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86화 (86/320)

28. 가산이 없다하여 체통마저 없겠는가 (3)

고민 끝에 방책을 내어 다투는 두 무리를 중재하라 한 것은 귀남의 성단이요, 채비하던 중 도성 저자에 망측한 일이 날 참이라는 급보를 듣고서 막 교대하려던 금군 몇몇을 데리고 달려간 것은 어윤중의 기지였다. 아무리 수 명이라지만 함부로 군병을 움직이는 일이니 후환이 걱정될 법도 하였으나, 그런 일이 있더라면 자신이 모든 후과를 기꺼이 받겠다 하여 순순히들 따라온 것이다.

“지금 도성 저자 한복판에서 이 무슨 패악한 짓들이란 말이오?”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어윤중이 목소리 높여 꾸짖자, 막 광통교 앞까지 밀려난 김병건과 그 무리들, 그리고 그들을 내리치려던 부보상 무리들이 모두 한걸음씩 물러서, 두 패거리 사이에 곧장 선이 훤히 그어졌다.

모름지기 뒷골목 왈패라면, 아무리 혈기 달아올라 성난 황소와 같을지라도 저보다 힘 센 이를 만나면 삽시간에 가라앉힐 수 있어야 하는 법. 공포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총성 울리고, 그 발원한 곳을 보니 금군의 검은 제복이 떡하니 있었으므로, 천덕기는 물론 개천 건너편 하일평도 바로 제 수하들을 물러나게 하였던 것이다.

“다들 딴에는 저의 일신만 생각하여 모인 것이 아니요, 충군보국하는 심정으로 모여들었을 터인데 이래서는 아니 될 것이외다. 당장 손에 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던 일 마저 보러 가도록 하시오들.”

그야 당연히 이 시국에 보국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 않고서 대놓고 무리를 모으면 열에 여덟아홉은 역모 취급 받기 마련이므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었지만, 궐에서 나온 사람이 당당하게 이를 걸고 넘어지니 누가 감히 반박을 하겠는가.

“나리, 저희는 그간 입은 나랏님 은덕에 티끌만큼이나마 보답하려 모여든 것이 맞습니다만, 저 치들로 말하자면 저들 잇속만 챙기려고 떼지어 소란을 일으키니 악독한 자들이 틀림없습니다요.”

허나 정말로 대원위 합하 말을 들어 조선 팔도를 깨끗이 하였다는 자부심 넘치던 몇몇은 끝내 수긍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진퉁 장돌뱅이들도 있었지만, 또 근자에는 도성의 한량들 중 가세 곤궁한 이들이 의협심에 휘말려 익문사에 몸 담는 – 물론 정말 의협심만 있던 것은 아니요, 어떻게 운현궁에 줄 대볼 생각도 있었겠지만 – 경우도 없잖았는데, 그들이 보기에는 정녕 사정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대들이 이처럼 사사로이 다투지 않더라도 조만간 나라에서 정도와 시무에 맞추어 처분하는 바 있을 것이니, 그리 알고 물러가도록 하시오.”

무어라 더 말하려는 청년을 천덕기가 저의 대들보만한 팔로 직접 제지하였다. 여기서 더 대꾸하였다가는 제가 모시는 대원군에게 필히 어떤 식으로든 폐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하였기 때문이리라.

“나랏일로 고생이 많으신 분을 괜스레 수고롭게 하였으니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입니다요. 그저 저희는 누가 시켜서 여기 모인 게 아니고, 그저 나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충군하는 마음에 모여들었으니 알아만 주시면 은혜 각골나망이겠습니다, 헤헤.”

어느새 날래게 얼어붙은 개천을 훌쩍 넘어온 하일평이 어윤중 옆에 달라붙어 수작을 걸었다.

“자, 뭣들 하는가! 얼른 제 갈길 가세나! 우리가 무슨 당을 만들고자 모인 것도 아니고, 그저 의기로 뭉쳤을 뿐 본디 남남이지 않던가!”

수상쩍은 모양새를 놓칠 리 없는 어윤중이었지만, 여기서 더 문제를 불거지게 하기를 원치 않는 성심을 알았기에 어색하게 흩어지는 주먹패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도중 패거리들도 멋쩍게 사의를 표하고는 하나씩 해산하여, 얼어붙은 개천 빙판 위에 유혈 흩뿌려질 일은 겨우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운종가에 모여들었던 구경꾼들이 누가 누구와 싸웠는지를 뻔히 보았고, 그들에게도 입 달려있는 이상 수군거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욕을 보더라도 훗날의 근심거리를 없애고자 하였던 대원군의 꾀가, 근심을 미처 뿌리 뽑지도 못한 채 저만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끔 만드는 올무가 되어 그의 발목을 잡아끌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조용히 묻고 넘어가면 임금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여기던 박규수가 제지하려 해도, 그간 찍어누르던 대원군에게 원한이 없을 리 없던 다른 명문가 사람들이 물 들어올 때 노 젓겠다며 나서니 미처 다 막을 수 없었다.

거기에 저들이 관직 생활을 막 시작하려는 차에 참의원이니 무슨 당이니 하며 나서는 꼴을 아니꼽게 여기던 젊은 간관(諫官)들도 없지 않아, 세도가 뒷배 믿고서 이 일의 책임 소지는 양쪽에 모두 있으니 반드시 그 끝을 살펴 처분해야 한다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양민들끼리 무리지어 싸워 사람이 여럿 상했으므로, 그 죄목도 명명백백하였고, 아무리 대원군이 뒷수습을 하려고 해도, 당초 모임을 시작한 이들이 공산당으로부터 노임 받던 자들이요, 그들을 까부수려 모여든 자들도 익문사 부보상과 한량들이었음이 너무나 뻔하였던 것이다.

“시의적절한 성단이 있어 난민들끼리 무리지어 다투는 망측한 일은 마침내 막아내었건만, 그 전말을 깊게 살피면 주동은 전 정자 김병건과 화공 장승업이요, 그들을 막겠다는 빌미를 내세워 화란을 키운 것은 천덕기, 하일평 등 모리배의 수괴입니다. 이들을 주벌하지 아니한다면 국법이 장차 위엄을 잃게 될 것이니, 그리 된다면 훗날 간사한 자들을 무엇으로 경계케 할 것이며 또 무엇을 근거삼아 죄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모두 처벌하고, 혹 그 뒤에 다른 흉심 품은 자가 있어 무뢰한 무리로 하여금 민요(民擾)를 일으키게 하지는 않았는지도 더불어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궁내에 귀가 있어 그러한 탄핵이 있었음을 고스란히 전해들을 수 있던 대원군은 그저 오늘따라 쓸쓸한 운현궁에서 한숨만 내쉴 뿐. 입궐하라는 어지를 받들고서 입궁하게 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차라리 일을 제멋대로 처리하기 전에 아들의 뜻을 한 번쯤 묻기라도 하였으면 되었을 것을, 이렇게 홀로 머리 굴려 움직이다가 손발이 맞지 않아 지금의 곤경을 초래하였으니, 아들 보기는 민망하였다. 허나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이번 일을 무마하고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자들을 족칠 수 있을 것인지 입궐하는 길 내내 고심하는 대원군이었다.

과연 겨울은 겨울이라, 편전에 대령하니 그 앞부터 군밤 굽는 고소한 향내가 진동하였다.

“근래 마음고생이 심할 듯하여 입궐토록 하교하였소.”

“이 모두 신이 미욱한 탓이니 어찌 원망하는 마음을 품겠사옵나이까.”

물론 이대로 조용히 뒷전으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지만, 아들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한 서너 해 정도는 몸을 사릴 생각을 이미 품은 대원군이었다.

“그 운종가에서 다투었다는 주먹패들이 실은 경이 사사로이 부리던 자들이라는 고변이 있었소. 내 잠저(潛邸) 시절 보고 들은 바 있어, 적어도 그 수괴인 천가와 하가로 말하자면 익히 알고 있소이다.”

어찌 모르겠는가. 천덕기는 같이 군밤 팔던 덕만의 숙부 되는 사람이요, 하일평은 효자밤 팔던 시절 단골이니 말이다.

“대관절 무슨 급함이 있어 그리하였단 말이오? 저 도중 운운하는 자들을 스스로 흩어지게 할 계책을 신료들의 도움으로 마련하였는데, 하루이틀 말미만 더 있었더라면 조용히 원단(元旦)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을...”

꾸짖는 언사지만 이면에는 아쉬움과 안쓰러움이 묻어나왔으므로, 절로 드는 미안한 마음에 대원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권력 앞에 아비도 아들도 없다는 식으로 금상과 다투는 사이라면 모를까, 굳이 따지자면 둘이 힘을 합치는 사이일진대 한쪽이 마음만 앞서다가 탄핵당할 소지를 만들어 버렸으니 금상에게도 이롭지는 못할 터.

“이미 사안의 중함이 지금과 같이 되었으니, 참으로 미안하지만 경 또한 내어주는 바가 있어야 하게 되었소.”

적어도 그런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는 것 정도를 모를 대원군은 아니었다. 하사하는 어제 군밤을 공손히 받아들며 대원군이 답했다.

“이미 전국에 서원과 학교가 늘어나 각자 능히 서책을 구비할 수 있게 되었소. 그러니 익문사를 존치함도 세인의 의혹을 사기 좋은 것이라, 이 일을 계기삼아 처분하여야 할 것이오.”

그러나 이 정도까지일 줄은 예상치 못했던 대원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전하, 차라리 익문사의 장정들을 직접 거두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껏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끔 경국(經國)해오신바 그 인덕이 만세에 빛날 것이나, 장차 이를 빌미삼아 배덕한 짓을 할 자들이 나타나면 나라의 기강이 또한 크게 흔들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하, 경이 걱정하는 바를 일찍이 경연관으로 있는 옥균도 아뢰더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태조께서 아조 조선의 기업을 크게 일구신 이래 위정한 바가 모두 떳떳하지는 않았다 할지언정, 적어도 정사의 밝고 밝지 못함을 가려 부끄러워하는 마음만은 줄곧 있었소이다. 그리하여 해동 땅에 예의의 나라를 만들었으니, 이 또한 나라의 위신으로 따지자면 구미의 나라와는 같지 않소.

그런데 그들 나라에서 그러하듯 국인(國人)끼리 자신의 이해를 따져가며 다툰다면, 세인들이 모두 이르기를 저들 또한 말로만 스스로 빼어나다 할 뿐, 실지로는 하등 다를 바 없다 비웃을 터이니 이만큼 조종의 은덕에 누가 되는 일이 또 있겠소이까?”

당장 어제 경연에서 있던 언쟁이었다. 그 전 경연에서 머리 맞대고 내놓은 결론에 여전히 불만이 많던 김옥균이, 천하의 어느 나라도 지금 어전에서 내놓는 그런 경국의 도를 따르지 않는다며 분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귀남이 생각하기에, 어쩌면 바로 김옥균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설프게 다른 나라들을 따라하려다 망조가 든 것은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지금껏 조선이 여기까지 온 것은, 자신이 어설프게나마 엉뚱한 소리를 했고, 그게 쌓이고 쌓여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그들 나라의 사정이고, 우리가 꼭 저들 하는 것을 따라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소? 오히려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화평하게 살아갈 도를 마련한다면 저들이 우리를 따라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하니 가만히 있던 김윤식도 찬동하는 것이었다.

‘상감께서 하교하신 바가 참으로 합당하다 하겠습니다. 지금 구미 여러 나라들이 나라의 힘을 가늠하는 방도를 무작정 따르게 되면, 아조는 약소하고 또 비루한 천하 한 구석의 나라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진 바를 살리고 없는 것을 채울 도를 찾아야 하는데, 지금 국운을 한 차례 부흥케 할 길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서양 나라들을 따라한다 해서 쉽게 될 부국강병은 아니니, 차라리 조선만의 편법을 찾자는 이야기였다. 어윤중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나라의 전례를 살펴보면, 저들 나라의 고공들이 먼저 노동조합이라 하는 당을 만들고, 저들이 받는 노임을 높여달라며 소란을 일으켰다 하니, 이는 도성에 온 법국인들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아국은 이제야 기기를 들여오고 공장의 제도를 일으키고 있으니, 그리 할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께서 이르신 것처럼 이익이 아닌 정도로 타이르고, 이로써 장차 부리는 자와 부려지는 자의 인화를 꾀한다면 나라 안에 크게 다툼이 일어날 화근을 미리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간 이야기를 대략 설명하니, 대원군도 경연에서 마련하였다는 대책이 대략 무엇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축 쳐져있던 어깨가 절로 들리고, 느껴지지 않던 군밤의 단맛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도중들이 소청(訴請)한 바가 그 처우를 저들 원하는 대로 높여달라는 데 있으니, 의리를 내세워 이를 들어주고, 그 요구하는 바가 지나치게 되면 정도를 벗어난 것이니 국법으로 금하겠다는 방책이신지요?”

꽉 막힌 선비들이라면 당연히 어찌 잡역(雜役) 하는 무리를 중히 대해주겠느냐며 우선 반발부터 하겠지만, 대원군은 쉽게 꿰뚫어볼 수 있었다. 어쨌든 예를 갖추어준다는 것은 삯을 후하게 주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니 어찌 보면 노임을 높여주는 대신 공치사로 갈음하는 셈이라 (물론 주상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신료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가장 비용이 헐하게 드는 방책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문득 드는 의문이 있었다.

“허나 지금은 저들이 새로 얻은 것을 기뻐하며 더한 것을 구하지는 않겠으나, 사람의 마음이 구원(舊怨)은 잊지 않고 은혜는 쉽사리 잊으니 훗날 다시 뭉쳐 공장의 주인을 겁박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뒤탈이 없게 하려면 마땅히 상응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은 그에 대해서도 방법이 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실은 그러한 폐단에 대해서는 딱히 방편이 없어, 우선 당면한 화를 면하고 볼 생각이었소.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이번 다툼으로 한 가지 방책을 얻게 되었으니, 세상 일이 참 묘하다 하겠소이다.”

이것은 또 무슨 봉창 두드리는 전교인가, 잠시 고민하였으나, 주먹패 다루는 일이라면 익숙한 대원군은 이 또한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익문사를 혁파하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도중들이 엇나가지 않는지 경계케 하시려는 것이옵나이까?”

“옳게 보았소. 그리하면 일전에 말하였던 공산당의 해악이 아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상책이라 할 수 있지 않소?”

부리는 자와 부려지는 자는 그 이해가 서로 맞지 않음이 보통이다. 대원군 본인이 그 옛날 장동 김문의 끄나풀을 꾀어낸 방법 역시 이러한 이치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고용하는 이와 고공 노릇하는 이가 일심으로 경계하는 자가 있다면, 홀로 적대할 수 없으니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심정으로 한데 뭉칠 수밖에 없을 터.

지금 조선 팔도에서 송상 정도를 제하면 공장을 세워 고공 부리는 자들은 도성의 거족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마치 뒷산 범처럼 경계하는 자라면 단연 대원군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로 도중 운운하던 자들 역시 운현궁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리라.

대원군이 처음 공산당을 꾸리겠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생각에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반대할 까닭이 있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경이 입안한 바에 따라 익문사를 처음 둔 것은 나라 전체에 서원과 학교가 크게 일어나 서책이 부족할 때였는데, 지금은 그때부터 시일이 많이 지나 경황이 그와 같지 않소. 또 장차 해삼위에서 값싼 종이가 들어오면 서책의 값이 훨씬 박해질 테니 익문사 없이도 배우기를 원하는 자라면 능히 서책을 구해 볼 수 있을 것이오.

허나 그렇다고 당장 익문사를 폐하게 되면 부리던 수많은 구실아치들은 하루아침에 할 일을 잃게 되니, 그들 중 도로 부보상 노릇하기를 원치 않는 자들을 모아 새로 경무(警務)에 힘쓰도록 하면 되지 않겠소?”

귀남 딴에는 대원군의 편의도 보아 주면서 여전히 께름칙한 공산당을 감시하고자 덧붙인 생각이었지만, 대원군이 보기에는 마치 아비 고수(瞽瞍)의 허물 덮어주는 순임금 같기도 하고, 또 주먹패 부리는 자신처럼 교묘한 술수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여, 고맙고 기특하였다.

이것이 프랑스 선교사들이 국가헌병대(장다르메)로 부르던 익문사가 정말로 국가헌병대 구실을 하게 된 까닭이었다. 물론 그런 이름을 알리 없는 조선이었기에, 고민 끝에 정한 이름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나라 안 모든 이들로 하여금 평안을 누리도록 돕는다는 뜻으로 공안서(公安署)라 하였다.

이번 기회에 운현궁의 수족 중 팔 한 쪽이라도 잘라보자며 벼르던 세도가들은 이 예상치 못한 흐름에 – 박규수를 제외하면 – 당황하여 스스로 옷매무새를 바르게 하고, 모든 공장과 국(局)의 고공들에게 관아에 신고하여 도중을 꾸리는 것을 허여한다는 어명에 기꺼워하던 김병건과 그 이하 사람들 역시 이어져 포고된 공안서의 소식에 황망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미 양력으로는 새해라, 노엘(크리스마스)은 지나고 벌써 신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프티 파리에서도 화제는 단연 이번에 연이어 발표된 두 법령이었다. 특히 이야기가 집중된 곳은 공식적으로 조선의 정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벨레를 빙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사이였다.

“벨레 영감님, 이게 다른 전근대 아시아 국가로도 퍼질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그러기는 어려울 게요. 이곳 조선이야 나라의 공식적인 이념으로 백성을 위한다고 못을 박아놓고 있고, 국민들도 그걸 받아들이고 있지 않소. 우리도 이미 1871년에 느낀 것이지만 이 이념의 힘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이 강력한 것이지.”

어쨌든 조선식 노조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모이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인정받은 셈이었다. 세간에서 인색하다는 평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르주아로 변모해가는 옛 대가문들은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노동자들을 대해주어야 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조가 목소리를 낼 때만큼 제대로 시원시원하게 임금이 인상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른 곳, 예를 들어, 그리스 같은 곳에서 이렇게 했다가는, 바로 폭동이 났겠지. 기업가들이 굳이 노동자들을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지 않소. 노동자들도 기업가들이 자신들을 ‘이놈’ 대신 ‘선생’으로 불러준다고 해서 만족할 이유가 없고.”

물론 대원군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곳에 모인 프랑스인들은 모두 조선인들이 체면과 명분을 퍽 중시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벨레의 해설에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하, 이게 또 이렇게 풀릴 줄은 몰랐습니다. 확실히 이곳 조선은 참 흥미로운 나라에요.”

“공산당 같지 않은 공산당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실험이 어디로 갈지 지켜보는 건 확실히 재밌는 일이기는 하겠지.”

“뭐, 어차피 프랑스로 한동안 돌아가기는 글렀으니,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겠지요.”

창밖을 하얗게 수놓고 있는 함박눈을 보면서, 루이즈 미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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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헌병대는 말 그대로 헌병은 헌병이되 민간에서도 치안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입니다. 현대 한국 기준으로는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 조직입니다만, 프랑스식 국가헌병대를 모방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꽤 많이 남아있는 편입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군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수한 경찰도 아닌, 준군사적 조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 역사의 동아시아에서 국가헌병대를 처음 도입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상술한 프랑스식 국가헌병대를 모방하여 1881년 설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구 사무라이(사족)들과, 정한론 논쟁에서 물러난 뒤 메이지 정부의 중앙집권에 반대하며 여론을 모으던 자유민권운동 세력에 대항하고, 징병령 시행 이후 평민 출신 병사들이 일으키는 군기문란에 대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헌병’이라는 명칭 또한 이때 번역되었지요.

원 역사의 대한제국에서도 일본식 국가헌병대 설치가 논의되었습니다. 물론 이미 경무서, 경무청 등을 두면서 도시 위주로 근대적 치안업무를 시도하고 있기는 했지만, 군제로 말할 것 같으면 친위대, 진위대 등 그때그때 열강의 군제를 모방해 얼기설기 둔 조직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지요. 특히 병사들이 소속이 다른 병사들과 패싸움을 벌이거나, 순검에게 행패를 부리는 등 군기문란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1900년 육군 내에서 헌병의 설치가 건의되었습니다. 이것이 가납되어 동년 육군헌병조례가 발표되었고, 1903년에는 5개 중대 규모로 증강되었습니다. 그러나 1905년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조언’에 따라 사실상 무력화되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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