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77화 (77/320)

25. 싸움으로써 평화를 얻어야 할 때 (3)

건기의 푸른 하늘에는 하늘색 전립도 썩 잘 어울렸다. 하지만 정작 들고 온 무장은 제각각이라, 누구는 미국인 무기상에게 들여온 권총을 차고 있고, 그럴 여유 없는 병졸들은 옛 병기고를 뒤져서 나온 창칼이나 옆집 한량에게 빌려온 각궁 따위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들 가는 곳이 싸움터는 싸움터이되, 병장기 휘둘러 싸우는 싸움은 아니라 하였으므로 기껏 받은 서양 총이니 회륜포(개틀링)니 하는 무기들은 죄다 타고 온 배 위에 남겨둔 것이다.

그나마 월남국 조정의 배려로 하내성(河內, 하노이) 근교의 널찍한 대청 하나를 내주었기에, 남쪽 멀리 있다는 서공성(西貢, 사이공)에서 도로 이곳 하내로 북상한 협상장을 오가기가 편리하였다.

“저들이 무어라 하더이까?”

지전보평군 부원수 양헌수가, 청과 월남, 법국 대표들을 모두 회견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도원수 최익현에게 군례를 갖추며 물었다. 어쩌다 보니 동문수학한 두 사람이 하나는 도원수, 하나는 부원수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나이로 따지면 한참 사형(師兄)인 양헌수라지만 품계로 보나 조정에서의 입지로 보나 최익현이 명색이 윗사람이다. 나라 열린 이래 처음 있는 머나먼 원정을 나서서 천하의 공무를 맡게 되었으니 몸가짐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말로는 환대하되 꺼리는 기색이 완연하니, 삼척동자라도 그 경계하는 마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소.”

의자에 차분히 앉는 최익현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평소의 다소곳하던 몸가짐에도 조금은 흐트러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건기라지만 조선으로 치면 초여름 날씨인데다, 조선군은 그저 불청객 신세이니, 사람인 이상 지치지 않기가 외려 더 어려웠을 것이다. 법국 사정 통달하기로는 제일이라 하여 몸소 나서게 된 최익현일지라도, 저의 굳건한 뜻과 조야의 든든한 기대로 더위를 물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국의 증 대인은 어찌 되었든 법국이 저의 세력만을 믿고 행패를 부리지 못할 터이니 그나마 반갑게 여기는 듯하였지만, 월남국의 반 공(潘淸簾, 판타인리엠)은 기실 우리가 청하여 풀려났음에도 되려 국외(局外)에서 공연히 찾아온 것을 의심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오.”

돌아가는 정황이 예상한 폭을 벗어나면서, 청 조정은 급히 작고한 증국번의 동생 증국전(曾國筌)을 흠차대신으로 파견하였다. 믿을 사람이 별로 없던 월남 조정은 막 풀려난 판타인리엠을 도로 기용해 그 자리에서 회담을 마무리 짓도록 하였고, 사태가 예상 외로 커져가는 데 놀란 프랑스는 한 수 굽히고 들어간다 생각하며 협상장을 도로 북쪽으로 옮긴 것이다.

“법국은 어떻습니까? 소장 또한 그 흑기군의 수장이라는 유 모(유영복)를 만나보았는데, 말하기로는 그 군대의 기세는 날카롭지만 한 번 그 기세를 꺾으면 능히 상대할 수 있다고 하면서, 여차하면 몰래 우리 배에서 병기를 내어 함께 법국을 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하더이다.”

“그 말대로, 과연 말로는 위세를 부풀리지만 조급한 느낌이 있는 것이,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소이다. 대국 또한 번병을 지키러 왔다고 하나 월남국을 마뜩잖게 여기는 듯하여, 사세가 복잡하고도 괴기하기 이를 데 없소.”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을 잘 알지 못하는 양헌수가 보기에도 괘씸한 것이, 조선과 같은 번병이라 하나 당당하게 사덕(嗣德)이라 연호를 붙이며 황제국을 자칭하며 그 나라 이름도 대국이 내려준 월남 대신 대남(大南)이라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 구래의 전례 운운하며 선대왕에게 묘호를 올리는 조선 또한 오롯이 떳떳하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양헌수의 눈에는 북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도원수께서 말씀해주신 바대로라면, 지금 법국은 월남국이 일찍이 약조한 바를 지키지 않았으니 보상해야 한다며 큰소리를 치고, 월남국은 대국이 이왕 들어왔으니 그 힘을 빌려 법국을 누르려 하며, 대국은 월법 양국 모두 괘씸하게 여기는 듯합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만리 밖의 나라로 적지 않은 군병을 이끌고 여기에 이르렀으니, 저들이 승냥이처럼 서로를 노릴지라도 우선 이곳 하내에서 말로써 다툼을 갈음하자 하고 있지 않소이까. 이로도 족히 군공(軍功)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외다.”

물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각국 대표를 만났을 때 최익현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계책을 일러주기도 하였다. 그 골자는 어전에서 논의한 끝에 나왔던 것이요, 살은 이곳까지 오면서 선상에서 붙인 것이었다.

저의 형에게서 조선이 천진에서 자신을 도와준 사연을 들었던 증국전은 꽤 흔쾌히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다른 야만인들보다야 프랑스에서도 그 이름 알려진 ‘무슈 최’와 대화하는 편을 선호하였던 필라스트르(Paul-Louis-Félix Philastre)도 나름대로 경청하였다. 판타인리엠은 여전히 그를 고깝게 여기는 듯했다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월남국이 낼 수 있는 목소리는 청국과 조선을 끌어들이게 되면서 개미소리만도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법국이 원하는 것은 이 홍하(紅河)를 타고 대국의 운남과 교역하는 것이요, 대국이 원하는 것은 법국이 월남을 번병으로 인정하여 더는 탐내지 않음에 있소. 이미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번국이 자주국을 칭함이 결코 사대하고 자소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음은 여러 해에 걸쳐 명명백백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세 나라로 하여금 따르게 하면 총칼을 능히 내려놓게 할 수 있을 것이오.”

“허나 저들이 무엇을 믿고 그처럼 가운데서 주선하는 바를 따르겠습니까? 대국이라면 모를까, 법국은 필히 불만을 품을 것이요, 월남 또한 우리를 믿고 도로 법국 군대를 칠 흉심을 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영을 내려주시면 회륜포와 양총을 몰래 내려 영내에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부원수의 우려하는 바는 익히 알겠으나, 우리가 이곳에 당도한 것만으로도 저들은 면책(免責)할 구석을 얻었으므로 그처럼 무모한 방도에 국운을 맡기지는 않을 듯하오.”

프랑스야 처음 군대를 이끌고 하내에 입성한 가 모(가르니에)가 이미 흑기군의 매복에 당해 전사하였으니, 혹 한 번 더 싸워 지는 일이 있다면 월남에 대병을 내기는 할지언정 국내의 사정도 멀쩡하지는 못할 것이다. 최익현 그가 아는 대통령 마크마옹이라면 티에르와는 달리 자신이 군인이므로 군의 사정에 밝다며 한껏 뽐내고 있을 터, 그런 중에 ‘동양 야만인’에게 프랑스군이 연패하였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필라스트르 역시 더 이상 무력개입은 자제하라는 지령을 받고 왔을 테다.

그러니 ‘좋은 친구’ 코레의 중재에 응하여 명예를 지키며 물러난다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핑계는 아닌 셈이다. 밝으신 주상께서 ‘양국의 이익을 위한’ 아라사와의 최근 조약을 예로 들어, 법국이 통상의 이익을 원한다 하니 중재하여 월남국과 그렇게 이익을 나누도록 해 주라 하교한바, 최익현이 보기에도 그 정도라면 법국과 청국 모두 만족할 만한 중재안이었다. 어쨌든 월남의 국체는 남는 것 아닌가.

귀남으로서는 그저 헛되이 인명을 살상하기도 저어되고, 그렇다고 후대에 나라를 망친 결정으로 지탄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애매한 방도라도 내어놓은 것이었지만, 그것이 살에 살을 붙이는 식으로 굴러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다.

당황스러워할 일은 또 무엇인가, 하면 지금 그의 앞에서 대소하는 마신이와 같은 반응 때문에 그러하였다.

“하하하! 실로 찬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어질고 현명하신 국왕께서 다스리시니 어찌 조선의 홍복이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조선이 법국을 규탄하며 대국 편에 서는 정도만 해 주어도 성공이라 여겼기에, 월남으로 직접 병력을 보내기가 저어되면 양광(광동·광서) 일대에 파병하여도 무방하다 하였던 마신이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마치 그 옛날 강가에서 초나라 군대가 강 건너기를 기다리던 송양공(宋襄公)처럼 군자의 군대라며 창칼만 들고 월남 본토에 나아갔으니, 당황하면서도 우선 두고 보자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만사가 잘 풀리게 되었으니, 그런 인의의 군대가 나아가니 정말로 싸움이 그치고 어찌어찌 화평하기로 약조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국왕 전하께서도 이미 들으셨겠지만, 우리 대국과 법국, 그리고 월남국이 함께 정하기를, 조선과 유구의 예를 준용하여 월남국은 대국을 따르는 자주국으로 삼고, 그 땅의 이익을 월남국이 홀로 이끌어낼 수 없으므로 법국이 돕기로 하였다 합니다. 우리 쪽의 증 대인이 조정에 올린 표문을 보면 이 모든 일에 귀국의 군대가 큰 공을 세웠다 하니, 이 어찌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경사라고 하기는 애매하였다. 결국 증국전은 법국이 이전에 월남을 (사실상) 겁박하여 얻어낸 이익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남은 월남의 강역을 보전하게 해 주는 데 그쳤으며, 그 남은 강역이라는 것도 홍하 일대는 개항되어 곧 법국인들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자리의 사람들이 영영 알 수 없을 원 역사의 조약에 비하면 달라진 것은 외교권을 월남 측에 고스란히 남기고 대신 ‘청국과 월남국은 법국이 월남 강역 내외에서 얻은 이익을 존중하며, 법국은 그 이익으로 말미암아 월남 또한 발전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한다’라는 애매한 구절이 덧붙여진 정도에 불과하였다. 굳이 더 따지자면 양자협약에 청국이 끼어들어 삼자간의 약조가 되었다는 것 정도가 있으리라.

프랑스가 보기에는 저 ‘적극 협조’가 곧 베트남 본토에 진출할 구실이었으며, 청월 양국이 보기에는 훗날 꼬투리를 잡아 단물만 얻어낸 뒤 조약을 파기할 단초였다. 그러나 이처럼 착각과 낙관을 초석으로 삼은 합의라도 당장 사람이 피 흘리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는 일.

“게다가 천병이 아직 양광에 머물고 있을 때 아조의 군병이 먼저 나아가 화평하는 일을 도왔으니, 대국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더 군병을 내라 하지는 않겠지요?”

대원군이 은근슬쩍 치고 들어와 아픈 구석을 찔렀다. 공과를 떠나 천조보다 더 화려하게 사태에 들이닥치게 되었으니, 청국 입장에서는 겉으로야 고맙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쓰릴 터. 마신이 본인부터가 잘 알고 있었다. 번국에 도움을 청하는 것도 천조로서 쉽게 할 수 없는 일인데, 그 번국이 천조를 돕다 못해 아예 홀로 나서서 사안을 주도적으로 해결해버리는 격이 되었으니 체통과 위신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하하, 대원군 그대도 여전히 날카롭구려. 본관은 엄연히 칙명을 받고 온 흠차대신이므로 그런 말씀에 대해서는 옳다 그르다 답을 내놓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장차 대국과 번국의 일을 논함에 있어 이번 사안이 한동안 거론될 것임은 분명하외다.”

“나로서는 그저 싸움으로써 평화를 얻어야 할 때가 왔다 하기에, 싸움에서 취하는 가장 값진 승리는 싸우지 않고 거두는 것이라는 병가(兵家)의 오랜 말을 떠올렸을 뿐이오.”

혹여 이번 일을 가지고 또 무슨 엉뚱한 오해를 할까 걱정한 귀남이 한 마디 보태었다.

“결코 대국을 업신여기거나, 대국과 법국 사이에서 한쪽을 편들 생각으로 이리한 것은 아님을 알아주길 바라오.”

물론 그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마신이가 생각하기에도 눈앞의 이 국왕은 최후의 최후까지 양쪽에서 모두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얻어낸 뒤에야 갖은 위선을 떨면서 한쪽 편을 드는 시늉이나마 할 사람이었으므로.

“부족한 사람이 크나큰 황은을 입어 이 나라 조선에 머문 지가 몇 해인데, 국왕 전하의 그런 어지신 마음을 못 헤아리겠습니까. 허나 한 가지 말씀 올리고자 하는 바가 있사오니 청컨대 깊게 새겨듣지는 마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총칼을 물릴 수 없을 때가 올 것이었다. 만약 마신이가 조금 더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어째서 그럴 때가 올 수밖에 없는지도 능히 설명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감만 있을 뿐.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여 인의를 베푸는 것은 쉽게 잊지만 저에게 손해되는 일은 평생토록 기억하여 원수로 삼는 법입니다. 이번에 병사를 내어 싸우되 싸우지 않게 하신 일 역시 인명을 아끼고 나라와 나라 사이 다툼을 멈추게 하려는 뜻은 실로 고매하다 하겠으나, 훗날 이 일로 구실을 삼아, 다른 나라가 조선에 원한을 품게 될 수도 있으니 마땅히 방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국 조선이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까닭은 그 누구도 조선을 발 아래 두는 데 사활을 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않은가. 대청은 그 앞의 대(大)자가 무색하게 안팎이 모두 어려운 판국에, 그나마 끼어들 사유가 있던 법국은 절로 무너져 제 앞가림에도 바쁘고, 코 꿰려다 도리어 꿰인 아라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세상은 점차 좁아지고, 그만큼 나라와 나라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도 줄어들 터인데, 그때가 되면 정녕 지금처럼 군자연하며 중재와 평화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수월해지겠는가, 싶었다.

곰곰이 그의 말을 곱씹던 국왕의 답변은, 꾸밈 없이 진솔하였다.

“그것은 그때 고민할 일이오.”

“전하, 그러나 인군(人君)된 이로서 마땅히 백년대계를···.”

“하하, 백 년은 무슨. 솔직히 한 해 앞의 일도 미리 살펴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오. 그러므로 성현의 말씀에 인의를 이른 것 아니겠소? 어지러운 세상에서 원한 살 일은 줄이고 서로 도울 일은 늘려야 하는 것이외다.”

어차피 역관이 알아서 옮겨줄 것이라 믿으며, 조정에서 논의할 때는 눈치껏 인용하던 (그렇지 않았다가는 바로 다음 경연에서 한소리 듣지 않겠는가) 고사며 장구도 한데 밀어낸 귀남이 말했다.

“비록 아국이 훌륭한 인재를 여럿 거두고 시운의 흐름을 타 여기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어찌 그 힘만 믿고 다른 나라를 함부로 눌러댈 생각을 품겠소? 그렇게 욕심을 부렸다가는 되로 주고 말로 받기 마련이지. 그러므로 머리를 맞대고서, 어느 한쪽도 편들지 않고 오늘의 다툼을 내일모레로 미룰 수 있는 방도를 고심할 따름이오.

그러다가 더는 미룰 수 없는 때가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 정녕 싸우지 않고서 화평을 얻을 수 없는 때가 언젠가 당도하지 않겠느냐 묻겠지만, 정말 그렇게 매일 노력하다 보면 영원히 그런 날은 오지 않겠지. 이게 어리석은 과인의 생각이외다.”

잠시 편전에 내려앉은 침묵을 깬 것은, 호탕한 마신이의 웃음소리.

“하하하! 앞서 말씀드렸지만 과연 훌륭하십니다! 이 자리에서 함부로 가불가(可不可)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만, 전하께서 흉중에 품으신 뜻대로 경국(經國)의 도를 삼으신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시위하는 대원군은 함께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뜻에 있어서는 마신이와 함께하지 아니하였다. 아들이 대견하면서도 걱정되어서였으니 미소짓는 까닭이 어찌 같으랴.

일전에 이 ‘지전보평군’이라는 해괴한 발상을 하였을 때도 그 내막이 궁금하여 물어본 바 있었다. 그때도 매한가지로 우선 발등에 떨어진 전화(戰禍)를 막자 한 것이 그의 아들이요 주상이었다. 늘 엉뚱한 생각에 엉뚱한 언행을 하던 아들답게 그 뜻도 거창하여, 정말 해낼 수 있을까 의심하는 마음을 품기도 하였지만 곧 고쳐먹었다. 이왕 아들을 이 나라 조선의 지존으로 만든 것, 조금 힘을 더 써 성군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들이 입궐하기 전날, 그 안에 들어앉은 군밤장수를 죽이라 했던 때만 하더라도 이리 될 줄 알았던가. 저의 말은 한쪽 귀로 흘려보냈는지 그저 오는 이 막지 않고 가는 이 잡지 않으며, 오직 하나 피 흘릴 일만 없게 하라는 뜻을 세웠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열 해가 지나, 결국 아들이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처음에는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로 치부하였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렇게 생각하며 언제든 사람을 쳐낼 독기를 품었던 자신이야말로 성상의 커다란 바둑판 위의 대마(大馬)였다.

물론 여전히 그 크나큰 마음 한 가운데에 당장의 앞날을 모색하는 재치는 부족하여, 가까이서 보면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나서서 채워줄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오늘의 다툼을 내일로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다 보면 결국은 평화가 찾아오지 않겠냐는 대책 없는 귀남의 공언을 듣고 난 뒤 대원군의 심정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싸워서 평화를 얻어내야 할 때가 있다면, 반대로 딴에는 평화를 지킨다며 섣불리 움직이다가 훗날 싸움의 화근이 될 일을 스스로 만들 때도 있는 법이었다. 귀남도, 대원군도, 심지어 마신이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이 일은 월남으로부터 전해진 증국전의 보고에 서태후가 내린 영에서 기원하였다.

“조선왕이 번병으로서 천하의 화평을 위해 나선 점은 실로 훌륭하여 마땅히 포장하여야 할 것이나, 금번 월남국의 일에 있어서는 그 중도(中道)를 잃어, 대국으로 하여금 체모를 잃게 하였다. 정녕 군병을 내어 법국의 흉험한 계책을 막아내고자 하였다면, 마땅히 그 전에 그 내막을 대국에 알려 상의한 연후에 진행하여야 하지 않았겠는가?”

대국이 번병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마땅히 헤아렸어야 했을 사정을 지금에 와 재론하니, 한때 영명한 군주가 머무르던 자금성이 어찌 이렇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나 서태후가 보기에는 어쨌든 월남의 일은 끝났으므로, 그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 이야말로 만인(滿人) 사이의 화평을 이끌어내는 방도였다.

“만주 땅은 조종이 일어난 기틀로, 비록 지금에 이르러 그 봉금을 폐한다 하나 대대로 전해 내려온 땅의 신령함은 예전과 한 터럭만큼도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비록 조선인을 받아들여 농상(農桑)과 공광(工鑛)의 이익을 얻는다 하더라도 이를 온전히 내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서태후가 조선의 ‘방자함’을 핑계삼아 말을 바꾸어, 심양과 요양 땅에 조선인이 입경하는 것은 허용하되, 농경을 하든 광산을 운영하든 반드시 청국의 법도에 따라 변발하고 그 군현에 세금을 온전히 낼 것을 요구하였다는 소식에 곧 조야가 시끄러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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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인리엠은 1차 사이공조약 체결에 관여한 판타인전(潘清简)의 아들입니다. 이후 동카인(同慶, 1885~1889) 연간에 황족의 이름을 피휘하여 청(淸) 자를 뺀 판리엠으로 흔히 불리게 됩니다. 원 역사에서는 프랑스군이 하노이를 점령할 때 인질로 잡혀있다가 조약 개정 후 석방되었지요.

베트남은 물론 한자 문화권에 속하기는 하지만, 중원과 가까이 붙어있어 좋든 싫든 제1의 번국이 되어야 했던 조선과는 달리 중국과의 관계에서 훨씬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는 의도적으로 청에 대한 조공 횟수를 줄이고 거리두기를 하는 한편, 대규모 영토확장을 통해 외왕내제 수준이 아니라 대놓고 황제국으로 행세하였지요.

그러나 응우옌 왕조가 시작될 무렵이면 이미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 개입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정신이 없는 사이 빠르게 일구어낸 번영은, 다시 프랑스가 정신을 차리게 됨에 따라 위협받게 되었지요.

외방전교회 선교사가 핍박당했다는 것을 빌미로 1840년대부터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본격화합니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베트남을 압박해 남쪽 영토(코친차이나)를 할양받았으며 (이때 1차 사이공 조약에서 허용된 3개 성뿐 아니라 그 옆의 3개 성을 추가로 병탄했습니다), 이후 원 역사의 2차 사이공 조약에서는 베트남의 외교권은 물론 북부 지역의 개항까지 이끌어내지요.

여기에 대해 베트남은 중국을 끌어들여 프랑스를 막아보려 했지만, 앞 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청 역시 베트남의 국체를 유지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지요. 그러던 중 청불전쟁에서도 해군의 압도적 전력차로 인해 지상전에서의 군사적 성과가 무의미해진 청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 행사를 포기하고, 이에 따라 베트남은 괴뢰 조정만 남긴 채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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