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동쪽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 맞다 (2)
메이지(明治) 5년(1872) 대만 출병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덩달아 류큐의 독립 문제까지 터져버리면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고향 사츠마로 내려간 지 오래요, 유신지사들이 꿈꾸었던 부국강병 역시 사실상 좌초하고야 말았다. 기도 타카요시도 요새는 지병이 심해져 영 골골대고 있으므로 세간에서 일컫는 ‘삼걸(三傑)’ 중 남은 것은 오쿠보 혼자였다.
아무리 반쪽짜리 나라라지만 혼자서 이끌 수는 없는 일. 약삭빠르게 그 빈자리를 노려서 출신 번이 다름에도 이인자 자리까지 얻어낸 것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걱정 마십시오. 귀빈께서 오고 가신 것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하루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요.”
이 나라 일본이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해도 고꾸라지지도 않은 채 버틸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라면, 처음에는 그저 ‘얼마나 잘 해보나 두고 보자’ 하는 느낌으로 팔짱 끼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만에서의 실패 이후 은근슬쩍 이렇게 협력을 타진해 왔기 때문이었다. 겉으로야,
‘이대로 가면 일본은 파멸일세. 이러려고 지난날 그 난리를 피운 건 아니지 않은가?’
하면서 우국하는 마음으로 한데 뭉친다 어쩐다 주워섬겼지만, 실제로는 저의 몸값을 높여볼 심산이었을 것이다. 아래에 거느린 이들 중 도움이 되기는커녕 족쇄 구실하는 자가 많아서 그렇지 일신에 지닌 지재로만 보면 빼어나다 할 수 있는 요시노부였으므로, 그런 계산까지 마치고서 접근한 것이리라.
여하간 얼마 전 지조(地租) 문제를 개정하는 일처럼, 문명국답게 개혁을 해보려는 모양새나마 갖출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런 접촉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문제라면 오늘에 이르러 그간 협조하던 모양새 뒤의 본심이 고개를 내민 데 있었다.
“고요한 연못에 퐁당 소리 한 번 났다고 개구리가 뛰쳐나오다니, 시인이 보면 무어라 했을까요.”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쿠를 가지고 던진 농에 오쿠보가 피식 웃었다. 의뭉스럽기는 요시노부보다 한 수 위일 이토 히로부미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같은 편이므로 그의 익살과 재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여유는 있었다.
“말하기를 이만하면 막부가 다시 존재할 이유가 명백해지지 않았는가, 하더군. 물론 우리가 아는 그 막부 말고, 원래의 그 에미시(에조. 아이누인) 때려잡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막부 말일세.”
이 정도면 웃음기 가실 만도 하건만, 여전히 싱글생글하고 있으니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하, 과욕을 부리는 걸 보니 그냥 개구리도 아니고 입 큰 왕개구리인 모양입니다. 신정부의 군부로 들어오겠다, 그런 말입니까?”
“그래, 그걸세. 대신 동국의 집안 단속은 더 철저히 하겠다더군.”
“너무 비싸게 부르는데요? 각하께서는 무어라 답변하셨습니까?”
“무어라 했을 것 같은가?”
당연히 옛 막부의 잔당이 군부로 들어오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삿초의 인사들은 짐 싸서 떠나야 할 것이다. 칩거한 사이고를 따라 물러난 사츠마의 열혈남아 태반은 함께 교토를 떠나 이미 민권운동에 투신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번에는 잠시 고민을 하느라 입꼬리가 잠시 수평을 그렸다가 도로 올라왔다.
“우선 선금을 내놓으라 하셨을 것 같군요. 신정부가 지나와 조선의 끄나풀이라 악을 쓰는 국학 나부랭이들의 입단속부터 시키라고요.”
“잘 맞추었네.”
“그런데 우리 쪽 사람들이야 자숙시킬 수 있다지만, 조선까지 우리 뜻을 따라줄 지는 모르겠군요. 각하께서는 일전에 조선왕을 직접 접견하고 오셨으니 잘 아실 것이고, 저도 이노우에로부터 충분히 들었습니다. 대체 그 자들은 무얼 원해서 이번 소란을 일으킨 걸까요? 정말 저들처럼 우리도 의원제를 도입했으면 좋겠다. 순수하게 그런 의도로 접근해온 건 아닐 테고요.”
저도 모르는 새 정답을 맞추었지만, 곧 그럴 리 없다는 듯 웃어넘기는 이토였다. 또 다른 익살이라 여긴 오쿠보도 잠시 헛웃음을 지었다.
“하,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조선왕의 마음속을 헤아리는 것은 헛수고일세. 어디로 튀어서 무슨 이득을 취할지를 알아맞히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어떤 수를 쓰든 우리에게 이익이 되도록 판 자체를 미리 짜놓는 편이 낫지.”
“역시 그렇군요. 그러면 저도 우리 운동하는 친구들에게 우선은 조선이 무어라 하든 신경 쓰지 말고 가열차게 사상투쟁을 계속해 두라 언질을 넣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조선이 재빠르게 제 정신을 추스르면서, 한동안은 군비 팽창은 할 여유도 이유도 없게 되었다. 요시노부의 손을 잡는다면, 징병령이니 강병 건설이니 하는 것은 적어도 십수 년은 지금 있는 그대로 머릿속에 가둬놓아도 될 것이다. 요새 불만 많은 사족(무사)들도, 이렇게 진정한 의미의 공무합체가 이루어지게 되면 저들 밥그릇이 없어질 일은 없다고 여기게 될 터.
그러나 그렇기에, 만약 도쿠가와의 접시꽃을 정부 안에 들여놓는다면 반드시 압화된 채로 끼워넣어야 한다고 여기는 두 사람이었다. 지금 상하관계를 분명히 해두지 않는다면, 결국 에도 막부가 신정부 군부가 아닌 교토 막부로 탈바꿈하는 꼴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그림은 끝내 들불처럼 타오르는 민의를 이기지 못하여 요시노부가 동국을 들고 귀순하고, 신정부는 그에 보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이타가키(板垣退助.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도 전해주고. 조선이 무슨 짓을 하든, 뭐 이세 신궁을 불태운다 그 정도만 아니라면 우리는 그대로 민권운동을 계속 하는 걸세.”
“하하, 그렇지요. 저들이 값을 세게 부른다면 우리는 물건을 더 귀하게 만들면 될 일입니다.”
조선 공사가 또 무슨 발표를 하든, 아니면 숫제 특사를 보내서 의원내각제 홍보를 하든, 신정부가 몰래 동원하고 있는 자유민권운동의 불길은 커지면 커지지 결코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잘 돌아간다지만 각 번의 번사들 정도가 시야의 한계인 요시노부는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바로 거기에 묘수를 두어 찔러넣을 수 있는 틈새가 있다.
“그래. 그리고 또 너무 열중해서 수렁에 빠지지는 말라고도 전해주고. 달리는 마차가 불타고 있으면 거기서 뛰어내릴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나.”
“물론 그렇지요. 잊지 않고 말로만 그치지 않고 슬슬 끝물이니 한편으로는 채비도 해두라고 하겠습니다.”
요시노부에게 번사들의 지지는 존립의 기반이지만, 신정부에게 민권운동이니 무어니 하는 것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니 앞뒤 생각하지 않고 지른 뒤 요시노부가 궁지에 몰릴 것 같으면 선심 쓰듯 지지를 거두고, 백성들에게는 의원제까지는 아니어도 적당히 비슷한 것 아무거나 물려준다.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이상과는 거리가 요원하겠지만, 어차피 그런 것까지 분간할 수 있는 백성들은 아니지 않은가.
여하간 그 지경에 이르면, 신정부는 잃은 것 하나 없이 요시노부가 먼저 가신 되기를 청하면서 굽히고 들어온 구도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 뒷사정이 어쨌든 보이는 모습이 이렇게만 되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면 그때 가서 한 판 더 붙어보겠느냐. 지난 번 마무리 못한 일을 끝내보자. 이렇게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허장성세 대결이 된다면 손에 든 패는 신정부에 비할 수 없는 일. 어쨌든 지금 공식적으로 이 나라의 정부는 오쿠보 자신이 이끌고 있고, 그러니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언제든 ‘문명화’ 노력에 저항하는 수구세력을 진압해달라고 외세를 부를 수 있다며 압박할 수도 있다. 특히 동국이 어지럽게 되면 당장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 미국은 절로 개입을 청해올 지도 모른다.
“물 아래 숨어있던 개구리가 고개를 내민 것부터가 이미 제게 아쉬운 게 있음을 드러낸 꼴이지. 한 번 제대로 기름을 부어보세나.”
봄꽃 저물고 초여름 더위 시작할 무렵까지는 그런 작전이 꽤 효과를 발휘했다. 일본 내의 분위기가 벌집 쑤신 듯함을 알아챈 모양인지, 조선은 자신들이 그저 순수한 호의에 따라 진심어린 조언을 했을 뿐이라며 변명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이면, ‘순수한 호의’니 ‘진심어린 조언’이니 하는 것이야말로 열강들이 이빨 감출 때 둘러대는 장식임을 모르는 식자가 일본에 드물었다. 정작 그런 일을 당해본 적 없는 조선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개화의 동반자’인 조선과 함께 나아가자고 외쳐대는 민권운동 쪽이나, ‘본색을 드러낸 삼한의 승냥이’가 저의 간특한 농간을 더 진전시키기 전 환부를 도려내어야 한다며 아득바득 우겨대는 동국의 번사들이나, 조선을 빌미삼아 저의 뜻을 관철시키려 함은 똑같았으므로 큰 상관은 없었다.
“조선국은 스스로 일컫기를 문명의 나라요, 참의원을 두어 민의를 따르는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어떠한가? 민의를 따른다지만 실은 전제군주정 그 자체요, 기껏 모아둔 참의원이란 그저 거기에 조언을 하는 구색을 맞추는 데 불과하다! 그런 조선의 책동에 넘어가 우리도 의원을 두어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야말로 그 표리부동함을 꿰뚫어보지 못하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미 옛 막부와 신정부는 메이지 원년에(1868) 매사를 공론에 따라 처리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히노모토 어디에 공론이 있는가? 조선보다 문명개화에서 앞서가던 우리가 도리어 따라잡힐 지경에 처한 것을 부끄러워하지는 못할망정, 지금 하고 있는 개화의 시늉을 참된 것으로 호도하는 자들이야말로 망국의 화를 불러올 것이다!”
그제야 조선에서는 분란을 일으켜 미안하다며, 동국 땅의 두 쪽 난 여론을 봉합하는 데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겠다며 나섰다. 이렇게 이미 여론의 구도가 굳어진 상황이고, 거기에 조선이 더 끼어들면 동쪽 안의 싸움은 심해지면 심해졌지 가라앉지는 않으리라 여겼기에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여 승인해주었다. 끽해야 특사를 보내 에도에서 연설 한두 번 하고 말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조선을 가만히 내버려둔 것부터가 패착이었다.
“그자들이 무얼 하고 있다고?”
“그 옛날 통신사 보내던 시절 인연을 내세워, 지번사들을 찾아가 일일이 설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의원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당을 하나 꾸리게 되면 무가(武家)의 입장에서도 이익이 된다, 뭐 그런 논리라더군요.”
저들 땅에서야 문벌(文閥)이 고스란히 재벌(財閥)도 되고, 고루한 문사들과 옛 세도가들, 국왕의 아버지 등등이 저 하고 싶은 대로 나름의 당을 꾸렸으니 일본에서도 자연스레 그렇게 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때로는 시류에 억세게 저항하느니 차라리 그 흐름의 힘을 빌리는 편이 낫다. 전후 사정 생각하지 않고 들으면 꽤 그럴듯한 소리였다.
“하, 암만 그래도 저들도 바보가 아닌데, 거기 그대로 넘어갈까. 선거라는 게 항상 대대로 당선되는 것도 아니고, 민권운동으로 이미 민심이 저들 편이 아님이 명백히 드러났는데 말이야.”
그러나 오쿠보와 이토 두 사람이 생각지 못한 점은, 이미 자신들이 지핀 불이 부지깽이 한두 번 뒤적거려서 불길을 잡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지 오래였다는 것이었다. 조선 사절단들이 에도를 쏘다니며 각 번의 유력자들을 만났다는 소식이 동국 땅에 퍼지니, 각 번의 호농과 부민들이 작당하여 번사들을 설득하려 나섰다.
“어르신, 물론 저희가 교토에서 나온 젊은이들 말에 혹해서 민선의원이니 입헌정체니 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뿌리까지 잊었을 리 있겠습니까. 조선인들이 와서 번주님께 조언했다는 내용을 들어보니, 그 의원이라는 것을 만든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 번이 완전히 신정부에 잡아먹히는 게 아니랍니다.”
“맞습니다. 오히려 번주 어르신께서 대대로 의원 자리까지 차지하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번에 이득되는 것은 번주께서 가장 잘 아시기 마련이지요.”
“나 또한 문득 또 다른 길이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던 차였다네. 자네들도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것이 아니라 하니 참 반갑군. 암, 우리도 상하 단합하면 정부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조슈니 사츠마니 하는 촌놈들보다 더 힘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번주 어르신을 의원으로 추대하고, 이왕이면 무슨무슨 당 당수 자리까지 하실 수 있도록 함께 힘을 실어드리도록 하세나!”
요컨대, 신정부라 해 보았자 어차피 외지인이니, 차라리 자신들에게 조금 양보만 해 주면 영영 번의 웃어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 번 안의 사람들끼리는 타협이라 부르겠지만, 번 밖에서 온 운동권 사람들로서는 배신이요 영합이었다. 특히, 지금까지 자신들이 이끌어주었기에 운동이 여기까지 왔다고 여겼던 신정부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전개였다.
동국의 옛 막부 사족들이 보기에도 황망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각 번에 확실히 뿌리내린 옛 다이묘들과 바로 그 아래의 가신들이야, 저들 하는 말대로 의원 자리 하나씩 꿰어차고 계속 거들먹거릴 수 있을 것이라지만, 접시꽃 문양 아래 모여서 버티다 보면 신정부가 제풀에 못이겨 내각과 군부에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해주리라 여겼던 하급 사무라이들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신정부만큼 단합되지 않았음에도 지금까지 비등하게 힘을 겨룰 수 있던 것은, 오직 여러 번들이 하나 되어 버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대가의 당주들이 민선의원이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뭉치기는커녕 제 번만 살아남을 궁리를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들 태반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지만, 그 가운데 몇몇은 또 그렇지 않았다.
“주군, 이대로 가면 막부는 영영 부활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장 질록(秩祿)이 끊어지면 살 길 막막한 무사들을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처음 요시노부가 군부를 내어놓으라 요구하였을 때는 마침내 다시 떳떳하게 자리 차지하게 되었다 안도하던 이들이었기에, 느끼는 당혹감과 배신감은 곱절이 되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또 이번에 돌아가는 사세를 보니, 아직 각 번의 영민들은 완전히 돌아서지 않았음이야. 지금 서쪽에서도 삿초 놈들 전횡에 불만이 많은 모양인데, 이대로 의회를 세우고 우리가 나서서 대안을 제시한다면, 그들까지 끌어들여 정부를 온전히 우리 것으로 할 수 있겠지. 그게 바로 신정부가 그리 좋아하는 양이의 방법 아닌가? 다수결이라고 했던가.
하여간 나는 자네들을 잊지 않았네. 나라의 으뜸가는 무가로서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이 말이야. 이대로 저 신정부에 굽히고 들어가느니, 잠시의 어려움을 참고 더 큰 영예를 얻어내면 되지 않겠는가?”
차라리 민권운동에 완전히 눈이 돌아간 각 번의 영민들이 번주는 물러가라며 소요를 일으켰다면, 패배를 인정하고 순순히 신정부에 충성의 서약이라도 했겠지만, 또 그게 아니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기싸움이든 칼싸움이든 한 번은 승부를 걸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예 가만히만 있어도 천하를 되찾을 방도가 열렸다고 생각하니 또 마음이 바뀌었다.
이렇게 동국 무사들 사이에서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갈리어, 맨 위에 있는 자들이 그 아래를 건너뛰고 백성들 손을 잡을 궁리를 하는 사이, 마침내 결단을 내린 자들이 있었다.
“무사라면 자신을 알아보는 주군을 위해 죽기도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주군이라면 차라리 버려서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차라리 최후의 일각까지 칼 뽑아 항전하다 스러진다면 그 또한 명예로운 일이겠지만, 무사된 자들이 스스로 무를 버려 대가 끊어지게 된다면 그만한 수치가 또 어디 있는가? 이대로 신정부가 집권하게 되면, 당장 우리가 받는 질록(秩祿)이 끊어지고 저 조닌(町人)과 다름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 것, 북쪽 에조치(蝦夷地, 홋카이도)로 가자! 가서 무사들만의 나라를 세우자! 노서아(러시아)를 무찌르고 에조를 정복하여, 이 무도한 천하에 아직 무사의 혼이 꺾이지 않았음을 보이자!”
몇 차례나 요시노부를 설득하다가 끝내 단념한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가, 동국은 물론이요 서쪽까지 이런 격문을 돌리고서는, 요코하마 항의 옛 막부 해군을 한데 그러모아 쓸 만한 함선이란 함선은 모두 끌고서 북쪽으로 향한 것이다. 창의대(彰義隊)라 스스로 이름한 이들이 곧 하코다테(箱館)에 당도하여 마츠마에 번을 집어삼키고는 그대로 독립을 선포하였으니, 이른바 에조 공화국의 시작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모두 얼어붙은 사이 동쪽 해안을 긁어가듯 북상하였으므로, 생사팔이로 돌아오는 이득이 아래까지 닿지 않는다고 불만 품던 무사들은 물론, 그저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데 혹한 멋모르는 이들까지 동참하여, 심지어 서쪽 해안에서도 배를 빌려 하코다테로 몰려들기까지 하였다.
조선의 속담으로 따지자면 병 주고 약 주었는데, 그 약마저 쥐약이었던 셈이었다.
--- *** ---
중간에 이토 히로부미가 언급하는 바쇼의 하이쿠는,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오래된 연못’을 말합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오래된 연못 / 개구리 뛰어드니 / 물소리 퐁당 (古池や蛙飛こむ水の音)”.
오늘날 하코다테의 표기는 函館으로 합니다만, 이는 1869년 홋카이도의 지명을 원래 ‘에조(아이누의 멸칭)의 땅’이라는 뜻의 에조치에서 바꾸면서 함께 본래 이름인 箱館에서 바꾼 것입니다 (발음은 똑같습니다.).
원 역사의 메이지 일본은 18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영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앞 장에서 언급한 자유민권운동은 물론, 메이지 신정부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긴 웅번의 무사들(이른바 ‘불평사족(不平士族)’)이 지속적으로 봉기를 벌였고, 끝내 유신삼걸의 한 명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서남전쟁(1877)으로 정점을 찍게 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위해 징병령을 내리고 사무라이 계층에 대한 특권(중간에 언급되는 일종의 사무라이 대상 봉급인 질록의 폐지가 그 예입니다)을 폐지하는 등, 빠른 부국강병을 위해 중앙집권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인 메이지 신정부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한편에서는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민중(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부농층), 다른 한편에서는 옛 권리를 지키려 하는 무사들이 각자 난리를 일으키는 와중에, 신정부는 결국 전자의 손을 잡(는 시늉을 하)고 후자를 철저히 분쇄하는 방향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잠시 억눌리는 듯했던 자유민권운동은 1880년대 사의헌법운동(헌법 제정을 촉구하며 민간에서 아예 헌법 초안을 작성해 건의하던 운동입니다), 그리고 1890년대 정당정치의 태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 원 역사에서도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막부 최후의 저항인 무진전쟁(보신 전쟁)에서 요시노부가 신정부군에게 항복을 결정하자, 막부 해군의 핵심 전력과 프랑스 군사고문단 일부를 데리고 탈출해 홋카이도 남부의 마츠마에 번을 점거, 에조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1869). 그러나 작중에서와는 달리 막부 잔당의 최후 저항 수준이라, 반 년도 버티지 못하고 정부군에게 진압당했습니다.
애초에 에노모토의 의도도 정말 나라 하나를 세워보겠다기보다는, 적어도 실력 행사는 한 번은 해야 신정부 체제 하에서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데 가까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굳이 다른 친막부 번으로 가지 않고 홋카이도로 간 것도, 당시 진지하게 우려되고 있던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홋카이도를 일본령으로 확실히 편입함으로써 공적을 세우고 친도쿠가와 무사들의 기반을 새롭게 확보한다는 목적이 강했다고 볼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