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90화 (90/320)

30. 밝은 덕을 밝히다 (1)

신강에서는 마침내 준비를 마친 좌종당과 공친왕이 야쿱 벡을 무찌를 준비를 마치고서 군병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었다. 야쿱 벡이 암만 날래다 하더라도 작정하고 달려드는 대국 군세를 정면으로 막아내기는 어려울 텐데, 만으로 한 해를 꼬박 써 가며 보급을 충실히 할 겸 완병지계(緩兵之計)를 교묘하게 베풀었으니 아마 반군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었다.

홋카이도 공화국이라는 나라는 공식적으로 닻을 올려, 서양식으로 (이를 보도한 조선의 신보들은 모두 ‘아조의 추거지법을 따라...’ 운운하였지만 사실무근이었다.) 약소하게나마 대선도 치러 초대 대통령 에노모토 다케아키 이하 정부를 세우고서 나라 구실을 하기 시작하였다.

교토의 신정부도 노리는 바 있어, 국경 문제와 에조치, 아니, 홋카이도 개발을 위한 차관 마련을 위해 대표단 꾸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 지는 애매하였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서 ‘투르크 압제자’에 항거하는 반란이 연이어 일어나고, 막아야 하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통치자는 무기력하게 방관하고만 있었다.

듣기로 지난 전쟁(크림 전쟁)에서 영불 양국에 진 빚도 갚기는커녕 이자도 감당하기 어려워 이미 여러 지방에서 들어오는 조세를 저당 잡힌지 오래라 하였으니, 아마 전비를 감당하기는커녕 디폴트나 선언하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사절단이 먼 길 지나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이면, 아마 차르는 극동에 신경 쓸 여력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난 연해주의 일을 교훈삼아, 저들이 주동하여 뭔가 하지 않는 한 다시는 동양 나라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겠노라 다짐하였을 수도 있다. (물론 오만한 백인들이 그 정도까지 신경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최익현은 문득, 자신이 언제부터인가 피득혁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새기게 되었으며, 보스니아니 헤르체고비나니 하는 변두리 땅은 진서로 어떻게 옮겨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없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디폴트는 애초에 상응하는 말을 찾기도 어려웠다. 굳이 탓하자면 가배에 맛 들려 계속 프티 파리의 삼월당 드나드는 자신을 탓해야 하리라.

기나긴 여름 해는 살짝 붉은 기가 감돌기는 한다만 멀쩡히 서쪽 산 위에 두둥실 떠 있고, 세상모르는 새소리, 골 반대편에서는 일 마친 농우(農牛)의 울음소리, 그리고 등 뒤에는 개울 흐르는 소리. 그 어디에도 페테르부르크, 보스니아, 야쿱 벡은 없었다.

언덕 오르니 그 옛날 제월대(霽月臺) 그대로요, 그 뒤에 노산사(盧山祠) 또한 그대로라. 제월대 세 글자를 전서로 멋들어지게 새긴 비석 고스란히 남아있고, 혹시나 싶어 뒤로 돌아가 보니 예의 그 비명(碑銘)도 어디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실구름이라도 남기지 말라 / 밝은 빛에 얼룩지지 않도록

지극히 그윽하고 지극히 밝으니 / 태양의 짝이 되는구나

(莫遺微雲 點綴練光 極虛極明 以配太陽)

정미년(1847) 여름, 화서(이항로) 새기다.”

조정에 돌아와서 다시 벼슬을 맡은 뒤로는, 그런 경력을 가지고서 어떻게 다른 일을 맡겠냐는 듯 외무(外務)만 전담케 된 최익현이었다. 심지어 멋모르는 젊은 대간들이나 통리아문 녹사들끼리 모여서,

‘환재 선생도 다섯 해 만에 총리대신 자리를 내려놓으셨으니, 조만간 귤산(이유원) 대감도 후임을 알아보지 않으시겠느냐.’

하면서 저를 흘깃 바라보는 것도 종종 듣고 보았다. 하기야, 지금 외국 사정 아는 이들 중 대원군과 대놓고 척을 지지 않은 사람이 저뿐이었으므로 (김병학이 운현궁 노안당 앞에서 삼궤구고두를 한다 하여도 진심임을 믿어줄 대원군은 아니지 않은가) 구업(口業) 즐기는 이들이야 그리 운운할 법도 하다 싶었다.

물론 그는 쓰이면 쓰이는 대로, 내쳐지면 내쳐지는 대로, 나아가고 물러날 뿐이라 다짐한 지 오래였다. 애초에 스승께서 자신에게 명하여, 이 비상한 시국에 뛰어들어 사문(斯文)의 찬란함이 만세토록 이어지게 할 법도를 궁구하라 하시지 않았던가. 아마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아마 – 환로(宦路)에 남아있었든 아니든 간에 – 아직껏 양이의 길을 곁눈질하며 마음의 대본(大本)을 잡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면암, 돌아왔는가!”

그러나 어쨌든 그로 인해 은혜를 거듭 내려준 스승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타향 전전한 것은 사실이라, 불현듯 찾아온 부끄러움에 노산사 문턱 넘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던 차, 언덕 아래서 달려오는 저의 사형 김평묵을 맞이하였다.

“존형께서 무탈하신 듯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여로는 고되지 않았는가?”

“성은 망극하여 이제 이 옆 양근까지 신작로가 뚫렸는데, 어찌 신하된 자로서 고됨을 칭하겠습니까? 게다가 설령 험산준령을 뚫고 오더라도 발걸음을 아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발단은 이러하였다. 지난 경과 별시에서 장원급제는 물론 강화도 유생 이건창이 가져갔지만, 또 나머지 서른두 명도 나름대로 답안을 적어 내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유인석도 응시하여 글을 올렸던 것이다. 그 내용을 살피자면, 나라의 가장 위태로운 바가 본래 일을 꾸미던 아름다운 마음을 잃는 데 있으니, 선정(先正)을 현양(顯揚)하고 명도(明道)를 더욱 밝히지 아니하면 지금까지 조선이 일군 바도 도리어 올가미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개략이었다.

정론이라면 정론이되, 나라에서 보름 전 책(策)을 시제로 내겠다 하였으므로 개화당에서 근자에 낸 서적 따위를 급히 찾아보던 다른 선비들은 죄다 개화스러운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유인석 혼자서 빼어난 글솜씨로 고릿적 글을 썼던 것이다.

그러니 말 그대로 ‘근래에 보기 드문’ 글이라. 상감이 생각하던 정답은 아니되 정성이 갸륵하여 또 알아보았더니, 일전에 어제 군밤을 내려주기까지 한 노신 이항로의 가장 연소한 제자라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혹 원하는 것은 없느냐, 하여 늘그막에 이항로가 언제고 지을 생각을 하다 끝내 못 지었다는 강당을 내탕(內帑) 내어 지어주겠다 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사액(賜額)도 넌지시 꺼내었지만, 어필의 자유분방함을 알았던 최익현이 극구 만류하여 내탕만 내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리하여 상량(上樑)도 진작에 끝났겠다, 마침 서양식으로 새로 장정한 스승의 문집 『화서아언(華西雅言)』도 나왔겠다, 하여 겸사겸사 잠시 정사(呈辭) 올려 한 달 휴가를 얻고서 최익현이 내려오게 된 것이다. 감히 막 면신(免新)한 주제에 쉬이 자리 비울 수 없던 유인석은 여전히 도성에 있었지만.

“새로 발간한 스승님 문집은 받아보셨는지요?”

“암, 내 자네 내려온다는 소식 듣고서 황계(黃溪. 이항로의 둘째 아들 이박)에게 신세 지던 차 엊그제 인편으로 온 것을 받아보았다네. 그러잖아도 벽계당에 현판도 하였으니, 주변의 연락하는 유학들도 불러 모으려던 차였는데, 마침 잘 되었지. 잘 되었고말고.”

벽계에 새로 세운 강당이 당호를 벽계당이라 하니, 마치 기와집 이름을 와당(瓦堂)이라 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냐마는, 이항로가 생전에 당호를 따로 정해둔 것도 아니요, 사액하는 성은이 내린 것도 아니니 어찌 제자된 도리로 멋대로 이름을 짓겠느냐고 김평묵이 주장하였기에 그대로 심심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약조한 모임 날짜는 사흘 뒤라, 지척에 사는 스승의 문인과 제자들이 모여들고, 멀리서도 하나둘씩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즈음부터 최익현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도성에 있어야 할 유당 참의대부들이 고개 내미는 것까지야 그럴 수 있다 치자. 아무리 스승의 명성이 고매하였다지만, 전우(田愚)처럼 아예 학문의 갈래가 다른 사람 – 얼마 전에는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라 하여, 스승의 글에 반박하는 글도 써서 돌렸다 들었다 – 도 고개를 들이민 것이다.

공치사 몇 번 오가고서 스승의 집 마당에 조촐하게나마 술상 차리니, 아무리 조촐하다지만 모여든 선비만 수십이었으므로 딱히 초라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술이 몇 순배 돈 뒤에야 모임의 본론이 나왔다.

“성상께서 친히 내탕을 헐어 벽계당을 세우게 하시니, 학문을 권면하시고 또 정도를 숭상하심을 이로써 다시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사람이 이때를 맞이하여 생각하니, 그처럼 어지신 마음이 근자의 정사에서 모두 드러나지 못함이 있어, 혹 이를 바로잡으라는 전교를 은근하게 내리신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정말 얼굴만 비추러 온 사람들은 어느새 슬그머니 사라져 있고, 전우처럼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어느새 주축이 되어 있었다. 김평묵은 최익현이 이런 사정까지 알고서 내려왔으리라 생각한 것인지, 그의 당황스러워하는 눈길을 도리어 이상하게 여기는 듯하였다.

“밝고도 어지신 심성이 고금에도 드무니,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으시거늘, 또 최근의 일을 보면 반상의 도가 무너져, 이로써 도를 닦는 이는 낮아지고, 저자의 잡배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라면 마땅히 비상한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뭇 선생께서는 부디 깊게 헤아려주십시오.”

일장연설이 끝나기 무섭게 토 다는 사람이 있었다.

“이보게, 간재(艮齋, 전우의 호), 또 그 이야기인가? 부자께서도 편편언(便便言)하고 유근(唯謹)하시었거늘 어찌 선비된 자로서 붕당 만드는 말을 그리 가벼이 꺼내는가!”

근자에 명덕(明德)의 문제를 놓고 전우와 논쟁 벌이던 유중교(柳重敎)가 언성을 미묘하게 높이며 가볍게 타박하였다. 성학의 도는 넓고도 넓으므로 의심나는 바가 있다면 먼저 질정(質正)하고 그러고도 남음이 있으면 서로 논의함이 가당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인 이상 거기에 호승(好勝)하는 마음이 끼지 않기는 또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전우처럼 강직하다 못해 저의 마음에 맞지 않는 모든 이에게 트집을 잡는 이라면 어떻겠는가.

“선비들끼리 찢어져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다툰다면 그렇겠지만, 지금 우리는 나라에 선비가 없게 될 위난을 앞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최익현이 좌중을 휙 둘러보니 동조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아니, 나이 불혹에 닿지 않은 자라면 오히려 동조하지 않는 이가 드물었다.

“간재의 말이 사리에 닿습니다. 성재(省齋, 유중교) 형께 청컨대 재고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노비를 풀어 장차 없애겠다 하신 것은 참으로 인정(仁政)이지만, 그 정(情)이 치우쳐 선비가 상한(常漢)과 같이 되는 폐단이 생겼습니다. 그 자리에 자전거라는 괴이한 기물을 들이고, 또 천박한 봉수군과 역군 무리에게 양이의 의복을 입혀, 가친에게는 효를 다하고, 뜻을 같이하는 선비끼리는 깊은 도를 의론하는 서신까지도 그 손으로 다루게 하였으니 어찌 이것이 옳다 하겠습니까?”

그야 전신이 들어오고 길이 닦이면서 (어차피 제대로 기능하지도 않는) 봉수대와 역참에 묶여 있던 양민들을 모두 풀어주고, 대신 호구지책 마련하도록 개중에서 머리 좋은 이들은 전신국에, 몸 멀쩡한 이들은 우정국에 각각 들인 것이지만, 또 서생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더구나 그런 폐단을 미리 없애기 위해 둔 것이 참의원의 제도인데, 이마저도 시행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아 또 폐해가 켜켜이 쌓였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끼리 당을 만들었는데, 그 논하는 바도 살피면 만민을 높여 선비의 구분을 없애자는 공산당이니, 명문벌열의 자제들끼리 모여 그저 도고(都賈) 노릇하려 하는 개화당이니, 그 세력에 끼어 산림의 밝은 목소리는 묻힐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즉, 지금처럼 세인의 말로만 있는 유당이 아니라, 제대로 정당을 만들어서 공산당이니 개화당이니 하는 무리를 견제하여야 하지 않는가,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최익현이 보기에는 이 또한 이치에 닿지 않았다. 대쪽같은 절개를 지킴도 중한 일이고, 때로는 그 절개를 버려 더 큰 의(義)를 따라야 하는 경우도 흔치 않게나마 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선비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저 예로부터 살던 대로 선비 대접 받으며 살고 싶으니, 힘을 합하여 세력을 만들자는 것뿐 아닌가.

계사년(음1833년) 생이라 어느새 어디 가서 나이로 쳐지지는 않게 된 최익현이 목청 다듬으니, 잠시 좌중의 눈이 그에게 쏠렸다.

“이보시오들. 내 가만히 들어보니, 그대들이 안타깝게 여기고 또 폐단이라 말하는 바가 물론 마땅히 취해야 할 말도 있지만, 또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 듯하오.

내 경조(京兆)에서 나랏일 돌아가는 것을 살피면, 국운이 소생하였으나 아직 성세를 칭하기에는 족하지 못하며, 금상께서 밝은 정사를 베푸신다 하나 아직 국용의 쓰고 거둠을 보면 궁벽함을 겨우 면한 정도요. 아직 천하에 이곳 해동을 노리는 승냥이가 많고도 많은데, 우리가 장차 선비의 당을 칭하려면 여기에 대해서도 온당한 대의를 내세워야 할 것이오.”

그러나 최익현도 모르는 사이 그를 아니꼽게 여기던 이들이 많았던지라, 고개 내밀자마자 염치 불구하고 성토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리 화서의 수제자라지만, 그가 출사한 이래 서양 땅을 오가면서 양이와 사귀고 심지어 그 나라 말을 배워 코쟁이와 호형호제까지 한다 하였으므로, 질시하는 자들이라면 충분히 그를 매도할 이유를 찾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저 말은 막힌 둑에 솥뚜껑만한 구멍을 단번에 뚫은 것과도 같았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면암 선생이야말로, 성상을 과연 사도(斯道)의 사람답게 보필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셨는지요?”

하는 이는 그나마 나았고, 우우 하는 목소리 사이에서는 더 괴벽한 힐난도 뒤따랐다.

“그런 선생께서는 어찌 화서 선생의 고아하신 말씀을 저처럼 호사스럽게 꾸며 책으로 내었단 말이오? 이것이 『춘추』를 놓을 자리가 없다 하여 『상군서』와 함께 시렁 위에 두는 격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이까?”

“더구나 그런 문집을, 천한 봉수군의 손에 맡겨 이곳에 부쳤다 하니, 그러고서 화서 선생을 뵐 낯이 있소?”

더 있다가는 선비된 자들이 스스로 선비 되기를 버리는 꼴만 볼 듯해, 눈과 귀를 씻고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뛰쳐나왔다.

해 저문 자리 맞은편에 달이 떴다. 그믐은 지난 지 오래였으므로, 보름달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훤하였다. 더구나 아직 산마루에 살짝 걸쳤으므로, 더욱 탐스럽고 또 매정하게 보였다. 달이란 애초에 정이 없는 외물이지만, 분을 미처 못다 삭인 최익현의 마음이 어지러웠으므로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 가고 나서도, 아니, 가고 나니 더 왁자지껄하였던 모임 소리가 조금씩 잦아드는 듯하였다.

저들과 아예 손을 끊어버리고, 나 혼자 갈 길 가겠다 하여도 영달은 물론 문중 하나를 일굴 수 있을 것이다. 주상의 신임이 있고, 법국인들을 비롯해 여러 국외인 사이에서 명망이 있으며, 대원군과 세도가 어느 쪽의 손도 잡지 않고서 여기까지 왔기에 (물론 스승의 덕이 컸지만) 누구에게 빚 지지도 않았다.

스승과 약조한 것이 있으니 어찌 사람의 면상을 하고서 그런 짓을 하겠냐만, 저무는 해가 언제까지 스스로 빛날 줄 아는 저 답답한 꼴을 보고 나왔더니 잠시나마 유혹이 마음 한 구석에서 고개 짓쳐드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물론, 저들이 정말 본성까지 옹색하고 고루한 선비라서 그럴까,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았다. 당장 자신부터가 박규수라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스승이 허여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저들 무리에 끼어 척양(斥洋) 소리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스승님, 어찌 하여야 하겠습니까...”

고개 들어 달을 보니 바다가 보였다.

정말 바다는 아니고, 나중에 배우기로는 아마 단순히 땅의 색깔이 어두운 것에 불과할 것이라 했다. 허풍선이 파스칼 그루세의 말로는 언젠가 인간이 큼직한 대포를 만들어서 달까지 가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지만, 어쨌든 지금도 망원경만 있으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문득 스승이 옆에 서 있다면 묻고 싶어졌다.

“달이 밝으니 잔구름도 끼지 말라 하셨지만, 저처럼 아예 달이 스스로 얼룩져 있는데 어찌하시겠습니까?”

“나는 아둔해서 그런 말을 하면 좀체 알아듣지를 못하겠네그려.”

혼잣말에 대꾸가 나온 것을 보니, 아마 흉중의 말이 그대로 새어나온 듯했다. 돌아보니 혀 꼬인 김평묵이었다.

“차라리, 끅, 이기(理氣)의 이야기만을 하라면 내 언제든지 말을 늘어놓을 수 있겠다만... 솔직히 나는 아직도 양이의 기물이라는 게 정말 귀신이 들리지 않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네.”

유인석이나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자신처럼 총명하지는 못하다는 세평이 있지만, 대신 그만큼 우직한 김평묵이었다. 아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기의 논변을 터득하기 위해, 최익현은 알 수 없는 그만의 고충이 차고 넘쳤으리라.

“그런데 이제 우리가 힘써 배워온 것들은 모두 쓸모가 없고, 전신인지 뭔지 하는 것을 다루는 재주도, 기선 모는 재주도 다 글재주만큼 귀하다고 하잖나. 힉! 사람으로서 아니 서러울 수가 없는 일이지.”

김평묵뿐 아니라 앞서 자신에게 대들었던 다른 자들의 심리도 대개 이러하였으리라. 결국 전신이니 자전거니 하는 것은 핑계고, 모든 재주가 잘 닦기만 하면 절로 값어치가 있고, 모든 사람이 또 나름대로 귀하다 하니, 스스로 귀하고 값지다 여겼던 자들은 아니꼽기에 앞서 당장 자신이 지금껏 해온 것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왜 나만 빼놓고 세상이 변하고 있는가 분하게 여길 법도 하였다.

이들을 설득하기보다는 얼렁뚱땅 무마해온 것이 금상의 통치였으니, 어떻게 보면 최익현 본인도 책임이 있다는 저들의 성토에도 일리는 있는 셈이었다. 그나마 이들 사정을 아는 대원군도, 섣불리 북벌 운운하며 이들을 어떻게 이용해서 이익을 취할까를 생각하지, 장차 유림이 어찌 살아나가야 할지를 물어보면 왜 그걸 문묘에 고하지 않고 운현궁에 찾아왔느냐며 타박을 놓을 터.

김평묵이 함께 달을 보려는지, 최익현의 곁에 다가와서는 체통도 잊고 털썩 맨바닥에 걸터앉았다. 사형만 그렇게 두기는 뭐하여 최익현도 덩달아 앉았다. 풀이 제법 푹신하였다. 아직 여름이라 지열이 남아있어, 이슬은 맺히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후... 정말 지구가 둥글다고는 하던데, 그러면 왜 성현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말씀하셨겠는가? 세상에 수많은 양이의 나라가 있고, 우리 같은 검은머리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백인, 흑인, 홍인도 있고, 대양 건너에 또 땅이 있고 바다가 있고... 그런 것을 왜 당요(唐堯)께서 오복(五服)의 법도를 정하실 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말인가? 나는, 나는 정말 모르겠네... 모르겠어...”

이 세상에서 선비의 쓰임은 정말 없을까. 모두 정도는 마음 한 구석에 처세의 법도로만 놓아두고, 다른 길을 찾아가야 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 다른 길로 나아가서, 언젠가 사람들이 다시 정도(正道)를 구할 때까지 이 찬란한 사문을 숨겨놓아야 함을 어떻게 고작 한 사람인 최익현이 설득할 수 있을까.

아직 처음 정사 올릴 때 말했던 한 달에서 보름만 지났을 뿐이지만, 이런 흉흉한 분위기에 더 있기도 저어되어 되는 둥 마는둥 고별하고서 상경하는 내내, 최익현의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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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呈辭)는 조선시대 관원이 휴가나 휴직을 청할 때 올리는 일종의 공문 양식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사직도 정사로 올릴 수 있지만, 대개 중앙 고위직들은 별도로 상소를 올려 임금의 재가를 받는 것을 선호했지요.

정사를 올리는 사유는, 공식적으로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즉 가족의 병환이나 관혼상제의 일, 자신의 병환 등등으로 국한되었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여유롭게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일례로, 한 지방관이 죽은 아내의 묫자리 이장, 본인의 병환, 아들의 지병 등을 한꺼번에 휴가 요청 사유로 올렸던 사례가 있었는데, 해당 정사 글이 남아서 지금까지 화제(또는 망신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툭하면 친척이 아프시고 컴퓨터가 망가지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원 역사에서 이른바 심설논쟁, 즉 심(心)과 성(性)의 구별, 그리고 그 구성요소로서 이기(理氣)의 포함 여부를 놓고 벌어진 논쟁은 조선 성리학계의 마지막 대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65년에 시작해서 1920년대까지 (즉 관계자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이어졌지요. 처음에는 (싸움꾼) 전우와 화서학파 유중교 사이에서 시작된 것이, 1880년대에는 화서학파 내부의 논쟁으로 이어지고, 이후 화서학파의 입장이 정리된 이후에는 다시 세기를 넘겨서 화서학파 대 간재학파 양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유학에서 학문의 지상목표 중 하나인 명덕(明德)이 대표적인 갈등의 소재였기 때문에 명덕논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작중 무대가 되는 곳은 지금도 양평에 남아있는 벽계의 화서기념관입니다. 이항로의 생가, 벽계강당, 노산사지, 제월대 등이 모두 있습니다. 이 중 노산사는 한국전쟁 중 불탔고, 벽계강당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가 이항로의 생전 설계를 바탕으로 1999년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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