁전에도 하교하신 법제에 따라 제조한 가배를 올렸사옵나이다. 맛보시고는, 실로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하니 절로 보양됨을 알 수 있은즉, 그저 성은에 감읍할 뿐이라 이르셨사옵나이다.”
따르는 상선이 상다(尙茶)로부터 전해 받은 대로 보고하였다.
“잘 되었구나. 지금 그런데 시각이 어찌 되느냐?”
전생에서야 그저 동 틀 때 나와서 해 질 때 들어감이 일상이었으므로 시계 따위 별 필요 없었지만, 여기서는 의외로 일과에 있어 시간을 빡빡하게 따졌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상선이 이번에는 멀리 상경(尙更)에게 눈치를 주니, 상경이 부복하여 절을 한 차례 올리고는 소매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하였다. 어느 세월에 해시계와 물시계에 가서 확인하겠느냐며, 얼마 전에 어명으로 도입한 물건이었다. (귀남이야 그저 답답한 마음에 내린 것이었지만, 상경들이 보기에는 그러지 않았는지, 시계 들어오던 날 다들 당황스러울만치 성은의 망극함을 아뢰었다.)
“곧 차대(次對) 드실 시각임을 고하옵나이다.”
하여 편전으로 나아가는데, 오랜만에 맛본 달달한 커피의 맛이 입 안에 남아있어 전생의 다른 군것질거리들도 떠오르게 하였다. 밤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제하더라도, 떡과 엿, 강정 따위는 종류가 몇이며, 뻥튀기나 과자에 이르면 또 수십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전생 막바지에 들어왔던 듣도보도 못한 해괴한 군것질거리들도 있었다.
이름도 복잡하여 혀를 꼬이게 만드는 것들 때문에, 해마다 매상이 떨어지는 것을 굳이 셈해보지 않아도 체감할 수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런 물건들을 파는 사람들도 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원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편전에 드니 여러 대신들이 일제히 부복하여, 흐르던 생각을 잠시 멎게 하였다.
아무래도 최근의 화두는 경복궁의 일이라. 반대하는 이들은 아직 나라에 신작로가 모두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고, 찬성하는 이들은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막상 지을 때 일이 어려워질 것이라 하였다.
결국 귀남이 개입하여, 우선은 따로 자재나 인력을 할애할 필요가 없는 설계의 일부터 손을 대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요새 차대가 늘 그렇듯, 철도의 일이 어쩌구, 공장을 세우는 것이 저쩌구. 동래부에서도 도중을 차리겠다는 공인들이 늘었다. 해당 관장에게 조처하는 도리를 마련하여야 한다. 아무래도 지난 추거 이후로 어깨에 힘 실린 이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다시 어전에서도 작게나마 의견이 갈리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간도 적당히 지나, 차대가 끝나갈 무렵, 최익현이 문득 다른 일을 발의하니 처음 편전 들 때 멎었던 생각의 흐름이 도로 트이게 되었다.
“성상 전하께서 신의 스승 되는 고 동부승지 이항로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푸셨는데, 이제 오늘에 이르러 한 번 더 깊은 은총을 내리시니, 전하의 어진 덕이 다시금 현양되어 산림의 유일들 또한 정사에 미약한 도움이나마 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신에게 이르기를, 지금의 조정에 출사하여 돕고자 하여도 용렬한 재주로 거들 수 있는 나랏일이 없어, 성상께서 국운을 새로이 중흥하시는 대업에 외려 누가 될까 두려워한다 하였습니다. 산림에 묻힌 선비들이 양이의 기물을 다루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다투고 화평하는 일에 대해서 밝지 못함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나, 나라에서 성학을 높이고 사문을 받든 법도를 세운 이래 지금까지 지켜왔으니 또 오늘에 이르러 물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영의정 한계원이 전혀 안타깝지 않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전하, 신이 살피건대, 무릇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어지러워지면 물러나는 것이 뭇 선정들께서 이르신 법도라 하겠습니다. 그 연후에야 재주가 많고 적음을 따져야 할 것입니다. 전적을 상고하면 제갈무후(제갈량)는 본디 초막의 서생이었고, 곽분양(郭汾陽, 곽자의)은 환갑에 이르러 쓰임을 얻기 전에는 일개 무부(武夫)였습니다.
그러니 보천욕일(補天浴日)하는 재주가 있을지언정 우선 출사하지 아니한다면 이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아조는 중흥의 때를 맞아, 모든 일이 사람을 얻고 얻지 못함에 달려 있습니다. 정녕 빼어난 인재라면 우선 자천(自薦)하여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리한다면 우리 성상께서 어찌 토포악발(吐哺握髮)하시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저들이 낄 자리 없다고 생각해 스스로 몸을 사리고 있으면서 어찌 불평만 하느냐는 이야기였다. 대원군이 환국 이후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한계원이나 류후조, 이유원 같은 이들이 가장 먼저 손을 잡겠다고 나섰으니, 이들이 보기에 지금 벽계의 선비들은 그저 권력을 잡을 줄 모르는 백면서생에 불과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권신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도를 지키고자 하는 선비들인데 어찌 그리 가볍게 말하느냐’ 질타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그때 옥음이 내리기를,
“그대가 말한 유학(幼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하니, 우선 답변하였다.
“여전히 초야에서 오직 바른 학문을 닦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배우기를 좋아하여 아직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성학이 넓고도 넓으니, 아무리 궁구하여도 끝이 드러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귀남이 들어보니, 최익현이 말하는 것은 배운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그 옛날 오경석에게 배웠던 것, 그러니까 공자왈 맹자왈 하는 학문이다 보니, 지금 세상에서 쓰일 곳이 없어 불만을 품었다, 대개 그러한 말이려니 싶었다.
당장 머나먼 훗날 겸 머나먼 옛날, 자신의 군밤이 어설픈 솜씨로 만드는 물 건너온 주전부리에게 밀릴 때, 자신도 똑같이 한스럽게 여기지 않았던가. 남의 일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호구할 방도를 마련해 줄 것인가?
“그처럼 배운 바가 많고 또 더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저자의 상한(常漢)과 같이 아무 일이나 할 수는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실로 그렇습니다. 선비의 쓰임은 작게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크게는 나라를 나라답게 하는 데 있으니, 실로 밝은 덕의 공효(功效)를 일으킨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배운 사람들이 할 일 중 세인의 존중도 받는 일을 생각하면 될 일이다. 바로 귀남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판사와 검사라, 그대로 꺼내보았다.
“그런 일이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에서 잘잘못을 가리게끔 하여, 옳은 풍속을 권면하고 도와 덕을 높이도록 함이 어떻겠소이까?”
말하기로는 고상하되, 듣는 사람 생각으로는 고작해야 율관(律官)이 할 일이었다.
“전하, 그런 일은 이미 관헌들이 주재하고 향리들이 맡는 일로, 왕정의 말엽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만히 듣던 김병학도 한 마디 보탰다. 이미 개화의 일이 돌이킬 수 없이 관성을 얻게 된 지금, 선비들이 뭐 거창한 일을 일으킬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대부를 대우하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로서 도통 이은 선비들이 율관 노릇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최익현이 꺼낸 얘기에 시큰둥했던 한계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랬더니 귀남의 반응이 (또) 예상 외였다.
“법률의 일이 중하지 않다면 무엇이 중하겠소? 지금 율관들이 다루는 것은 고작해야 자질구레한 다툼을 중재하고 죄주는 데 불과하니, 이야말로 잘못된 일이라 하겠소. 나라의 예법과 응당 지켜야 할 도에 있어서도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지 않겠소? 그런 일이라면 덕행 있는 선비들이 맡지 않고 또 누가 감히 맡을 수 있겠소?
내 듣기로 이전 현묘와 숙묘조에 기최의 예법을 놓고 조정에서 크나큰 다툼이 있기도 하였다 들었소이다(예송논쟁). 아무리 정해진 예법이 있다 하여도 사람끼리 이처럼 다투는데, 이를 조정에 그대로 맡기게 되면 어찌 훗날 이를 핑계로 사사롭게 편을 가르는 폐해가 없겠소?”
“전하, 그러나 나라가 지켜야 할 도리를 법률의 절목에 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위정하는 도리의 대략은 모두 성현께서 밝히어, 더 남은 것이 없으니 어찌 여기에 법을 운운하겠습니까? 오로지 수양하여 도덕을 지키면 정사의 모든 절목은 저절로 바름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지금 경이 말한 바를 조목으로 하여 만세토록 지키는 도리로 하여야 하지 않겠소? 지금의 시국이 경들이 앞서 말한 것처럼 비상하니, 마땅히 지켜오던 국제(國制)를 글로 남기어 헛되이 미혹하고 다투는 일의 뿌리를 뽑고, 더불어 산림의 유일을 등용하여 이를 정하고 지키는 대본(大本)으로 삼고자 하오.”
아직 제대로 동쪽 땅에 번역되지도 않은 말, 헌법의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이 이 때부터였다.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사법부를 차리고, 사법부를 차리기 위해 헌법을 만들게 되니, 일의 본말이 뒤집히기가 이보다 심할 수 있겠냐만은 이 자리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할 만한 유일한 사람이었던 최익현은 미소 지으며 침묵을 택하였다.
물론, 이 엉뚱한 이야기에 당장 다음날 조회부터 시끄러워지고, 또 벽계는 벽계대로, 참의원은 참의원대로 소란스럽게 되겠지만, 어쨌든 이로서 선비들이 쓰임을 얻을 수도 있게 되었구나, 하는 믿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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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첫머리에 인용되는 고사는 『장자』 외편의 <전자방(田子方)>에 실린 것입니다. 내편과 달리 대부분 후대의 저작으로 여겨지는 외편과 잡편은, 도가의 입장에서 유가를 신랄하게 (때로는 지나치게) 비판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 재밌는 고사들이 많지요.
근대문학에 흔히 등장하는 얼룩소는, 우리가 생각하는 홀슈타인 종 젖소가 아닙니다. 칡소, 반우(또는 호반우)라고도 하는 한우의 한 종류로, 누런 터럭 가운데 검은 줄무늬가 있지요.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조선의 사법체계는 물론 잘 갖추어져 있었지만, 글 중에 나온 것처럼 사법의 독립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관들 역시 법을 다루기는 했지만 고작해야 전거를 찾고 세부적인 항목들(예컨대 특정 범죄의 처벌에 대한 규정들)을 다루는 데 지나지 않았지요. 기본적으로 사법의 큰 틀은 그러니까 행정권력과 함께 갔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