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68화 (68/320)

22. 악의와도 같은 선의 (3)

종교를 모두 삿된 것으로 취급하던 코뮌이라지만, 저들이 야소의 말씀 받아들인 것이 기억하기로는 대략 서진 영가(永嘉) 연간쯤이나 되었다니 그 가르침이 풍속이 되어 뿌리내림도 충분히 가한 일이라. 대놓고 제물포 천주교인들처럼 성가 부르고 돌아다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노엘(Noël.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이곳 ‘프티 파리’에도 꽤 흥건하였다.

“프랑스 속담에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라 했지 (Tout est bien qui finit bien). 이 정도면 잘 끝난 것 같지 않은가?”

사람들의 들뜬 기분에 맞춘 듯, 유난히 푸근한 날을 맞이하여 가배 한 잔 들러 온 홍종우가 어딘지 모르게 부루퉁한 김옥균에게 말했다.

조정에서 몇 차례 오가던 공론은, 임금이 싱겁게 결론을 내려버리면서 끝을 보고야 말았다. 명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익현이 나서서, 불인(不仁)한 제도를 여태껏 고치지 않다가 마침내 오랑캐로부터 지적을 받게 되었으니 성내기는커녕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물론 지존이 아니라 대신들에게), 실리로 말할 것 같으면 김병학이 나아와 작금의 만국 정세로 보아 영길리를 가까이함이 실로 크나큰 이익이 됨을 열변하였다.

게다가 무슨 청(廳)이나 국(局)을 만든다고 하였으므로, 대원군도 반대하기보다는 어떻게 자기 끄나풀을 심어 나라에 이익이 될 – 즉, 자신의 권세에 도움이 될 – 방도를 마련해볼까를 먼저 고심하였다. 그러므로 반대하려 하여도 비빌 구석이 없어, 처음에는 무작정 영길리를 비난하던 자들도 슬그머니 말을 바꾸었다.

“주상 전하의 군밤이 실로 영험한 것이지. 어지간해서는 노비의 역을 도로 대물림하게 해야 한다 말도 못 꺼내게 되었잖은가.”

이유원과의 대담으로, 조선에 노비가 아직껏 있는 까닭이 그저 자전거와 우체국이라는 저에게는 당연한 것을 아직 이 나라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이라 단정한 귀남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 조정에서 오가던 얘기를 신보 보고서 알게 된 봉산 고을의 옛 집사노(執事奴. 집사 노릇 하는 종) 복동이라는 자가, 계약으로 매년 신공 대신 바치기로 한 금액을 안 내겠다며 옛 상전과 다툼이 붙어 조정에까지 이야기가 올라오는 일이 있었다. 어쨌건 면천은 하였으므로 상전과 종복 사이의 인륜(人倫)을 버린 것은 아니되, 또한 함부로 다루었다가 구설수에 오를까 두려웠던 봉산군수가 그대로 관찰사에게 처분을 넘기고, 관찰사도 동일한 심산으로 일을 조정에 상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문명의 이기를 몰라서 아직껏 노비 운운한다 생각하던 귀남은 그저 그 상전이라는 진사 엄 모와 복동을 모두 어여삐 여겨, 도성으로 불러왔다. 그러고서는 어제 군밤과 더불어 막 법국에서 들여온 백랍서폐(Velocipede. 자전거)를 친히 하사하고서 전교하기를,

‘너희 백성 중 종복이 없으면 거동할 수 없는 자들은 내 내탕을 털어서라도 자전거든 인력거든 사 주겠노라.’

하였던 것이다. 그런 어질고도 어진 성은이 내렸으니, 조선 팔도에 그 어떤 간 큰 선비가 노비제를 가지고 더 무어라 하겠는가. 그저 주상의 하해와도 같은 마음에 감복하였다 외치면서 속으로 눈물 삼킬 수밖에.

“자, 이러고도 성현의 말씀이 쓰임이 없다 하는가?”

“흥, 이 일과 상관이 무에 있단 말인가?”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콧방귀 뀌는 김옥균이었다.

“허허, 고집하고는. 성상께서 인의로 문무백관과 민려(民黎)를 모두 보듬으시니 아무도 군말 못하는 것 아닌가. 당장 오늘자 『익정신보』에도 면암 선생이 개진한 논의를 실어두었더군. 물론 사서(四書) 어디를 보아도 벨로시페드(자전거) 같은 물건은 나오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 이치에 따라 잘 타이르면 이렇게 구습을 버리고 개화의 길로 나아가게 설득할 수도 있는 것이야.”

“그래, 그래. 자네가 이번은 이겼네. 되었나? 그보다 이 사람들은 왜 이리 늦는가 모르겠군.”

“조선 사람 모두가 시계를 들고 다니는 건 아니잖은가. 조바심 내지 말고 식기 전에 카페나 마저 들게.”

그때, 옆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고개 돌려보니 기다렸던 사람들은 아니 오고 웬 생면부지의 중늙은이가 하나 서 있었다.

“거 말씀 좀 묻겠소. 혹시 법국 말을 할 줄 아시오?”

차림새는 훤칠하되 인상은 잘 쳐주어도 장사꾼이다. 그래도 나이는 나이이니 우선은 정중하게 물었다.

“예, 조금 합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아, 천행(天幸)이구려! 나는 저 해주 고을에서 올라온 참의대부 안인수라는 사람인데, 이번에 상감께서 법국 수레를 널리 퍼뜨리겠다고 하교하셨다 들어서, 만에 하나 이 동네의 법국인들 중에 그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있는가 수소문하러 왔소만.”

애초에 그간 아득바득 그러모은 가산을 풀어 환심을 사 참의대부까지 올라온 진정한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 쌀장수 노릇 삼십 년 끝에 가세가 크게 일어났지만, 나라의 대문이 열리고 온갖 진기한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오니 정말로 돈 될 것은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뭐 건질 만한 건수가 없을까, 참의원 모임에서든 저자를 거닐 때든 두 귀 크게 열고 다닌 지 어언 삼 년. 그러나 해먹음직한 일은 통상 명문거족들 선에서, 그렇지 않으면 대원군과 그 아랫사람들 선에서 챙겨가니 좀처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원군에게 아예 의탁할까 고민도 해 보았지만, 암만 머리를 굴려보아도 요행스레 따낸 참의대부 자리 하나만으로는 무엇 하나 당당하게 요구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밑천 없이 그저 뒷배 얻을 생각으로 넙죽 굽히고 들어가는 것은 하수 중의 하수(下手)들이나 할 짓 아닌가.

그러던 중 군밤과 자전거 소식을 듣고서, 이것이야말로 기회임을 깨달았다. 물정 모르는 이들이야 이 소식을 듣고서, 규방의 규수들이나 병자들까지 제 발로 모는 수레를 탈 수는 없을 테니 남이 끌어주는 수레를 만들자, 정도의 생각만 하겠지만, 잔뼈와 잔머리 모두 갖춘 안인수는 한 수 더 내다본 것이다.

수레라는 물건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쉽사리 망가지기도 하는 법. 얼핏 들어보니 자전거라는 것도 어지간히 복잡한 기기가 아니었다. 이제 인군(人君)이 직접 나서 권장하였으니 다들 어떻게든 저의 이웃보다는 빨리 자전거를 구해 타고 다니려 할 텐데, 조선 천지에 양반은 몇이며 또 양반인 척하는 사람은 몇이겠는가. 당장 만드는 것은 언감생심이지만 자전거를 고치는 기술과 그 연장을 독점하기만 하여도 싸전과는 비교하기 민망할 만큼 엄청난 이문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심산을 이 두 풋내기들에게 털어놓을 안인수는 아니었지만.

“무릇 왕정(王政)을 도와 조정과 백성 사이의 다리 노릇하는 참의대부로서, 성상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직접 이로운 기물을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도 몰라서는 안 되지 않겠소이까. 그리하여 직접 발품 팔아 여기까지 온 것이오.”

홍종우가 득의양양하게 ‘거 보아라’ 하는 눈치를 김옥균에게 던지며 일어섰다.

“아, 정말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마땅히 도와드려야지요.”

그러고서는 농으로 상심한 표정 지어보이는 김옥균을 뒤로 하고 다른 자리에 앉은 프랑스인들에게 말 걸러 떠나갔다. 홀로 남은 김옥균은,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한 어윤중과 김윤식 두 사람이 어찌 이리 늦는가 하며,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볼 뿐이었다.

영특한 제 머리가 어디 가지 않아 올해 칠석제(七夕製) 정시(庭試)에 붙었으므로, 내년 식년시(式年試)에서 급제만 하면 (설마 안 될 리가 있겠는가) 자기도 엄연히 벼슬길에 나서, 문중의 기대대로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사내 대장부가 거기서 머물러서야 되겠는가. 물론 금상 치세에 들어 문중이 크게 쇠락하여 한때 강고히 잡고 있던 실권을 내려놓다시피 했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차피 그때의 그 세도라는 것은 참으로 옹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으므로 아쉽지도 않았다.

무릇 권세라고 하려면,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나라를 한 손 안에 꽉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파리에 머물면서 그가 나폴레옹이라는 사내에게 그리도 매료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고작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리고, 임금의 생부로서 세도를 부리는 것은 그가 보기에는 너무나 하잖았다.

당장 임금이 물러나라고 하면 고스란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 권세지 않은가? 실제로도 그러하여, 장동 김문도 아무리 대원군이 사전에 꾸민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결정타는 선왕의 말 한 마디가 내린 것이었고, 대원군도 만약 금상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을축년 양요 때 내쳐지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박규수야말로 무언가 해볼 수 있었을 듯하지만, 오히려 그는 권력다툼을 깔끔히 포기하고 지금은 재동 사랑방에서 후진 – 지금 자신과 만나기로 한 지 20분 넘게 지난 –을 키운다며 사실상 은거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가 박규수와 같은 자리에 있었더라면, 금상의 마음을 움직여 대원군을 쳐내고 무언가 한 건 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뭐, 애초에 그럴 기반을 다지려고 오늘 모임을 주선한 것이기도 하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자신의 윗대에 꿈을 크게 가진 이가 없으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언제고 크게 한 번 내질러 나라의 근본부터 뜯어고칠 밑바탕을 만들어야 한다. 코르시카 섬의 촌부도 해낸 일을, 장동 김문의 자제인 그가 못할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허, 이건 참 놀랍습니다. 정말로 수상 각하와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있기는 하군요.”

여느 때처럼 우정어린 비꼼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이나마 감탄도 들어 있었다. 그랜빌 백작을 하루이틀 만난 사이가 아니었던 글래드스턴의 귀가 놓치지 않을 만큼.

“정장의 색깔이 정반대인 걸 제외한다면, 같은 신사의 나라에, 군주를 모시고 있고, 의회도 새로 차린 데다가, 이제는 자전거까지 타겠다고 하니, 여간 재밌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동양인들의 쓸데없는 허세와 자존심을 익히 알고 있던 그랜빌은, 디즈레일리가 처음 말했던 것처럼 이 일을 구실로 공연히 조선이 영국에서 돌아서게 되지는 않을까 살짝 우려하였다. 그러나 파크스 영사의 보고에 따르면, 공문을 전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고 했다. (파크스가 양국의 평화와 자신의 입지를 위해, 그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에 대해서는 최대한 간결한 보고를 올리기도 했던 면도 있었지만)

그리고 그 답변을 자세히 보면, ‘노비’란 노예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그 신분이 세습되던 제도를 바꾸기로 결심하였으며, 향후 그런 오해가 없도록 양국 간에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했으니, 차관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도 적당히 타이르면 영국 편에 설 나라가 아니었는가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인도나 중국에 들이는 공력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의 차관이었지만,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깝지 않은가.

“디즈레일리 그 친구의 표정이 어서 보고 싶군. 우리 사이 얘기지만, 이렇게까지 저들이 호의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네. 마음 같아서는 직접 가서 고맙다고 얘기도 꺼내주고 싶을 지경이야.”

가뜩이나 유럽 대륙의 급변하는 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엉뚱한 도덕론이나 내놓는다며 정적들의 공격을 받던 글래드스턴이었다. 자유당 내의 아첨꾼들이 그 앞에서 주워섬기는 별명 ‘위대한 노인(GOM. Grand Old Man)’을 비꼬아서 ‘신의 유일한 실수(God’s Only Mistake)’라고 부를 지경이었다.

그러던 차에 비록 극동의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으니, 그간의 불명예를 모두 씻지는 못해도 간만에 체면치레는 한 셈이었다.

“어쨌든 보수당에 보기 좋게 한 방 먹였으니, 이제는 무얼 더 챙겨낼 수 있을까 고민할 차례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음. 카드웰(Edward Cardwell)에게 군제개혁을 더 야심차게 진행해도 좋다고 해 보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니면 또 보수당 사람들이 걸고 넘어진 설탕 관세 문제를 놓고도 한 판 벌여볼 수 있을 듯한데.”

“글쎄요. 각하의 임기에 들어 이미 충분히 양쪽에 모두 충분히 성과를 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여기서 더 밀어붙이면 잃는 표가 더 많을 겁니다. 차라리 같은 동방정책에서 비슷한 방법을 취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음, 아프가니스탄 쪽에도 비슷한 제의를 해볼 수도 있겠지요. 북쪽에 이웃한 야만적 현지 정권들보다 훨씬 정당성이 있음을 보여주어라... 이 정도로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머릿속 생각과는 다르게 조선에서의 성공은 크게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물론 디즈레일리의 얼굴이 한 사흘 정도는 찡그린 채로 유지되기는 했고, 글래드스턴으로서는 그 정도도 충분하지 않을까 짐짓 생각할 정도로, 중국이라면 모를까, 조선이 가지는 의미가 그렇게 크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언젠가 써볼 만한 장기말 하나가 들어온 정도로. 치적이라면 치적이지만 그냥 ‘잘 했다’ 한 마디로 끝내고 넘어가면 될 정도로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장기판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러시아가 그런 의견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실망일세, 뷰초프 군.”

난봉꾼으로 지내던 호시절은 다 갔다고 한탄하면서 귀국한 전 주조선 러시아공사 예프게니 뷰초프는, 정말로 호시절이 다 갔다는 것을 – 그것도 그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규모로 –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입항하자마자 그가 기억하는 시간 내내 러시아의 외교를 책임져 왔던, 제국의 제일가는 일꾼 고르차코프 공작(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Горчаков)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을 줄 알고 따라갔더니, 이게 웬걸.

초상화로만 보아 왔던 고르차코프의 온화한 표정이, 집무실 너머로 보이는 네바 강 위의 안개처럼 흐려져 있는 것을 보자마자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임기가 거의 끝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 항상 지켜야 할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것도 인간적으로 짐작은 할 수 있네.”

목소리만 들으면 마치 사탕을 훔쳤다가 가게 주인에게 걸린 귀여운 손주를 가볍게 꾸짖는 것 같았지만, 실상이 그렇지 않음은 너무나 명백하였다. 우선은 바짝 엎드려 (필요하다면 물리적으로도) 폭풍이 지나가길 바래야 할 터.

“죄송합니다! 소관이 부족하여 제국에 크나큰 누를 끼쳤습니다.”

“오,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는가?”

“그것이... 제국의 국익을 조선 내에서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하하. 그뿐이었다면 나처럼 바쁜 사람이 자네를 여기까지 부르지는 않았겠지.”

“죄송합니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그 대가로 차관을 받았다... 영국이 이상한 짓을 저지르는 게 하루이틀은 아니니까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적어도 국내에서는 말이 많았겠지. 동양인들의 자존심은 알아주어야 하니까. 그런데 자네의 보고서에 그런 내용은 없더군.”

그야 정말 쓸 내용이 없었으니 안 쓴 것이지만, 상부에서 보기에는 달랐던 모양이었다. 러시아의 관료제는 그 땅덩이만큼이나 비대하고, 사람과 사람을 거쳐 보고가 올라가다 보면 오해가 생기기도 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리고 오히려, 양국 사이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나가겠다... 이렇게 발표했더군? 이게 하루아침에, 그것도 사소한 내정개입의 일을 놓고서 나타날 수 있는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하는가, 뷰초프 군?

무언가 뒷공작이 있었다 생각할 수밖에 없지. 그리고 지금 영국이 굳이 별다른 가치가 없는 변방의 소국에서 뒷공작을 벌인다면, 실제로 가치가 있던, 없던, 우리로서는 마땅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 말일세. 차르의 충실한 종이자 제국의 관리로서, 그런 생각을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 번 펑 터져나온 목소리는, 곧바로 평온을 되찾았다.

“먼길을 오느라 고생은 했다만, 자네의 다음 임지는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일세.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고, 제국과 자네의 앞날을 위해 힘써 노력하도록. 이만 들어가보게.”

“감사합니다!”

전혀 감사하지 않은 목소리로, 뷰초프가 힘껏 외쳤다.

--- *** ---

자전거는 의외로 19세기 정치·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발명품입니다. 중산층의 등장, 여권 신장 (자전거를 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바지를 입게 됨), 포장도로의 확대 등등, 파급효과를 꼽자면 한둘이 아니지요.

반대로 정치·사회적 여건 역시 자전거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확히는 지연시켰다고 봐야겠지요. 제대로 된 페달과 회전 가능한 앞바퀴가 달린 자전거가 1863년 프랑스에서 발명된 뒤 (그 이전에도 비슷한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은 프랑스였습니다), 자전거는 히트 상품으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대량생산이 시작된 1868년부터 고작 2년 만에 보불전쟁이 터져버렸고, 뒤이은 장기 공황은 프랑스 내 자전거 시장을 완전히 고사시켜버렸습니다.

1860년대의 자전거 열풍은 대서양 건너편에도 불어서, 중소 도시에도 자전거 클럽이나 경륜장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자전거는 당연히 고무 타이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자전거의 별명 중 하나가 ‘뼈흔들이(Boneshaker)’였을 정도로 승차감도 나빴습니다. 페달이 앞바퀴에 달린 형태라서 다소 위험하기도 했고요. 그로 인해 유럽보다 훨씬 도로 사정이 열악했던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자전거가 한때의 유행으로 그치고 말았지요.

반면 적절히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충분한 소득 수준을 갖추었던 영국에서는 지속적으로 자전거가 유행했습니다. 우리가 ‘옛날 자전거’ 하면 흔히 생각하는 앞바퀴가 큰 자전거부터, 두 바퀴 사이에 페달이 따로 있고 뒷바퀴와 체인으로 연결된 현대식 자전거 (1880년대 영국에서 개발)까지, 모두 영국에서 개발된 물건입니다.

반면 그런 요건이 갖추어지지 못하고, 도시화가 오랜 세월을 걸쳐 이루어진 유럽과 달리 높은 인구밀도와 급격한 도시화로 자전거를 널리 쓸 여건이 되지 않았던 동아시아에서는 (사실 이건 지금도 그렇지요) 대신 인력거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원 역사의 동아시아에서는 1860년대 말 일본에서 이미 등장했고, 사실 아이디어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곧 다른 아시아 곳곳에도 퍼지거나 자체적으로 등장했지요. 가마라는 것이 보기에는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사람(그것도 키와 근력이 서로 다른)이 드는 물건인지라 승차감이 썩 좋지는 않았으므로, 빠르게 인력거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나왔던 안인수가 한 번 더 나왔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조부 되는 이로, 원 역사에서는 해주의 쌀장수 겸 향리로 큰 재산을 모았던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참의대부로 출세했습니다.

글래드스턴과 그랜빌 백작의 대화에서 잠깐 언급된 카드웰은, 영국의 군제개혁을 이끌었던 자유당 내각의 멤버입니다. ‘레드코트’의 명성에 맞지 않게 매관매직 등의 관례가 남아있던 영국군, 특히 육군을 보다 근대화된 군대로 빠르게 변화시켰지요.

함께 언급되는 설탕 관세 문제는, 그냥 단순한 설탕이 아니라 노동자 복지와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19세기 영국 노동자에게 홍차와 설탕은 기호품이 아니라 생필품에 가까웠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와 별개로, 글래드스턴이 도덕주의-자유주의 기조 하에 보호무역 대신 자유무역을 내걸었고, 이것이 이후 19세기 후반 영국의 경제적 패권의 기초가 되었던 점도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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