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악의와도 같은 선의 (2)
귀남이 생각하기에, 사람 아래 사람 있기 마련인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 비록 자신은 팔자 해괴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그 외에는 대저 높은 사람은 높은 대로, 낮은 사람은 낮은 대로 사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지체 낮은 사람이라 하여 함부로 깔아뭉개서도 아니 되는 법. 테레비에서 종종 나오던 국민의 권리니, 법 위의 평등 – 아니, 법 아래의 평등이었던가? - 이니 하는 소리까지야 잘은 모르겠지만, 이곳 조선에서도 보아하니 설령 종복이라 할지라도 꼬박꼬박 새경 내어주고 하는 것을 보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발칵 뒤집힌 조정을 보니, 또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찌 수호하기로 한 나라로서 이리 능멸하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도하기가 이를 데 없사옵나이다.”
“물론 노비의 제도에 어질지 못한 것 또한 있습니다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나라가 다르고 풍속이 다르므로 인덕으로 타이르고 도의로 설득한들 쉽사리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자금을 융통해주겠다며 풍속을 바꾸라 하는 것이 어찌 가한 일이겠습니까?”
“나라의 국고는 풍성할수록 이로우며, 자금은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라가 부유하다 한들 조종의 법도를 가볍게 여긴다면 어찌 나라라 하겠습니까? 일시의 이로움을 위하여 작은 풍속을 바꾼다면, 훗날 더 큰 제도를 바꾸라 저들 무리가 청할 때 어찌 응대하겠습니까? 부디 밝게 헤아려주시옵소서.”
삼정승이 입을 모아 규탄하였다. ‘노비의 제도만 버리면 훌륭한 문명국’이라는 말은 다시 말해 노비의 제도가 있는 작금의 조선은 문명의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무리 지난날 법국이 융통해준 것보다 더 많은 자금을, 비슷하게 저리(低利)로 융통해준다 한들 빚은 엄연한 빚. 그러므로 조정의 완고한 중신들이 보기에는 꿔달라 청한 일도 없건만 와서 공연히 트집을 잡는 격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귀남이 곰곰이 생각에 빠지자 상께서 찬동해주신다 여긴 이들의 기세가 올랐다.
“마땅히 영길리국을 엄히 꾸짖어야 할 것입니다! 공사 박 모(파크스)에게 항의하는 국서를 내리시어 본국으로 내쫓으시옵소서!”
“신이 듣건대 그 나라는 임금의 자리에 과부가 앉아있다 합니다. 이처럼 예의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아무리 강성하다 한들 어찌 오랑캐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착각일 뿐이었다. 그래도 또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생각한 귀남이 도로 옥음을 내리매 부화뇌동하여 영국을 매도하던 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일전에 법국에서 융통하여준 은으로 크고 작은 사업을 벌여 만백성의 큰 이로움으로 삼았으니, 나라에서 빚을 지는 것은 여염의 일과는 같지 않은 듯하오. 경들이 보기에, 영국의 제의를 받아들임이 나라의 보탬이 될 수는 없겠소이까?”
중간에 벼슬길에 잠시 단절이 있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좌의정이든 우의정이든 하나쯤은 하고 있어야 할 김병학이 먼저 나섰다. 외유의 나날로 적잖이 눈이 트였던 것일까. 확실히 정승들과는 말하는 바가 같지 않았다.
물론, 조금 더 심사 꼬인 이라면, 아직껏 가솔로 남겨놓고 있는 노비라면 다들 일신의 재주 있는 이들일 터이니 김문이 차린 광통이도국(廣通理道局)에 끌어들여 솜씨 있는 공인으로 부리고자 하려는 속뜻 있는 게 아니냐며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미욱한 신이 보건대, 노비제의 일은 그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요, 속뜻은 과연 아조가 저들의 편에 설지 시험하는 데 있지 않을까 의심스럽습니다. 일전에 말씀 올린 바와 같이 작금의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가 영길리임은 명명백백한즉, 일시의 굴욕을 참고 우선은 저들의 뜻을 받아들임이 가할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 지탄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김병학을 강타했다. 아무리 장동 김문이 쇠락했다 하나, 근자에 도로를 닦으면서 세가 어느 정도는 돌아온 면이 있었으므로 가볍게 여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겁 없이 나섬은, 지금 조정에서 오가는 이야기가 곧 참의원으로도 흘러들 것이요, 그리하면 『익정신보』를 모방하여 몇몇 참의대부들이 세운 신보에 곧바로 아무개 대신이 이런 말을 했다더라 하는 식으로 실릴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을 뒷배로 둔 한계원 같은 이라면 모를까, 환국 이래로 새로 출사한 사람들이라면 대개 세간의 시선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장 노비제를 폐하게 되면 누가 가장 먼저 핏대 올릴 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영국 공사관을 불태우자고 한다면 모를까 김병학과 같은 말을 내놓는다던가 그를 두둔한다던가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뒷배 따로 없어도 할 말은 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신 예조참의 최익현 아뢰옵나이다. 고사를 상고하여 보면, 옛날 기자(箕子)께서 금법(禁法)을 만드신바 이로써 백성 중 죄지은 자를 노(奴)와 비(婢)로 낮추어 후대의 경고하는 바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役)을 대대토록 이어받게 함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니, 어찌 성인의 심려에 그저 부모를 잘못 만나 종신토록 노비로 살도록 만드는 불인(不仁)이 있었겠습니까? 일찍이 궁방(宮房)·각사(各司)의 노비안(奴婢案)을 불태우신 순묘(純廟. 순조)의 성대하고도 지극한 덕은 이러한 이치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신이 하해와 같은 성은을 입어 구주를 유람하면서 보고 들은바, 영길리국이 말하는 ‘노비’란 그들의 말로 술랍((영) Slave) 혹은 액랍((불) Esclave)이라 하는 것으로, 다른 양인에게 속하는 천인(賤人)을 이름은 같으나 실지로는 그들의 말로 ‘사람의 말을 하는 짐승’이라 부를 정도로 그 다루는 방도가 모질어 우리의 노비에 비할 바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노비의 역이 세세토록 전하는 것만을 금하고, 영길리에는 저들이 우리의 실정을 잘못 알고 있음을 알림이 상책이라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설복된 것인지, 아니면 영국의 차관 제의는 혹했지만 저에게 쏟아질 분노와 추궁은 두려워하던 중 면피할 구석을 찾은 것인지, 또 줏대 없는 몇몇이 예조참의의 헌책이 실로 가당하다며 지지하고 나섰다.
어쨌든 지금 나라에서 개화의 사업을 벌이기 위해 어디선가 금은을 융통하여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 않느냐 따지고 드는 이들도 있었고, 김병학의 말에 또 혹해, 힘 잃은 법국 대신 힘이 넘치는 영국과 이번 기회에 더욱 돈독해져야 한다 말하는 이도 있었으며, 여전히 대조선국의 신료라는 자가 무도한 외국의 청을 들어줄 고민이나 하고 있어서 되겠느냐 따지는 이도 있었다.
이대로 가다 필경 누군가는 말이 지나치지 않을까 우려한 영의정 홍순목이 나섰다.
“전하, 무릇 사람의 지모에는 한계가 있어, 잠시 사안을 내려놓고 크게 바라보아야 비로소 방도가 보이기도 하는 법입니다. 송구하오나 이 일로 국론에 어지러움이 있을 수 있사온즉 후일 재론함이 어떠하겠사옵나이까?”
귀남이 보기에도 하루아침에 결판 날 사안은 아니겠다 싶었다. 문득 이럴 때 박규수가 있었더라면 어떨까 싶어, 그가 그리워졌다.
“그러고 보니 총리대신이 없었구려.”
“예, 전하. 차대에 들 때 아뢰었던 것과 같이, 어제부터 와병하여 거동이 불가하다 하옵나이다.”
꿩 대신 닭이라. 귀남이 보기에도 전임자만큼 미덥지는 않은 이유원이었지만, 그래도 이전에 군대의 일로 마음에 맞는 답안을 낸 일도 있었으니, 한 번쯤 더 믿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처럼 국외의 일로 말미암아 나라의 구법을 바꾸는 것은 통리기무아문을 둔 큰 뜻이니, 총리대신에게 전교하여 등청하는 대로 아문에서도 이 일에 대하여 그 장단과 본말을 헤아려 방책을 올리도록 하시오.”
주변에서 하도 무능하다, 탐학하다 소리를 들어서 그렇지 (이유원은 이게 다 전임자 박규수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유원도 어쨌든 한 사람의 선비로서 야소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처럼 머리 아픈 때에는, 정말로 천좍쟁이들 말마따나 하늘에 누가 앉아서 하계의 인간에게 ‘너는 좀 괴로움을 겪어 보아라’ 하면서 고초스런 일을 마구 뿌려대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로 하여금 ‘등단(登壇, 대장) 총리’ 소리를 듣게 만든 신미병정(辛未兵政. 징병제)의 일이, 멀리 법국에서 떼로 몰려온 서리들 덕분에 겨우 정리될 무렵. 때이른 가을 고뿔에 걸려 며칠 앓다가 오늘은 그나마 차도가 있어 늦게나마 등청하였건만, 하필 그가 빠진 사이 끔찍한 사달이 나고야 만 것이다.
“당장 영길리 공사를 쫓아내고 엄하게 꾸짖어야 한다며 저자가 온통 시끄럽습니다. 구래의 제도를 폐하면 자금을 융통해주겠다니, 아예 주는 것도 아니고 꾸어주는 것일진대 우리로 하여금 문명이 떨어지는 나라라 매도하면서 생색을 내는 꼴 아닙니까. 격분할 만도 하지요.”
아무래도 경험으로 보나 일신의 재주로 보나 – 박규수가 없는 지금은 - 통리아문 각사의 신료들 중에 가장 우두머리라 할 만한 오경석이 그가 부재한 사이의 일을 정리해주었다.
“당장 거느린 노비마저 없어지면 곤란해질 집안이 수두룩하지 않소.”
밀린 군무의 때문에 찾아와 기다리던 정운구가 한 마디 던졌다. 오경석이야 대대손손 한양에 살며 역관 노릇한 집안이니 노비나 머슴이나 새경 받는 것은 똑같지 않으냐 여기겠지만, 당장 도성만 벗어나도 사정이 그렇지는 않았다.
“외거하는 노복들이야 진작에 면천하여 각자 명의의 전답을 타 가게 했다지만, 집안에 거느리는 노비까지 없어지면 당장 집안의 토지를 일굴 일손이 없어지게 되오. 게다가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이 한둘이 아닌데, 노비 대신 머슴으로 이를 갈음한다면, 아무리 요새 풍속에 노비도 삯을 준다지만 어찌 예전처럼 여럿을 거느릴 수 있겠소이까?”
“온갖 수를 써서 전답을 받아내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어야지, 이제 와서 후회하면 무얼 한답니까? 국법을 우습게 아는 무리들의 사정까지 보아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명전법을 나라에서 시행하면서, 대대로 부쳐온 전답을 (비록 어음을 받고 판다지만) 나라에 넘기게 된 향반들이 넙죽 엎드려 바쳤을 리 없었다. 상전의 은덕으로 면천하게 되었으니 비록 신분이야 양인일지언정 자발적으로 신공을 바치겠다는 각서를 쓰게 만들고서 노비를 별도의 호(戶)로 만든다던지, 집안의 서얼들을 모두 분가시켜 저들 몫의 논밭을 받게 만든다든지 하는 식의 일탈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치죄할 수도 없었던 것이, 위에서 명 내리는 관리들은 속 좋은 임금의 성정을 알았으므로 혹리(酷吏)로 고변당하기를 원치 않았고, 아래에서 실무를 잡은 향리들은 명전법의 일이 끝나도 저 사는 고을에 계속 발 붙이고 있어야 했으므로 적당히 몸을 사렸다. 그리고 아무리 편법을 써서 전답을 더 얻어낸다 한들 만석꾼이 천석꾼 되는 꼴이었으므로 인정상 그 딱한 사정을 보아준 면도 없잖았다.
“그건 그렇다 쳐도, 무릇 반가(班家)라면 어지간히 한미한 집안이 아니고서야 종복 한둘쯤은 두기 마련이오. 그들까지 내보내라 하게 되면 교군(가마꾼)은 누가 할 것이며, 부치는 서한은 또 누가 들고 오가겠소?”
그러나 요새 확실히 대원군의 편으로 갈아탄 이래로 부쩍 높아진 오경석의 코에서는 ‘흥’하는 콧바람이 절로 나올 뿐이었다. 아마 지금 정운구가 말하는 저것이야말로, 암만 잘나 보아야 ‘고작 중인’이었던 오경석이 노비제를 없애고자 하는 진정한 속마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교군 노릇할 종복이 없어지는 거야, 하늘이 두 다리를 내리셨는데 같은 양인으로 누구는 걷고 누구는 못 걷는답니까? 그리고 서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보게, 그만하게. 당장의 일을 신경써야지, 내 앞에서 다투어서야 되겠는가?”
왜 안 되겠는가. 만약 총리대신이 – 이유원이 이 자리를 맡기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 응당 있어야 할 위엄을 꽉 잡고 있었더라면 저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 터.
하필 반가의 사족이든 개 잡는 백정이든 모두 군역을 직접 지게 하라는 영을 취임하자마자 내리는 바람에 ‘구관이 명관’ 소리를 입 달린 사람 앞을 지날 때마다 듣는 이유원이었다. 그때야 자신이 성상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고 관중(貫中. 명중)하였노라 쾌재를 불렀지만, 안타깝게도 남이 보기에는 순수히 자신이 창안하여 그런 소리를 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물론 임금이 발의하고 자신은 옆에서 고개만 끄덕였더라도, 지존을 놓고 함부로 입 놀릴 수 없으니 욕은 고스란히 이유원의 몫으로 돌아왔겠지만.
그렇게 질러놓고서 정작 뒤처리를 할 때는 오경석이나 정운구처럼 아문에서 뼈 굵은 이들의 힘을 빌려서 겨우 해결하고 있었으니, 위신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당장 지금도 다투지 말라고 해놓고서는 곧바로 저들의 의견을 들어야 하게 생겼지 않은가.
“그래서, 그대들이 보기에 영길리의 제의를 받아들임이 가하겠는가? 다음 차대 전까지는 마음을 정하여 말씀을 올려야 할 텐데 말이지.”
“어차피 개화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사업이 아닙니다. 물론 나라의 살림이 한 해 거두어 겨우 그 해의 수용(需用)에 맞춘다고는 하지만, 이미 나라의 문호를 열고 오랑캐의 정밀한 기물을 들여오는 일은 모두 이루어졌으니 앞으로 지출될 바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의 어려움을 참고 인화(人和)를 지키는 장구한 도리를 택함이 어떻겠습니까?”
아문 생활이 길어지면서 이제는 제법 박규수나 오경석이 하던 풍월도 따라 읊게 된 정운구가 먼저 말했다. 아니꼽기는 해도 그의 말에 딱히 틀린 데는 없다고 여겼던 오경석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물론 (요새는 조금 소원해진) 그의 벗 유홍기처럼 멀리 세상을 두루 둘러보고 왔다면야, 지금의 조선이 그저 태풍 한 가운데의 찻잔과도 같은 평온을 즐길 뿐임을 알았겠지만, 오경석의 입장에서는 이미 개화의 급선무가 모두 마무리되었다는 정운구의 말에 딱히 트집을 잡을 건도 없었다.
“흠, 역시 불가(不可)를 아룀이 마땅하겠군. 나 역시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네. 그러면 그렇게 말씀을 올리도록 하지.”
물론 개인적으로야 노비의 제도를 고쳐서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하면 좋겠다는 정도의 생각은 하던 바였다. 언젠가 출간하여 널리 읽게 할 욕심으로 짬 날 때마다 끼적이고 있는 글 중, 그런 취지로 유형원(柳馨遠)이나 안정복(安鼎福) 같은 이들이 노비에 대해 써놓은 것들을 짜깁기해놓은 것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미 뭇 사족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처지에서까지 노비제를 폐하자고 할 정도로 중하게 여기는 사안이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산적한 일이 한둘이 아닌데, 무엇하러 긁어 부스럼을 만들겠는가.
그렇게 정운구가 제 앞에서 오경석과 다투며 늘어놓았던 얘기를 대충 주워 모아 불가론을 꾸며 올린 지 한나절이나 지났을까. 추분도 지나 짧아지기 시작한 해가 붉게 물들 무렵 궐에서 연락이 왔다. 주상의 부르심을 받아 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입궁하니, 늘 그렇듯 사람 좋은 미소가 그를 맞이했다.
“아, 총리대신, 어서 오시오.”
날 선선해질 때가 되면, 나이 지긋한 대신들이 - 무엄하게도 - 연이 닿기를 손꼽아 기다린다는 질화로와 밤 굽는 내음은, 임금이 앉은 편전에는 (아직) 없었다. 갑자기 입궐을 명한 사유가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은근히 기대했던 이유원은 아쉬움을 삼켰다.
“실은 아문에서 앞서 올린 글을 보고 느낀 바 있어 경을 부르게 되었소. 병석을 떠나자마자 다망한 국사로 노고가 많으니, 위로해주고자 하여 불렀소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앞서 차대에서는 여러 대신이 거론하기를, 비록 말엽에 불과한 제도라 하나 조종 이래로 내려온 유서 깊은 것인즉 국외인의 말 한 마디에 고침은 불가하다 하더군. 그런데 아문이 올린 글에 이르기를, 그보다 더 내밀하고 근천한 사연이 있어 놀랐소.”
“열성조께서도 밝게 헤아리시어, 노비를 두는 제도를 존치하신 것이니 그 헤아리신 바를 따라 부족하게나마 간추려 올렸을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들은 이유원은, 파란 일어나는 것을 꺼리는 주상답게, 결국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 같은 영길리의 제의는 완곡하게 물리는 쪽으로 성심이 향하는 듯하다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 마디 하교는 기대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깊게 생각하면, 경이 올린 글의 절목은 모두 이치에 닿지 않소. 무슨 지극한 의리가 있어서 노비를 두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서찰 부치고 가마 탈 생각으로 옛 법도를 지키자 한 것이오?”
“허, 허나 선비를 높이는 도리가 있으니 어찌 상한(常漢. 상놈)과 같이 몸을 놀리게 하겠사옵나이까? 물론 이르시는 뜻은 지극히 고매하오나, 또한 높고 낮음이 제 자리를 찾게 하는 이치도 있사오니 부디 밝게 헤아려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널리 나라의 길을 닦고 있는데 조종의 보우가 있어 재주 있는 양인들도 건너왔으므로, 몇 해 내로 전국의 큼직한 고을 사이를 오가기가 지극히 편리해질 것이오. 그렇게 되면 굳이 노복을 거느리지 않아도, 누구 사람 한 명에게 삯을 주고, 저 있는 동리의 서찰을 모아다 여기저기 돌리고 다닐 수도 있겠지. 그리고 발품 팔아 여기저기 오가기가 곤란하다면, 자전거라도 타면 되지 않소?”
아직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우체국 – 이제 곧 다가올 미래의 표현으로는 우정국(郵政局) - 의 개념이야 그렇다 쳐도, 마지막의 생소한 단어에 이유원이 무심결에 반문하였다.
“마,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신의 귀가 어두워 하교하신 마지막을 듣지 못하였사옵나이다. 자전거라 이르셨사옵나이까?”
그제서야 아직까지 이곳 조선에서 자전거가 굴러다니는 것을 못 봤다는 데 생각이 미친 귀남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아직 들어오지 않은 물건이었군. 그, 내 듣기로 구주 땅에 자전거라는 기물을 비롯해 여러 편리한 수레가 있다 하는데, 이를 쓰면 사람을 부리지 않아도 편하고도 빠르게 먼 길을 오갈 수 있다 하였소. 이 정도면 노비 없이도 체통을 지킬 수 있지 않겠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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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비제는 사학계에서도, 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종종 논쟁이 되곤 하지요. 그러나 노비제의 성격과 실제가 어떠하였든, 19세기가 되면 기존의 노비제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는 데는 이설이 없습니다. 순조대의 공노비 해방 (정확히는 공노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내수사 소속 납공노비의 해방입니다. 그 외의 공노비는 갑오개혁 때까지 존치되었습니다)에서 볼 수 있듯, 19세기가 되면 노비의 생산성이 크게 저하되게 됩니다.
이는 농업경영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라, 농번기에 고공(임노동자)을 부리는 것이 훨씬 이문이 남게 되었고, 이에 따라 노비 전체의 수가 확 줄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비제 자체는 꾸준히 유지되었으며, 그 수도 일정 수준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복합적이었습니다.
먼저 (이 글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주인의 경제활동에 직접 노비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전경목(2012)은 부안 해안가의 한 양반가에서 노비를 활용해 어업과 간척에 동원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전문화·조직화된 노동은 임노동자 고용으로는 대체할 수 없었지요. 그리고 집안에서의 제분, 도정처럼 고도의 수공이 들어가는 작업을 위해서도 노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수요는, 글에 나온 것처럼 양반의 ‘지체’, 즉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19세기 중반 양반가의 노비 활용 양상을 보면, 가마꾼이나 경마, 서신 전달, 관공서 업무(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노비도 있었습니다) 등 양반이 양반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활동의 보조 역할로 많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몸을 직접 쓰는 것을 천시하는 문화 속에서 결국 누군가는 다른 이를 위해 대신 땀을 흘려주어야 했던 것이지요.
실제 역사 속의 노비제 역시 이에 따라 공식적 폐지 이후에도 오랜 기간 존속했습니다. 대한제국 시절의 노비매매 문기들이 적잖이 남아있기도 하고요. 심지어 임학성(2013)은 광복 전후까지도 옛 노비들이 상전의 집에 찾아와 집안일을 거들어주는 사례가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지요.
한편, 이와는 반대로 노비세습제에 반대하는 입장도 꾸준히 존재했습니다. 이는 유교 윤리에 입각한 것으로, 천민의 수가 늘어나거나 최소한 유지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적 관점은 동시에 “기자의 팔조금법”을 인용해 노비제 자체의 존립을 정당화하는 등 (죄지은 자를 노비로 삼는 조항이 전하지요.), 우리가 현대적 감성으로 생각하는 반노예제 주장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노비세습에 대한 문제의식은 유형원, 이익, 안정복 등 소위 ‘실학자’에만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송시열 같은 사람도 문제로 삼은 바 있고요, 심지어 공직에 있으면서 한 번도 노비제를 문제화하지 않았던 이유원도 문집 『임하필기』에서 유형원과 안정복의 노비세습제 반대론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