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79화 (79/320)

26. 반역의 즐거움 (2)

무리를 모아 군문의 일을 사사로이 논함은 곧 역모의 증좌라, 예전처럼 성총(聖寵)을 잃지 않고자 피 흘려 싸우던 시절이었다면 귀에 들어오는 대로 고변하였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머리 굳은 무관이라면 무슨 계를 만든다 운운하면 저도 모르게 몸서리치기 마련.

그러나 두 해 전 군제를 뜯어고치면서 양이의 무교(武校, 사관학교)를 본따 새로 둔 엄익관(嚴翼館)의 사람들로 말할 것 같으면, 반절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욕심으로 머리가 말랑해진 이들이요, 나머지 반절은 물정 모르고 들어온 젊은 선달들이라, 그들이 추앙하는 정운구가 넌지시 건네는 말을 솔깃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뛰어들고 나서 보니 뒷배가 다름아닌 운현궁이었으므로, 그나마 남아있던 저어되는 마음도 눈 녹듯 사라져, 흥분한 몇몇은 마치 내일모레 요하(遼河)에서 말 목을 축일 것처럼 들떠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사람을 모아놓으니 의기는 넘치지만 나머지가 모두 쳐진다는 데 있었다.

“장차 우리 국운이 창성하게 되면, 청국은 비로소 이를 시기하여 더욱 모질게 우리를 핍박할 터이니, 이번 일은 그 서두에 불과하다 하겠네. 그처럼 화란이 닥치기 전에 미리 굳센 병비를 갖추어야만, 저들의 강퍅(强愎)한 심성을 능히 통어할 수 있을 것이야.”

연신 ‘옳소’ 운운하며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던 이들은, 막상 그들을 불러모은 대원군의 말이 끝나자 합죽이가 되었다. 영 어색한 정적을 깨뜨린 것은 실질적으로 좌장이라 할 수 있는 정운구였다.

“자, 이렇게 합하께서 그대들을 불러모아 주셨으니,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가감 없이 내놓도록 하게나. 우리가 장차 청국과 일대 결전을 벌이게 된다면, 그 승산은 어떠할 것인가? 두 나라의 군병을 서로 재어보면, 무엇이 뒤떨어지고 무엇이 빼어나다 하겠는가? 이런 것들을 흉허물없이 털어놓아 합하께서 말씀하신 큰 뜻을 이루는 기틀로 삼고자 함이 우리 계(契)가 모인 까닭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지껏 제대로 싸움이라는 것을 해보지도 않은 이들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물론 엄익관 열린 이래 무경칠서(武經七書)를 강론할 뿐 아니라 진부한 진법(陣法) 대신 통리아문에서 옮긴 서양의 병서를 읽게 했으므로 그 옛날 ‘무식한 무부’ 소리 들으며 해묵은 언해본 경서나 더듬더듬 읽던 시절에 비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 한들 막상 싸울 계획을 짜 보라 하면 막막한 것이 사실이었다.

“무릇 싸움이란 기세를 중히 여기므로, 저들이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우리가 나서서 저들이 우리를 뒤따르게 함이 가당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군정(軍丁)의 수가 청국에 비할 바 아니라 하나, 양총과 화포를 갖춘 정예한 군병으로만 따지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예리한 창으로 가죽을 뚫듯 맹렬히 치달려, 심양을 단번에 취하면 저들이 어찌 먼저 화평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말석에 있던 젊은 무관이 어디서 난 용기인지 한 마디 의견을 내었다. 군무에 있어서는 영 깜깜이인 대원군이었지만, 듣고 보니 은근히 그럴듯하였다. 허나 그나마 식견 있는 무관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네, 엄익관에서 언뜻 보았던 듯한데 이름이 어떻게 되던가?”

“성은 홍(洪)이요 이름은 재희(在羲)라 합니다. 작년에 엄익관을 마치고 도로 무위영에 돌아와, 지금은 참령(소령)으로 있습니다.”

“그래, 홍 참령. 자신의 뜻을 서슴지 않고 진달하였으니 그 의기는 참 훌륭하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미덥지 못한 바 있는 계책이라 하겠네.”

정운구만큼 연줄이 많지는 않았기에 을축년 싸움 이래 그리 영달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새로 세워진 엄익관에서 교수 자리를 얻은 한성근(韓聖根)이 홍재희의 말을 끊었다.

“아무리 팔기(八旗)의 기강이 무너져 태반이 보군이라 하나, 여전히 보군이 대다수인 아군에 비하면 기병이 많을 걸세. 게다가 우리가 저들을 치게 되면 우리는 적지를 빠르게 지나야 하는데, 그 뒤따르는 치중(輜重)은 어찌 옮길 것이며 누구를 부려 지킬 것인가?”

“연병법(징병제)으로 군적에 오른 이는 이제 모두 군병이 될 것이니, 비록 군정의 수효가 적다 하나 한 번 싸움터에 내몰 수 있는 병정의 수는 우리 또한 결코 적지 않습니다. 팔기와 녹영은 이미 흐트러진 지 오래이며, 지난 난리 이후 새로 청국에서 꾸린 군대는 멀리 신강이나 강남 땅에 있을 것입니다. 비록 군정이 많다 하나 땅 또한 넒으니, 저들이 군대를 물려 요하에 이를 즈음이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지쳐 완병(緩兵)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우리 또한 물력이 다할 것인데, 아무리 우리 병정이 날래고 용맹하다 한들 연경에 도달하지도 못한다면, 저들은 우리와 강화하기보다는 차라리 힘을 모아 창칼로써 땅을 되찾으려 할 걸세. 이것은 어찌하겠는가?”

이번에는 무위영에서 참장 벼슬하는 윤웅렬(尹雄烈)이 그의 말을 끊었다. 홍재희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이번에는 오경석이 직접 나섰다.

“어차피 일이 그 지경에 이르면, 우리가 저들을 상국으로 모시지 않음이 명명백백하여 설령 강화한다 하여도 엎지른 물과 같은 형세가 될 것이오. 지든 이기든 결코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 이왕 그리 될 바에야 확연히 판세를 뒤집어야 하겠지.

이번 월남국에서 법국이 소란을 일으킨 것은, 그 나라에 홍하라는 강이 흘러 강남의 남쪽 끝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었소. 이처럼 대국의 땅을 노리는 이들이 많으니, 그들 중 하나 또는 두셋을 끌어들여 함께 중원을 도모하자 하면 결코 물력은 다하지 않을 것이요, 저들 역시 이역만리까지 수천의 대병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니 우리가 응당한 몫을 취함을 놓고 무어라 하지는 못할 것이외다.”

그 옛날 효종대왕 시절 이래로 이렇게 제대로 북벌의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었을까. 가만히 듣고 있던 대원군은 절로 뿌듯하여, 허술하였던 논의가 서로 머리 맞대고 물고 뜯다 보니 조금씩 얼개를 갖추어나가는 모습에 벅차오르는 심정을 어찌할지 몰랐다.

“오 녹사께서 이르신 대로라면, 명분을 얻는 것이 또 중한 일입니다. 무릇 군과 군이 맞부딪힘에 의(義)는 중하지 않다 하지만, 그 의로움을 얻고 잃음에 따라 서양 나라들이 돕고 도와주지 않음 또한 갈릴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의의 나라임이 저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는데, 어찌 청국이 겁박한다 하여 단번에 그 땅을 내놓으라 승냥이처럼 달려들겠습니까?”

시정 잡배의 마음을 지닌 대원군이 보기에 세상살이의 이익 다툼은 곧 협잡질이요, 명분이란 더 고단수의 솜씨가 필요한 협잡질에 지나지 않았다. 우직한 무부들이나, 고지식한 선비들이라면 이런 문제를 놓고 끙끙대겠지만, 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라,

“그야 청국이 먼저 달려들게 하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오랑캐의 성정이 금수와 다르지 않다 함은, 적당한 미끼를 던지면 고스란히 따라오기 때문이니, 그러한 정황을 만들어놓으면 언제고 일은 생기기 마련이지.”

하는 이야기도 할 법하였다. 그러하니 정운구 이하 무관들은 대체 무엇을 이름인가 하여 아리송해 하고, 그나마 대원군이라는 사람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은 하던 오경석은, 저 사람이 또 무언가 흉악한 계책을 꾸미고 있겠거려니 하며 이번에는 누가 당할 차례일지 속으로 궁금히 여겼다.

역천(逆天) 운운하며 작당하는 무리가 있으면 또 그 집 들보 위에는 밤귀 밝은 생쥐가 있기 마련이다.

“흐흐흐, 그렇다는 말인가.”

다음번 『익정신보』에 낼, 청국을 규탄하는 글의 논조를 놓고 상의 – 라 하지만 실제로는 일방적인 명령 –를 위해 찾아왔던 민승호는 뜻밖의 성과에 쾌재를 부르게 되었다. 갑자기 서반들이 우르르 들어와, 노안당 대신 노락당(老樂堂)에 호롱불 켜고서 무어라 웅얼대고 있는데 범상한 일일 리는 없었다.

마침내 모임이 파할 때, 그 중 가장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젊은이에게 붙어 은근슬쩍 치켜세워주며 바람을 넣으니, 결국 그 또한 대원군의 사람이리라 여겼는지 대충 이야기를 흘렸던 것이다.

무엇을 위한 모임인지는 모르겠지만, 무관들이 모여 ‘조만간 있을 지도 모르는 큰 싸움에 미리 대비한다’라 하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대원군 이 자가 끝내 제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역적모의까지 하고 있다 지레짐작한 민승호였다. 제가 원하던 모든 것을 다 얻은 대원군이 또 무엇을 더 얻어내고자 그런 위험천만한 짓을 준비하겠는가, 싶어 잠시 스스로 의심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마침내 주상과 대원군 사이에 쐐기를 박을 만한 건수를 올렸다는 것이라 생각하니 곧 의심하기를 그치게 되었다.

남은 것은 이 일을 그럴듯한 고변으로 꾸며내는 데 있다. 청국에 그대로 의탁하자니, 지금 가뜩이나 달아오른 여론을 생각하면 자칫 자신이 먼저 분노한 백성들 손에 장살당할 듯해 그 또한 마뜩잖았다. 그렇다고 꽉 막힌 유자(儒者)들에게 호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개화당 박규수로 말하자면 또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기에 기대려 했다가 자신이 도로 삶길 수도 있겠다 싶어 저어되었다.

그러니 상책은 의붓여동생 중전에게 의지하여 그대로 어심을 얻어내는 것. 아무리 지금껏 대원군을 비호해 온 주상이라지만, 피 흘릴 일을 억지로 만들려 한다고 하면 또 얘기가 달라질 것이라, 바로 대원군을 내치지는 않는다 하여도 운현궁과 거리를 두는 것은 물론이요 민승호 자신을 확실하게 지켜주기도 할 것이었다. 비록 요새 영 데면데면해 문중을 위해 힘 좀 써달라 청탁을 넣을 때면 마치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을 마음 깊이 새긴 것처럼 냉랭하게 무시할 뿐이라지만, 사안이 이처럼 중한데 과연 가만히 있겠는가.

그리고 임금은 가만히 있었다. 민승호가 미리 헤아릴 수 없던 것은, 자신이 올린 글이 고스란히 전해지기는 했으되, 저의 오라비에 대한 원망이 그대로 있던 중전이 엉뚱하게 첨언하여 ‘그 주위 사정을 깊이 살피시라’ 주상에게 귀띔하였고, 이번 생의 아버지를 여전히 굳게 믿는 귀남은 이를 다시 고스란히 운현궁에 알렸다는 사정이었다.

“마침 잘 되었구려. 지금 조정에서는 살림이 어려워 부득불 압록강을 넘어가려 하는 백성들을 누군가 돌보아야 한다고 얘기가 나오고 있던데, 이름하여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라 한다 하오. 그러나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고 개호주를 잡아올 수는 없는 법.”

(요 근래 조금은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명필이라 하기는 어려운) 어필로 ‘불윤(不允)’ 두 글자 쓰인, 겉봉 익숙한 서한을 조심스레 내보이며 대원군이 말했다.

“지난 신미년(1871)의 일도 미처 잊히지 않았는데 이번에 또 성상의 마음을 어지럽혔으니, 그 죗값을 어찌 치러야 하겠소? 오랑캐 천자가 예전에 하였다는 말을 옮기자면, ‘머리를 남기면 터럭을 남기지 않고 터럭을 남기면 머리를 남기지 않도록 (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 하겠은즉 알아서 하시오.”

장차 만민공산당의 유력한 수단으로 써야 할 『익정신보』를 계속 맡겨두기에는 어째 불안하였던 민승호가 스스로 이렇게 미끼 될 이유를 만들어주니, 내심 고맙기도 하였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불만, 그리고 무엄하게도 주상에 대한 원망을 품고 북쪽으로 가게 되면, 이를 알아챈 청국에서도 가까이 다가가 무언가를 꾀하려 할 것이다. 그야말로 적당한 트집거리가 아니랴?

그 날이 바로 오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신보가 자신의 편이니 자신이 원할 때 적당한 빌미를 삼아 터뜨리면 그만이다. 중전은 적잖이 곤란해지겠지만, 어차피 외척이 힘을 얻게 하지 못하게 하고자 한미한 집안에서 간택하기를 원하였던 이유도 이 때문 아니었는가.

임지가 다름아닌 심양 봉천부(奉天府)라 하니, 혹 떼려다 혹 붙인 민승호는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대원군이라면 능히 자신이 고변한 것을 무고로 만들어 역으로 몰아세울 수 있을 것이니, 싸워보기도 전에 또 당한 꼴이었다. 차라리 갑작스레 벼슬을 제수하는 교지가 내려왔더라면 신병(身病)을 핑계삼을 수라도 있겠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거절할 수 없는 청을 하니 어찌할 바 없었다.

그렇다고 정말로 변발하고서 청국인들 사이에 머물게 되면 그야말로 문중의 굴욕이며, 끝내 변발하지 않겠다고 우기다 청국에서 내쫓기게 되면 또 그것은 그 나름대로 탄핵의 사유가 된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을 구멍은 있는 법이었다. 우거지상을 하고 솟을대문을 나와 감고당으로 돌아갈 무렵, 갑자기 오경석이 나타나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흠흠, 거 안쓰럽게 되었습니다.”

“되었네. 지금 말장난할 계제가 아니니 농은 다음에 던지도록 하게나.”

“실은 운현궁 드나드는 문객들 중 의주 고을을 오가는 이 있어 들려준 것인데, 그 변발이라는 것이 꼭 지켜야 하는 법도만은 아니라 하더이다.”

대원군의 끄나풀이 무슨 일이냐, 쏘아붙이려던 민승호는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보게, 그게 정말인가?”

“어찌 제가 허투루 말을 꺼내겠습니까. 듣기로 저들의 법에 승려와 교인(敎人)은 체발(剃髮, 삭발)의 법을 면한다 합니다. 게다가 경신년(1860) 이래 저들 땅에서 천주교의 위세가 당당하여, 심지어 관인(官人)들도 이를 어찌하지 못한다고도 하니, 이는 의주뿐 아니라 저 천진을 드나드는 상고들도 증언하는 바입니다.”

이미 은근슬쩍 압록강을 건너 사람 없는 땅을 일구던 평안도 백성들이 내놓는 명분 또한 그와 같았으니, 이러한 편법은 기실 관에서 낸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홀로 궁리하여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경오년(1870) 교안으로 나라가 큰 홍역을 치를 뻔했음을 아는 만인 관원들로서는, 도강한 조선인들이 ‘또 교안을 한 번 일으킬 셈이냐’ 하며 강짜를 부리면 딱히 할 말이 없던 것이다.

이왕 단발하게 되었다면 적어도 어디 가서 고개 들고 다닐 만한 명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풍양 조문에 입교한 이들이 적지 않다 하니, 적어도 만인들마냥 흉하게 돼지꼬리 늘어뜨릴 일은 없겠다는 데 안도하여 그날부로 민승호는 한성부 관아에 가 교첩(敎牒)을 받았다. 세례도 받지 않은 천주교인이 이렇게 나타나게 되었다.

중전의 오라비 되는 민승호가 직접 제물포와 의주에서 알음알음 전해지던 이 편법을 따르게 되니, 소문이 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갑작스레 신도가 늘어나 천주교인들은 당황하였지만, 비록 이름만 신자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제대로 신앙의 길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여기며 묵인하기로 하였다. 거기에 입교도 하지 않은 채 교인을 자처하는 이들은 그 수가 훨씬 많았다.

물론 조정의 시책에 따른 것은 아니요, 그저 간도 땅에 옥토가 많다더라, 그 땅에 산도 많으니 양인들에게 배운 탐광의 기술을 써서 도톰한 광맥 하나 찾으면 삼대가 먹고 살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 제 발로 건너가는 백성들이 태반이었다.

금상 치세에 들어 사면을 받아 여전히 영남 일대에서 교인들을 이끌고 있던 최제우(崔濟愚)가 나선 것은 이때였다.

“우리 교가 동학을 자처함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함인데, 지금 압록을 건너는 백성들은 좋든 싫든 모두 서학을 따를 것을 자처하고 있다. 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또한 북쪽 땅은 그 근원을 찾으면 동명왕 이래의 고토요, 동명왕은 곧 천제의 후손이라 하였으니 마땅히 우리 도에서도 이를 따라 경영하여야 할 것이다.”

서양이라는 뒷배 있는 천주학쟁이들과는 달리 교첩의 은총을 얻었다지만 여전히 찬밥 신세인 동학이라. 눈칫밥을 계속 먹기보다는 차라리 북녘 땅에 나아감이 낫겠다 싶었다.

그리하여 해동 땅에 전해 내려오는 도(道)를 따른다 하여 ‘천도교(天道敎)’라 개칭한 동학의 신도들이 대거 만주 땅으로 향하게 되었으니, 관헌에서는 막고 싶어도 이름에 ‘도교’가 들어가므로 차마 막지 못하였다.

‘조선인 마을에서 일하면 머리를 길러도 된다’ 하는 풍문이 유조변(柳條邊) 넘어 몰래 들어오던 한인들 사이에서 퍼지는 것 역시 금방이었다. 당초 계획대로 군현을 설치하여 다스리려 하여도, 현을 두게 되면 그 현의 관원을 제한 모두가 되는 대로 머리를 기른 더먹머리요, 변발한 사람은 백에 하나에 불과한 정도였으므로 세금 – 그나마 제대로 내는지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 이 조금이나마 걷히는 데 겨우 만족하여야 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듯, 북경을 더 발칵 뒤집어놓을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니, 미국인들을 필두로 오만 양인들이 당당하게 호패를 보여주며 봉천과 요양에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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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익관이라는 이름은 『시경』 <소아(小雅)>의 유월(六月)에 있는, ‘위엄 있으며 당당하니 무(武)의 일을 받들었네 (有嚴有翼 共武之服)’에서 따왔습니다. 주나라 선왕(宣王)이 윤길보(尹吉甫)를 보내 북쪽 오랑캐 험윤(玁狁)을 주벌한 일을 칭송하는 노래지요.

흔히 선달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은 (못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여겨집니다만, 본래는 문무의 구분 없이 쓰는 호칭이었습니다. 허나 적당히 기다리면 말직일지언정 벼슬 하나쯤은 얻을 수 있는 문과와는 달리, 무과는 비교적 쉬운 시험조건과 맞물려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임용대기 상태로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 ‘선달’은 무과 출신 한량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게 된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조선 음료업계의 선구자로 전해지는 봉이 김선달이 있습니다.)

홍재희는 개명 후의 이름인 홍계훈으로 더 유명한 개화기 무관입니다. 을미사변으로 살해된 것 때문에 널리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 1876년 오위장으로 임명되고 동학농민운동 때는 진압군으로 출전하기도 하는 등 꽤 이른 때부터 군부의 주요 인물로 있었지요. (그러므로 옛날 사극에서 나오던 풋풋한 인상은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윤웅렬은 철종 시기 무과에 합격해 함경북도병마우후를 지내는 등, 서얼 출신임에도 꽤 잘 나가는 무관이었습니다. 이후 김홍집의 2차 수신사에 동행한 것을 계기로 별기군의 조직에 관여하는 등 개화파의 군부 쪽 인물로 활동하였습니다 (물론 별기군에 관여하는 바람에 임오군란 때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기는 하였습니다만). 갑신정변에도 관여하였다가 탄핵당했지만, 아관파천 이후 다시 벼슬길에 나서 군부의 핵심인사로 떠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윤치호가 훨씬 유명하지요.

국적이라는 개념은 다분히 근대국가적인 발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민족, 국민 등등으로 엄격하게 사람과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당대 조선에서는 낯선 감이 없지 않았겠지요. 물론 한인, 왜인 같은 이질적 집단에 대한 인식은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칼로 나눌 수 있는 ‘국적’이나 ‘민족’ 같은 개념은 (물론 그 개념의 원시적인 모태는 형성되어 있었겠지만) 찾아보기 어려웠을 듯합니다.

일례로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가 부임했을 때, 남씨 집안에서 재상이 나왔다며 축하하러 온 남원 선비 이야기는, 오늘날에는 우스갯소리로 전하지만 전통적인 조선 사회의 관념으로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최근에도 – 물론 퍼포먼스의 성격이 강하지만 – 반기문 사무총장이 당선되었을 때 중국 내 반씨 집성촌에서 축제를 벌인 사례가 있었지요. 프랑스인 벨레의 참의대부 출마 및 당선, 그리고 이번 화의 조선 이중국적자 서양인 등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청이 변발을 강제하던 중원 점령 초기에는, 대머리라 하더라도 머리를 붙이게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엄격하게 체발령(변발)을 강요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후 통치체제를 정비하게 되면서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생기게 되었지요. 특히 종교의 문제가 컸습니다. 불교의 경우 만주족 대부분이 독실한 신도였을뿐 아니라 몽골에 대한 통치력 유지를 위해 티벳 불교에 신경을 써야 했고, 도교의 경우에도 그냥 눌러 없애기에는 그 영향력이 작지 않았지요. (원나라 역시 도교에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아, 유목민 고유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래서 두 종교의 종교인에 대해서는 변발령을 면제했고, 대신 도교의 경우 대부분의 도교 관련 국가제례를 간소화 혹은 철폐하는 등 ‘숭불억도’적인 정책을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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