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동쪽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 맞다 (1)
춘당대(春塘臺) 넓은 마당에 봄바람 살랑이니, 후원의 꽃내음도 덩달아 실려왔다. 조선 땅에 사류(士類)의 자제로 태어나 문장 갈고닦기를 업으로 삼아온 자라면 이 정취에 절로 글감이 솟아날 것이련만, 안타깝게도 지금 마당 위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문장을 쥐어짜내는 뭇 유생들에게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연유는 무엇인가? 경과별시(慶科別試)의 전시(殿試)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 꽃봉오리 고개 내밀던 두 달 전 바로 이 자리에서 보았던 응제(應製)야 문장 솜씨를 보는 시험이니 부(賦)만 잘 지으면 되었지만, 전시는 대개 국정의 현안을 그 시제(試題)로 내기 마련이요, 금번에는 숫제 그렇게 시무책을 적어 내도록 할 것임을 보름 전에 공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오히려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미리 적어오기로 마음먹은 구절을 까먹는다면 모를까, 동쪽으로 훤히 보이는 봄날 부용지 경치가 응시하는 유생들에게 도움이 될 리는 전혀 없었다.
한편 지난 생에서나 이번 생에서나 시험 볼 일은 없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유생들 소맷자락 구경하는 임금 귀남도 마찬가지로 경치가 온전히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으니, 근래 마음속이 복잡한 탓이었다. 그러니 사람이 보기 위해 가꾸어둔 후원의 기화요초들은 헛고생을 하는 셈이었다.
‘아조가 개국한지 어언 사백 하고도 팔십사년이 되었으니, 성덕이 이처럼 누대에 걸쳐 이어짐은 실로 고금에 드문 바다. 그러나 이는 과인의 덕이 아니요, 위로는 조종 사직의 두터운 보살핌이, 아래로는 뭇 선비의 현량함과 만백성의 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천하의 형세를 보면 서로 다투고 빼앗아 마치 험윤(玁狁)과 견융(犬戎)에게 에워싸인 것과 같다. 이러한 형국 중에서도 가장 위태로운 곳이 있다면 어디라 하겠는가? 이를 능히 막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계책을 베풀어야 할 것인가? 제생(諸生)은 기탄없이 뜻을 펼쳐보일지어다.’
하필 이러한 시제를 직접 지은 까닭은 이번 경과의 원인이 된 경사, 즉 중전 민씨가 대군을 해산한 일로 깨달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번, 그러니까 원자 태어내기 한 해 전에 출산한 공주가 고작 반년 만에 졸서(卒逝) 하였을 때,
‘신미년(1871)에도 손쓸 시기를 놓쳐 중전에게 하늘 무너지는 서글픔을 주었는데, 올해마저도 참혹한 일을 당하게 만드니 너희 내의원 무리들은 나라의 봉록을 얼마나 가볍게 여긴다는 말이냐!’
하고서 크게 꾸짖었더니, 그 사이에 알아서 사람을 뽑아 서양 의학을 배워온다, (눈치껏 사비로) 기물을 새로 들인다 하여, 이번에는 산후 보름 즈음에 잠시 위중한 때가 있을 적에 재빨리 솜씨를 발휘하여 겨우 살려낸 것이다.
그리하여 원자의 돌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고, 이번에는 대군까지 생산(生産)하여 책임질 목숨이 하나 더 늘었으니 아비 된 자로서 어찌 마음 쓰이지 않겠는가.
그 한 몸만 적당히 임금 노릇하며 대접받고 살다 갈 것이라면 적당히 선행 베풀면서 나라 망할 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그러다가 안 망하면 더 좋고. 이 정도로도 족했겠지만 이제는 정말로 노력해서 적어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전생의 아들이 겹쳐보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거짓말일 것이다) 아들 녀석도 저처럼 편하게 왕위에 앉아 호의호식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금번 경과전시 시제를 저와 같이 내게 된 내력이었다. 혼자 하면 답이 없는 고민이지만, 그러기 어려울 때 남에게 언제든 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귀남의 직업이 가져다주는 혜택 중 하나 아니던가.
독권(讀券)·대독(對讀. 전시의 채점을 맡는 관리)은 정해진 품계가 있으므로, 김병학·최익현 같은, 어디 가서 중신이라 자부할 만한 이들이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옆에서 나름대로 사평(私評)하는 것 정도야 담장 아래 옹기종기 모인 젊은 경연관들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들 중 벼슬살이 가장 오래한 어윤중은 대독관 말석으로 차출되어 아직 뒤처리를 하고 있고, 그 대신 얼마 전 모친상 시묘살이 끝내고 합류한 김홍집(金弘集)이 끼어 있었다.
“금번 책문의 시제를 금상께서 손수 지으셨다는 것이 사실인지요?”
“어필은 아니지만 옥음으로 전교하신 바를 그대로 옮겼으니 도원(道園, 김홍집의 호) 자네가 옳게 들은 셈이지.”
같은 옥수라지만 군밤 구울 때는 그처럼 섬세한 것이 붓만 잡으면 행서를 써도 초서가 나오니 참으로 망측한 일이었다. 물론 신하된 자로서 감히 그런 무엄한 언사를 마음 밖으로 내겠냐만은.
“우리 사이 얘기지만, 만약 제가 응시하던 임신년(1872) 문과 시제가 이렇게 나왔을 것 같으면 어련히 좋았을까 싶습니다. 한 식경이면 그 자리에서 시권(試卷)을 가득 채웠을 텐데요...”
김옥균이 저의 재주 잘난 것에 퍽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다른 둘은 익히 알았으므로 – 김옥균 주변에 있으면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 빙긋 웃을 뿐이었다.
“고균 자네라면 어떻게 답을 했겠는가?”
“당연히 왜(倭)의 일이 가장 위태롭다고 답했을 것입니다. 그 나라로 말하자면 다스려질 때는 자족(自足)하지만 어지러울 때는 항상 저의 난(亂)을 남에게 옮기는 것을 좋아하니, 우리도 함께 어지럽다면 그 힘을 빌려 어딘가 이로운 데 쓸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라면 오히려 우리가 힘을 써서 저들 안에서만 머물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고균 자네야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답이 너무나 많은걸. 당장 청국과의 사이만 보더라도 화평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북벌 운운하는 철 지난 소리야 제쳐놓더라도, 전번 월남국의 일에서도 보평군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뭇 백성이 참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것이야.”
“그러니 더욱 일본국이 중한 것이지요. 그 나라가 자중지란에 빠져 우리네 공인들이 만드는 물건을 사가지 못함도 곤란한 일이지만, 또 저들끼리 단합하여 아국의 물산을 저들 땅에서 몰아내겠다 하는 것도 아니 될 일입니다. 잘못하면 훗날 또 청국에서 저들 땅에 조선 물산을 들이지 않겠다 겁박할 때 기댈 바가 없지 않게 되겠지요.”
고지식한 의정대신들이 지엄한 금궐(禁闕) 한 귀퉁이에서 이렇게 잡인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젊은 신료가 꺼내고 있음을 알았더라면 까무러치고도 남으리라. 당장 그나마 식견 있다는 이들 둘도 김옥균처럼 적나라하게 통상의 이익을 얘기할 엄두는 내지 못할 터였다.
“흠흠, 내가 불효한 일을 당하여 초야에 있을 때 생각하기로는 아라사를 끌어들이되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급하다 여겼다네. 지난 번 함경도 난리 때만 해도, 늦기 전 화약하였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러지 못하고 병란(兵亂)으로 번졌더라면 얼마나 나랏일이 어지러워졌을 것인가? 지금이야 아라사가 저 멀리 서쪽에서 청국과 변계(邊界)의 일을 놓고 다투고 있다지만, 또 언제고 남쪽으로 내려오려 획책할지 모르지.”
마침 그즈음 행랑 모퉁이에 관복 소매 휘날리며 어윤중이 나타났다.
“하하, 여기들 계셨군요. 다들 금번 시제를 놓고서 모의로 답안을 써내고 있는 모양이지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 금상께서 이르신 위태로운 곳이 어디인가 다들 한 마디씩 내놓고 있었다네.”
잠시 소매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본 어윤중이 곧장 답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방을 붙였을 테니 발설해도 되겠군요. 아마 대국, 왜국, 그리고 아라사, 이렇게 말씀하셨을 텐데, 금상께서 왜국을 지목한 책문을 급제로 정하셨습니다.”
“고균 이 사람아, 입 찢어지겠네.”
제 말이 맞았다는 데 의기가 양양해진 김옥균에게 김윤식이 농을 던졌다.
“강화도 유생 이건창(李建昌)이라고, 참의대부 지내신 사기(沙磯. 이시원(李是遠)) 영감의 손자 되는 젊은이입니다. 금상께서 일독하시더니, 매우 뜻이 훌륭하다면서 조만간 이대로 행하시겠다 하시더군요. 아마 당장 내일 조강이나 주강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허, 그렇다면 당장 내용을 살펴야 하겠군그래.”
나라의 문호가 열린지 꽤 되었으므로, 해동 선비들은 모두 정저지와(井底之蛙)다 자조하였던 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향촌의 유학들도 여전히 성현의 말씀을 따르면서 예전처럼 향회에서 무리지어 다투고 명절에는 족친(族親)끼리 모여 친목을 다졌지만, 그러면서도 또 우정국에서 통문마냥 배달하는 신보를 돌려보고, 또 부쩍 값이 헐해진 종이 덕에 마구 찍혀 나오는 양서 한두 권쯤은 소장하고서 빌려주고 또 빌려보는 것이었다.
하물며 어렸을 때부터 강화도 학통을 이어받을 인재로 촉망받던 이건창은 어떠하였을까.
‘... 무릇 사람이란 겉으로 구규(九竅)를 갖추고 속으로 사단(四端)을 가지니, 우리가 말과 습속이 중원과 다를지라도 능히 성현의 가르침을 체득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국 역시 비록 그 풍속이 남을 속여 이익 취하기를 좋아한다 하여도, 궁구하여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전적(典籍)을 상고하여 보면, 같은 일본국인데도 원씨(源氏, 무로마치 막부)가 흥하였을 때는 나라 경계를 엄히 지켜 침노함이 없었지만, 그 힘이 다하여 평씨(平氏)가 전횡하자 우리 남쪽 바다의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그 아래에서 풍신수길(豐臣秀吉)이 나왔을 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그 나라의 사정에 학문에 힘쓰기 어렵고 또 정진하여 도행을 닦기 힘든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니, 그 본질이 간교하여 고칠 수 없다는 말은 참으로 우활한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 근자 일본국에서는 여러 백성들이 함께 진언하여 저들 말로 민선의원(民選議院)의 제도를 세우자 하였다 합니다. 이는 밝으신 성상께서 참의원을 두신 데 탄복한 것이니, 이로써 저들이 바른 것을 알고 또 좋아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국이 우리와 같이 국세를 널리 펼치고 나라 안의 학문을 융성케 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비로소 그 국인들 역시 군자와 같이 될 것이니, 급한 우환일지라도 이처럼 방비한다면 훗날에는 그런 근심이 있었음도 알지 못하게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방끈은 짧아도 조선이 어느 나라로 말미암아 망국의 한을 품게 되었나 모를 리 없던 귀남에게 이러한 내용은 참 매력적인 것이었다. 쳐들어가 없애버리자니 당장 조선의 힘이 그만큼이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 사이 옆 나라들이 가만히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니 가장 좋은 것은 나라의 힘을 들이는 시늉만 하고서 최대의 효과를 얻는 데 있었다.
“때마침 일본국에서도 뜻 있는 선비들이 이처럼 참의원의 법도를 따라하자고 하고 있다니, 이웃 나라로서 북돋아주어야 하지 않겠소?”
“전하, 하지만 아조와 일본국은 서로 자주하는 나라로 공인하여, 그 안의 사정에 간여하지 않기로 약조하였습니다. 신이 법국에서 배운 바로는, 자칫 나라 사이의 공법(公法)을 어겼다는 빌미가 될 듯하여 두려울 뿐입니다.”
그러나 김옥균 혼자만 그렇게 생각할 뿐, 나머지 경연관들이 생각하기에는 또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만국공법』에서 그렇게 서로의 정사를 존중하라 한 것은, 나라마다 크기와 힘이 가지각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국과 일본국을 따지자면 오히려 일본국이 백성의 수가 더 많으며, 세력으로 말하자면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침노하기보다 차라리 국외(局外)의 강한 나라에게 함께 핍박받을 공산이 더 큽니다. 그러니 우의를 지키는 도리에 따라, 좋은 제도는 서로 권하여 장차 힘을 합하는 밑바탕으로 삼음이 가할 것입니다.”
아무리 천하가 무도하고 모두가 제멋대로 군다 해도, 누가 보아도 좋은 법, 좋은 제도가 있기 마련이라 여기는 게 유자(儒者)다. 좋은 행실을 권면하는 일조차 남에게 간섭하는 것이라 한다면, 세상에 올바른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개화당이 보기에도 참의원은 구미 각국에도 있는 문명국의 법도였으며, 여전히 참의원 하면 현량과를 생각하는 유당(儒黨) 선비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바다 건너편 사정에 밝은 경상도 출신 참의대부 몇몇이, 근래 일본국 사정이 혼란스러우므로 우선 지켜보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조심스레 말을 꺼낸 것이 조정과 참의원을 통틀어 나온 이견의 전부였다 (여전히 제가 맞다고 여기는 김옥균을 제외하면).
그러나 유럽인들이 보기에는 빼도박도 못하는 내정간섭이었으며, 더구나 지금껏 조선이 벌여온 일들이 적지 않았기에, 거센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 반발이 향하는 방향이 한성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간만에 교토에 상경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미리 준비된 밀실에 들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서양식으로 꾸며진 오쿠보 도시미치의 집무실 한쪽을 막아서 만든 것이라, 다다미 대신 녹색 융단이 깔려 있어 꽤 이색적이었다. 겉으로 얘기하지는 못하지만, 사실은 이런 양식(洋式)도 나쁘지는 않아 기회만 되면 에도 성도 이렇게 개수하고는 싶었다.
“아, 요새 고생이 많겠군그래.”
곧이어 들어온 내무경 오쿠보를 보자마자 말을 꺼냈다. 방 안의 모습처럼 말끔한 서양식 옷에, 촌마게도 자르고 수염도 길렀다. 여전히 세상 바뀐지 모르는 에도의 로주(老中)들은 쇼군이 사츠마 촌놈을 이렇게 독대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지만, 요시노부는 그들처럼 머저리가 아니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자부심이 지금의 사태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전하야말로 이 시국에 참으로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쇼군이라는 자리도 없어진지 오래지만, 여전히 경칭을 고수하는 오쿠보였다. 물론 마음에서 우러나온 존대는 아닐 것이다. 그저 부족한 것이 있기에 굽히고 들어올 뿐.
“하하, 이 사람도 고생이 없지는 않지. ‘신정부가 조선인들을 끌어들여 신주(神州)에 독을 풀었다!’ 나름 성현의 말씀을 배웠다는 국학 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지난 대만 출병이 말로만 성공을 거두고 사실상 빈손으로 돌아온 이래, 신정부는 사람을 풀어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자유민권이니, 사민평등(四民平等)이니 하면서 사람을 모아 시끌시끌하게 하지를 않나, 이름도 그럴듯하게 민정사(民政社)니 애국사(愛國社)니 하는 결사를 세우지를 않나. 심지어 빈농들을 끌어모아 지주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것이 정말 개혁을 위한 목소리인가, 하면 당연히 아니었다. 지난 번 전쟁이 무승부로 끝난 뒤, 한 번 더 정면승부를 걸어보았다가는 나라가 결딴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실낱같은 평화를 유지해주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군대 대신 자칭 ‘민의’를 모아 옛 좌막파 번들을 흔들어보겠다는 심산이리라.
생사(生絲) 팔이 덕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던 각 번의 재정도 그나마 호전되었다. 그렇지 않은 번들은 남아도는 영민들을 데려다 ‘해외 취업’을 알선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모인 잔돈으로 공장까지 세우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무언가 끓어오르는 여론을 달랠 필요는 있었으므로, 교육을 보급하겠노라 공언하면서 비교적 돈이 적게 드는 학교를 세웠다.
그랬더니 바로 그 학교에 저 ‘사상투쟁가’들이 틈입하여 어느새 저들의 병영으로 삼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정사(政社) 따위를 만들어 각 번의 공론을 헤집어놓은 탓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조금씩 밀리면서 위기의식을 품기 시작하던 옛 막부의 충신들이었다. 공론, 공의 따위를 내세우며 신정부를 견제하던 것이 바로 좌막파의 논리였으므로, 너희 무사들의 목소리만 공론이고 우리 농부들, 어민들의 목소리는 아니란 말이냐며 따지고드는 자들을 말로 달랠 수는 없었다. 그저 손찌검으로, 그것도 안 되면 칼부림으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
그러던 차에 각 번의 지번사들이 해당 번의 공론을 제대로 반영해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민선의원을 선출하여 입법하는 기구로 삼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 뒤에 가고시마 사투리 짙은 자들이 여럿 끼어 있음은 요시노부 또한 알고 있었다. 대만에서의 망신 이후 후방으로 물러난 사츠마의 옛 지사들이 개입한 것일 터.
조선 정부가 어설프게 – 과연 어설프게일까? - 개입하여 신정부가 정말 의원제를 도입한다면 어떻게든 도와줄 용의가 있음을 밝힌 것은 (하필) 그 무렵이었다. 적의 실체가 드러났다며 늙다리 원로들은 날뛰고, 신정부는 엉뚱한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다.
“저희로서도 조선 정부가 이렇게 나온 데 대해서는 참 당혹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예상하지 못하는 수를 연이어 두었던 자들이라...”
“예상하지 못하는 수일수록 그 뒤의 의도를 경계해야 하는 법. 자네도 머리는 깎았다지만 여전히 무사의 마음가짐은 있을 테니 알고 있겠지.”
이미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로 동국 사람들-정확히는 옛 영주와 번사들-은 조선은 곧 양이와 한패요, 양이는 항상 일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마침 신정부의 끄나풀들로 인해 곤란하던 와중에 이처럼 좋은 빌미가 또 있었을까.
“당장 에도에서도 이번에야말로 신정부의 관련자를 색출하여 엄히 문책하여야 한다. 이렇게 중론을 정했다네. 정말 머저리들이 말하는 것처럼 조선이 그 민권운동이니 하는 것의 배후에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번 일을 꼬투리 삼아 뿌리를 뽑아내겠다, 이거지.
자, 그러니 자네들도 정하도록 하게나. 이번 일에 책임을 지고, 동국에 대한 불개입을 선언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동국 여론에 더 불을 지펴서 다시 한 번 우리 히노모토를 불구덩이로 밀어넣을 것인가?”
잠시 말을 멈춘 마지막 쇼군은, 능구렁이 미소를 지으며 세 번째 선택지를 제시했다.
“아니면 내어줄 것을 내어주고서 우리 다툼의 종전을 선언할 것인가? 내가 에도에서 들고 온 선택지는 이렇게 세 가지가 전부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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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대는 부용지 옆의 공터입니다. 말이 공터지 실제로는 석재로 기초공사가 이루어져 있어, 이런저런 큰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그런 행사 중 하나가 바로 국왕 앞에서 진행하는 과거의 최종시험, 전시였지요. 전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책문, 즉 나라의 중대사에 대한 정책을 묻는 질의를 포함하기도 했습니다.
원 역사에서 명성황후 민씨는 1875년 4월에 대군을 출산합니다만, 아이는 보름 만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러나 예정되어 있던 경과, 즉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특별시험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도 대군의 사인은 나와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더군요.
원 역사에서 이건창은 1866년 별시에 등과하여 조선왕조 오백년 사상 최연소 과거급제 기록을 세웁니다. (여담으로, 최고령 과거급제 기록도 고종대에 나왔습니다) 물론 이건창 본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해당 별시가 바로 그의 조부인 이시원의 순국(병인양요 당시 음독자살)을 기리기 위함이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런 시험에서 이건창을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문제가 있었겠지요. 이때 그의 나이가 15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제 관직생활은 적당히 유예를 두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원 역사의 일본 자유민권운동은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토 히로부미의 신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장외투쟁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 주동자는 정한론 정변에서 밀려난 사이고 다카모리, 정확하게는 친 사이고 유신지사들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시작과는 별개로 세상이 변했다는 일본 민중의 인식이 강했기에, 곧 폭발적인 성장을 거두게 됩니다.
1874년의 민선의원운동, 1880년대의 사의헌법운동 등을 거치면서 일본에도 민주주의의 토양은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군국주의의 광풍, 그리고 상층부의 번벌 정치라는 기성 정치권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국에 이르게 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