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반역의 즐거움 (3)
“조선왕 그자가 어찌 이리할 수 있는가! 선조의 땅을 경영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음에 감읍하지는 못할망정 대업이 배태된 유서 깊은 강역을 더럽히다니!”
카랑카랑한 노성(怒聲)이 자금성 연희당(燕禧堂)에 울렸다. 서태후가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라면 상대를 겁박하기 위함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지금처럼 사정이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졌을 때인데, 그 중 후자는 좀처럼 없는 일인만큼 한 번 들이닥치면 필히 어딘가에 그 노기를 들이붓기 마련이었다.
그 성정을 익히 아는 궁인들은 눈치껏 고개를 숙이고 은근슬쩍 바닥의 포석을 감상하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관측하였다. 하지만 서태후로서도 이렇게 분통을 터뜨리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당장 다른 만인 고관들을 볼 낯이 없었으므로, 없는 분기라도 만들어내어야 할 판이었다.
“태후 전하,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났으니 어찌 되돌리겠습니까. 마땅히 방도를 마련하여 그 우환이 고질이 되기 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순친왕 이후완(醇親王 奕譞)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말을 끊는 것은 담담하되 그 안에는 ‘이제 어찌할 것이냐’ 하는 의문이 들어있었다. 애초에 지금껏 서태후 앞에서 항상 고개 숙이고 있던 그가 연희당까지 찾아온 것도 평소라면 있기 어려운 일. 이후완 개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다른 만인들에게 등 떠밀려 여기까지 온 것이리라.
아직 공식적으로 한인들에 대해서도 온전히 풀지 아니한 봉금령을 조선인들에 한하여 풀어준다 하였을 때 반발하였던 고관대작들이었으므로, 서태후의 입장에서도 억울하다 할 수 있었다. 그때 저들의 말을 들어주어, 조선인들에게 변발할 것을 요구했더니 이렇게 된 것 아닌가.
“듣기로 넘어온 이들은 태반이 그저 조선 땅에서 잡다한 이득을 취하고자 넘어온 잡인들로, 아직 저들이 강남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이 뿌리를 내리려는 시늉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때가 아직 늦지 않았으니, 조선왕에게 칙명을 내려 양인을 함부로 도강케 하면 길림 땅에서도 저들을 쫓아내겠다 엄포하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조선왕도 자신이 방자하였음을 깨닫고 스스로 삼가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공(功)은 나누어 가지려 하지만 과(過)는 한 사람에게만 모이게끔 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 심성이라, 자금성 안의 동정을 마치 흐르는 바람처럼 읽을 수 있는 서태후로서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웠다.
“나 또한 그리 들었다. 허나 월경하는 양인의 태반이 잡다한 무리라지만 또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지 않은가.”
한성의 흠차대신이 보고하기로, 의주에서 강을 넘는 양인은 대부분 근 몇 년 사이 미리견에서 넘어온 자들로, 광산의 이익을 찾아 먼 바다를 건너왔다 하였다. 요 근래 내란이 끝나자마자 나라의 살림이 군색해졌다는 미리견이니, 이들은 대개 뒷배 없는 모리배에 불과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외 가뭄에 콩 나듯, 무늬만 교인인 자들을 진짜 교인으로 만들고자 넘어온 선교사도 없지 않고, 모험심과 호기심에 가득 차 넘어오는 영·법국인도 있다 하였다. 천진에서의 교안이 아직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고, 당장 이 문제의 발단이 된 월남의 사정도 강남으로의 판로를 찾아 올라온 법국 상인과의 다툼에서 비롯한 것이었으니, 함부로 단속하려다가는 자칫 조종의 산실이 고스란히 승냥이 주둥아리 안으로 들어가는 꼴이 될 터임을 물정 어두운 서태후조차 쉬이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또 천도교라는 무리가 함께 넘어왔는데, 이들은 대개 조선인으로 그들 말로는 동학이라고도 한다 하였습니다. 그 힘쓰는 일을 보면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태우는 것이라 하고, 하필 세를 키운 것도 장발적(태평천국)이 쇠한 뒤의 일이라 하니 혹 사교의 말예(末裔)가 해동으로 넘어간 것은 아닌가 두려울 따름입니다.”
아라사가 한 번 영토를 떼어간 것을 제외하면, 선대 황제 이래 지금껏 병란 한 번 없이 온전하게 남은 유일한 땅이 바로 동삼성(만주)이다. 그런 땅에 양이나 사교(일지도 모르는 자들)가 들어옴은 결코 상서로운 일이 아니었다.
“태후 전하의 공순하고도 현량한 덕이야말로 우리 대청이 의지하는 바입니다. 신묘한 계책을 베풀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음껏 헤집고 후벼 판 뒤에 내놓는 위안의 말이지만, 그 뒤에는 ‘네가 벌인 일이니 네가 책임을 져라’ 하는 원망이 깔려 있었다.
아직 동태후도, 공친왕도 멀쩡히 숨을 붙이고 있고, 자신이 배 아파 낳은 – 그러나 기실 별 정은 없는 – 아들 자이슌(載淳)은 자신보다도 외려 동태후를 더 의지하는 듯하였다. 서태후가 쌓아올린 권력의 탑은 아직 속이 완전히 다져지지 않았던지라,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하니 그 안의 위태로움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금상의 생모라지만, 북경의 모든 만인 고관들이 합심하여 다른 이를 높이고자 하면, 아직까지는 쉬이 이겨내기 어려운 상황.
그때, 총애하는 환관 장공희가 들어와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태후 전하, 천진에서 올라온 흠차대신 모창희의 글입니다. 함께 그 사정을 전하기로, 조선왕이 이번 일로 천조가 크게 놀랄까 두려워하여, 번병으로서 근심을 없애고 천하 모두의 이로움이 될 일을 새로이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제는 슬슬 ‘조선’의 앞글자만 나와도 두통이 올 참이었던 서태후였지만, 왠지 이번은 무언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왔다. 손짓하여 받아보니 과연 그럴듯한 얘기가 들어 있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그 안에 또 어떤 가시가 있어 훗날 목에 걸릴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당장의 궁색함을 면해야 하는 처지에서 그런 것을 가릴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때이른 장마는 하늘에 먹구름 수놓고, 그 솜씨 허술해 어디에 구멍이 난 것인지 거센 장대비 쏟아져 부용지 수면을 쉴 새 없이 때렸다. 잠시 번뜩하며 들보에 섬광이 비추더니, 어김없이 천둥이 뒤따랐다.
“비록 중전은 괜찮다 하지만, 그 심정이 어찌 진실로 그러하겠소. 비록 심양 땅이 만리타향까지는 아니라 하나, 물 다르고 사람 다를진대 고역이 아니라면 그야말로 거짓일 터.”
민승호에게 처분을 내린 뒤 썩 뒷맛이 깔끔하지 않다 여기던 귀남이, 명을 받고 대령한 대원군에게 말을 꺼냈다
“물론 민승호 그 자는 일찍이 신미년(1871) 겨울의 죄업도 다 갚지 못했는데 또 파란을 일으키려 모의하였으므로 마땅히 벌하여야 하겠지만, 또 막상 떠나보내니 화목함을 갖추는 도에서 어긋난 듯해 마음 한편이 평안하지 않소이다.”
“실로 어지신 마음이니, 누대에 걸쳐 쌓아온 조종의 은덕에 참으로 보탬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자 하여 불렀소. 민승호 그 자가 고변하려 한 것. 무관을 모아 무슨 회동을 하였다는 것은 실지로 있던 일이오?”
“어찌 거짓을 고하리까. 좌우를 물려주시면 그 의론한 바를 터럭 하나 숨기지 않고 모두 말씀 올리겠나이다.”
그 말대로 모두 물렸고, 대원군은 이어서 모두 털어놓았다.
“전하께서 다툼을 싫어하시고 화합을 기쁘게 여기심을 미신(微臣)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중원의 나라를 대국으로 일컫고 그 중화를 얻고 잃음과 무관하게 겉으로라도 사대의 예를 갖추는 까닭은, 그 물산과 군병이 천하의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간은 서양 오랑캐들이 잠시 이를 어지럽혔다지만, 천하라면 몰라도 이곳 동쪽 땅에서는 여전히 대국만큼 풍족하고 부강한 자가 없음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성덕을 베푸시어 이제 우리의 문헌과 물산이 모두 중화에 버금가는 자리를 되찾고 있으니, 여기서 더 나아가면 필히 저들은 우리를 시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흥성함이 반드시 저들의 대국 됨을 부정하기 때문이니, 저들의 종실이 실덕하지 않아 여전히 강희(康熙)의 성세와 같을지라도 이러한 이치는 그대로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국과 창칼을 맞댈 때에 대비하고자 미리 무관들을 모아 맞서 이길 수 있는 방도를 획책케 한 것입니다.”
세 해 전 함부로 전쟁 운운하는 이필제에게 목소리 높였던 귀남이었지만, 대원군이 또 전쟁을 얘기하니 심정이 복잡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전부터 제가 소학교 시절 배웠던 어설픈 지식, 주워들은 옛 이야기 속에서도 그 명성 자자했던 흥선대원군이었기에 지금껏 의지하고 또 따랐던 귀남이었다. 그런 사람이 언제고 전쟁을 벌여야 한다 하니, 쉽사리 틀렸다고 반박할 수 없었다.
“지난 번 아라사와의 교섭에서도 그렇고, 이번 대국과의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장차 아조가 성세를 되찾아나갈수록 이를 시기하는 무리도 늘어날 것이니, 미리 그 기세를 꺾어 우리의 강성함을 보이지 않는다면 질시하는 자들이 언제고 우리 뒤를 노리는 비수가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신은 무덕(武德)이 미비하여 이를 막을 계책을 낼 수 없으니, 무관들을 시켜 비책을 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잦아듦 없이 연신 지붕 두드리는 소리. 외풍 들어오지 않아도 절로 일렁이는 호롱불은 주상의 용안에 보령에 맞지 않는 – 그러나 실은 매우 잘 들어맞는 – 주름을 드러내었다.
희미한 옛 기억을 되살리려 힘써 본다. 나라가 토막나고, 금방 끝난다던 전란이 삼 년을 끌다가 끝내 나라의 허리께에서 마무리 짓게 된 까닭이 무엇이었나 고민해 보면, 냉전이니 국제질서니 하는 거창한 말을 모르는 귀남이 보기에는 그저 북괴가 하나의 이유요 나머지는 중공 되놈들 때문이라.
군에서 만난 전방 출신 선임들도 그 무시무시함을 종종 얘기하고, 전쟁 끝난 뒤에도 아직 마음 속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또 증언하였던 것이 바로 ‘되놈들 인해전술’이었다. 그런 나라와 과연 이 조선이 싸워 이길 수 있을까? 만약 싸워 이긴다면, 그 다음에 도로 밀려나 애초에 시작할 때보다도 못한 지경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온 천하가 무도한 지경에 빠져, 싸워야 할 때가 올 때 창칼을 집지 아니함도 위정의 도리는 아닐 것이오. 하지만 대국에 맞서 이길 방도를 생각하느니 차라리 그럴 일 자체가 없도록 할 방도를 고민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금할 수 없구려.”
대원군은 군밤장수인 그보다 훨씬 훌륭하고 총명한 사람이다. 아마 그가 그만큼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궁리한다면 어떻게든 중국과도 싸워 이길 방법을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임금 노릇 십 년이라지만 아직 여기기에는 범부 한 사람에 불과하다 생각하는 귀남은 차마 그런 의문의 답을 던질 수 없었다. 고민할수록 오히려 이번 생에서 얻은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아련하니 마음만 쓰려올 뿐이었다.
“물론 그대의 말마따나 병사를 조련함에 힘써 누구도 우리 백성을 가볍게 해칠 수 없게 함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지금 그대가 말하는 것은 거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한 사안인 듯하오.”
“헤아리신 바가 참으로 지극합니다. 어찌 가볍게 이러한 사안을 논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천하의 대세가 이러하니, 하늘의 운수가 한 번 돌아 치세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오직 서로 다투기만 하여 그침이 없을 것입니다. 하늘이 이미 뒤집히고 있는데 어찌 역천(逆天)이 죄가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귀남이 내키지 않아하는 모습을 본 대원군이, 답변하던 중 고심에 빠졌다. 또 한 차례 우레 지나간 뒤에야 뒷말이 이어졌다.
“전하께서는 성품이 옛 성현과 다름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 늙은이는 천성이 용렬하여, 일찍이 저자의 잡배들과 어울리며 남을 해할 궁리만을 하였습니다. 조정의 고관들이 이제 와 무어라 하든,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니 어찌 발명(변명)하겠습니까.
노자(老子) 말하기를 병(兵)이란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 그 짐을 미리 짊어져야 비로소 전하의 치세에 기린(麒麟)이 뛰어놀게 될 것입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리 하시오.”
기다렸지만 그와 동시에 의외인 답변. 대원군이 잠시 귀를 의심할 즈음이었다.
“경은 그리 하시오. 내 막지 않겠소. 어쩌면 그야말로 아조의 평안을 위하는 하나뿐인 방도일지도 모르니...
하지만, 꼭 병기를 내어야 함이 명명백백하게 되기 전까지는, 싸움의 승패에 사직을 거는 일은 차마 할 수 없겠소. 애초에 우리가 강성해진다 하여 꼭 저들이 우리를 시기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서로 돕고 사는 것이지.”
갈수록 하교하는 말에 위엄은 떨어지고 진솔함은 더해지매, 대원군도 그 절절함을 알 수 있었다.
“그 역천이라는 것. 천명에 거스름을 그리 부른다 들었소. 그런데 지금 천하의 대세가 서로 물고 뜯는 데 있다면, 참으로 천명을 거스르는 길은 그에 맞서 다 함께 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데 있지 않겠소?
물론 세상은 넓고 우리는 작으니, 단번에 그런 꿈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우선 우리 주변부터라도 하나씩 무언가를 해나간다면, 어쩌면 그런 날이 올 지도 모르는 법이외다.”
또 한 차례 울리는 우렛소리 잦아들기를 기다려 응대하는 대원군의 말은, 공치사인 듯하면서도 대견함과 안타까움이 함께 묻어있었다.
“참으로 어질고 훌륭하십니다, 전하.”
대견함이란 귀남 그가 어느새 임금 노릇을 잘 한다 여기는 데서 말미암았을 것이요, 안타까움은 그 임금 노릇이 대원군 본인이 생각하던 철인의 모습과는 다르기에 배어나오는 것이리라. 대원군 본인이야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의 언행에서 부지불식간 그런 기미가 보이는 것을 놓칠 귀남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욱한 신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시고자 하시는 바에 거스르는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되, 그러한 왕업을 도울 재주 또한 미치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경이 무관들을 모아 꾀를 내었듯, 내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할 수 있는 인재를 모아주시오. 부족하게나마 무언가 해 보기 전까지는, 경의 이르는 말이 옳음을 알지언정 차마 행할 수 없구려.”
경연이 졸지에 진지한 공부 모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동안 편안하게 즐기던 경연이 머리 아픈 시간으로 돌아왔지만, 귀남은 누굴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번거롭고 골치 아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골탕 먹일 궁리를 할 때 느끼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민승호가 고변하던 일이 제대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몇몇은 심상찮은 일이 있었음을 눈치껏 짐작하고 있었다. 대원군이 수족을 움직여 경연관의 인선을 바꾸려드는 것을 막아서지 않는 편이 일신에 이로우리라는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대원군도 언젠가 이렇게 임금에게 다가간 젊은이들이 산군(山君, 호랑이)처럼 자라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잠시 했지만, 박규수가 참의원으로 물러난 판에 그나마 임금의 뜻을 받들 수 있는 인재는 얼마 없어, 그의 문하에 있던 자들, 그리고 장동 김문의 옥 무어라 하는 젊은이처럼 출신이 믿음직하지 않은 이들까지 붙여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낸 생각은 대원군이 보기에도 꽤나 그럴듯하여, 어쩌면 임금이 이른 길도 완전히 헛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정확히는, 부디 헛된 것이 아니길 바라는 심정과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단정이 교차한 것이었지만.
동치 13년(1874) 늦여름의 어느 날 서태후가 받아본 조선왕 이형의 글은 그 산물이었다.
“함께 철도와 전신을 동삼성에 깔아, 산출되는 뭇 이로움을 나눌 수 있게 하고, 불온한 자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자니, 이로써 양이들이 건너온 일은 조선왕이 노린 바가 아님을 알 수 있겠다. 직례에서 성경, 그리고 의주까지 철마가 달리게 되면, 그 누가 아조와 조선 사이를 갈라놓을 흉심을 품겠는가?”
물론 철도라는 것은 곡량과 철강, 석탄만 나를 수 있는 게 아니라 병사와 치중도 옮길 수 있고, 전신이란 양쪽을 빠르게 잇는 만큼 잽싸게 속일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면피에 급급한 서태후로서는 이를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느 장맛날 주강(晝講)에서 그런 방안을 처음으로 제의하였던 어윤중과 김옥균은 어떤 쪽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면 이 또한 사람의 한 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한 쉽게 알 수는 없는 일. 그저 저의 뜻에 맞는다 여겨 즉시 면밀히 다루어볼 것을 주장하였던 귀남 역시 깊이 두 사람의 의중을 살필 생각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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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변(1861)으로 집권한 서태후의 정권은 집권 초기만 하더라도 서태후 개인에게는 썩 만족스럽지는 못한 것이었습니다. 23화에서 공친왕이 처음 등장할 때 언급되는 1865년의 공친왕 파면 소동으로 서태후, 동태후, 그리고 공친왕 중 가장 우위에 있는 것이 자신임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 명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체제는 유지되었지요. 일례로 행정권력을 장악한 공친왕의 경우, 1870년대 중반까지도 군기처의 군기대신 대부분을 자신의 파벌로 채울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치제가 들인 황후를 싫어했던 서태후였지만, 동태후의 눈치를 보느라 끝내 내치지 못했지요. 1874년 겨울 서태후의 친자 동치제가 급사한 것 역시 한 가지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친왕의 비호 하에 진행된 양무운동이 해방·새방 논쟁으로 분열되고, 서태후가 양무파에 반대하는 청류파를 끌어들이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이후 1881년 서태후만큼의 정당성은 있었지만 그만큼의 정치적 역량과 의지가 없었던 동태후가 사망하고, 이어 1884년 청불전쟁에서의 졸전의 책임을 지고 공친왕이 실각(갑신역추)하면서 마침내 우리가 익히 아는 서태후의 절대권력 체제가 완비되게 됩니다.
중간에 언급되는 순친왕 이후완은, 동치제 다음으로 제위에 오른 광서제 자이티얀의 친부이자 마지막 황제 푸이의 섭정으로 유명한 자이펑(순친왕 작위를 물려받아, 똑같이 순친왕으로 불립니다.)의 아버지입니다. 서태후의 여동생과 결혼한 사이로, 신유정변에서도 서태후의 편을 들어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썩 정력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고, 동태후의 죽음 이후에는 서태후의 아래로 들어가 조용히 지내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