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62화 (62/320)

21. 무너지는 하늘 아래서 (1)

“(...) 그리하여 조선 국왕은 슬픔을 기쁨으로, 미신을 문명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이에 반발하는 어리석은 백성들도 억누르게 되었다.

억누름이란 무엇인가? 피를 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세(勢)로써 제압함이다. 서구 제국이 지나(支那, 중국)와 같이 혹형에 기대지 않고서도 뭇 인민의 충심을 담보함이 여기서 나왔다. 조선 또한 그 길로 착실히 나아가고 있다.

대저 조선인들은 소위 소중화(小中華)라 하여, 자신들이 우리 일본이나 지나보다 빼어나다 자만하는 폐해가 있었다. 이것이 지나쳐 나라에 폐를 끼친 무리를 모조리 변방의 군졸로 보내고, 나아가 국민개병의 빌미로 삼으니, 경거망동하던 자들이 더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며 스스로 몸을 사렸다.

첫 왕자가 불행히 요절하니, 서양인들의 도래로 제 일자리 잃은 자들이 요설로 세인을 선동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은 역으로 서양인 의사를 모아 병원을 세우고, 혀 놀린 수괴 민씨를 전향케 하여 신문으로 고백하게 하였으니, 피 흘린 이 없어도 왕이 또 무엇을 할지 두려워해 요사한 무리가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개화한 다스림의 요체이니, 우리는 일시의 부끄러움을 참고 본받을 것은 본받음으로써 황국의 앞날을 더욱 밝게 해야 할 것이다.”

오사카부의 한 식당. 자칭 ‘양식(洋式)’으로 구워낸 고기 요리를 배불리 먹은 뒤 시작한 메이산샤(明三社) 모임은, 주조선공사 카츠 카이슈가 보내온 이번달 『조선신문논평(朝鮮新聞論評)』 낭독으로 그 서두를 떼었다.

“참으로 좋은 얘기입니다. 어서 카츠 공이 돌아와 우리 모임에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이노우에 카오루가 먼저 촌평을 남겼다. 반편이 정부라 하지만 신정부도 그럭저럭 자리를 잡으면서, 에도의 퇴물들로부터 미움 받는 카츠를 거두어줄 여유가 생겼다. 게다가 그가 조선으로 쫓겨가듯 부임한 것이 게이오 3년(1867)이었으니, 메이지 4년(1872)인 지금은 돌아올 때도 되었다.

“다만 우리가 저들의 방식을 따라할 수는 없겠지요. 저들은 이미 국론이 하나되어, 적어도 나라 안에 중심이 확고히 섰으니 능히 저리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자칫하면 민심이 에도로 기울어버릴 테니까요.”

“그러므로 그 민심이라는 것을 문명개화로 이끌 필요가 있다, 이 얘기입니다. 누차 강조하였지만, 지금 세간의 어리석은 자들이 신주(神州) 안에 제국과 동국(東國) 두 나라가 있다고 비꼬는 꼴을 하루라도 빨리 모면하려면, 오히려 늦게 돌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애초에 이노우에를 비롯한 삿쵸 정객들이 이 모임에 끼어드는 것을 좋게 보지 않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딴지를 걸었다. 틀린 말은 아니어서, 이노우에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신정부가 안정되었다는 얘기는, 다시 말해 그 반대쪽에 있는 막부의 잔당들도 세를 굳혔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일신 이래 대일본제국을 자칭하였건만, 자발적으로 폐번을 청한 몇몇 번과 도시들을 제하면 여전히 다스리는 이의 이름만 다이묘에서 지번사(知藩事)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하하, 그 일을 위해 여러 고명하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도 고견을 청할 뿐입니다.”

말쑥한 정장이지만 실없는 웃음기 어린 표정은 그대로인 이토 히로부미가 끼어들었다. 은근히 이 모임을 주선한 세력이 누구인지를 암시하니, ‘고명한 선생들’로서는 말 중의 뼈를 의식치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전쟁에서 막부군 전습대의 힘을 본 뒤, 서둘러 군제개혁을 하고, 최근에는 전습대의 스승뻘인 프랑스가 대패한 데 충격을 받아 프로이센 교관단을 청해오려 노력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한바탕 싸움으로 저쪽을 꺾어내기 위해서는 꽤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 명백하였다.

그리하여 신정부 -정확히는 삿초 사람들- 요인들은 대신 사상의 싸움에 눈을 돌렸다. 고리타분한 국학자들이 지금껏 자신들이 내걸었던 양이(攘夷), 정한(征韓) 운운하며 좌막파 세력을 한데 결집시키는 데 주목해, 반대로 저들 번의 몰락한 무사들, 부유한 평민들을 그럴듯한 개화론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한 것이다. 지금 모여 있는 메이산샤도, 겉으로는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되 속에는 사상의 칼날을 벼리려는 신정부의 의도가 들어 있었다.

“흠흠, 지금 우리 일본은 문명의 길로 나아가다 주저앉아 반개(半開)에 머물고 있소. 사민평등(四民平等)을 내걸어 뭇 인민의 개화를 조속히 도모해야 할 텐데 말이오.”

“하지만 그보다 급한 것이 군비의 일입니다. 강한 군대를 먼저 만들어 나라가 나라답게 존립할 기반을 다진 뒤에 백성을 생각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애초에 백성이 모여 나라를 만든 까닭을 저버리는 꼴입니다.”

후쿠자와가 무슨 민(民) 운운할 때마다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던 니시 아마네(西周)가 딴지를 걸었다.

“그것을 지금 못하고 있지 않소? 총칼이 들지 않을 때야말로 문명과 교육의 힘에 기대야 하는 법이지.”

이 근래 메이산샤에서 돌고 돌던 논쟁이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사츠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같은 자들은 우선 힘을 기른 뒤 동쪽 번들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시 아마네 또한 기본적으로 그런 주장에 동감하는 바였다. 어차피 길러야 할 군사력이므로, 국민개병이니 문명개화니 하는 것보다는 서쪽의 사족과 호민들을 잘 구슬려 언제고 대결전을 벌이든 대타협을 하든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그 주변 잔당의 남은 힘을 쓸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저도 지사니 뭐니 하기에 앞서 한 사람의 무사로서, 때로는 무(武)의 길을 따라야 할 때가 있음을 압니다만, 지금 나라의 처지가 그럴 여유를 허용치 않습니다.”

유신의 대의를 내걸면서 ‘널리 회의를 열어 만기(萬機, 모든 일)를 공론에 따르기’로 선포한 이래, 막부의 잔당들은 툭하면 공의를 내세워 개혁의 논의를 저지해 왔다. 분명 구래(舊來)의 누습(陋習, 인습)을 함께 철폐하겠다 선포했지만, 예컨대 조선의 예를 따라 징병령을 선포하자는 얘기가 나올 것 같으면,

‘공의에 맞지 않으니, 더 두고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운운하며 저들 잇속을 챙기는 핑계로 삼으니 신정부, 정확히는 신정부의 삿초 지사들로서는 속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개화만 늦추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당장 셔먼 호 사건 이후로 뭇 외인들이 내지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생사를 불티나게 사가고 있었다. 저들 나라의 누에들이 무슨 병에 걸려서 모두 죽어나간 덕이라 했다. 문제는 어디 항구에 집적하여 도매로 파는 것이 아니라, 각 번이 찾아온 외국인 상인들에게 판매하다 보니 세수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생사무역의 이익은 모두 각 번으로 흩어져버리고, 게다가 금방 역전되리라 여겼던 조선과의 무역수지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근자에 나오는 인천목(仁川木)이 원망스러울 뿐.

이곳에 모인 식자들 또한 이런 사정을 알았으므로, 논쟁이 계속 헛도는 것이었다. 무언가 현상을 바꾸기는 해야 하겠는데, 그러면 민심을 이쪽으로 끌어옴이 먼저인가, 아니면 군사력을 키워 동쪽 번들을 힘으로 찍어누름이 먼저인가. 그러나 당장 예산부족에 허덕이는 신정부로서는 어느 쪽도 쉽사리 택할 수 없었다.

“힘이 없고 쉽사리 기를 수도 없다면, 궁여지책으로 우리가 힘이 가득한 것처럼 속이는 방편도 있겠지요?”

문득 이토가 한 마디 툭 던지니, 논쟁 벌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도로 쏠렸다.

“결국 우리가 옳고 저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어차피 백성은 물론이요 사족의 대부분도 틀에 박힌 구학문이나 하고 있는 판국인데, 어디 적당하게 시비를 걸어서 우리 정부의 치적으로 포장할 만한 건수를 하나 올리면 되겠지요.”

그랬더니 열광하기는커녕 영 저어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이토가 보기에는 딴에는 무사라고 하고 있지만 천생 샌님들이구나 싶었다. 하기야, 자신들 유신의 지사들처럼 방화도, 칼부림도 할 각오 (그리고 실제로 저지른 경험)가 없는 이들은 이름만 무사인 셈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문명의 대의 운운하며, 우리 육군을 어딘가로 보내 무위(武威)를 떨치는 겁니다. 그러면서 보여주는 것이지요. 천하의 공의가 어쩌구, 양이가 어쩌구 하고 있는 너희 퇴물들도 이런 공을 세울 수 있느냐, 반면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제국의 국체를 선양하고 있지 않더냐.

그러면서 후쿠자와 선생이 말씀하신 내용을 저쪽 동쪽의 무라(村)란 무라마다 흩뿌리는 겝니다. 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말로만 떠들고 실제 당신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있는가. 다 천황 폐하와 신정부가 내리는 문명개화의 은덕을 중간에 가로채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떻습니까? 이름도 그럴듯하게, 자유민권(自由民權)을 고양한다 해 두면 되겠군요.”

자유, 민권. 두 마디에 혹하는 좌중을 살펴보면서, 역시 샌님은 샌님들이다 생각하였다. 물론 그런 속내를 보이는 건 정말로 샌님들이나 할 법한 짓.

그리고 생각해보면 거짓은 아니지 않은가? 다이묘의 통치에서 벗어나 충직한 신민으로서 보다 개명된 통치를 받을 자유요, 자신들이 이끌어낼 개혁에 필요한 황금과 피를 바칠 권리다.

“흠, 이토 군의 말에 과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자유민권이라는 말은 택할 만하군. 확실히, 어일신 이래로 구시대와 확실히 달라지는 면이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업적, 그리고 새로운 명분. 나쁘지 않아.”

후쿠자와와 니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호, 그래, 이게 이토 자네와 이노우에 둘이 끼어든 그 메이산샤라는 모임에서 나온 얘기다 이건가?”

‘자유민권을 앙양(昂揚)할 방책을 논함’이라는 제호 붙은 『메이산 잡지(明三雜志)』를 집어든 기도 타카요시가 말했다.

“‘의혹하는 무리의 몽매함을 깨뜨리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위업을 이루고, 이로써 신문물의 개명됨을 징험케 하여야 한다’라, 뭐, 나로서는 우리의 우월한 국가정책을 국토의 반절에 대해서까지 시행할 방도면 무엇이든 족하네.

훗날 발목 잡힐 거리를 만들지 않는 선에서라면 괜찮을 듯하니, 한 번 추진해 보도록. 후쿠자와 군이나 니시 군도 끼어들었으니 우리 조슈 젊은이들끼리 낸 계책보다야 저 사츠마 촌놈들에게 잘 먹히겠지.”

마음만 같아서는 하루 빨리 나라를 저 서양 나라들처럼 바꾸어놓고 싶었던 기도였다. 지금 나라 꼴이 어지럽지만 않았더라면 작년에 떠난 이와쿠라 사절단에 끼어 장래의 국가구상에 보태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까닭이 바로 발등의 불, 저 에도의 짐덩이들 때문 아니었던가.

이는 처음 사절단 인선의 물망에 올랐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사이고 다카모리도 마찬가지일 터. 그러므로 우선 무엇이든 해서 나라에 안정 – 즉 신정부의 절대우세-을 이루고, 앞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그 뒤로 미루어도 되리라 생각했다.

반면 오쿠보 도시미치는 대경실색했다.

“아니, 지금 당장 나라의 경제가 위태로운데 무슨 모험을 얘기하는가? 물론 에도 쪽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선 부족한 예산을 쪼개어 공장을 세우든 학교를 세우든 해서 우리가 더 나은 길임을 보여야지, 어디서 무엇을 할 지도 정해지지 않았으면서 무작정 일을 벌여보자는 건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군.”

게다가 성공하더라도 저 자유민권 네 글자는 계속 신정부의 발목을 잡을 게 뻔했다. 비록 직접 가서 눈으로 보지 못함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적어도 글로나마 프로이센의 부상을 접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국운의 흥성함은 뛰어난 재상 몇몇이 나라를 빈틈없이 이끎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야. 당장의 효과를 위해 얕은 꾀를 부렸다가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걸세.”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극찬했다.

“아, 그렇지! 이런 생각을 우리 사츠마 사내들이 여태껏 하지 못했다니, 안타까울 뿐이군. 무사의 의기를 우리가 앞서서 보인다면 저 구시대 골통들도 따라올 수밖에 없을 거야. 얼른 그렇게 국론을 단합해서 힘을 기르고, 우리보다 늦게 나라 문을 연 주제에 거들먹거리는 조선 놈들을 도로 눌러줘야지. 오쿠보 그 놈은 그런 깡이 없으니 이런 대국적인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게야.”

‘조슈 머저리’인 이토 앞에서 같은 사츠마 사람을 깔보는 것으로 보아, 둘 사이가 확연히 갈라지고 있다는 소문도 사실과 그리 멀지는 않은 듯했다. 아마 막부 잔당에 대한 대책을 놓고 의견이 갈린 탓이었으리라.

“마침 좋은 일이 있네. 저 오키나와 놈들이 말로는 류큐 왕국이네 뭐네 하지만 일찍이 우리 사츠마에 조공 바치고 있는 건 자네도 알겠지. 그런데 놈들이 몰던 배 한 척이 작년 겨울에 저 남쪽 대만에 좌초했어. 그랬더니 그곳 토인들이 도와주기는커녕 도리어 조난한 선원들을 학살했다는군. 생존자 몇몇이 겨우 도망쳐서 지금 지나의 대만부(臺灣府) 성 안에 의탁하고 있다네.”

그가 말해주는 사정은 이와 같았다.

“말한 것처럼 오키나와도 우리 땅이고 그 백성도 우리 속민이라 할 수 있으니, 지나 쪽에 책임과 보상을 요구함도 가하겠지. 이왕이면 쪼잔하게 은자 정도로 끝내지 말고, 제대로 출병(出兵)해서 그 원주민 놈들 목도 좀 베고 해 보자고. 지나 쪽으로부터 오키나와가 확실히 우리 땅임을 공인받는 건 덤이고.

조선은 말만 잘 했는데도 훈춘인가 하는 만주 땅덩이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지, 그 정도로 유약한 나라가 지금의 지나야. 자네 말대로 우리 정부의 위업으로 삼기에는 나쁘지 않지. 그렇지 않나?”

물론 이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만약 출병한다고 하면 사츠마 번이 이전에 구매해둔 양선으로, 사츠마 병사들이 가서 공적을 세울 것이라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사족들의 불만이 많은데 야마가타 놈의 기병대 평민들이 이름 날리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좋은 생각이십니다! 모쪼록 그쪽을 잘 단속해 주신다면, 공적이 드러날 때 섭섭하지 않도록 잘 안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속내를 모를 리 없던 이토 역시, 공치사를 주워섬기면서도 어떻게 하면 야마가타를 끌어들이면서 생색은 최대한 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비록 당장의 먹거리를 잃지는 않았다지만, 신정부가 프로이센 – 그리고 가깝게는 조선 – 의 예에 따라 평민들에게까지 칼을 쥐어줄 것이라는 풍문이 돌면서 서녘의 사족들 사이에서도 조심스레 위기설이 돌고 있던 터였다. 적어도 동서 갈등이 유지되는 한, 칼밥 먹는 사람들의 일자리는 없어지지 않으리랴 여겼는데, 그런 기대가 무참히 무너져내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나마 에도의 접시꽃(도쿠가와)에 기댈 수 있는 동쪽 무사들과는 달리, 이쪽은 다이묘, 아니, 지번사들도 신정부 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정부의 시책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안과 불만이 조금식 차오르던 차에 대만 소식이 전해지고, 조만간 정부가 토벌령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조심스레 퍼지기 시작하자 여론은 열광하였다. 사족들은 이번에야말로 무사의 위엄을 세움으로써, 역시 싸움은 무가(武家)의 일임을 증명하자며 열의를 보였고, 바뀐 정부 아래에서 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세금에 슬슬 환멸감을 보이던 도시의 거상들도 마침내 이 이름만 그럴듯했던 신정부가 무언가 해보려 하는가 하며, 어떻게 군납으로 제 배를 불릴지 고심하였다.

뒤늦게야 이 소식을 접한 서양 외교관들이 적어도 중국이나 열강 측에 통보하여 협상의 시늉은 해 보라 하였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는 빼든 칼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을 수 없었기에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이것이 원 역사보다 두 해 일찍 이른바 ‘대만 출병(臺灣出兵)’이 일어나게 된 내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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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메이로쿠샤(明六社)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메이지 6년(1874)에 세워졌습니다. 신정부의 초대 주미공사였던 모리 아리노리가, 미국 교육자들의 계몽활동에 감명을 받아 설립하였는데, 이 역사에서는 반대로 국내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원 역사에서 메이로쿠샤는 주로 『메이로쿠 잡지(明六雑誌)』 발간을 통해 활동하였으며, 그 외에도 연설회를 통해 서구 사상의 전파에 힘썼습니다. 니시 아마네, 후쿠자와 유키치 모두 메이로쿠샤의 멤버였습니다.

물론 원 역사의 메이로쿠샤는 지식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막부의 붕괴로 일본 전체 장악까지는 아니어도 적대하는 세력이 없는 정도까지는 올라온 원 역사의 유신 세력은 (아직) 굳이 정치사상까지 신경쓸 이유가 없었지요.

여담으로, 메이로쿠샤 멤버들은 모두 양식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고기 맛에 빠져서인지, 아니면 ‘문명개화’에 대한 정치적 제스처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작중 국내 상황 때문에 도쿄가 아닌 오사카에서 회동하고 있지만 음식 취향은 그대로인 듯합니다.

니시 아마네는 후쿠자와 유키치에 비하면 지명도가 조금 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만, 일본 및 동양 근대정치사상에 있어 중요한 인물입니다. 특히 ‘철학(哲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는 등, 서양 철학의 번역에 있어 엄청난 공헌을 했지요.

한편, 19세기 중순부터 프랑스를 휩쓸기 시작한 후추병(Pébrine), 위축병(Flacherie) 등 각종 누에병으로 유럽 양잠산업은 치명타를 입습니다. 파스퇴르의 활약으로 원인이 자연현상이 아닌 병원성 미생물임이 밝혀졌지만, 이미 때가 늦은 뒤였습니다. 덕분에 일본은 열강과의 무역에서 쏠쏠하게 이익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불평등조약을 계속 준수할수록 일본이 이익을 보는 구조가 일시적으로 생기면서, 조약을 준수하다 보면 절로 열강이 개정을 청하지 않겠느냐 하는 주장까지 구 막부파 내에서 나올 정도였지요.

원 역사의 대만 침공은 1874년에 일어납니다. 원 역사의 1872년에는 기도 타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모두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유럽과 미국을 순방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1873년 정한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위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사이고가 실각하고, 단발령(1871), 징병령(1873) 등으로 높아진 사족 계층의 불만 등이 쌓이면서 1874년 사실상 사츠마 세력의 독단적 출병 및 정부의 사후 재가 형식으로 침공이 일어나게 되지요. 어찌 보면 훗날 일본의 군국주의를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전개 과정까지도 여러모로 훗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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