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철마는 누구를 위해 달리는가 (2)
장지동이 비록 서태후의 총애를 받는다고는 하나 관직을 내려놓고 일개 선비의 자격으로 여기까지 왔다 하니, 궁내의 뭇 신료들은 자못 당혹스럽게 여겼다. 아무리 근자에는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그래도 겉으로나마 상국으로 섬기던 것이 아직 모두의 기억에 남아있던 차, 대우를 해주기도 무엇하고 해주지 않기도 무엇하여, 고심하던 끝에 우선은 다른 산림의 유일(儒逸) 맞이하던 예로 대하기로 하였다.
“바다 건너 이곳 한성까지 오느라 노고가 적잖았을 터인데, 여독을 풀기는커녕 궁 앞에서 목청을 높였으니, 심신이 모두 고될 듯하오.”
북경에서도 소문 무성한 조선왕이 서두를 위로하는 말로 떼니, 옮긴 말을 전해들은 장지동은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그새 풀어진 마음의 끈을 도로 동여매었다.
“하찮은 사람을 위해 그처럼 마음을 써 주시니, 이 장 모는 그저 감개가 무량할 따름입니다. 허나 나라 안의 일을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흉 듣기를 감수하고 찾아온 길이니, 마무리를 짓기 전까지는 스스로 편히 여길 수 없으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애초에 서태후의 완고한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청류의 우두머리 격인 이홍조(李鴻藻)가 여전히 사람들을 모아 틈 날 때마다 태후를 설득하고 있다지만, 동삼성에서 조선의 편의만 보아준 셈이 되었다는 비난을 어떻게든 피해야 했던 서태후는 요지부동이었다.
게다가 이런 월척을 내버려둘 수 없던 이홍장이 모든 연줄을 동원하여 서태후의 ‘용단’을 찬양하였으므로, 처음에는 같은 만인의 눈치를 보아 억지로 철도 공동부설을 승인하려던 서태후의 마음도 돌아서기 시작했다.
동북을 호시탐탐 노리는 아라사라지만, 저들 말로 서백리(시베리아)라 한다는 천조의 북쪽 땅까지는 피득혁(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암만 서둘러도 몇 달은 달려야 하는 판국이다. 반면 철도가 모두 놓이면 청국은 일성호령으로 수천의 병력을 직례에서 동삼성 어디로든 보낼 수 있게 될 테니, 더 이상 동쪽의 일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다.
이상이 이홍장이 살살 서태후의 귓가에 불어넣는 이야기의 요체였다. 그가 판에 뛰어들면서 단순히 공동으로 철도와 전신을 깔자는 정도였던 조선의 제의는 어느새 직례에서 심양까지, 조금 더 욕심을 내어서 훈춘, 여순, 그리고 조선의 의주까지 철도를 놓는 일대 대사업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 나아가 요 근래 과거도 제대로 치지 않고 멋대로 나라의 관직을 탐내고 있는 무리 대부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앉아 있는가. 철도를 놓는다면 필히 그 자금과 기술은 모두 양이로부터 들여와야 할 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양이의 힘을 빌려 입관 이래 여태껏 한인 관료들이 발붙일 수 없던 동북 땅까지 저의 영향권 안에 넣으려는 탐욕 아니겠는가. 이것이 이홍조와 장지동, 그리고 그 외 청류파 동지들의 생각이요 걱정이었다.
“동북의 세 성은 우리 대청의 종실이 발흥한 고장입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천조를 도와 많은 공훈을 이루셨기에, 특별히 세 성을 전하의 백성에게 열어, 그 이익을 나누고자 한 것입니다.”
“그대의 말이 맞소. 그리하여 같은 뜻으로 철도와 전신을 깔아, 두 나라 사이를 더욱 긴밀하게 하자 하였는데, 이제 와서 이를 물려야 한다 하니 과인으로서는 쉽사리 그대의 취지를 헤아릴 수 없구려.”
귀남 딴에는 여러 젊은이들을 불러다 놓고 (주로 귀남 본인이 아니라 신료들의) 머리 쥐어짜서 나온 것을 명안이라 여겨 고스란히 청국 측에 보내었던 것인데, 받아본 서태후는 흔쾌히 승낙하였다지만 정작 엉뚱한 이들이 와서 제안을 철회해 달라 청하니 당혹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밝으신 국왕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전신과 철도라는 것은 옛 파발이나 관도(官道)에 비할 수 없이 빨라 마치 번개가 오가는 듯하므로 참으로 천하의 이로운 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가볍게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의생(醫生)이 사람을 다룸에 있어, 먼저 진맥을 하고 가벼운 약재로서 그 혈기의 음양을 고르게 할 방도를 찾아야지, 급한 마음에 대황(大黃)·파두(巴豆)와 같이 독한 약재를 먼저 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아조의 상해에서도 간사한 양이들이 철도를 놓는다는 구실로 우리 백성으로부터 땅을 앗아가려 하다 겨우 때맞추어 막아낸 일이 있었습니다. 동삼성과 같은 곳에 철도를 놓는다면 아국과 귀국의 장인이 양국의 재보를 밑천삼아 스스로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저들의 기세는 사납고 우리의 기세는 약하니 자칫 고황(膏肓)에 자청하여 화란의 씨앗을 심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아국이 어찌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이미 구미 각국에 우리 두 나라가 장차 철도의 대업을 일으킬 것을 알려 이에 거들고자 하는 상고와 장인을 구하고 있거늘, 갑자기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소이다.”
내년 봄까지는 이번 사업에서 누구의 손을 잡을지를 결정하는 것이 북양대신 이홍장과 총리대신 이유원이 정한 목표였다. 날씨가 요 근래 선선하다 하나 아직 절기는 겨울 문턱에도 닿지 아니하였으므로 결코 사안이 급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나라들 앞에서의 체면이라는 것이 있으므로 함부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르신 바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 또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양이에 맞설 힘을 기르고자 한다면 철도는 부득불 이루어야 하는 사업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지금 잠시 서양 오랑캐와 서먹해질 것을 각오하고서 물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실수는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하였으니 (過則勿憚改), 다시금 표문(表文)을 올려, 당장 동삼성에 철도를 놓을 것이 아니라 차라리 수십 년의 큰 계획으로써 두 나라의 서생과 장인들이 그 제도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건언(建言)하심이 어떨는지요?”
비록 한쪽은 조선말이요 다른 쪽은 중국말이라 듣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눈앞의 젊은이(물론 몸으로만 따지만 귀남이 훨씬 더 젊었지만)의 절박한 마음만은 얼추 전해졌다. 그의 원래 세상으로 비유하면 한국 안의 일을 어디 멀리 미국이나 러시아 대통령 앞에 가서 하소연하는 격 아닌가. 저의 나라 안에서 차마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 부디 도와달라 청하는 것이니 나라의 망신이요,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벼슬까지 내려놓고 온 것이리라 생각하니 그 각오도 알 만 하였다.
하지만 장지동이라는 이 젊은이도 인정하였듯, 그리고 미래의 일을 대충이나마 아는 귀남도 부정할 수 없듯 마땅히 놓아야 할 철도를 당장 놓지 않겠다고 해 보아야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에 불과하다. 더구나 귀남 본인이 먼저 철도를 놓자 한 것을 스스로 물리기도 어려운 일 아닌가. (그 어려운 일을 청하는 것이었으므로 장지동도 여기까지 직접 온 것이겠지만)
“내 그대의 걱정하는 바는 잘 알겠소. 우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융통할 방안을 고심해 볼 터인즉 우선은 물러가 쉬도록 하시오.”
아직 해를 넘기기는커녕 첫눈도 내리지 않았건만 천진에 유럽 각국 철도회사의 중진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조청 양국이 만주 철도 사업을 발표하자마자 전보로, 그것도 특급으로 유럽 각지에 연통이 돌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철도라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 여기던 대부분의 만주인 고관들로서는 경악스러울 법도 했다.
더구나 몰려든 자들이 가만히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요, 통상서에 찾아와 담당자를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겠다, 혹시 북경까지 올라가 태후 전하를 직접 뵈어도 되겠느냐 요란을 떨었기에, 어지간하면 관심을 독식하고 싶었던 이홍장으로서도 배탈을 우려하여 북경과 한성에 기별을 넣어야 할 지경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저들이 이렇게 자세를 낮출 수도 있었다니요.”
천진으로 건너오기 전 친히 어명을 받들고 온 이유원의 단상이었다.
“그야 저들은 조정의 관리도, 군관도 아니요 그저 생의(生意, 사업)로 모인 상인들이니 그럴 법도 하지요.”
대꾸하는 것은 북양대신 이홍장이었다. 예전과 같았으면 번국의 품계는 천조의 품계에 비해 감하여 셈하기 마련이므로 이홍장 역시 편하게 그를 대했겠지만, 지금은 어쨌든 조선도 자주지국이요, 더구나 (안타깝게도) 청국과 달리 외세 사이에서도 그새 나름대로 명망을 얻은 조선이었으므로 우선은 겉으로나마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귀국 국왕 전하께서 교섭에 대해 하명하시면서 또 동일한 뜻을 담아 표문을 상주하셨다 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앞서 일러주신 것과 다름이 없겠지요?”
“그야 이 사람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대강을 얼추 전해들은 바 큰 차이가 없다 하였습니다.”
“허허, 그대로 되면 이번 철도의 일은 어쩌면 이곳 천진 항구가 양인들에게 열린 이래로 이곳에서 논의된 뭇 국사들 중 가장 큰 것으로 남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지금도 저 양인들이 저처럼 스스로 굽히고 있는데, 장차 황명이 내려 이 대업의 규획이 확연히 정해지게 되면 그 조심스럽게 공경하는 마음이 더해지지 않겠습니까.”
비록 사람됨이 변변치 않다는 – 당사자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박한 – 평을 듣는 이유원이었지만, 총리대신 자리에 앉은 지 벌써 햇수로만 네 해가 다 되어가는 판이었기에 양이의 생리가 어떠한지는 얼추 알게 되었다. 작은 이익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만, 오히려 그 이익이 너무나 크게 되면 눈치를 보기 마련.
아직 아문의 젊은 신료들의 설명만으로는 그 철도가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완전히 체득하지는 못한 이유원이었지만, 적어도 이번 일에 대국과 함께하게 된 것은 그런 면에서 참 다행이라 여겼다.
“두 대신을 뵙습니다. 지금 영·법·독 삼국의 철도공사(철도회사) 독판(督辦)들이 찾아와 급히 접견을 청하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이홍장이 막료(幕僚)로 두고 있는 젊은이 마건충(馬建忠)이 공손히 들어와 말했다.
“세 나라 사람들이 함께 왔다는 말인가?”
여러 나라로 갈려 서로 다투는 양이들이 한데 뭉치는 것은 오직 다른 한 나라를 함께 공략하고자 할 때뿐이라 알던 이홍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닙니다. 가장 먼저 영국 자씨양행(자르딘-마테손)에서 뵙기를 청하여 그 사연을 듣고 있는데, 그러기 무섭게 뒤이어 법국 노씨(로스차일드)가 직접 찾아왔고, 두 나라 사람들이 티각태각 하는 사이 덕의지(독일) 두 공사의 독판이 뒤따라 왔습니다.”
“음, 우선 들라 하게. 이 대인, 자리를 옮기시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준비해둔 접견실로 몸을 옮겼다. 널따란 마당을 지나면서, 성큼성큼 큰걸음하는 이홍장의 보폭에 맞추어 잰걸음을 하던 이유원이 물었다.
“허, 무슨 일로 저렇게들 급히 찾아왔는지, 혹시 북양대신께서는 짐작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저들이 경조(수도)에 공사를 두고 있으니, 아마 그쪽에서 급보를 보내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들이 보내올 급보라면 이번 철도의 일밖에 없으니, 아무래도 태후께서 황상을 도와 귀국이 올린 안을 윤허케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대사라면 금궁(禁宮)에서 외국 공사관으로 새어나가기 전에 마땅히 북양대신 이홍장이 먼저 알아야 하겠지만, 이 나라가 원칙대로 돌아가지 않게 된 지가 어언 수십 년이니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 정도란 말입니까? 이 사람이 보기에는 양인들이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여전히 의심되는 면이 없잖습니다만.”
“저 역시 마찬가지로 조금 의아하기는 합니다만, 피아의 완급(緩急)이 이로써 뒤집혔으니 우선은 가만히 관망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곧 접견실에 당도하여 보니, 그 관망하는 재미가 아닌 게 아니라 짭짜름하였다.
“각하, 지금 페킹(북경)에서 사업계획 변경안이 승인되었다는 급보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정말 이대로 진행되는 것인지요?”
인사도 생략하고 세 나라 사람들이 거의 한시에 말을 꺼냈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들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업의 신뢰성 증진을 위해 약조하는 범위를 크게 넓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면 그것이 옳소이다.”
“범위를 넓힌다니요! 이건 범위를 넓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사업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이미 자신들이 상하이에 일구어놓은 기반이 있으므로 넉넉하게 사업을 타낼 수 있으리라 낙관하던 영국 쪽 대표가 먼저 언성을 높였다. 당국의 꾸준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상해에 철도를 놓기 위해 막 철재를 들여오려던 터였기에, 이제야 막 사업에 뛰어든 프랑스나 독일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위에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중국과 조선에 제철소 각 1개소 건설, 양국에 최소 1개교씩 기술학교 설립, 각종 설비 국산화 지원... 이 정도 조건이면 차라리 나라 하나를 새로 짓는 편이 더 저렴할 지경입니다!”
“대신 고작 동삼성에만 철도를 놓는 데서 그치지 않잖소. 우리 중국과 이 총리의 나라 조선, 이렇게 두 나라의 대업이니만큼 이 정도의 투자는 받아내겠다는 것이 우리 측 입장이오. 아마 이 부분도 전해 들으셨겠지만.”
이것이 장지동이 물러간 뒤 귀남과 젊은 경연관들이 내놓은 방법이었다. 어차피 자금으로 보나 기술로 보나 서양 각국과의 교섭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이었고, 이대로라면 장지동이 지적한 것처럼 아직껏 열강의 손길 닿는 곳에서 벗어나 있던 만주 땅이 단번에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
반면 청과 조선(정확히는 청에게만)에게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거대한 땅덩어리와 시간뿐이었다.
“그... 제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만추리아(만주)에만 짓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전역, 그리고 조선의 주요 간선까지 손을 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습니까?”
불경기로 인해 놀고 있는 공장을 도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겨 직접 찾아온 젊은 알폰스 로스차일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절호의 기회가 아니라, 이 정도면 거의 회사의 본체를 중국으로 옮겨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들으셨소. 듣기로 서양 나라들도 다 국토를 종횡무진 누비는 철로를 이미 두었거나, 근시일내로 완비할 것이라 들었는데, 우리라고 거기에 뒤쳐질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하, 하지만, 그 정도 규모의 공사는 하루아침에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나치게 불합리한 수정안이니만큼 협상하여 재조정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듣기로 전조(명)에서 고쳐 세운 장성(만리장성)은 저 달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라 하던데, 굳이 그 옛날 진시황까지 끌어올라가지 않더라도 홍무(洪武, 명 태조) 연간에 짓기 시작한 것을 만력(萬曆, 명 신종) 대에 들어서나 마무리하였고, 그러고도 다 끝나지 않았소이다. 철도라는 것도 한 번 깔면 그 쇠가 어디 가지는 않을 텐데,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대계를 세워야 하지 않겠소이까?”
새로 손을 본 계획은 – 당연히 구상 단계에 불과하였지만 – 지도만 보아도 양광부터 경상도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그저 만주 일대만 생각하고 모여든 유럽 측 대표들이 적당한 축척의 지도를 구하지 못해 급히 세계전도를 찾아야 했을 정도였다. 당연히 하루아침에 하는 것도 아니고 넉넉히 50년간 추진할 계획이라 하니, 말로만 듣던 중국의 광대함에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러시아통(通)이 아니고서야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공상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중원이 넓다 하되 하늘 아래 땅이니 짓고 또 깔다 보면 못 이룰 리 없건만, 아직 자신들이 일구어놓은 과학의 힘이 얼마나 지구의 표면을 헤집어놓을 수 있을지 일반적인 유럽인들은 쉽게 짐작하지 못했다.
전 세계에 철도망 깔린 시절을 눈으로 보고 온 귀남 – 노인정 테레비에서 종종 틀어주던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행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던가 – 은 물론 이를 가능하다고 여겼고, 서태후는 천하의 중심으로서 마땅히 이 정도의 기개는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겼기에 즉시 승인했다지만.
“자, 이왕 이렇게 모인 것 미리 말씀이나 들어보도록 합시다. 아무리 규모가 커졌다지만 결국 철도를 놓는 일인 것은 다르지 않소. 이 일에 함께들 하시겠소이까?”
상대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마음에 여유를 되찾은 이유원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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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종종 언급되었던 청류파는 태평천국과 염군의 난을 진압하면서 부상한 한인 관료들 위주로 꾸려진 양무파와 대립하던, 청말 정치세력 중 하나입니다. 야심차게 시작한 양무운동의 성과가 의외로 미약한 점을 들어, 양무파가 이미 서양 세력과 결탁한 채 부패하여 탁류(濁流)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청류파를 자칭하였지요. 이들은 정식으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관료들로, 외치보다는 내치를, 급진적 근대화보다는 최대한 보수적·점진적인 개혁을, 그리고 서구 열강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했습니다.
작중에서는 원 역사에서 청류파를 뭉치게 한 일본의 대만 침공과 2차 사이공조약 대신 조선의 부상과 존재감 상승 – 그리고 그에 따른 천조 청국의 위상 하락 – 이 청류파 결집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청류파는 크게 전기(북파)와 후기(남파)로 나뉩니다. 북파는 주로 강남 한인들인 양무파와 달리 화북 일대의 한인 사대부 위주로 구성되었습니다만, 청불전쟁의 사실상 패전이라는 충격 이후 뭉친 후기 청류파와 달리 양무파에 반대한다는 것 외에는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파벌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홍조, 장지동, 장패륜 등 몇몇 굵직한 인물이 있었을 뿐이지요.
장지동은 청류파로도, 양무파로도 볼 수 있는 애매한, 그러나 청말의 명신을 꼽는다면 이홍장과 동급이라 할 수 있을 거물입니다. 이홍장의 주화론을 비난하고 열강에 강경하게 맞설 것을 주문했지만, 그와 동시에 점진적 근대화를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근대적 경제 및 군사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특히 충분한 영향력과 권위를 얻은 1890년대에는 차관을 들여와 철도와 제철소를 부설하고, 호북·호남 일대에서 수출산업을 육성하는 등 단순히 수구파로 볼 수 없는 행보를 보입니다. 무술변법(1898) 당시에도 변법파의 자강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중체서용론에 입각한 온건개화를 강조했습니다.
“달에서도 만리장성이 보인다”라는 유명한 ‘썰’은 의외로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이미 18세기에 만리장성의 규모를 과장하던 몇몇 유럽인들이 그런 주장을 펼쳤고, 19세기에는 거의 상식 수준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특히 19세기 말, 화성의 대협곡이 실은 ‘화성인이 지은 운하’라는 주장이 대중적으로 퍼졌던 시절에는 당연히 만리장성도 달에서 보일 것이라고 기정사실로 여기게 되었지요. 이러한 시각은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국 측 대표로 나온 자르딘-마테슨 사는 지금도 자르딘마테슨 홀딩스라는 이름으로 홍콩에 본부를 두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2013년 기준 세계 200대 기업에도 들었다고 하네요. 조세회피 목적으로 본사는 버뮤다에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