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슴이 머무는 섬 (3)
세상에 강한 이들이 있으면 약한 이들도 있게 마련이라, 각자 처신하는 방도가 있다.
“아라사의 무랍욕 경이 자국의 안타까운 사정을 잘 이야기하였기에, 비로소 서로 묵은 오해를 풀고 원한 쌓일 일을 막을 길을 찾았소이다. 귀국이 우리를 지켜주겠다 하는 그 뜻은 고맙지만, 아라사와 다툼이 없으므로 귀국을 수고롭게 할 필요도 없게 되었소.”
민간의 ‘조언자’로 입회한 무라비요프를 옆에 두고, 총리대신 이유원과 러시아 공사 슈트루베가 조러조약 개정에 공식적으로 합의한 다음날, 영국 공사 파크스를 돌려보내며 귀남이 한 말이었다. 그래도 지난번 차관의 일도 있어 빈손으로 보내기는 미안하였으므로 간만에 밤을 구워 한 움큼 쥐어주었다.
위로해주는 시늉을 하며 무라비요프가 일전에 제의한 대로 무언가 뜯어갈 생각으로 왔던 파크스는, 이권 대신 돌아온 군밤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전하, 하교하신 대로 아라사인과 약조하였으나, 신이 미욱하여 장차 우환의 뿌리가 되지 않을까 심려됨을 금할 수 없나이다. 가르침을 내려주시옵소서.”
아연한 심정은 마찬가지였던 이유원이, 국외인들이 모두 물러간 뒤에 조심스레 물었다.
“내 저들의 사정을 듣고 보니, 비록 대서 북방의 강한 나라라 하나 저 연해주라는 땅은 본국에서 멀어 연락이 닿지 않는다 하였소. 그러니 가까운 우리가 가서 그 경영을 돕고, 장차 양국의 우호에 보탬이 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이외다. 저들의 흉포히 횡행함은 오직 자신이 다른 열강에 비하지 못함을 두려워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우리가 인덕으로 대한다면 저들 또한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삼갈 것이오.”
물론 대원군이 제의한 대로 갈 때까지 가 보자며 역으로 겁박하는 방법도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배를 째라고 내밀었는데 정말로 쨀 수 있는 상대 앞에서라면 이 또한 화가 되어 돌아올 뿐이다.
허나 만약 겉으로 들이대는 칼은 그저 곁가지이고 따로 속셈이 있다면, 오히려 잠시 굽히는 시늉을 하면서 잇속 챙길 궁리를 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은 것이다. 적어도 군밤장수 일흔 해 동안 큰소리 칠 일은 없고 큰소리 들을 일만 가뜩 있던 귀남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쏘련, 아니, 아라사가 그가 알던 것만큼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지만, 적어도 지금의 조선보다는 부유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 옛날 대한늬우스에서 어설프게나마 들었던 것처럼 서독에 광부 보내듯 외화벌이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디 이역만리 가는 것도 아니요 그저 강만 건너면 되므로 오히려 더 이롭고 백성도 덜 괴로울 듯했다.
“아조는 예로부터 땅은 좁으나 사람이 많아, 작은 기근이 들어도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백성이 많았소. 그런데 지금 저 연해주는 땅이 넓지만 사람이 적다 하니, 어찌 우리와 아라사 두 나라가 사귐에 이로움이 없겠소이까?”
명분으로는 ‘양국 접경지대의 발전과 평화’를 위한 조약이었다. 조약 전문(前文)에, ‘이 조약의 취지는 이처럼 두 나라의 특수한 상황에 말미암은 것이므로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준용할 수 없다’고 못박기까지 하였으므로, 무라비요프 백작은 더욱 흡족하게 여겼다.
“설령 나중에 조선인들이 다른 나라에게 최혜국 대우를 보장한다고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예외사유로 들이밀 수 있겠지. 어떤가?”
“훌륭하십니다, 각하! 저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시늉을 하면서 이권을 모두 얻어내셨군요!”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와 교섭 내용을 전달해주자, 뷰초프가 찬사를 보냈다. 물론 아첨이 조금 섞이기는 했지만 진심도 적잖이 들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 조약으로 얻어낼 조선 내의 이권도 러시아가 독점하는 꼴이 된 것이다.
혹시나 조선인들이 나중에야 산마다 러시아인의 벌목장이 세워지고 포구마다 러시아인들이 들어차는 것을 보고서 딴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통상과 이동, 심지어 거주의 자유까지 못박아놓지 않았는가. 물론 ‘접경지대’를 조약의 대상으로 명시하였으니 아직까지는 그 함키온(함경도) 지방만을 열어두는 데 그쳤지만, 그 정도로도 라자레프 항(원산)이 러시아의 사정권 안에 들어왔으니 충분한 성과다.
“그런데 동일한 권리를 조선 쪽에도 인정해주신 것은 어째서인지요?”
감탄하는 뷰초프와는 달리 펠드가우젠은 당장 도시를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더 캐물었다.
“그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선인들을 이쪽으로 끌어올 수 없으니 그런 것이지. 지금처럼 저들 땅에서 곡량과 농우를 계속 수입해올 수는 없지 않은가. 보이기로는 한 나라에만 특혜를 주는 조항도 없으니 영국 놈들도 대놓고 딴지는 못 걸 것이고···.”
아무르 강가에 농업지대를 조성하려다 실패한 이후로, 식량자급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 무라비요프였다. 언뜻 듣기로 함키온의 조선인들은 이곳 연해주와 별반 다르지 않은 땅에서도 잘만 농사를 짓는다 했으니, 데려와 연해주를 개간케 한다면 어느새 블라디보스토크의 고질이 된 식량의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겉보기로 너무 조선에게 유리하게 (즉,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정하게) 조문을 짰기 때문에 영국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이라도 러시아가 조선을 괴롭히는 모양새가 나와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파크스 그 자와 교섭한 것은 어디까지나 영국의 개입을 막기 위한 물밑 작업에 불과하였으니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정 저들이 추궁하려 든다면, 자신은 그저 러시아 공사에게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 찾아간 민간인일 뿐이었다고 둘러되면 될 일 아닌가.
“내 일전에 아이군에서 중국인들과 협상하면서 본 것이지만, 동양인들은 자존심은 높아도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굼뜨기 그지없네. 그러니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조선인들은 그들 중에서는 가장 명민하고 우수한 인력일 것이야. 저들 왕의 통치보다 우리 차르 폐하의 개명된 다스림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알 정도의 조선인들이라면, 우리 국민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기대가 무참히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각하, 조선 수도로부터의 연락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을 쉽게 바꿔서는 안 되니, 적어도 몇 해는 두고 본 뒤에 재론하자며 슈트루베 공사의 재개정 제안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후, 그런가···. 고맙네, 뷰초프 군.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무라비요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체통을 생각해 머리를 감싸쥐려던 손을 애써 제지하며, 펠드가우젠이 창문 밖을 내다보는 무라비요프에게 물었다. 천생 군인인 그로서는 도저히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였다.
“벼가 익으니 마치 황금 벌판 같구만. 우랄의 밀밭과는 또 다른 멋이 있네그려.”
펠드가우젠의 집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루스키 섬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멀쩡한 벌판을 남기는 것은 죄악이라는 듯, 빈 땅뙈기가 있으면 무어라도 심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조선인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저 눈앞에 보이는 금빛 이삭. 분명 아열대가 원산지라는 작물을 왜 이곳까지 와서 심으려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건 멀쩡히 자라나 수확을 앞둔 벼는, 마치 어리석은 일이라 비웃던 러시아인들을 놀리는 듯했다.
“다 차르 폐하의 은덕 아니겠습니까. 그 은덕에 고마워하기는커녕 단물만 챙기고 있으니 문제지만요.”
차라리 조선 정부가 지금껏 나라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다면 사정은 조금이나마 나았을 것이다. 경흥부에 개시가 열려, 블라디보스토크와 그 일대 사람들이 오간 지도 팔 년차. 서로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게 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조러조약 개정이 발표되자마자, 이백능의 뒤를 이어 경흥부의 참의대부로 나선 전 경흥부사 이석영(李錫永)이 산당(山黨)이 내놓는 『해동신보(海東新報)』에 연해주의 식민지원 정책을 소개하며 ‘가자 北으로!’를 외쳐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간 조선과의 교역으로 조금이나마 줄였던 연해주의 재정적자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고, 갑자기 인구 일만을 넘긴 블라디보스토크 시 곳곳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저녁마다 올라오게 되었다. 두만강변의 사정은 더욱 심각해, 초소와 초소 사이가 논밭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심지어 포시에트에서 올라온 보고로는, 초소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현지인들이 품삯을 주고 참새 따위를 쫓게 시킨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개간지원을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효험이 없었던 모양이지?”
“예, 귀화하고 3년간 정주하지 않으면 종자와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포고했습니다만, 그랬더니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귀화하지 않고 일만 하다가 겨울에 돌아가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으니 대신 농기구 장사를 하기 위해 조선인 상인들이 몰려오기도 했고요.”
“어째 요새 도시 외곽에 조선식 가옥들을 많이 짓더라니.”
“소식을 듣고 새로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들도 태반이 조선과의 교역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스위스에서 건너왔다는 포목상 브리너(Jules Brinner) 씨도 박 무어라 하는 조선의 귀족 가문과 협력해 제지공장을 세우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공장을 세우고, 창고를 짓는다고 하면, 주인이 조선인인 곳에서는 당연히 말 통하는 이들을 부릴 것이고, 설령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임금이 싼 조선인을 들일 것이다.
“어떻게든 저들의 유입을 조절해볼 수는 없겠나?”
“이미 많은 수를 써 보았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내에 거주지가 없으면 고용할 수 없게도 해 보았고, 어떻게든 머무르는 동안에라도 세금을 납부하게도 해 보았지만, 그래도 계속 들어올 자들은 들어올뿐더러 잔머리를 굴려서 피할 방도를 마련하기까지 하니, 여의치 않더군요.”
비록 전근대 행정이라고는 하지만, 어지간한 평민들도 여차하면 관청에서 소장 쓸 줄은 알 정도로 관을 대하는 데 익숙한 조선인들이다. 아직 지방행정에 어설프다 못해 중세적인 구석까지 남아있던 러시아의 지방관들은 그들의 눈에 순박하게 보일 정도였다. 가뜩이나 서로 비슷하게 생겨서 잘 구분도 되지 않는데, 경흥 토박이 김판돌이 저 편할 때마다 보리스 박으로도, 아나스타스 최로도 둔갑하는 식이니 뭔가 꼬투리를 잡아 규제하려도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 해보게. 나랏돈이 헛되이 빠져나가는 것은 막아야지. 이대로 조금만 버티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게야. 이곳 블라디보스토크가, 나아가 연해주 전체가 제국의 앞날을 지킬 보루로 자라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성장통이라 생각하게나.”
“하지만 이대로라면 조선인들의 유입을 늦출 수는 있어도 막지는 못할 겁니다. 이 추세라면 상주인구로만 세어도, 길어도 오 년 내로 연해주 인구의 과반을 조선인들이 차지하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여전히 창밖의 황금빛 경치를 감상하던 무라비요프가 돌아서 펠드가우젠을 직시했다. 수심 가득한 군정관과는 달리, 백작의 얼굴에는 야심인지, 희망인지 모를 것이 어려 있었다.
“그래, 확실히 내가 조선 국왕이나, 조선인이나 모두 과소평가하기는 한 것 같네. 우리가 군을 내보이면 절로 겁을 먹어서 꼬리를 내릴 줄만 알았건만, 이렇게 역으로 우리를 이용하려 들다니, 그 재치는 확실히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군.”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건가? 그루지야(조지아)의 백성은 거의 모두가 그루지야인이지만, 차르 폐하의 신민인 것은 똑같지. 블라디보스톡이, 연해주가 조선인들 천지라고? 조선 전체가 러시아의 것이 되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오히려 우리가 조선에 개입할 명분이 되기도 하겠지. 이렇게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가 가까이 있으니, ‘이웃한 나라의 정’으로서 개입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그 반대로, 앞으로 러시아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조선이 개입할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무라비요프도, 펠드가우젠도 그럴 가능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인의 유입으로 생길 눈앞의 손해와, 먼 앞날의 이익을 놓고 의견이 갈렸을 뿐.
“이 도시를 보게. 반절은 유럽, 반절은 아시아. 우리 제국 같지 않은가? 타타르의 굴레를 벗어던진 이후로부터 우리는 계속 동쪽을 향해, 야만을 향해 달려왔네. 만날 때마다 찢어 없애는 대신 우리 안에 품었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지. 선대 차르께서 아무것도 없는 젊은이었던 나를 믿고 아무르로 보내신 것도, 제국의 운명이 그러함을 아셨기 때문이야. 걱정하지 말고, 지금 할 일에서 최선을 다하게나,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펠드가우젠)”
잠깐이나마 무장한 사내들이 서로 총 겨누며 경계하던 녹둔도 갈대밭에 철새가 돌아왔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강어귀 가장자리에 살얼음 조금씩 끼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크게 눈 한 번 내리면 이제 내년 봄까지는 맨땅을 보기 어려울 듯했다.
여름 내내 경흥개시에서 경비를 서다 다시 순번이 되어 녹둔도로 돌아온 한 광양 병사가 한탄했다.
“에휴, 북변 추위는 한 번이면 길이 들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이라. 추위는 여전히 그대로여서, 암만 솜옷을 껴입어도 벌써부터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요새는 부업이 쏠쏠하여, 제대로 겨울이 찾아올 무렵이면 지금 속에 껴입은 솜옷 위에 겉옷을 한 겹 더 걸칠 수 있을 듯했다. 군복 모양새가 부풀어올라 영 웃기게 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엄동설한에 맨몸이나 다름없는 군복으로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여기 날씨, 그래도 따뜻하다. 여기 옆이 바다. 나 원래 있던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멀리 북쪽. 진짜 춥다.”
반대편에 서 있는 병졸이 제법 유창한 조선말로 대꾸했다. 이름이 이반인가 미샤(미하일)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다들 비슷하게들 생겨서 잘 구별은 되지 않지만, 어차피 마우재 이름도 죄다 거기서 거기다.
그 사이 한 번 두 나라의 높은 분들이 훑고 지나가면서, 갈대밭 가운데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지고, 그 선을 따라 여기저기에 초소와 검문소가 들어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지점을 지키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라, 그나마 가까이 있는 사람들끼리 말동무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황현 상사처럼 꼬장꼬장한 사람이 보게 되면 경을 치겠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제 등 뒤를 경계하고 있는 마우재 군졸이 먼저 제게 알려줄 테니 그리 걱정은 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저 또한 아라사 쪽에서 그쪽 군관이 오지는 않는가 한 눈으로 살피고 있지 않던가?
그때, 멀찍이 마른 갈대가 들썩이더니, 사람 머리통이 불쑥 올라왔다. 상투만 보아도 조선 사람이요, 이 시기에 몰래 넘어가는 이라면 사냥철 되기 전에 미리 목을 살피러 가는 포수일 테다. 자세히 보니 일면식 있는 사람이라, 알아보았다는 표를 내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어제 근무 끝나고 마을 내려갔다가 만난 포수였다. 나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인지, 엽전 따위가 아니라 새로 서울서 나왔다는 반짝거리는 동전으로 값을 치렀다.
“누구냐 저 사람? 그라니차(경계) 넘는다.”
물어보면서도 은근슬쩍 제게 손 뻗는 꼴을 보니, 그저 형식적인 물음인 듯했다.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다. 아라사 땅 안에서 생업에 종사할 이들은 반드시 신고를 하고 세금을 내라 하여, 세금이라면 학을 떼는 조선인들, 특히 며칠 머물다 나올 포수라던지, 한철 바짝 일하고 돌아올 일꾼들은 이렇게 아라사와 뭍으로 이어진 녹둔도를 거쳐가고는 했다.
“사람 아니다. 그 뭐시기냐, 알렌이다. 알렌(사슴).”
챙긴 동전 중에서 미리 떼어둔 얼마를 슬쩍 꺼내, 저를 향한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어차피 이곳에 배속된 군인이 돈 쓸 곳이야 조선인 마을 아니면 진짜 조선 마을뿐이니, 큰 상관은 없었다.
“아, 다시 보니 알렌 맞다. 이 동네, 원래 알렌 많아서 이름도 알렌 섬이라고 한다고 들었다.”
사슴 머무는 섬 녹둔도(鹿屯島)의 모습이 요새 대개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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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주의의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우선 확장한 뒤 경제적으로 유지할 방법을 탐색하는, 다시 말해 질러놓고 보는 그 확장주의적 면모에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이 다른 열강에 비해 뒤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토 확장에는 적극적인 면을 보였는데, 여기에는 경제적 요인보다는 끝없는 확장으로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 서구 열강과 대등한 입지에 서고자 하는 정치, 문화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매한 상황에 놓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실제 역사에서 1880년대 이전까지 러시아가 보였던 대조선 정책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860년대부터 비공식적으로 조선과 교역이 시작되었지만, 공식적으로 두 나라 사이에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민간 차원에서 교역을 요구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러시아 정부 차원에서는 오히려 조선이 쇄국한 채로 상황이 유지되기를 바랐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과의 비공식적 육로교역이 극동의 유지에 필요했던 반면, 개항을 통한 해로교역이 시작되어 다른 열강들까지 개입할 경우 극동에 대한 국력투사에 있어 절대적으로 열세에 있는 러시아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육로를 통한 교역을 공식적으로 보장하는 조약을 맺자니, 다른 국가들의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컸지요. 따라서 러시아는 육로통상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다른 열강들의 개항에 끼어 조약을 체결하는 정도로만 그치고, 다른 국가가 조선을 보호령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 한 별도의 개입을 하지 않는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셈법은 1891년 시베리아횡단철도가 부설되고, 발칸과 중앙아시아에서의 러시아 확장정책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만주를 통한 중국 개입이 가능해졌으며, 전세계적으로 격화된 식민지 쟁탈전으로 인해 개입할 필요성도 생긴 것이지요.
원래의 역사에서 조선은 자국민이 러시아령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로 넘어가는 조선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각오를 하고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1880년대 중국인들이 봄에 넘어온 뒤 가을에 돌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로서 연해주로 대거 유입된 것과 비교됩니다.). 이주한 조선인들은 개척자들에 대한 러시아 지방정부의 지원정책에 힘입어, 황무지 개간에 있어 상당한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도 밀과 콩(지금도 러시아 극동은 러시아 내 전체 대두 생산량의 42%를 생산합니다)의 재배에 성공했으며, 러시아 당국 또한 이에 고무되었습니다. 이후 러시아와 국교를 맺은 이후로는 조선인 노동자의 계절노동도 양성화되어, 1891년에는 5천 명에 달하게 됩니다.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인 이민을 조절할 필요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었고 (이전에도 1869년 경흥부와의 합의에서 볼 수 있듯 속도 조절의 시도는 있었습니다), 1884년 조러조약 체결 시점까지 이주한 약 9천 명의 조선인들은 러시아 국적으로 편입시키고, 그 이후 유입 인구는 2년 이상 체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1898년 5년 이상 체류자에 대한 국적 편입 조치가 내려지는 등, 저 ‘2년’ 기한은 제대로 준수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러일전쟁 패배로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가 기정사실화되면서, 러시아 당국은 연해주 한인들을 안보상 불안요소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도 한인들은 연해주 산업-특히 광업과 농업-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이후 스탈린이 강제이주정책을 취하기 전까지 이러한 위협인식은 구체적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담으로, 훗날 만주로 간 조선 농민들은 고집스럽게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쌀에 대한 한민족의 집착 내지는 사랑을 엿볼 수 있지요. 러시아로 넘어간 한인들의 경우는 – 아마 벼 자체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듯합니다 – 이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만,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 이후 중앙아시아에서까지 벼농사를 고집했던 것으로 볼 때 연해주에서도 어떻게든 벼를 재배했을 듯합니다.
지나가듯 언급된 쥘 브리너는 1870년대 블라디보스토크를 기반으로 활동한 무역상입니다. 조부의 이름을 물려받은 손자가 바로 배우 율 브리너입니다. (율 브리너가 누군지 모르신다면, 축하합니다. 당신은 젊습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대조선 주력 무역상품은 영국산 직물이었습니다. (반대로 주 수입품은 농우와 곡물이었습니다.) 비록 밀무역이라고는 하지만, 접경지대 주민들을 제대로 조선이 통제하지 못했기에 – 또는 통제할 의지가 부족했기에 – 육상무역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1888년 조러육로통상장정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