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가산이 없다하여 체통마저 없겠는가 (1)
“오, 베트남에 다녀온 사이 꽤 그럴듯한 건물로 옮겼구려. 자칫 못 찾을 뻔 했소이다.”
1874년 겨울, 마침내 이전의 한옥에서 유럽식 건물로 이전한 삼월 카페에서, 참의대부 벨레의 비서관 겸 통역 노릇하는 파스칼 그루세는 막 조선에 돌아온 최익현을 맞이하고 있었다.
임금이 성은을 베풀어, 객지에서 노고가 많았으니 바로 복직하지 말고 한 두어 달 쉬고 오라 하였던 것이다. 지전보평군의 일은 전례 없던 것이고 월남 땅까지 군병을 몰고 다녀온 일도 나라 열리고 처음 있는 사건이었으므로 딱히 문제삼을 이도 없었다.
“하하, 덕분에 그러잖아도 조선 분들도 많이 찾던 이곳 카페가 더욱 붐비게 되었지요.”
“그러게 말이외다. 저기 저 사람은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은데?”
“무슈 오웬(오원, 장승업) 말씀이신가요? 뛰어난 화가지요. 서양화를 구경하려 종종 찾아오곤 한답니다. 물론 한 반절 정도는 그림 구경은 핑계고 그저 술을 마시러 오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또 그렇게 취하면 즉석에서 동양화를 그려주고는 하니 민폐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오늘도 한 잔 했는지, 즉석에서 테이블 하나를 비워놓고 신들린 붓을 놀리는 장승업을 보면서 그루세가 말했다.
“그나저나 베트남에 가서 보니까 프랑스 대표도 무슈 벨레의 당선 소식을 들어 알고 있던데, 본국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던 듯하더이다. 보좌관으로서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물론 벨레 어르신께는 참 좋은 일입니다만, 영감님께서 졸지에 몸담게 되신 이곳 공산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조금 실망스럽기는 합니다.”
그루세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벨레가 참의대부 자리에 오른 뒤 반짝했던 프랑스 언론의 관심도 잠시. 아무래도 말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보니 결국 참의원 내에서 겉돌기는 매한가지였다. 벨레 본인도 늘그막 심심풀이로 나선 자리였으므로, 가끔 돌아가는 일에 대해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한다’ 정도로 조언하는 것 외에 의정활동이라 할 만한 것을 하지는 않았다.
“이름은 공산당이라고 하고 있지만,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시늉을 하는 섭정공 흥선 대공이 대신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내세운 간판에 지나지 않잖습니까. 내놓는 정책 같은 것도 보면 사실 딱히 그쪽 같지도 않고요. 얼마 전에 내놓은 그 시전 혁파라는 것만 보아도, 사실 시장경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는 것이지 딱히 대단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만.”
계속 난전은 늘어만 가고, 새로 들어오는 서양 물건들과 제물포 공장의 물건들의 유통을 놓고서는 마진을 내기 어려웠던 시전 상인들이 단체로 영업의 고충을 호소하니, 기존에 진배(進排, 진상)하던 물목의 납품을 보장하고, 궁궐 건물을 도배하고 수리하던 국역을 면제키로 한 것이다.
“흠, 확실히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기는 하겠구려. 하지만 우리네 조선의 공인들이 아직 유럽의 노동자들처럼 한데 뭉쳐서 생존권을 보장받을 정도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잖소?”
“마르크스 선생의 말이 모두 옳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적어도 장기적으로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고 실질임금이 하락하게 되면 이곳 조선도 똑같이 될 겁니다. 듣기로는 벌써 중국과 일본의 포목 시장이 포화되고 있어, 인도산 면직물과 경쟁하기 위해 제물포 공장들이 노임을 낮출 예정이라 하던데요. 지금 만민공산당이 거기에 딱히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나 백성을 방본(邦本)으로 여김은 우리 조종과 사류가 지금껏 지켜온 도리요. 나라가 다르고 풍토가 다르다지만, 결국 유럽의 공산당이 말하는 것과 대원위 합하의 공산당이 꾀하는 것 사이에 맞닿는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외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조만간 노동자들이 뭉쳐서 노조를 결성한다던가 파업을 한다던가 하게 되면 흥선 대공의 생각도 달라질 듯한데요. 물론 조선의 유학자들이 애민을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백성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려고 하면 어디 감히 천한 것들이 정사를 논하느냐며 정색하지 않겠습니까? 유럽 군주들도 대개 그런 식이었거든요.”
“나라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함부로 그런 일까지 논할 수는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조선은 다를 듯하오. 성현의 말씀이 유럽의 과학처럼 삶에 이로운 기술을 직접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서로 다투지 않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는 확실히 그 쓰임새가 있으니 말이오.”
“흠,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어차피 나날이 공업화가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또 어떻게든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런 류의 갈등이니까요.”
예상보다 매우 가까운 시일 – 다시 말해 오늘 – 내에 닥쳐올 일을 예견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그루세였다.
“장승업이 예 있는가! 지금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얼른 나와보게!”
『익정신보』 사무실을 겸하는 만민공산당의 회당(會堂)에 황망히 사람 찾는 소리가 울렸다.
“녹사 나리 오셨습니까. 그림쟁이 장가라면 아침에 일찌감치 와서 그림 한 편 그려두고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신보 식자공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노릇하는 김병건이, 소리를 듣고 행랑 사이에서 나타났다. 지난 추거(선거)에서 벨레에게 밀려 낙선한 이후 먹고살 길 막막한 터에, 마침 신보의 사업을 크게 키우려던 오경석의 눈에 띄어 다시 활자를 만지게 된 이였다.
“어디 짐작가는 곳이라도 있는가? 당장 내일 낼 신보의 도평(만평)을 새로 그려야 하게 생겼어!”
“무슨 큰일이라도 났는지요?”
“아니, 이 사람아. 신보 낸다는 사람이 소식에 이렇게 깜깜해서야 되겠는가! 청국 천자가 붕어하였다 이 말일세!”
그야 아직 서양에서처럼 풍문을 주워다 신보에 쓸 글로 옮기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이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이미 심양·천진까지 발 뻗친 익문사만큼 소식이 빠를 수 없던 것이었지만, 어쨌든 목소리 큰 사람 – 정확히는 돈줄 쥔 사람 - 은 오경석이니 김병건으로서는 일언반구의 볼멘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기로 한 도평을 보니, 떡하니 청국 태후 전하를 그려놓고 있지 않은가! 평소라도 함부로 내면 안 될 그림인데 이런 시국이니 두말할 것도 없지.”
이번 호가 큼직하게 다룰 소식은 서태후가 동철의 설립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이 비장해둔 보화를 내어놓았다는 이야기였다. 비록 이름은 공산당이라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운현궁이요 『익정신보』도 그 이름 그대로 나랏일을 돕는 것을 고스란히 소기의 목적으로 삼고 있으니, 이런 아름다운 소식을 널리 퍼뜨리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러면 그저 관대하게 인심 쓰는 모습만, 그것도 이왕이면 초상(肖像) 대신 팔 정도만 그려두면 될 것을, 누가 심사 뒤틀린 그림쟁이 아니랄까봐 변발한 만인들을 쥐어짜 나온 보화를 철길에 뿌리는 모양새로 그려두었으니, ‘되놈들’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어지간한 백성들이라면 좋아라 하며 보겠지만 나랏일을 생각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신랄하면서도 익살스러운 그림이었기 때문에 『익정신보』가 재미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그간의 오명을 벗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덕분에 『해동신보』니 『청구시무(靑丘時務)』니 하는 다른 신보들에 비해 배는 많이 찍어냄에도 불구하고 항상 없어서 못 돌릴 지경이었다. 참의대부 추거 때문에 잠시 일을 맡겨보았던 것이 점차 커져서, 도평을 매번 싣게 된 이래 이렇게 되었으니 그 공의 열에 아홉은 장승업의 몫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되니 여기에 재미 붙인 오경석 – 그리고 아마 그 뒤의 대원군 – 이 툭하면 정해진 날 외에도 호외를 내도록 한다는 데 있었다. 본디 『익정신보』는 천간으로 따져 매 정일(丁日), 경일(庚日), 계일(癸日)에 내기로 하였는데, 그렇게 기분 내키는 대로 일을 더 하도록 시키면서 주는 삯은 똑같으니 (그것도 그리 후하지도 않았다)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간지를 따지면 병술(丙戌)일이니 천자가 붕어하였든 잉어하였든 호외를 낼 일은 없었지만.
“그러면 그림 자리를 비우고 그 뒷면에 들어갈 글을 앞면으로 옮기면 될 일이지 않습니까?”
“물론 한 번 쯤이야 그 도평 없이 신보 낸다 해도 큰 탈은 없겠지. 하지만 끽해야 한 각(약 15분)이면 족히 한 편을 그려내는 사람인데 어지간하면 붙잡아다 새로 한 편 더 그리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 말일세. 자네는 아무래도 나보다는 그 젊은이를 많이 볼 테니, 짐작가는 곳 한 군데쯤은 있겠지. 그렇지 않은가?”
“송구스럽습니다만 장가 녀석은 무슨 도술 쓰는 사람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지라 당최 행적을 종잡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요 근래 자전거니 인력거니 하는 기물이 좀 많이 굴러다녀야지요. 동전만 넉넉히 들고 있으면 아마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저 마포나루까지는 능히 갈 수 있을 겝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실은 장승업이 어디로 도망하였을지 뻔히 알고 있던 김병건이 고민에 빠졌다. 장승업의 평소 하는 짓을 생각하면, 아마 지금쯤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법국인들 사이에서 노닐고 있을 터.
‘지금껏 대국 화첩만 보고서 따라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거 서양 그림들이야말로 진국이었다, 이 말입니다 어르신. 거기에 양주 맛이 또 우리네 술과는 하등 같지 않으니, 사내 남아로서 어떻게 맛보지 않고 넘어간다는 말입니까?’
해서 그림 구경 술 구경하러 틈날 때마다 선혜청 창고 옆 법국인 동네를 쏘다니던 장승업이었다. 아침에 얼굴도장만 찍어놓고 사라진 지 꽤 되었으니, 아마 오경석에게 붙잡힐 무렵이면 이미 어디 대청마루에 대(大) 자 모양으로 뻗어있거나, 거나하게 취해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뱉어낼 터.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나중에 오경석에게 붙잡혀 한 소리 듣게 하는 것보다야 지금 미리 혼쭐이 나게 하는 것이 피차간에 감정이 덜 상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근자에는 법국인들과 종종 교유한다 하였으니, 만약 갔다면 그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맙네. 가서 꼭 붙잡아오도록 할 테니 자네도 준비해두도록 하게나.”
그런데 떠나간 지 한 시진이 다 될 무렵에야 돌아온 오경석은, 노기가 탱천한 표정으로 짤막하게 ‘내일부터 시작해 장차 도평은 싣지 않도록 할 것이니 그리 알게’ 하고서는 곧바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시 해 떨어질 무렵이 되니 여기저기 부르트고 멍든 장승업이 다리 절며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아,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겐가.”
하며 물으니 마루에 털썩 걸터앉은 장승업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가 울다가 하며 하소연하였다.
“어르신! 내 억울해서 못 살겠습니다. 내가 무슨 빌어먹고 다니는 비렁뱅이도 아니고, 어엿한 재주 가지고서 벌어먹는 사람인데, 해 달란 만큼 해 주었더니 이제는 마음대로 부려먹으려 하지를 않나, 싫다고 하니 당장 그만두라면서 왈짜들 데려다 이렇게 반죽음을 만들어놓았다는 말입니다!”
거기까지 들으니 이 장가 녀석을 하루이틀 본 것이 아니었던 김병건은 대강 어떻게 흘러갔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러잖아도 호외 낸다고 할 때마다 저는 못하겠다며 여기저기 도망다니던 장승업이다. 막상 그리는 걸 보면 그렇게 공이 들어가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딴에는 ‘그 그림 그릴 궁리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운운하며 더는 못 그린다며 우겨대기도 하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이미 그린 그림을 돈 한 푼 더 얹어주지 않고서 고치라 하는 게 말이 되느냐 따졌을 것이며, 아랫사람에게 관대하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는 오경석은 하라면 해야지 환쟁이 주제에 말이 많다고 무어라 꾸중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 번 열 뻗치면 말을 가리지 않는 장승업이 먼저 역관이나 환쟁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냐며 뻗대었든, 아니면 요새 장승업이 애지중지하면서 틈날 때마다 감상하는 법국산 화첩을 오경석이 뺏어다 길바닥에 내팽개쳤든, 둘 중 하나가 먼저 선을 넘었을 것이다. 어쩌면 둘 다 일어난 일일 수도 있고.
“어르신, 우리가 집안에 가산이 없고 벼슬한 사람이 없으니 이러고 있지, 체통이 없는 건 아니잖습니까. 아무리 뒤에 운현궁 업고 있는 오 녹사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같은 양인을 이렇게 멋대로 다루는 법도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 사람아, 말이 지나치네그려. 물론 나라고 요 근래 돌아가는 일이 모두 마음에 맞겠냐만은...”
“지나치긴 뭘 지나칩니까, 오 녹사 어르신이야말로 정도를 한참 지나친 겁니다.”
하도 얻어맞아 술도 깬 것인지, 조금은 정신이 멀쩡해진 듯한 장승업이 법국인 사는 골목을 드나들면서 언뜻 들은 것 같기도 하던 풍월을 읊었다.
“솔직히 요 근래 얹어주는 것 없이 만날 신보 더 찍어내라 하고 있으니, 어르신도 어르신이지만 아래에 택자(擇字)하는 공인들이나 글 쓰는 서리들도 할 말은 많을 겁니다.
거 시전의 장사치들도 저들끼리 뭉쳐 도중(都中)이니 하는 것을 만들던데 우리라고 못 만들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네 하나둘 정도야 군말 없이 쫓아낼 수 있겠지만 신보 만드는 이들 모두가 작심하고서 한데 모이면 천하의 운현궁이라 한들 어찌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우선은 달래고 볼 생각이던 김병건도 조금씩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가 교서관 정자 벼슬을 버리고서 일전의 참의대부 추거에 나섰던 이유가 무엇인가. 성인의 학문도 얼추 들어 알고 있고, 글재주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의 명문을 자칭할 수는 없을지언정 시사(詩社)니 서원이니 차려놓고서 거들먹대는 한량들보다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듣기로 서양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뭉치면 어지간한 거족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그것을 하는데 재주가 필요하다면 마땅히 처우하는 도리도 솜씨에 맞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새는 하찮은 재주라고 할지라도 잘 배워두기만 하면 굶어죽을 걱정은 떼어놓을 수 있는 세상이지 않던가. 정말 집도 절도 없이 빌어먹고 사는 무리들은 총질하고 무두질하는 방법이라도 배워서 북변으로 향하고, 조금 약삭빠른 사람들은 서양 문물을 공부해 뭔가 기똥찬 장사를 벌여 큰돈을 그러모으기도 했다. 심지어 연해주 해삼위 고을로 말할 것 같으면 아라사인들 사이에서 대접받고 사는 거상들도 있다 하였다.
돈을 내고서라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또 가르치려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라, 요새는 현판하기만 서원이라 하고서 그런 잡기(雜技)를 다루는 곳들도 큼직한 고을이라면 하나씩은 있을법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매하신 선비님네들은 상것 취급하며 함부로 대하니 불만이 없다면 그야말로 시뻘건 거짓말이리라.
마침 짧은 겨울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라, 내일자 신보도 거의 다 찍어내고서 하나둘씩 일꾼들이 퇴청할 차비를 할 때였다. 울분에 찬 장승업의 마음속 말이 타래 풀려 나올 때마다 김병건 주변에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어느새 ‘옳소’ 하는 추임새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시전 상인들이야 저들이 국역(國役)을 도맡으니 도중을 꾸려서 행세하고 다닌다지만, 사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또한 나라의 이로운 소식을 만민에게 알리고 있으니 이야말로 보국(報國)하는 큰 공 아닙니까. 우리라고 못할 게 뭐 있습니까?”
들어오는 광고 식자하는 박 모라는 젊은 택자공이 앞장서서 거들었다.
“우리가 도성 일대에 돌리는 신보만 해도 족히 수천 부는 될 것이니, 아무리 기세등등한 운현궁이라 해도 쉽게 건드릴 수 없을 게요!”
“아직 내일 동 틀 때까지는 꽤 여유가 있으니, 도평 들어갈 빈자리에 우리네 사연을 적어서 새로 찍어냅시다!”
정말 동조한 사람도, 그저 그 자리에 있다가 어물쩡 끼게 된 사람도 있었지만, 여하간 그렇게 해서 만민공산당의 첫 번째 ‘공산당스러운’ 행보는 정작 그 영수 정도 되는 대원군이 듣지도, 알지도 못한 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진서 아는 사람은 적지 않다지만 막상 보는 이의 심금 울릴 만한 명문을 하룻밤사이 써낼 자신 있는 자는 없었으므로, 그저 절절한 마음이나 전하자는 생각에 순전히 언문 활자로만 적어내었고,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여백에 적는 것이었으니 그저 “신보도중(新報都中)”의 창설과 그 취지, 그리고 처우에 대한 요구사항 정도만 쓸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다음날 『익정신보』를 받아본 도성과 성저십리, 멀리는 제물포 사람들까지 크게 뒤흔들게 되었다. 요 근래 몰려드는 공인들 중 밥벌이가 어렵다고 느끼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을 서럽게 여기는 이는 차고 넘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창 내년 신작로 공사를 구상 중이던 광통이도국, 슬슬 삯을 줄인다는 얘기 나돌던 인천목(仁川木) 공장, 하다못해 반촌(泮村)의 백정들까지도 저들끼리 도중을 만들겠다며 나서게 되었으니, 운현궁은 물론이요 도성의 명문가들도 뒷목 잡을 일이 이렇게 터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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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제는 1874년 겨울 앓아누워 해를 넘기자마자 (음력으로는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공식적인 병명은 천연두였지만, 세간의 낭설로는 성병이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므로, 그 사촌동생인 광서제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앞서 작가의 말에서 설명한 것처럼 광서제는 서태후의 여동생 완전의 아들이었고 그 아버지 역시 서태후를 지지하는 순친왕이었습니다. 비록 작중 조선이 애매하게 완화된 사대관계를 따르고 있다 해도, 천자의 사망이라는 전통적 천하질서에서의 대사건 속에서 황족에 대해 가볍게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도중이란 엄밀히 말하면 협동조합 내지는 길드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국가로부터 특권과 왕실 물품 납품이라는 의무를 부여받은 시전 상인들은 자신들이 일반적인 상인과는 다르다는 확연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도중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주요 업무는 상가 운영과 재정 관리 등이었습니다.
한편 대동법 시행 이후로 공물 수납 과정에서 각사의 실무자들이 받았던 이익이 민간 영역으로 이전되면서, 이들이 맡던 궁궐 수리 및 도배의 국역도 시전으로 넘어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역시 도중에서 조율하는 업무 중 하나였지요.
개항 이전부터 도성에 서양 물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시전의 경영은 위협받기 시작합니다. 결국 왕실 행사에 납품하는 정도로 근근이 연명하는 정도가 되었지만, 그나마 1870~80년대 재정난으로 인해 계속 대금 지급이 밀리면서 줄줄이 영업의 중단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청과 일본 상인들의 진출은 이들의 명줄을 끊는 결정타로 작용했지요.
한편 원 역사에서도 이미 1890년대 말이면 노동운동이라 할 만한 대중동원의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개항장 부두 노동자들, 광부들 등을 중심으로 그런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노조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노동운동이라기보다는 조선 후기 민란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집단항의·폭력시위에 가까웠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조직적 움직임은 노동여건 보장보다는 사회적 정의를 목적으로 내세웠으며, 경제적 유인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단순히 ‘전근대성’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