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63화 (63/320)

21. 무너지는 하늘 아래서 (2)

근위병(近衛兵) 2개 대대를 이끌고 기세도 당당히 대만 땅에 상륙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물론 막판에 조슈 놈들의 농간으로 기병대(奇兵隊) 출신인 조슈쪽 1개 대대를 포함시켜야 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깟 토인 놈들쯤이야 2개 대대는커녕 2개 소대로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므로 조슈쪽 병력을 싸움판에 끼우지 않으면 그만이리라 단정하였다.

상륙하여 (현장의 보고에 따르면) 원주민 부락의 추장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그 아들을 사살했다는 승전보가 전해졌을 때만 해도, 어쩌다 이 모험을 사실상 이끌게 된 사이고 다카모리는 예상대로 일이 잘 풀리고 있다며 은근히 좋아하였다.

신정부 수립 이래 황국의 이름을 내걸고 나가는 첫 원정이요, 분로쿠·케이쵸(文祿·慶長) 연간에 시마즈(島津) 공이 조선 땅에서 공적 세운 이래 (임진왜란을 말함) 사츠마 사내들이 세울 대공(大功)이라, 다름아닌 제 동생 주도(西鄕從道)가 지휘관을 맡고 있다는 것이 퍽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전황은 줄곧 내리막길이었다. 군공을 더 세우려 섬의 고산과 밀림을 뒤지고 다녀도 있는 것은 학질 옮기는 모기뿐. 한 번 된통 당한 이래 원주민 놈들은 도통 싸우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껏 옆에서 큰소리 한 번 내면 찍소리 못하고 숙여온 것만 같았던 지나 정부조차 자신들의 어려움을 알았는지,

“화외(化外)의 생번(生蕃. 복속하지 않은 야만인)이 무도하여 정벌함은 가한 일이나, 사전에 대국과 상의하지 않음은 실로 무도하고도 방자하다. 이미 지난 동치 8년(1869)에 조선 땅에서 대국과 조·일 세 나라가 서로 약조하여 수호하기로 하였건만, 삼년도 채 되지 않아 대국의 방토(邦土)를 범하니 어찌 괘씸하지 않은가.”

하며, 사정을 설명하려 애쓰던 주청공사에게 퇴짜를 놓았다 했다. 마음 같아서야 대병을 몰고 쳐들어가 싹 갈아엎고 싶지만, 당장 나라에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여 출병한 지 고작 석 달만에 자랑스럽던 황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병마에 시달리며 대만 섬 한구석 포구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

그러니 어떻게든 성과를 내어야만 했다. 자신과 같은 거물이 친히 이 슈리성(首里城) 정전까지 와서 류큐왕 쇼타이(尙泰)를 어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전하, 청국에서 우리 일본에 화답한 글의 소식은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소. 귀국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하게 되었을 듯한데.”

‘귀국’이라는 말에 힘이 실려있음은 사이고의 귀에만 들린 것은 아닌지, 동석한 류큐의 몇몇 중신들이 긴장에 절로 숨을 삼켰다. 과감하게 내지른 한 수가 악수임이 밝혀진 지금, 기회를 보아 여차하면 청국의 편에 붙어 도로 자주국 행세를 하겠다는 생각이리라. 그러잖아도 신정부 수립 이후 영 정부가 힘을 쓰지 못하자, 이전의 관계는 일본국이 아니라 옛 막부의 봉신인 사츠마 번과만 수립한 것이었다며 은근슬쩍 발뺌하려는 류큐왕이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정부로서는 그저 전하의 백성이 우리 천황 폐하의 백성이기도 하므로, 마치 친자식처럼 아끼는 마음에 그 원한을 풀어주고자 병력을 내었을 뿐입니다만···.

그러나 지금 건너간 2개 대대가 부족하다면, 아직 이곳 슈리성에서 기선으로 지척인 우리 본토에는 같은 근위병으로만 일곱 개 대대가 남아있으며, 충의로운 무사들은 그 수를 셀 수 없습니다. 반드시 뜻을 이루어내고야 말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못 들은 척하며 은근히 위압하였다. 십수 년 전 사츠마 번이 무역의 이익을 얻기 위해 그럴듯한 대리로 내세워 영국이니 미국이니 외세와 조약까지 맺게 해주었기에, 자신들도 어엿한 나라인양 착각하고 있을 뿐, 끽해야 한 병력 5백 정도만 데려와도 한나절 안에 무너질 류큐 아닌가.

“그, 그렇지. 참 안타까운 일이오. 우리를 위해 그처럼 노력해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소이다.”

설령 대만에서는 물러날지라도 신정부가 고분고분히 자신의 세력권을 포기할 의사는 없음을 알게 된 쇼타이의 얼굴에 체념이 깃들었다.

“실은 그 건과 관련하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천황 폐하의 덕이 이처럼 두터운데, 혹 세간에 다툼 불러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악한들이 이곳 류큐와 본토 사이를 이간질할까 두렵습니다. 이번 일로도 명백히 밝혀졌지요.

이에 우리 조정에서는 그간 명확하지 않았던 류큐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만세토록 안전과 번영을 보장하는 법도로서 전하를 류큐번왕(琉球藩王)으로 봉하고자 합니다. 한때 저희 사츠마 번에 입조하셨던 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높아진 것입니까? 지금껏 지켜주신 의리에 보답하는 황은이 이처럼 두텁습니다.”

요컨대 이 정도 처우에 만족하고, 합병에 동의하라는 것이었다. 막부도 아닌, 일개 번의 번주에게 조공 바치는 신세보다는 나은 것이므로 아예 거짓도 아니었다. 슥 좌중을 흝어보니, 체념한 듯 담담한 이도 있었고, 이미 예전부터 사츠마와 연이 깊던 자들인지 희색이 완연한 이들도 있었다.

그때, 말석에 앉은 젊은 관리 하나가 분기를 못 이겼는지 일어나 말했다.

“전하, 무례를 무릅쓰고 이자를 꾸짖고자 하옵나이다. 허하여 주시옵소서.”

“코치웨카타(幸地親方), 그대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쇼타이의 제지에도 젊은이는 목숨 내놓을 각오를 했는지, 아니면 그저 치기어린 열정인지 말을 이어갔다.

“이보시오, 사이고 경, 비록 우리는 약하고 일본은 강하다 하나, 우리 또한 대국에 조공하는 엄연한 하나의 나라요!”

그러나 동조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속으로는 따를지언정 겁이 나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일지, 아니면 이미 예전부터 사츠마의 편에 섰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고, 사이고의 입장에서는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하늘 아래 대의가 살아있을진대, 그간 우리가 잠시 힘에 억눌려 고개를 숙였다 해서 이렇게 모멸하다니, 그러고도 그대가 문명국 되려는 나라의 신하라 할 수 있소? 천하에 이런 법은 없소이다, 없단 말이오···.”

끝내 끌려나가면서도, 유창한 가고시마 사투리로 떠들어대어 한동안 그 목소리가 정전 마당을 넘어서까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전하, 작금의 세상을 보십시오. 옛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한두 조각이 부서져 머리 위로 가루 흩날릴 뿐이지만, 조만간 송두리째 내려앉겠지요. 그 아래에 깔리지 않으려면, 미리 믿음직한 지붕 아래 의탁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어찌 그렇지 않겠소이까.”

언제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는 그 복잡미묘한 심정. 절망인지, 체념인지, 수긍인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수없이 섞인 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 마디였다. 그러나 사이고로서는 그저 뒷수습 계획의 첫 번째 단락이 마무리되었다는 데 안도할 뿐이었다.

이제 계획의 두 번째 단계로, 조선을 끌어들일 차례였다.

“이리하여 우리 일본이 선의로 시작한 일이 청국과 부딪히는 연유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깝고도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근자에 대국이 양이의 침공으로 흔들려 자그만 소동에도 의심하는 마음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이니 어찌 함부로 탓하겠습니까.

하지만 무고한 우리 선원들, 그리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나선 우리 용맹한 군인들까지 나라 사이의 다툼에 휘말려버렸으니 얼마나 안 된 일입니까. 분명 청국에서도 그 야만인들은 자국의 책임 밖이라 공언하였기에, 우리 손으로 정의를 이루고자 먼 바다를 건너갔건만, 멀리는 청국의 외압에 시달리고, 가깝게는 야만인과 풍토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강한 군대를 가진 상대는 존중해야 하는 법이다. 비록 언젠가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 조선을 집어삼키기는 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요새는 꼭 그 목적을 위해 무력을 동원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는가, 은근히 생각하는 사이고였다. 오히려, 대륙을 향한 발판인 조선이 스스로 힘을 써 신식 군대를 만들어준다면, 삼키든, 제 편으로 만들든 일본을 위해 쓸 수 있을 테니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정말로 조선이 개명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까지 일본이 – 정확히는 신정부가 - 완전히 대업을 이루어 서구의 나라와 견주어도 뒤떨어짐이 없다면, 그때는 자연스레 제 발로 무너지는 지나를 벗어나 일본의 편에 서지 않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는, 그때야 어차피 서양 오랑캐 앞에 두 나라가 사이좋게 먹잇감이 될 테니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국왕 전하께서는 인자하고도 현명하시어, 이미 청국과 서양 여러 나라를 중재하신 바 있으십니다. 부디 이번에도 그 덕을 베풀어, 일청 양국 사이에 의가 상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번 대만의 일에 조선을 끌어들임은 조선을 청국의 품에서 끌어내는 초석이 될 지도 모른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이런 것일까.

“대충 이렇게 말씀을 올렸더니, 곧 대신들과 상의하여 답을 주겠다고 하더이다.”

알현을 마치고 공사관에 들린 사이고가, 교섭한 결과를 (아직까지는) 공사인 카츠에게 일러주었다.

“하하, 고생 많았네그려. 자네 성격이라면 그냥, ‘언제까지 지나 놈들 뒤를 따르실 겁니까! 이 참에 거하게 한 판 해 보십시다!’ 이러고 끝낼 줄 알았는데.”

사츠마 촌놈이라는 은근한 놀림이었지만, 말 꺼낸 사람이 카츠였으므로 사이고도 농담인 것을 알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튀어나오는 본심을 누르기가 참 힘들었지요. 다행히 데려온 친구가 참 사람 듣기 좋은 말은 잘 만들어내는 친구여서요. 오키나와에서도 그렇고 덕을 많이 봤습니다.”

“오, 그런가? 사이온지(西園寺) 가문의 이름을 잇는 젊은이던데, 이름이 긴모치(西園寺公望)라 했던가? 웬일로 사츠마 동향인 대신 공가(公家) 젊은이를 데려왔는가 싶었지.”

“오무라(大村益次郎) 선생의 추천을 받아 데려왔습니다. 비록 선생 본인이 조정에 적이 많아 눈치가 보여서 어디 유학은 보내지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바깥 경험을 쌓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는데, 꽤 똘똘하더군요.”

“뭐, 이제 우리도 슬슬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신경 쓸 나이기는 하니까. 그나저나 화려한 언사야 언사지만, 조선왕을 대할 때 그렇게 명분론을 내세웠다니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는군. 그게 도리어 함정이 되어 우리를 옭아맬 수도 있단 말이지.”

그놈의 군밤에 본인도 한두 번 당했고, 또 많은 사람들 – 주로 불우한 벨로네 백작 – 이 자신보다 더 호되게 당하는 꼴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하하, 암만 그래도 사람 좋고 남이 힘든 모습을 차마 보아넘기지 못한다는 조선왕인데, 어찌 우리 병사들과 오키나와 뱃사람들이 처한 힘든 상황을 좌시하겠습니까? 무언가 조치를 취하겠지요. 우리는 그걸 적당히 가공해서 청국에 ‘조선도 우리 편을 들었다’ 넌지시 일러주기만 하면 됩니다.”

신정부 수립 이래 막 나가던 열혈 성격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기질이 어디 갈까.

“결국 우리만으로는 싸움이 되지 않으니 조선까지 끌어들여 청국과 맞서보겠다, 그런 얘기인가? 뒷감당은 할 수 있겠나?”

“어차피 당장 우리가 다 집어먹을 수는 없는 대만 섬 아닙니까. 만약 이 일이 잘 풀려서 배상금이라도 받아내게 되면 반절쯤 나누어주면 뒷말이 없겠지요. 조선도 듣자하니 이미 북쪽 땅을 착실히 떼어먹고 있다던데요. 겉에 헤실대는 국왕을 내세웠을 뿐, 속이 검은 건 똑같지 않습니까?”

적어도 사이고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비록 일본보다 늦다고는 하지만, 개항한 지 여섯 해밖에 되지 않는 나라치고는 빠르게 따라오고 있는 조선이다. 일본을 끌어들여 끝내 자주국 지위를 쟁취해낸 것도 그렇고, 자기 나름대로 무너지는 천조(天朝)의 하늘 아래에서 도생할 궁리를 찾아가고 있다고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좌우지간 카츠 공께서도 잘 말씀해주셔서, 이왕이면 애매하게 지지하는 말 한 두 마디로 끝내지 말고 파병을 하든 군자를 대어주든 해 달라고 해 주십시오. 어차피 조선이 그렇게 나아갈 길을 정했다면,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살짝 떨떠름해 하면서도, ‘내 노력해 보겠다’ 하는 카츠의 답변을 흡족히 여기면서 사이고는 슬슬 귀국을 준비하였다. 자신쯤 되는 사람이 직접 나서니 이처럼 효험이 있지 않은가.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마음에는 안 드는) 서양식으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이온지였다.

“오, 돌아왔나.”

그 구구절절한 글을 써준 뒤로는 딱히 도와줄 일이 없어, 이왕 나온 길에 외국 구경이나 하라며 도성에 그대로 풀어뒀다. 바리바리 싸든 짐을 보아하니 서책인 듯했다. 역시 공가 출신 아니랄까봐, 책상물림 기질도 그대로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살짝 봤더니, 누르스름한 익숙한 표지들 사이사이로 알록달록한 표지의 양서(洋書)도 여럿 보였다. 잘 보니 장정하기로는 보통의 동양 서책과 같고 쓰인 글도 한문이되 표지만은 서양식으로 판화를 곁들여, 일자무식인 사람도 무언가 다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사이고의 눈길이 어디에 향했는지 알아챈 사이온지가 수줍게 변명하였다.

“작년에 나라에서 화를 입고 이곳 조선으로 망명해 온 프랑스인들끼리 사는 동네가 있다 하여 찾아가 보았더니, 프랑스 책들을 번역해서 파는 가게가 있더군요. 조선 글이야 못 읽지만 다행히 한문으로 옮긴 것도 있어 몇 권 사 보았습니다.”

유독 짐 가운데 표지 새빨간 책이 한 권 있어 사이고의 눈에 띄었다.

“흠. 공... 산당... 선언? 이름도 참 기묘하군그래.”

“그러게 말입니다. 뭐, 끽해야 잡서 아니겠습니까만, 그래도 궁금해서 말입니다. 하하.”

그러고서 귀국한 지 한 달. 정말 대만 때문에 조선이 개입까지 하겠느냐 의심을 품던 오쿠보도, 어차피 둘러대기 나름 아니냐는 사이고의 설득에 우선 사세를 지켜보자며 의견을 보류한 가운데, 아무도 예상치 못한 소식이 연달아 들어왔다.

첫 번째 소식은, 조선왕이 장고 끝에 일본군을 돕기 위해 대만에 사람을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큼직한 양선 한 척, 그것도 조선 해군이 보유한 기선에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실어 보내기로 했다는 카츠의 보고였다. 정말 자신의 설득에 조선왕이 넘어오리라고는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일이 정말 이렇게 되니 사이고는 의기양양하여 오쿠보와 기도에게 가서 한껏 자랑질을 하였다.

두 번째 소식은, 프랑스인들까지 대거 동원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었다. 지금 조선에 머무르고 있는 프랑스인으로 군과 관계된 사람이라면 결국 고문단밖에 없을 터. 그들까지 동원한다면 정말 조선의 최정예군이 나서는 것 아니겠는가 싶어, 그때까지 사이고의 호언장담에 영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던 신정부 사람들도 조금씩 설레어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소식은 대만에서 직접 전해져왔다. 도착한 것은 군함이로되, 타고 있던 것은 의사와 간호사 무리요, 실려있던 것은 금계랍(金鷄蠟)이라는 학질 약이라 했다. 배에는 조선의 국기와 함께 생소한 붉은 십자기가 휘날리고 있었는데, 이름하기를 ‘조선적십자사’라 한다고 했다. 이 해괴한 소식에 당황한 신정부가 발칵 뒤집힌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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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일본에 익숙한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육군은 조슈, 해군은 사츠마, 이렇게 번벌정치를 이해하기 쉽습니다만, 의외로 메이지유신 극초기까지만 해도 사츠마가 육군 쪽도 주도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정확히는 사츠마라기보다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주도였지요.

근위병, 그리고 그 전신인 어친병(御親兵)의 중핵은 구 사츠마번의 번사 및 군대였고, 기껏 세워놓은 신정부가 각지의 불만세력에게 무너지도록 방치할 수 없던 조슈와 도사가 따라오는 형태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무사 계층으로, 막부 대신 신정부로부터 봉급을 받을 뿐 달라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 및 프로이센의 서구화된 군대 운용 노하우의 전수,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남전쟁으로 인한 사족 계층의 몰락 본격화로 인해 근대적인 일본군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역사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한편, 원 역사에서 1874년에 이루어진 대만 출병에서도 일본군은 마찬가지로 졸전까지는 아니어도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물론 석문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작중에서와 동일하게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보고된 환자의 수가 총 병력을 상회하는, 즉 걸렸던 사람이 다시 걸리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그 열악한 환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만 침공의 진정한 목적은 류큐에 대한 영유권 문제의 해결에 있었습니다. 류큐 어민이 ‘자국인’이라 주장하면서, 17세기 초엽 이래 중국과 일본-정확히는 사츠마 번-에 이중으로 종속된 관계였던 류큐를 자국 영토로 확실히 인정받고자 했던 것이지요.

(물론 본작의 일본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지만) 중국에 대항해 뭔가 힘을 행사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대만과 류큐라는 ‘머나먼’ 땅에 대한 청 조정의 무관심, 일본의 잠재력과 확장의지에 대한 과소평가, 막 불붙기 시작한 이리 지역 분쟁으로 러시아가 일본 편을 들어 개입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등으로 인해 청은 일본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류큐의 합병을 사실상 용인하게 된 것이지요.

코치웨카타 초조(幸地親方朝常), 중국식 이름으로는 쇼 토쿠코(向徳宏)는 이에 불복해 1876년 중국으로 밀항, 청 조정에게 일본을 압박해 다시 류큐 독립을 이루도록 해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둘러싼 상황이 이러했기에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891년 중국 복주에서 “살아서는 일본의 신민이 되지 않고, 죽어서는 일본의 귀신이 되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긴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당시 대만 원주민들은 비록 부족 수준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수백 년에 이르는 외부 세계와의 교역으로 화약무기를 보유해 높은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67년에는 미국 상선 로버(Rover) 호의 선원 몰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상륙한 미 해병대를 지형을 이용해 괴롭힌 끝에 후퇴시키기도 했고요, 1875년에는 청군을 몰살시키기도 했습니다. 물론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호전성에 주목해 2차대전 중에는 마치 영국의 구르카 부대처럼 대만 원주민을 일본군 외인부대로 편성하는 방안이 일본 지식인 사이에서 논의되기도 했습니다.

막판에 나오는 금계랍은 곧 키니네입니다. 정확히는 키니네를 중국식으로 음역한 것이지요. 말라리아 특효약으로, 개화기 조선에도 들어와 큰 인기를 끈 바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 훗날 일본의 거물 정치인이 될 사이온지 긴모치는 지금 시점에는 유럽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그를 후원해 유학을 갈 수 있게 해주었던 오무라가 힘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관계로 (그는 비록 출신은 조슈가 아니지만, 조슈 육군의 핵심 인사 중 하나였습니다.), 아직 일본에 남아 있었다는 설정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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