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냥개의 처세술 (2)
7월의 열기에 달아오른 발해만 바다는, 천진 항구로 쉴 새 없이 뜨겁고도 짭짤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저 속 어딘가에는 대고(大沽) 포대 앞바다에 진을 친 법국 이하 7개국 함대가 뿜어나는 매캐한 매연도 있을 것이고, 지금 이 통상서(通商署) 앞마당으로 끌려와 울고불고 하고 있는 백성들의 눈물도 조금은 섞여 있으리라.
“아이고, 대인, 대인, 살려주십쇼!”
“쇤네는 무고합니다! 저기 장삼(張三) 놈이 주모자입니다요!”
천주교당을 불사르고 법국 영사를 살해한 혐의로 붙잡혀온 천진 백성들이었다. 병환으로 보정(保定)에서 요양하다 급히 달려온 증국번이, 여독이 풀리지 않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어려웠기에 현청 대신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처음 출사할 때도, 열심히 격문 돌리며 향용(鄕勇)들을 모을 때도 증국번(曾國藩)은 자신의 대의를 믿었다. 가끔은, 군자의 도를 지키기 위해 소인의 칼을 써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저 마당에서 우짖는 소리가 바람 타고 전해질 때마다 그의 마음도 아려왔다. 이 나라, 이 조정을 서양 오랑캐로부터 지키기 위해 나라의 백성을 팔아넘겨야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찌하랴. 저렇게라도 해서 바다 앞에 진 친 무리의 화를 달래지 않는다면, 당장 북경이 또 한 번 더 불탈 터인데. 직례총독(直隷總督)으로 있으면서 모를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이보시오. 증 대인, 정말 저렇게까지 해야 하겠소? 이 일은 내가 보기에는 저 오랑캐들의 잘못도 적지 않소만.”
통상서의 원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삼구통상대신(三口通商大臣) 충허(崇厚)가 증국번의 속을 긁었다. 사정상 증국번에게 이곳 통상서를 내어주기는 했다만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였다.
“어쨌든 죽은 것은 양인들이외다. 이 일이 어찌 처리되든 죄 있는 이는 붙잡아 잘잘못을 가려야 하니, 차라리 지금 미리 처분을 준비하여 후환에 대비함이 옳소.”
“그야 그렇다 칩시다. 설령 우리 쪽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오만한 글로써 우리를 책망하니 이보다 괘씸할 수가 있겠소?”
그가 말하는 것은 7개국의 대표로서 영국이 보내온 글이었다. 이르기를, 금번의 사태는 서양 제국과의 통상,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 그 자체가 문제이므로, 마땅히 청조가 이를 시정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여전히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 믿는 이들에 이만큼 치욕스러운 글귀도 많지 않으리라.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그 말미에 이르기를,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실화(失和)의 우려가 있다 하지 않았소이까. 이곳 천진은 경사(京師, 수도)의 지척에 있으니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입게 될 것이오,”
“그러니 더더욱 굳건히 지켜야 하는 것 아니오? 저기 양주(揚州)라면 모를까, 이곳에서까지 저 양인들의 그러잖아도 높은 콧대를 더 세워줘야 하겠소이까? 증 대인은 정녕 이 나라의 대신이 맞소?”
비록 충허 자신이 만인(滿人)이라 하나, 조정의 중신이요 문무 양면으로 이름 높은 증국번 앞에서 이렇게 방자하게 나서니,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지금껏 옆에서 지키고 있던 이홍장이 조용히 나섰다.
“대인, 아마 지금 천기(天氣)가 불량하여 인화(人和)에도 어지러움이 있는 듯합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시고 나중에 거론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야, 감히 네가 누구라고 내 관청에서 나를 내쫓겠다는 것이냐 하고 따져물었겠지만, 육척 장사 이홍장의 솥뚜껑만한 손바닥이 어깨 위에 내려앉으니 충허도 자연히 순해질 수밖에 없었다.
“후우... 중당(中堂) 그대에게 폐를 끼쳤구려.”
충허가 무어라 구시렁대며 자리를 비우자, 이제 대학사 자리까지 꿰어차 곧 스승보다 더욱 현달할 것이 명백한 제자에게 스승이 사의를 표했다. 자리에 맞게 예를 갖추어주니 이홍장은 더욱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불초 제자가 도움이 되지 못하여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과연 송구스러워 할까? 조정에서 교안이 터진 다음 직례총독인 자신으로 하여금 직접 나서게 하면서도, 그 옆에 굳이 이홍장을 붙인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는 뻔하였다. 공친왕을 버리고 확실히 서태후의 편에 선 이홍장을 중히 쓰려는 속뜻이리라.
작금의 교섭에서 자신이 실기하면 이를 빌미로 삼아 제자로 하여금 스승을 대신하게 할 생각이리라. 만약 성과를 거두더라도 마찬가지로 이 공훈에 대한 포상을 명목 삼아 대동소이한 처분을 내릴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자신이 마땅히 하여야 할 바를 다하지 않음은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 설령 살무사처럼 스승의 배를 가르고 현달하는 제자라 할지라도, 나라의 영재를 얻어 천하의 준걸로 키워내었으면 그로서 족한 일이다.
“양인들이 무도한 요구를 함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니, 우리로서는 그저 인고하며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요. 아직 그때가 오지 아니하였으니, 여차하면 이 늙은이가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 될 일 아니겠소이까. 하지만···.”
“조선의 일은 예전과 같지 않으니 가볍게 넘길 수 없겠지요.”
스승이 흐리는 말꼬리를 기막히게 읽어낸 이홍장이 바로 이어받았다. 대견함 반, 씁쓸함 반이 섞인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제대로 보았소. 지금이야 가당찮게 조규(條規)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 그 전 장정(章程)이 있던 시절부터 이미 조선인들이 많이 건너왔다 합디다.”
처음에야 강남 상인들이 제물포로 몰려들었지만, 조선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므로 곧 가운데 거간을 건너뛰고 아예 청국 땅에서 포삼 장수 노릇을 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개중에는 아예 제물포에서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포목을 얻어다 물 건너에 파는 이들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천축(인도)에서 건너오는 진퉁 옥양목은 이기지 못하니 대신 같은 황인끼리 돕고 살자는 둥, 이 포목이 실은 홍삼 주위에 둘렀던 것이라 그 약효가 배었다는 둥 속이고 얼러대면 나름대로 쏠쏠하게 재미를 볼 수도 있었다.
“거두어들여 조선 소식통으로 부리고 있는 장 모가 내게 일러주기를, 저들의 세족들 중 풍양 조문이라는 문중이 있어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더이다. 말직 패관(하급관료)들의 기강이 땅에 떨어진지 오래이니 누가 되었든 포삼이나 은만 조금 쥐어주어도 온갖 편의를 봐주기 마련이고. 게다가 조선인들은 서교(西敎) 신자 되기를 꺼리지 않으니, 또 천주교당을 현지의 뒷배로 삼는다고도 하오.”
조선 상인들 가운데도 조금 더 고단수의 도고(都賈)들은 풍양 조문과 손잡고 판을 더욱 크게 벌렸다. 구심점이 될 인물이 없는 연고로 자연스레 궁 내의 보이지 않는 다툼에서 조금씩 밀리던 조문은, 후일을 기약하고서 선교사들과의 연줄을 활용해 바다 건너로 눈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바다 건너 말 다른 땅에 건너온 상인들은 곧 저들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마침 풍양 조문부터가 천주교에 우호적이니 눈치를 보아 입교한 자들도 있었고, 애초에 제물포로 모여든 사람들 중 적잖은 수가 교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건너와서 본즉 이곳 세상에서는 천주교도가 상전이고 일반 백성들은 그 눈치 보기에 급급하여, 여전히 천좍쟁이 소리 들으며 눈칫밥 먹는 조선과 같지 않았다. 기고만장해진 몇몇 조선인들이 선교사와 교인들을 따라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으므로 곧 양귀자(洋鬼子)만큼 간특한 고려귀자(高麗鬼子)라는 얘기도 나돌기 시작했다.
“거참, 멀쩡한 아라사 상인들을 법국인으로 오인하여 때려죽인 것만 일이 아니었군요. 그렇다면 조선왕도 곧 저 오랑캐 무리에 끼어 가당찮은 요구를 내밀게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침음성이 대답을 갈음하였다.
그러잖아도 재작년 새로 맺은 『청조수호조규』의 일로 조정이 한동안 시끄럽지 않았던가. 물론 사절로 다녀온 잉한(英翰)이 조선왕의 아첨을 그대로 아뢰자, 서태후도 덩달아 기꺼워하였기에 함부로 이 일을 문제삼지는 못했지만, 견식 있는 조정의 대신들은 조선의 의도가 과연 무엇일지를 놓고 종종 걱정하곤 하였다.
게다가 지난 몇 년 새 제물포에서, 또 의주에서 교역이 흥성케 되면서 조선으로 빠져나가는 재보도 적지 않았다. 그 근원까지 따져보면 출발점은 오 년 전 법국이 조선과 매우 우호적인 조건으로 통교한 데 있었다.
재작년, 북경 인근까지 진격한 염군 최후의 발악을 손수 진압하면서 다시 화려하게 복귀한 공친왕이, 조선과 동일한 조건으로 영법 양국과 조약을 개정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굳이 조선에게만 관대한 조건을 허용한 데 속뜻이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아는 법국인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저들이 채워놓은 목줄을 당기려 할 게요. 아예 이번 기회에 새로운 상국을 모시라고 저들의 조야(朝野)를 오가며 충동질하겠지.”
“만일 그렇다면, 우리 천조를 노린 실로 무서운 복안이라고밖에 평할 수 없겠군요.”
저들이 법국의 힘을 빌어, 이미 천진 앞바다에 진을 친 7개국에 동참하여 조정에 사과를 요구하면 어찌 될 것인가. 이미 조선을 자주국으로 승인해주었으니 열강들 앞에서 무어라 할 말도 없다. 그렇다고 한때의 속번(屬藩)에게 천조가 사죄하게 되면, 이는 그야말로 당우(唐虞, 요순)가 삼묘(三苗)를 정벌하고 오복(五服)의 제도를 세운 이래 지금껏 전해 내려온 천조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뜻한다.
“그저 조선왕이 그보다는 현명하기만을 바랄 뿐이외다. 저들이 비록 법국의 강성함을 믿고 미쳐 날뛴다 한들, 바로 옆의 대국을 어찌 감당하겠소? 그리고 구주의 정세는 조변석개하니, 새로 법국을 상국으로 모신다 한들 그들이 언제까지나 강성하리라는 보장도 없지요.”
이홍장의 머릿속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오가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법국의 힘이 빠지는 즉시 무언가 트집을 잡아 조선을 본래 맞는 자리로 돌려놓아야 하리라. 그리고 그러려면 필두에 서는 것은 그 이름을 무어라 하든 직례에 기반을 둔 군일 수밖에 없고, 마치 사교(태평천국)를 진압하며 상군과 회군이 이름을 날렸듯 이제 직례군이 이름을 날리며 조선의 실권까지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오게 되면, 아마 그대와 같은 인재들이야말로 아조의 동량이 될 터. 부디 수양하며 그날을 대비하도록 하시오.”
물론 그날이 오게 된다면 증국번은 이 앞날 창창한 제자에게 밀려나, 어디 시골 한 구석 한직이나 맡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충(忠)을 구하여 충을 얻었으니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있겠는가.
장동 김문이 김병학의 짧은 생각으로 말미암아 트집을 잡혀, 양회(시멘트) 공장을 세우고, 학교를 세워 이른바 공학(工學)을 가르치는 등 본디 나랏돈이 나가야 했을 일에 가산을 출연하고 있음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풍양 조문으로서도 세인들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무언가 겉으로나마 국운에 보탬 되는 일은 해야 하겠으되, 그간 곳간에 쟁여놓은 재화 더미를 헐어 없애기는 꺼려졌다. 그리하여 낸 꾀가 바다 너머로 장사하러 나간 나라 백성들을 지켜준다, 밑천을 대서 양인들이 하는 대로 회사라는 것을 차린다, 온갖 거창한 명분을 갖다붙이며 도고들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양이의 앞잡이로 몰려서 상인 다섯 명이 맞아 죽고, 그나마 동포나 교인들이 구하러 왔기에 목숨만은 건졌지만 평생 불구가 된 자는 기십에 달했다.
그리하여 그 가족들이 제물포에서 상경하여 원수 갚아주기를 호소하니, 투자한 가산이 허공에 날아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던 풍양 조문에서도 위문을 빙자하여 이들의 청원에 거들었다. 궁 앞을 소란스럽게 하면 쫓겨날 것이 뻔하였으므로, 대신 이들은 오늘날 도성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모여든다는 참의원 앞 거리에 모여들어, 지나가는 사람들 소맷자락 붙잡고 읍소하고 통곡하였다.
“하오니 마땅히 저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
국왕의 선량한 심성에 저런 절절한 호소를 지나치지는 못하리라 지레짐작한 벨로네가, 동정과 연민 가득한 얼굴을 연기하며 말했다.
“비극이 일어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가건만, 청국 공사 마 씨는 사죄는커녕 유감의 뜻조차 일언반구도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야 끈 떨어진 뒤옹박인 마신이가 함부로 종주국이 (한때의) 속국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침소봉대와 위선의 달인인 서구 외교관에게는 이만큼 완벽한 먹잇감이 없었다.
“이로써 저들의 속마음이 명백해지지 않았습니까? 제 본국 프랑스를 포함해 일곱 나라의 함대가 천진 앞바다에 나아가자, 그제서야 저들 정부는 사죄도 아니요 협상에 나섰습니다. 저들의 뻔뻔함이 이와 같습니다.”
마치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벌어다 준 테헤란 시절의 입담이 돌아온 것 같았다. 외교관으로서의 정중함이 열기에 취해 사라지면서, 열정적인 제스처가 한둘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동석한 사관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벨로네의 뒤통수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저 중국에게 따르는 겉모습을 취한 전하의 정부의 결정은 존중하는 바입니다만, 이제는 결단의 때가 왔습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저 무례하고 야만적인 자들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겠습니까?”
숙고하던 귀남이 마침내 물었다.
“그대의 말대로 한다 합시다.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제물포에 머물고 있는 전하의 해군을 시켜, 일개 중대, 아니, 일개 소대라도 좋으니 병력을 천진 앞바다로 보내게 해 주십시오. 중요한 것은 실제 무력이 아닙니다. 이 나라 조선이 더 이상은 청국의 야만적 정권에 복종하지 않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것이지요.
이는 청국을 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유럽 국가들이 청국의 발전과 문명화를 위해 지난 삼십 년간 부단히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나쁜 친우라면 적어도 엄히 꾸짖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도움이 바로 진정한 우정이요 도의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조선은 중국 대신 프랑스에 목줄이 채워지는 것이다. 물론 짧은 시간 내에 2개 연대나 되는 근대적 무력을 길러낸 점은 조금이라도 칭찬할 만한 구석이 있지만, 결국 군대를 이루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돈이다.
중국이라는 거인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군비를 져야 할 것이고, 그럴수록 프랑스에 기대게 되리라. 차관과 기술원조로 적당히 친불 국가로 만들어버리면, 이만한 카드가 없게 된다. 딱히 뜯어낼 자원도, 제대로 된 시장도 없는 이 나라의 쓸모라면, 그 위치, 그리고 국왕을 따르는 충직한 신민들이었다.
그렇게 되면, 몇몇 허풍선이와 공상가의 주장대로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철도가 개통하지 않는 한, 프랑스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영국은 물론이요 러시아까지 누를 수 있게 된다. 비록 열강의 군대에는 못 미친다 해도 근대 무장을 갖춘 병력 수십만을, 그것도 북경과 만주, 연해주를 동시에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주둔한 병력을 고스란히 손아귀에 넣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군인이 공장에서 찍혀나오지는 않는 법이니 그 전에 조선이 먼저 무너져버리거나 (지금까지 벨로네가 보기로는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프랑스가 먼저 무너져버린다면 (제 정신 박힌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희박한 가능성으로 여길 것이다) 겨우 극동에 마련한 세력 거점을 허공에 날려버리는 격이지만 그럴 공산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벨로네로서는 자신의 실적에 흠이 가기 전에 이 업적을 발판삼아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진다면 군사고문관이나 자신의 후임자 잘못이지, 자신의 잘못은 아니니까.
지난 며칠간 갖은 잔머리를 굴려 여기까지 이른 그의 마음속 계산을 복기하면서, 벨로네는 청년 왕의 답을 기다렸다.
“이 일로 이미 우리 조정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소.”
그렇다 한들 최종 결정자는 눈앞의 이 속 알 길 없는 젊은이다. 처음 조선에 왔을 때는 권력의 핵심인 줄로만 알았던 섭정공도, 그 다음 근대화의 실무를 도맡던 박 총리도, 휘두르는 힘만 보면 나라의 권력자인 것처럼 보였지만, 도성에서 눈칫밥 먹은지 오 년차 된 벨로네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전혀 권력을 탐하지 않는 이 젊은이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라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권력이 드디어 말했다.
“그대 말대로 청국을 우리가 나서서 도와줄 필요는 있겠구려. 잘잘못을 가리고 원통함이 없게 하려면 일개 소대는 물론이요 일개 중대로도 부족함이 있을 것이오. 곧 조정에서 방침을 논의할 것이니 그대는 그리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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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아편전쟁 이후 중국 내부로의 기독교 선교는 더욱 적극성을 띄었습니다. 교세를 빠르게 늘리기 위해, 주요 도시에서 선교사들은 병원, 고아원·탁아원 등을 운영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반기독교·반서양 정서가 팽배한 와중에 실제 능력 이상으로 거대하게 일을 벌리면서, 열악한 환경의 시설이 많이 생겼고, 이로 인해 수용된 어린아이들이 사망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선교사들이 어린아이를 납치해 잡아먹는다거나, 심지어 눈과 뼈를 뽑아 건물을 짓는 데 쓴다는 등의 섬뜩한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이미 천진교안 2년 전의 양주교안(揚州敎案)에서도 있던 일이지요. 여담으로, 이 일도 증국번이 맡아서 처리했습니다. 태평천국으로 떠서 천진교안으로 몰락했으니, 출세의 시작과 끝에 모두 기독교의 영향이 있던 셈이지요.
증국번의 속을 썩이는 만주족 충허는, 작중에 나오다시피 북양대신(북양통상대신) 직위의 전신인 삼구통상대신 자리를 맡고 있었습니다.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프랑스 영사 퐁타니에에게 적반하장의 태도로 일관하면서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퐁타니에도 썩 공손한 태도로 나오지는 않았겠지만) 사건의 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교안의 책임을 지고 프랑스로 ‘사죄대신’으로 다녀오게 되고, 이후 신강의 이리 지역을 놓고 러시아에게 땅을 내어주는 협약을 체결하는 바람에 투옥된 뒤 막대한 군비를 헌납하여 겨우 죄를 면했습니다. 여러모로 청말의 무능한 만주족 고관 스테레오타입에 부합하는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실제 역사에서도 서태후는 만주족 관료들이 주도권을 쥔 총리아문이나 삼구통상대신 충허에게 교안의 처리를 맡기는 대신, 지방관으로 내려가 있던 한족 관료 이홍장과 정일창(丁日昌)을 불러와 증국번을 보좌하여 서구 열강과 교섭토록 하였습니다. 물론 감시역 비슷하게 만주족 청린(成林)을 붙이기는 했습니다만.
또한 실제 역사에서도 1868년 공친왕은 영국 공사 올콕(John Rutherford Alcock)과 교섭하여 천진조약의 개정을 시도했습니다만, 마찬가지로 실패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영향력을 다시 확대해보려던 공친왕은 다시금 좌절하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