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싸움으로써 평화를 얻어야 할 때 (1)
“아아, 오늘이 어떤 날인가. 하늘이 종묘사직을 보우하여 더없는 경사가 내리었구나. 이 모두가 열성조의 도우심이요 자전(慈殿)의 현숙함과 뭇 중신의 보필에 힘입은 것이니 부덕한 과인의 공은 어디에 있겠는가.
이제 지극한 기쁨이 있고도 이레가 지났으니, 마땅히 대왕대비전에 나아가 치사(致詞) 올리는 예를 갖출 것이다. 그때 나아가 진하(陳賀)하는 예를 갖출 것이니 해사(該司)는 그리 알지어다.”
어째 가냘팠던 첫 아이와 달리, 이번에 중전이 순산한 원자는 아무리 보아도 튼실하여, 만에 하나 불상사가 있을까 두려워 미리 불러둔 어의와 양의들은 한 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귀남만큼 기쁠까. 혹여나 싶어, 출산한 지 이레가 지난 지금까지 지켜보았건만 맥은 순후(淳厚)하고 성정은 벌써 그 온량함이 드러나, 귀엽고도 듬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총리대신 이유원이 문득 나아와 아뢰기를,
“천하의 운수에 허투루 흐름이 없음을 이로써 알겠사옵나이다. 마침 대로를 따라 전보(電報)의 체제가 갖추어져, 이제 파발을 보내면 촌음(寸陰)의 사이에 전국에 퍼뜨릴 수 있게 되었사옵나이다. 이것이 고작 여드레 전에 완비되었으니, 이처럼 공교로운 일이 어찌 하늘의 안배가 아니겠사옵나이까? 청컨대 만백성이 함께 기뻐하도록 첫 전보로 이 경사를 알릴 수 있도록 허여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물론 정녕 하늘이 꾸민 일은 아니요, 거의 완성이 되어가던 판에 뜸만 들이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정을 다들 알면서도 말로 꺼내지는 아니하였다. 중전의 출산이 눈앞에 있을진대, 고작 한두 달을 못 기다려 쓸데없는 보고를 역사적인 첫 전보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장동 김문이 대로 닦는 데 숟가락 얹어 신작로 곁에 전봇대를 세우고, 전보가 생기면 유명무실해질 봉수군(烽燧軍)들을 모조리 각지의 전보국 직원으로 충당하였다. 이미 우정국을 세울 궁리를 하면서 역참의 역민(驛民)들을 각지 우정국에 배치하는 안이 나왔기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철도니 무어니 하는 것에 비하면 그리 많은 공이 들어가지도 않는 전신이라, 곧 이렇게 바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 하시오. 또한 그 죄질이 가벼운 수인(囚人)은 풀어주고, 문무관과 음관(蔭官)으로 파삭(罷削)된 자들은 죄과를 따져 다시 서용(敍用)하되 마땅히 조처하기 전 유사(有司)는 전례를 상고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첫 전보가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아, 한성에서 인천, 의주, 동래, 그리고 경흥까지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인천에서 들어온 두 번째 전보는 그렇게 축하할 만한 내용도, 반가운 소식도 아니었다.
“법국이 월남국을 침노하여 그 주권을 침탈하려 하고 있는바, 천조에 번속한 나라를 이처럼 업신여김은 곧 천조를 넘봄과 같다. 흠차대신은 이러한 사정을 국왕에게 알려, 능히 함께 법국을 성토하고 그 삿되고도 음험한 마음을 되돌리는데 힘을 보태도록 고유(告諭)할지어다.”
물론 그런 내용이 고스란히 전보국을 통해 들어왔으니, 말로는 흠차대신에게 알리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처럼 중한 내용을 자문(咨文)이 아닌 전보로 보내기 저어되어 돌려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자금성의 서태후가 이런 내용을 보내라 친히 지시하였기에, 그대로 중국전보국을 통해 쳐서 보내게 한 이홍장은 심란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아아, 이처럼 어리석을 수가 있는가!”
지금 나라의 관심사는 오직 서북을 향해 있었다. 이리(伊犁)를 되찾기 위해 공친왕이 친히 나서, 좌종당과 함께 멀리 신강까지 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저 두 사람이야 나라를 위해 그리하는 것이지만, 저 청류(淸流) 자칭하는 샌님 무리들은 어떻다는 말인가.
예컨대 근자에 그의 분통을 터뜨린 장지동(張之洞)의 상소를 보면, 대개 내용이 이러하였다.
“아조의 국세를 위협하는 나라로 아라사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세력이 다른 서양 오랑캐만 못하기에 스스로 두려워하고 근심하여 자강(自彊)코자 다른 나라를 병탄하려 드는 것이니, 그 위세가 대단해 보일지라도 실은 겉으로 내세운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길림(吉林)에서 들어오는 동정을 들어도 알 수 있습니다. 조선과 아라사가 두 나라 사이의 경계를 획정하는 일을 놓고 다툼을 벌였는데, 조선왕이 움츠리지 않고 일전을 각오하니 비로소 물러나 화약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연해주 땅에 조선인들이 나아가 경영하니 도리어 조선이 아라사로 말미암아 이익을 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즉시 십만 대병을 내어 이리 땅을 되찾고, 여차하면 아예 더 깊숙이 들어가 아라사의 땅을 빼앗자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즉시 항변하였지만, 오히려 장지동은 다른 한림원 학사들까지 끌어들여 저를 비난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우리 대신들은 말로는 양무(洋務)에 힘써 군병의 예리함을 되찾겠다고 하나, 실지로 그 하는 바를 보면 결코 그 행적이 명분과 맞지 않아 마치 곰 가죽 위에 비단옷을 걸친 듯합니다. 한낱 소국도 아라사에 대적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데, 천하의 대국된 나라로서 어찌 일전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국가는 백년 동안 아무 일이 없을지라도, 하루라도 전쟁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國家百年無事 不可一日忘戰). 부디 살피어주시옵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저처럼 전장에 나서보지도 않고서 싸움의 승패를 운운하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성정을 최대한 죽이면서, 아직 자강의 대업이 마무리되지 않아, 우선은 아라사와 화친하고 그 여력을 오롯이 동남을 지키는 데 들여야 한다 하였더니,
“직례총독은 오로지 싸울 각오를 해야만 화평을 지킬 수 있다는 (以戰定和) 도리를 잊은 것입니다. 군기(軍機)의 사무를 맡아 굳센 태세를 갖추었더라면 능히 이를 써서 나라의 근심을 해소하여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언제까지나 더 힘을 길러야 한다며 움츠리고 있다면 무슨 공덕을 이루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좌종당까지 끌어들여 겨우 저들을 논박하는가 싶었더니, 한림원의 학사들은 아무래도 좌종당이 저보다는 만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좌종당의 편에 서서 자신을 탄핵하려 들었다.
“지난날 열하로 몽진하였던 것은, 사교(태평천국)와 비적(염군)의 무리가 온 천하를 어지럽히던 와중 이리와 같은 서양 오랑캐가 그 틈을 노리고 치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만약 강건(康乾, 강희·건륭) 연간의 때와 같이 모든 삿된 무리가 그저 변경에 웅크리고 있을 때였더라면, 저들이 어찌 우리의 십정(十征)하던 위세를 보고 함부로 업신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 아고백(야쿱 백)의 무리를 쳐 없앤다면 어리석은 오랑캐들도 비로소 천조의 위엄을 깨달아 망동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침 똑같이 양무 운운하는 처지지만 변경의 일이 해방(海防)보다 앞선다고 여기던 좌종당도 저런 논리라면 자신이 이용할 수 있다 여겼는지, 은근슬쩍 저들 편에 서서 자신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어지간하면 이런 조정 내 논쟁에서는 중립을 지키던 공친왕까지 은근슬쩍 나서서는 자신에게 자중할 것을 권하지 않았던가.
눈 또는 골 (때로는 둘 다)을 장식품으로 두고 다니는 다른 조정의 신료 따위에 비할 수 없는 공친왕이 친히 나섰으므로, 우선은 사정이 있겠거려니 하고 물러났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월남의 일이 터진 것이다. 나라의 우환은 바다로 들어오는 영불 양국에 있음을 그토록 주장하였건만, 끝내 일이 이렇게 되었다.
“중당(이홍장)께서는 근심을 푸시지요. 조선왕은 필히 따를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조정에서 가장 조선 사정에 밝은 이로서 특명흠차대신으로 임명받은 마신이가, 이홍장이 분통 터트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문안을 겸해 말했다.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지 않소? 천조의 위엄 운운하는 자들이 오랑캐 앞에서 허세 부릴 것만 생각하고, 번병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소지를 만드는 데는 거리낌이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외다.”
물론 이제 조선도 기선이 있고 정병(精兵)을 나름대로 갖추었다 하니, 만약 조선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멀리 남만 땅까지 병사 수백을 보내 월남이 법국을 상대하는 데 조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이 정도로 제대로 전쟁까지 치르기에는 양쪽 다 힘이 빠진 상태이지 않던가.
“말씀하신 것은 물론 옳고도 옳습니다. 천조로서 신속하는 나라에게 자소(字小)하는 도의를 보이기는커녕, 다른 나라에게 손을 벌려 도와달라 함은 온당치 않은 처사이지요. 하지만 도움을 청하는 번국을 그저 내버리는 것은 그에 비할 바 없이 그릇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신강에 가 있는 병력을 물려 양광(兩廣)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소? 아니, 차라리 내게 직접 남쪽으로 내려가 저들을 막아내라 하면 지금이라도 나서겠소. 조선왕이 무엇이 아쉬워 천조가 부를 때 나아와 돕고자 할 것이라 믿는지 부족한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구려.”
당장 양광(광서·광동)에 양창대(소총수 부대) 하나 없는 실정이라지만, 상대하는 법국 역시 내키는 대로 힘을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 들었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회군을 끌고 나가 싸워야 한다 해도, 어쨌든 승산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던 이홍장이었다.
“황상 폐하와 황후 전하께서는 학사들과 중당 사이에서 절충하여 양쪽의 좋은 점만을 얻겠다 하교하시었지요. 물론 훗날 양쪽 모두 다투게 될 여지는 남기겠지만, 우선 금궁(禁宮)에서 정해진 바에 따름이 마땅한 줄로 압니다.”
차라리 학사들이 아뢴 대로 힘에는 힘으로 맞대응하고자 했더라면, 지금쯤 이홍장은 여기 집무실이 아니라 저기 군막에서 물자를 나르는 것을 점검하고 있었을 테다. 그런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미 출정한 서북 신강에서는 아구백을 무찌르고 아라사를 압박하기로 한 방침을 지키면서 월남에 대해서는 번병을 앞세워 법국을 압박하겠다 하니 군비는 군비대로 나가고 위신은 위신대로 떨어질 상황이었다. 물론 서태후가 생각하기에는 묘안이라고 내놓은 것이겠지만.
“그리고 사실 조정 안의 다툼을 없애는 법도로 생각하면 이 또한 아예 잘못된 조처만은 아닙니다. 조선왕을 의리와 이익으로 설득하는 것은 제 소임이니 중당께서는 심려치 마시지요.”
물론 그렇게 말하는 마신이도 속으로는, 조선과의 협상에서 여차하면 내놓아도 된다고 허가를 받은 사항들에 대해 일말의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갓 한 달 된 아기가 무얼 알겠냐만, 어버이 된 입장에서 보기에는 꼼지락대고 꼬물락대는 일거수일투족이 마치 재롱 떠는 것처럼 보여 여간 귀엽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들떠 가볍던 마음은 제물포에서 막 찾아온 마신이가 전한 소식을 듣고 곧바로 우중충해지고야 말았다. 반가운 얼굴이라며 기꺼이 맞이하였던 것도 잠시의 일.
“그래서, 아국이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천병(天兵)이 나설 때 함께 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조정에서 판단컨대 지금 법국이 월남을 압박함은 곧 구주 땅에서 잃은 세력을 동양에서 다시 얻고자 함이라, 우리가 의로써 타이르고 힘으로써 막아선다면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물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꼭 월남 땅에 발을 디디지 아니하여도 저 강남의 광주(廣州) 땅에 날랜 기선과 정예한 병사를 내어주신다면, 이로써 천조와 번병이 하나 되어 천하의 화평에 힘쓰는 아름다움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마 공, 일본국이라면 모를까 월남은 바다 멀리 떨어져 있어, 비록 종종 같은 번국으로서 한때 교류한 바가 있었다지만 엄연히 머나먼 이방(異邦)이오. 그대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장담하지만 군문(軍門)의 일이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인데, 백성의 어버이 되는 사람으로서 어찌 자칫 사지(死地) 될 곳으로 함부로 군사를 내보내겠소이까?
더구나 법국은 비록 정의 상할 일이 없던 것은 아니나 엄연히 우리와 수호한 나라인데, 물론 대국과의 오랜 의리에 비할 바는 아니라 하나 그래도 그간 우리가 자강하는 것을 옆에서 도운 공이 있소. 쉽게 내칠 수는 없는 것이외다.”
이 정도면 귀남의 평소 말투에 비추어보아 단호한 거절이었다. 하다못해 군밤 굽는 화로도 나오지 않았으니, 조선 땅에 (반강제로) 머물면서 조선왕의 언행을 익숙해질 만큼 지켜본 마신이 또한 모르지 않았다.
“천조에서도 그러한 귀국의 사정을 헤아려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법국인들이 원한을 품고 귀국에 해코지를 한다 하면 마땅히 거두어 보살필 것이며, 나아가 지금 훈춘 일대에서 전하의 백성들이 경영하는 권리를 내어준 것을 넓혀 길림과 성경(盛京) 일대 전역의 봉금을 풀어 천하 만민이 그 땅의 이로움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마신이가 조선으로 떠나기 전 황상으로부터 직접 받은 지령이었다. 어차피 봉금을 유지해 보아야 나라의 이익에 하등의 보탬이 되지 않으며, 이번 일에 조선이 거들게 되면 법국과의 사이는 파탄의 지경에 이를 테니, 후일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하지 않으려면 그에 상응하여 충실한 번국을 포장(褒獎)하는 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황상 – 그리고 태후 – 의 깊은 뜻이었다.
물론 만인(滿人)들이야 불만을 품겠지만, 마신이가 명을 받들고 나서 생각해보아도 지금 중원 본토에서 제 앞가림 하기에도 바쁜 판에 조선을 끌어들여 만주 땅의 이익을 개발하게 되면, 마치 한 집안의 농토를 두 일손이 가꾸는 격이니 손해 볼 것은 없다 싶었다.
물론 그러던 중 조선이 반심을 품게 되면 큰 화란이 되겠지만, 그 전에 – 이홍장의 장담이 맞다면 – 양무의 실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요, 이번 일로 조선이 확실히 대청의 편에 섰음을 공언하는 격이 될 터이니 설령 배신하려 한들 비빌 구석이 없게 될 것이라. 요즘 조정에서 나오는 계책치고는 치밀함이 있다 싶었다.
과연 국왕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주름살로 보건대, 고뇌하는 심정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기야, 국왕의 성정에 이런 일을 흔쾌히 결정한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일 터.
생각에 빠진 국왕을 대신해 동석한 대원군이 물었다.
“대국으로서 소국에 도움을 청하는 것에 대해 따로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소. 대국에서도 이를 충분히 헤아렸기에 지금과 같은 제의를 한 것일테니 말이오. 헌데 만일 우리가 그대의 청을 거절하거나, 오직 법국과의 사이에서 중재만을 하겠다 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잠시 대꾸를 고민하던 마신이는 변죽을 울렸다.
“제물포에 공장이 많이 늘었더군요. 듣기로 곧 서양 나라들처럼 철도도 놓는다 하던데요.”
“자세한 것은 우리 총리대신에게 물어야 하겠지만, 우선은 그렇소. 요새 미리견 땅에 전황(錢荒)이 돌아, 그 땅에서 철길 놓는 일 하던 공인(工人)들이 손을 놀린다 들었기에 데려왔지. 아직은 첫 삽만 떴을 뿐이오.”
“제가 처음 부임할 때만 해도 방직공장 한둘이 고작이었는데, 그 사이 순탄하게 여기까지 왔으니 실로 나라의 복이오 국왕 전하의 어지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공장을 지었으니 이제는 주야를 잊은 채 계속 돌려 그 이익을 얻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나온 물산은 제물포의 부두를 거쳐 어디로 향하는지요?”
저의 말을 이해한 대원군의 표정도 그 아들과 같이 변했다. 그간의 정이 있기에, 차마 이런 수단까지 꺼내기는 미안하였지만, 그 또한 섬기는 조정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하여야 할 말을 남기고 스스로 재갈을 물겠는가.
“물론 조선은 예의를 아는 나라요, 자주지국이므로, 스스로 여기기에 법국과의 신의 또한 중하다고 보신다면 능히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조정에서도 지난 유구국의 문제를 놓고 조선이 일본국의 편을 들어준 데 속셈이 있지 않았는가 미심쩍어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원군 합하께서 아라사 사절에게 말씀하셨다지요. 피득혁(상트페테르부르크)은 연해주에서 멀지만, 이곳 한성은 가깝다고요. 마찬가지로 파려(파리)는 멀고, 북경은 가깝습니다. 이처럼 겁박하는 형세를 갖추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만···.”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누구에게서 찾아야 할 것인가? 탓하자면 이 세상을 탓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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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으로 쓰는 단어인지라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전봇대’, ‘전신주’의 전보와 전신은 우리가 아는 그 전보, 전신이 맞습니다. 요새는 굳이 구분해서 전력만 지나가면 전주(電柱), 통신선만 지나가면 통신주(通信柱)로 부른다지만, 전기와 전신 중 무엇이 먼저 전국에 보급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어원이 무엇인지가 명백하지요.
의외로 조선에서의 전신 개설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청이었습니다. 물론 우정국을 세우면서 함께 전신 설비도 도입하려 했지만 갑신정변으로 어그러진 탓도 있었지요. 1877년 대만에 최초로 전신선이 가설된 이후 10년도 지나지 않은 청불전쟁 무렵에는 중국전보국 산하에 거의 전국 각 성과 북경 사이의 전신이 가설되었습니다. 이후 중국전보국은 자신의 운영방식을 그대로 옮겨 한성전보총국을 설립하고, 인천-서울-의주간 전신선을 가설하였습니다. 물론 18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선 정부 자체적으로 전보를 보급·자주화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지만요. (이렇게 발전한 조선의 전보는 이후 1905년 한일통신협정으로 고스란히 일본 쪽에 넘어가게 됩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실 중국어 – 정확히는 한문 – 는 전신에 꽤 적합한 언어였습니다. 이미 1870년대 초에 외국인들에 의해 자리잡은 전보체계는 모스부호 – 4자리 코드 – 한자의 2중 번역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지요. 미리 만들어둔 전보용 옥편의 몇 페이지 몇 번째 줄 몇 칸에 있는 한자를 보라는 의미로 4자리 코드를 모스 부호로 변환해 전송하면, 전보수가 이를 다시 4자리 코드로 복호화하고, 역보수(譯報生)가 코드를 한자로 옮기는 식이었습니다.
알파벳 대신 0~9에 해당하는 신호만 오고갔으므로 송수신이 간편했고, 역보수의 입장에서는 자주 쓰이는 한자의 코드를 외우면 쉽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에, 한 글자당 많은 정보가 담기는 중국어의 특성상 이러한 전신체계는 꽤 효율적이었습니다. 물론 인력이 다른 방식에 비해 2배로 들어가는 단점이 있었지만, 당대 중국에 있어서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또한 오늘날의 통신망에 비해 훨씬 기술적으로 간단한 체계라는 점도 한몫했습니다. 썩 상태가 좋지 않던 1880년대 조선도 적극적으로 나선 데서 짐작할 수 있지요. (원 역사)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 도쿄-요코하마 전신선 가설을 시작으로 1872년이면 벌써 국제전신 네트워크에 상당히 편입된 상태였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청류파는 강경한 대외정책을 주문했습니다. 후대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사실 아편전쟁에서 지지 않았다는 다분히 정신승리에 가까운 역사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었지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양무운동이 심화될 경우 중국의 전통 사회질서와 국제체제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인식, 그리고 더 가깝게는 회군과 상군 등 군사력을 기반으로 둔 신진 한족 관료들의 약진 앞에 전통적으로 과거를 보아 중앙정부의 관료가 된 이들이 느꼈던 위기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요.
그러나 이들이 완전히 현실에 어두운 것은 아니어서, 원 역사의 청불전쟁 전에도 독일과의 협력을 통한 프랑스의 견제, 독일제 무기의 구매 등등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비스마르크 외교정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기는 합니다만, 전통적 동아시아 지식인이라는 청류파의 한계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변호 – 정당화 말고 – 는 가능할 듯합니다.)
원 역사에서 이와 더불어 나타난 해방·새방 논쟁은 좌종당과 이홍장을 각각 주축으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한편에서는 이리 분쟁이 본격화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원 역사의) 일본의 대만 침공으로 천하질서가 흔들리는 와중에 어디에 주력하여야 하는가를 놓고 벌어진 논쟁이었지요. 이 일을 계기로 좌종당과 이홍장은 완전히 경쟁하는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광서제(즉 서태후)가 직접 둘 사이를 중재하여, 마침내 좌종당이 흠차대신으로서 12만 대군을 이끌고 이리로 출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거둔 승리는 1880년대 청이 겉보기로나마 중흥하는 모양새를 갖추는 계기가 됩니다. 이 역사에서는 대만 침공 대신 연해주 문제의 해결 과정을 보고 러시아를 과소평가하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