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슴이 머무는 섬 (1)
때는 바야흐로 계춘(季春) 삼월이건만, 두만강 살얼음은 온전히 걷히지 않았고, 가끔 흐르는 물이 보이는 곳에는 종종 상류에서 떠내려온 얼음덩이가 두둥실 떠내려갔다.
“어, 강바람 시렵다. 거 나라 지키기가 이리 고될 줄이야.”
“제기, 같은 조선 땅인데 삼월에 이리 춥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어허, 이 사람. 상사 나으리께서 들으실 지도 모르네.”
지금 입김 호호 불며 두만강 건너는 것은, 광양 고을에서 올라온 장정 백 명중 가려 뽑은 서른 명이요, 그들이 이 한겨울 같은 봄에 강바람 맞는 것은, 전부는 아닐지라도 열에 아홉이 꼬장꼬장한 열아홉 살 젊은이 황현(黃炫) 상사 탓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사(水師. 수군)에 지원할 걸 그랬네. 암만 고되어도 얼어 죽을 걱정은 안 했겠지.”
말 많고 탈 많던 신미병정(辛未兵政)의 연병법(練兵法)도 이제는 마침내 첫발을 내디뎌, 팔자 사나운 전국의 젊은이들이 군문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생각해 첫 번째 초모에 응한 광양현 장정 중 몇몇은 암만 그래도 천역(賤役) 취급인 수군은 안 된다 여겨 그 육군이라는 것을 하겠다 나섰고, 조금 더 나라일 돌아가는 모양새에 밝던 이들은 그랬다가 어디 먼 곳에 끌려갈 수도 있음을 알았기에 모두 수군으로 몰려갔다. 그러다 보니 향안에 이름 올린 집안의 자제는 황현 혼자뿐이라, 자연스레 최상급자가 되어 분에 넘치게 상사 자리도 얻게 되었다.
“뭐, 엎치나 메치나지. 어쨌든 배는 타게 되었잖수?”
길잡이 노릇하러 따라온 경흥부 군사가 옆에서 슬쩍 놀려대었다. 같이 새 연병법으로 인해 입대한 사내지만, 이전부터 종종 강 건너가 농사도 짓고 마우재(러시아인) 상대로 장사도 해 보았다는 사람이라, 저의 동향 청년들과 함께 범 잡으러 가는 대신 여기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조선 땅에서 인명을 가장 많이 살상하는 것은 역병 다음으로 산짐승이라, 북변에서는 새로 군복 입은 장정들을 그대로 착호(捉虎)에 투입해도 되었지만, 삼남은 산이라 해도 지리산, 속리산, 태백산 정도가 아니라면 심산유곡도 얼마 없어, 고스란히 남는 만큼을 북쪽으로 올려보내게 되었다.
‘그렇다고 기껏 총을 들려준 장정들을 군병으로 쓰지 않는 것도 온당치 않은 노릇이니, 국경을 지키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국경이라 하면 휴전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던 귀남의 제의를, 삼군부에서도 그럴듯하게 여겼다. 게다가 함경도 쪽은 길림을 지켜달라는 청국의 요청도 있었겠다, 엄연한 서양 나라인 아라사와 접경도 했겠다. 병력이 긴요하기도 했다.
물론 남쪽에서 지내던 젊은이들이 갑자기 두만강변 삼수, 갑산으로 끌려가는 꼴이니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본토박이 함경도 토병(土兵)들은 죄다 호랑이 잡으러 산과 들을 누비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어, 다 건너왔다. 여기가 그 뭐시기냐. 녹 뭐라 했었지?”
“녹둔도(鹿屯島)라우. 뭐, 섬도 아니지만.”
상사라는 것이 기실 그리 대단한 자리도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도 딴에 벼슬이라 여겼는지, 황현은 이곳에 오자마자 무슨 제의를 한다, 시책을 올린다 하며 매일같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저 작자가 지나가는 토병에게 ‘자네는 왜 상관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가’ 하고 시비를 걸지 않는 것 정도로 만족하던 병사들도, 저러다 언제고 큰일을 내지 않을까 슬슬 근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강 건너편’이 모두 아라사 땅이라던데, 자신이 서적을 상고하여 본즉 건너편에 있는 녹둔도도 본디 조선의 땅이라, 그 옛날 이충무공이 공적을 세운 곳이니 다시 보(堡)를 설치하고 아라사 당국에도 이를 통지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며 경흥부사에게 건의를 올린 것이다.
경흥부사가 생각하기에도 어차피 그쪽에 사는 것은 조선인들뿐이요, 아라사인들은 근방에 살기는커녕 듣기로 강 건너 한 백 리는 들어가야 나오는 포섭(포시에트)인가 하는 곳에 마을 하나를 이루고 있다 하였으니 딱히 문제될 것은 없고 공적될 소지는 많아 보였다. 그리하여 병사를 붙여주고 우선 강을 건너가 정탐해보라 시킨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저 건너편 보(堡)의 권관(權管) 허벽(許璧)이 이끄는 일행이지만, 그 역시 딱히 의욕이 없어, 지금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다.
강을 건너서 도로 뭍을 밟자마자, 멀찍이 망루에서 감시하던 아라사 병졸 몇몇이 달려왔다. 어차피 강 양안에 조선인 마을이 있으니 사람들 오가는 일쯤이야 자주 있지만, 총 들고 군복 갖춰 입은 무리 수십이 건너오니 눈 대신 옹이구멍을 달아놓았다 해도 뭔가 다름을 짐작할 법했다.
“너희, 초소닌(조선인)? 살다띄(군인)? 여기, 우리 땅. 어서 돌아가.”
물론 아직껏 갖은 욕 다 먹으며 군 생활하고 있는 이필제처럼 북변 군졸 중 죄 짓고 충군(充軍)된 이가 많다지만, 이는 아라사 쪽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주변에 감시할 사람은 없겠다, 강 건너편에 아라사와 교역하는 경흥개시(慶興開市)도 있겠다. 근무 끝나고서 – 조금 더 담대한 군사들은 근무 중에도 – 강 건너와 술 한 잔 걸치고 가는 것은 일상이었으므로 다들 조선말 한두 마디씩은 할 줄 알았다.
“그 무슨 말인가? 이곳 녹둔도는 비록 강가의 작은 땅뙈기라 하나, 개국 이래 열성조의 은덕으로 엄연히 지켜 내려온 강토일진대, 어찌 그대들의 땅이라 하는가?”
황현이 카랑카랑 따지고들었지만, 쇠귀에 경 읽기다. 러시아 군사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소곤대더니, 곧 한 마디 던지고선 돌아갔다.
“나리 말, 어려브다. 니 파니마유 (못 알아듣겠다). 너희, 기다려라. 우리 카피탄(대장) 데려온다.”
“그래서, 강 하구의 그 땅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예, 노브고로드 요새로부터 들어온 보고는 그렇습니다. 저들 말로는 강의 유로가 바뀌기 전에는 원래 해당 구역이 조선의 영토였으며,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었다 하더군요.”
경흥부사야 한두 해에 한 번씩 갈리는 자리다. 현지 물정에 어두우니 아래의 군관과 향리들이 적당히 입만 맞추면 어지간한 대형 사고가 터지지 않는 이상은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 여름 되면 화전 일구러 강 건너가는 이들이 경흥부에만 족히 수십 호는 될 테지만, 이 또한 여태껏 크게 문제 되지 않았으니, 같은 이치다.
그러나 군제개혁을 하면서 동네 사정 모르는 외지인들이 우르르 들어와 헤집고 다니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어느덧 인구 팔천을 넘겨 그럴듯한 도시 형세를 갖춘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책을 논의하는 신설 블라디보스토크 군관구의 수뇌부가 알 수 있는 사정은 아니었지만.
“친애하는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날이 번창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초대 군정관 펠드가우젠(Александр Ф. Фельдгаузен)이 도시의 최대 후원자라 할 수 있는 무라비요프(Николай Н. Муравьёв-Амурский) 백작의 의견을 구했다. 비록 총독직에서는 물러났다지만, 극동에 제국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주장하며 은퇴도 미루고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해 도시에 필요한 지원을 여기저기서 끌어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무라비요프였으니, 그의 의중을 무엇보다 우선해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니콜스코예(현 우수리스크)에 연통을 넣어서 우수리 강가의 모든 카자크를 소집해 쳐들어가고 싶지. 마음 같아서는 말이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우리도 멀쩡할 수 없겠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조선이 개항하면서, 아무르 강(흑룡강) 유역에서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문제가 절로 해결되었을 때는 마냥 좋아했다. 자신의 모험심 넘치는 개척 계획에 슬슬 질렸다는 눈치가 돌아오면서, 은퇴를 조금씩 고민하던 차. 시베리아 기준으로는 지척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 고작 130베르스타(약 140km) 떨어진 곳에 늘 부족한 곡물과 농우를 들여올 수 있는 시장이 열렸다는 소식만큼 반가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런 독이 또 없었다. 몇 년 사이에 하나의 도시를 자칭할 만큼 커진 블라디보스토크지만, 모피를 팔아 곡식을 들여오는 지금의 상황이 무너져내린다면 크기는 도리어 약점이 될 것이다. 조선과의 무역으로 겨우 적자의 규모를 줄인 지금의 극동 개척이다. 조선의 빈자리가 드러난다면, 지금까지 극동에서 자신이 벌여왔던 모험이 러시아의 위엄이라면 모를까 금고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음이 밝혀지게 된다.
“쳐들어가서 강 건너편의 모든 마을을 노략질해 사람이란 사람을 다 잡아온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우리는 문명인이지, 타타르가 아니니 말일세.”
“각하, 하지만 저들의 침탈 행위를 방관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고르차코프 공작께서···.”
“되었네. 그 얘기라면 벌써 자네가 돌아온 뒤 하루에 세 번씩 듣고 있지 않은가.”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갔다가 도로 이곳 극동까지 돌아온 전 조선공사 – 개인적으로는 백작의 옛 비서 – 뷰초프가 말했다. 여독도 풀리지 않았는데, 고르차코프 같은 실권자에게 직접 면박을 당한 충격이 컸는지 아직도 낙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젊은 뷰초프 군의 말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조선 반도를 놓고 영국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조선에 양보하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중국도, 일본도 영국의 힘을 빌려 우리에게 대들지도 모릅니다.”
“후, 어렵군. 어려운 일이야. 그렇다고 함부로 윽박질렀다가는 그걸 빌미 삼아 영국 놈들이 끼어들 게 뻔하고···.”
바다를 보며 한동안 생각에 빠진 무라비요프 백작이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우수리 쪽의 트루베츠코이(Пётр П. Трубецкой) 공작에게는 내가 연락하겠네. 군을 움직이도록 하세나. 직접 쳐들어갈 수야 없다지만, 시늉은 낼 수 있겠지. 예프게니 (뷰초프) 자네의 후임이라는 슈트루베 (Кирилл В. Струве), 그 친구는 성정이 어떻지?”
인수인계를 하면서 잠깐 만난 사이였다. 잠시 고민하던 뷰초프는 무라비요프가 알아들을 법한 표현으로 대답했다.
“찻잔과 도자기를 모으는 게 취미인 사람입니다.”
괄괄한 무라비요프의 성격에는 사내로 보이지도 않으리라. 하기야, 조선이 영국과 결탁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기 이전에 결정된 인사이니만큼, 젊은 외교관의 첫 부임지로 나쁘지 않다고 본국에서는 판단했을 것이다.
“하! 덕분에 이 나이 먹고서 다시 현장에 돌아가게 생겼군.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펠드가우젠), 날랜 배를 한 척 준비해주게나. 예프게니 자네는 도쿄에 전신을 좀 보내주고.”
다른 건 몰라도, 도자기 컬렉션을 늘릴 기회가 되리라 생각하며 은근 기대를 품고 부임한 러시아 공사 슈트루베는 이 동네 말로 아닌 밤중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물론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장군들이 속된 말로 막 나가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막 나가는 성미를 하필 자신이 있는 – 그것도 이제 막 부임한 – 나라에 풀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당장 물러나라 말하시오! 어찌 서로의 영토를 불침하겠다 약조한 나라로 이러한 폭거를 범할 수 있소이까?”
그의 조국이 조금만 더 힘이 셌더라면, 오만하게 ‘이 정도로 끝내는 데 만족해라’라고 해줄 수 있겠지만, 극동에 결코 그 정도의 여유가 없음은 전문가가 아닌 슈트루베의 귀에도 들려올 정도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랬던 것일까? 도쿄를 경유해 들어온 급보에 따르면 국경을 이루는 강 하구의 작은 섬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하였다.
“총리 각하, 우리 차르 폐하와 폐하의 충직한 종복인 우리 정부는, 결코 러시아의 친구인 조선의 안전을 침해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건은 어디까지나 사소한 오해로···.”
“그럼 저 녹둔도 앞에 눌러앉은 것은 귀국 군대가 아니라 어디 말갈족들인 모양이구려?”
애초에 이 나라가 개화를 위해 내걸었던 명분이, 북변 땅에서 내려오는 러시아에 대응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미국 같은 나라가 강화도에 상륙하려 했다 하면 항의에 앞서 혹시 길을 잃은 것은 아닌가 먼저 물어보았겠지만, 하필 다툼이 붙은 것이 러시아였으므로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었구나’ 하는 분위기가 조야에 팍 퍼졌다. 거기에 좋은 건수를 건졌다 여긴 영국의 파크스 그 자가 여기저기에 충동질하면서 바람잡이 노릇을 하고 다닌 것도 있었으리라.
그 때문에 노기등등하게 들이닥친 총리대신 이유원에게 슈트루베는 졸지에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청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두만강 이북을 점유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마 귀국에서 지형을 잘못 조사하여 이렇게 된 것은 아닌지···.”
“되었소. 당장 녹둔도에 들어간 우리 군사들을 풀어주고, 해당 섬이 추호의 의심도 없는 우리 강역임을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또한 귀국이 신의 없는 나라임을 만방에 알릴 수밖에 없소!”
황현이 급히 출동한 러시아군 장교와 언쟁을 주고받고, 그 이후로 갑자기 경성에 드나드는 러시아군 병사들이 뚝 끊기게 되자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 정도는 누구든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병력을 모아 두만강변에 배치하고, 호랑이 잡으러 산으로 들어간 함경도 병사들을 급히 부르는 한편 녹둔도에도 병력을 보냈는데, 하필 그 시점에 남하한 러시아군과 대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 사이 제대로 된 포함 한 척까지 구매하여 연습함만 있는 신세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러시아 태평양전대도 홀로 당해낼 수 없는 조선 해군이었다. 두만강 하구를 그대로 포위하고, 강가에는 포를 배치하였으므로, 녹둔도에 들어간 조선군은 훤히 반대편 강안이 보이건만 포위된 신세가 되어버렸다.
“자, 우리 허세는 그만 접읍시다. 어차피 그대들이나 우리나 내보일 수 있는 패가 그리 많지 않음은 똑같지 않소?”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공사관 한편에서 나타난 무라비요프 백작이 한 마디 던졌다.
아무리 명분이니 도의니 내세워도, 외교전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블러핑이라면 러시아를 따라올 자가 없다. 유럽의 외교계에서는 누구든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다지만 근본이 선량하고 유약하다는 조선 국왕, 그리고 그보다 못나면 못났지 잘나지는 않았을 조선 정부는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왕년에 아무르 강을 놓고 청국 관리들을 윽박지르던 때를 생각하며, 무라비요프는 목에 힘을 주었다.
“그대들은 이렇게 큰소리를 치다 보면 저기서 영국이 듣고 도와주러 달려올 것을 기대하고 있겠지. 하지만 고작 차관 한 번 준 사이인데 과연 영국이 그 정도의 의리를 위해 남의 나라 다툼에 끼어들 것이라 생각하시오?”
강가의 조그만 섬 하나를 가지고 정말 전쟁까지야 가겠냐만, 동양의 이 조그만 나라에서는 알 리가 없다. 아무리 러시아가 극동에서 보유하고 있는 전력이 다른 열강에 비할 바 아니라지만, 조선 같은 나라의 손목 비틀기에는 족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잊지 마시오. 영국은 멀고, 우리 군대는 당장 강 건너편에 있지. 물론 이 나라도 그간 나름대로 노력을 하긴 했겠지만, 그 노력이 충분한지 나라의 명운을 걸고 확인해볼 각오는 되어 있소이까?”
무어라 대꾸를 하려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동양인 총리를 보면서, 무라비요프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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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연해주, 동시베리아 등등)의 개발과 조선 사이에는 의외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1860년 이전부터 이미 두만강 북쪽으로 조선인들이 이주하거나, 적어도 여름철 농사일을 위해 월경하는 일이 있었고, 1860년 연해주를 러시아가 얻어내면서부터는 이주가 본격화되었지요.
이미 1860년대에는 국경을 넘어 러시아와 통상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고, 러시아 역시 조선의 변경 주민들이 관헌과는 달리 교역에 적극적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1860년 이후에도 러시아쪽 두만강 건너편이 무인지대(공광지)임을 주장했고, 번국과 외국 사이에 직접적인 연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청도 이러한 관점을 지지해주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러시아와 조선의 첫 번째 접촉은 그래서 경흥부사와 국경의 포시에트에 소재한 노브고로드 요새 사령관 사이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고종 집권 후에도 고질적인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러시아의 이주민 우대정책 소식이 퍼지면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인구 4천 명의 마을이었던 원 역사의 1878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로 이름 중 하나가 ‘고려 거리’일 정도로요). 그러나 이는 원래 러시아 본토의 빈민과 농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러시아 개척민보다 조선(그리고 적잖은 한족)인들이 더 많아질 판이 되자 러시아측은 조선과 협상해 조선 이주민들을 퇴거시킬 계획을 짜게 됩니다. 물론 이 역사에서는 일어나지 않을(아마도) 일입니다만.
열악한 경제력과 교통 상황으로 인해, 매년 엄청난 적자를 내었던 극동 개발에 있어서는 인력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아무르의 무라비요프) 백작은 동시베리아 총독으로 재직하면서 바이칼 일대의 카자크인(그리고 시베리아에서 유형·노역살이를 하던 농노들)과 형벌을 받은 군인들을 이용해 새로운 국경에 식민사업을 벌이고, 1850년대에 자신이 청나라에서 얻어낸 아무르 강 하류 일대에 농경지를 개간하려고 했지만, 여러 어려운 여건이 겹쳐 실패했습니다. 원 역사에서 작중 시점이면 여러 실패 끝에 공직을 내려놓고 파리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어야 합니다만, 여기서는 조선과의 교역 덕분에 조금이나마 러시아 극동의 발전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개통 전까지, 연해주는 결코 러시아에게 이익이 되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열악한 교통상황으로 인해 효과적인 전력투사가 불가능했고, 중앙아시아와 극동 양쪽에 모두 국력을 투사하기에는 한계가 명백했지요. 1850년대 에도 막부와 사할린-쿠릴 열도의 영유권을 놓고 협상할 때도 에도 막부 쪽에 어느 정도 양보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는 1880년대까지도 조선의 개항에 부정적이었습니다. 태평양으로의 진출 가능성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만약 조선이 여러 열강에게 골고루 열리게 되면 객관적으로 국력이 부족한 러시아가 밀릴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이지요. 이는 무라비요프 같은 모험가 소질 다분한 확장주의자들에게는 적잖은 불만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비슷하게, 주로 군부가 일을 먼저 일으키고 정부가 따라 끌려가는 경우가 있었지요.
극동군관구(Владивостокское военное губернаторство)는 원 역사에서는 1880년에 세워지고, 이후 1888년 인근의 다른 지역단위와 합쳐져 연해주(프리모리예)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선과의 통상으로 고질적인 식량 문제가 해결되면서 도시의 성장이 한결 빨라졌습니다.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에 형성된 작은 섬입니다. 17세기 이후 토사 퇴적으로 두만강의 유로가 바뀌면서, 한쪽이 막혀 러시아 쪽과 연결된 반도가 되었지요.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분명 조선의 영역에 속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북변에 배치되어 있던 시절 여진족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지요 (이를 기리는 비석을 1898년에 녹둔도에서 보았다는 러시아 측의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에서도 녹둔도를 섬으로 그려놓는 등, 실제로 조선 후기까지 녹둔도를 제대로 관리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정황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녹둔도에 거주하던 적잖은 조선인들은 어물쩡 ‘고려인’이 되었지요. (여담으로, 고려인들을 흔히 ‘카레이스키’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정확하게는 카례예츼(Корейцы, 단수 (남) 카례예츠кореец)가 맞습니다.
황현은 본래 광양 출신입니다. 실제로 『매천야록』을 비롯한 유명한 저술활동을 한 것은 구례에서지만, 그리로 이사한 것은 조정의 정사에 실망하여 과거를 포기한 이후이므로 아직은 아닙니다.
마우재는 ‘털보(毛子, 마오즈)’라는 중국어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인에 대한 유서 깊은 멸칭입니다.
슈트루베 남작과 그 아내 마리아는 실제로 찻잔을 모았습니다. 훗날 미국 공사로 부임한 뒤 스미소니언 재단에 기증한 찻잔은 900여 점에 달한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