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경사스러운 복을 찾아서 (2)
근엄한 대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김병학이 가져온 사진 조각을 감상하는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희극의 한 도막 같았을 것이다.
“허어, 대감 말씀마따나 참으로 재주가 신묘하외다.”
“안쪽의 모습도 휘황하니 실로 천고에 없던 모습이오.”
이항로 같은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옆에서 그런 사치스러움에 넋이 나가서 되겠느냐고 한 소리 했겠지만,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은 바로 그 사치를 지금껏 즐겨온 세도가 사람들이 태반이요, 그들의 뒤를 이어 세도 누려보고자 환로에 나선 이들이 또 나머지의 태반이다.
“이곳이 아라사 임금의 동궁(冬宮, 겨울궁전)이라 하였소? 그 추운 땅에서 건물을 이리 높게 지으면 전각 위쪽에는 구들장을 못 깔 터인데, 방에 불을 지피는 기물이 따로 있는 게요?”
물론 개중에는 그저 감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원리를 물어보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조회에서 귀환을 보고하고 난 뒤 받아온 예물과 사신들이 마련한 진상품을 함께 올리니, 임금이 이런 기이한 물건들은 홀로 감추어둘 수 없는 법이라며 뭇 대신들도 보고 가라고 아량을 베풀어준 것이다. 물론 귀남이야 태반이 이미 익숙한 물건이므로 딱히 미련이 없던 것이었지만.
“흠흠, 좌우지간 상께서 이런 토목의 법대로 경사(京師)도 수선(首善)으로서 위엄을 되찾게 하라 전교하셨으니 만세의 지복(至福)을 누릴 기틀이 될 것이외다.”
“아, 어찌 그렇지 않겠소? 나 또한 초야에 있을 때부터 자못 안타깝게 여겼는데, 마침내 법궁의 위엄을 되찾게 되었소이다.”
운현궁에서 대원군이 뛸 듯이 기뻐했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그의 앞잡이 노릇하는 한계원과 강노가 한 마디씩 덧붙였다.
대원군으로서는 불감청(不敢請)일지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금상이 보위에 오르자마자 어떤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바로 착수하려던 경복궁 중건의 대업이다. 그러다가 서원의 일로 한 번 미루어지고, 그 다음에는 양요의 일로 정국이 소란하였고, 마침내 금은이 터져나오나 싶더니 그마저도 의외로 신통치 않았다. 듣기로는 금맥이 확실히 거하게 있기는 하되 기계를 들이고 캐낸 금광을 내오기 위하여 길을 내는 것만으로도 몇 년이 걸릴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어쩌면 하늘의 운수가 자신의 대에는 꿈을 이루는 것을 허용치 않음인가 싶어 단념하고 있는데, 엉뚱한 데서 말이 나왔다. 심지어 김병학이 나랏돈이 국외인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가산을 털어 장인을 모으고 재주를 배워오게 할 것이니 공사의 대업을 맡겨만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마음 같아서는 체통이고 뭐고 버리고 병학과 병국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 주고 싶었으리라.
물론 참의원에 모인 잡배들이 어떻게 고매한 선비들까지 꼬셔서 의론을 한데 모아 반대의 뜻을 올렸다고는 하지만, 나라의 주인 되는 임금이 당장 저 섭영(사진)을 보고서 매우 좋으니 저대로 하라고 직접 하교하였은즉 그 기세가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도 같았다.
반면 전교하는 옥음을 직접 들은 박규수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라 하여도 과장은 아니리라. 예가 아님을 알면서도 조회가 파하자마자 곧장 편전으로 향하였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물론 궁을 새로 지어 종실의 위엄을 높임도 가당하오나, 지금 나라의 살림은 병자가 겨우 고식(姑息)의 지경에 이른 데 불과하니 병석에서 완연히 일어난 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마침 참의원정 민치상도 엊그제 오고 간 논의에서 중론이 모두 중건에 반대함을 아뢰던 터였다. 대원군이라면 모를까 아직껏 고집스럽게 무언가를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주상이었으니 마땅히 뜻을 거두어주리라 기대하였다.
그런데 웬걸.
“총리대신이 우려하는 바는 알겠으나, 어차피 이루어야 하는 사업이오.”
귀남의 본래 생에서도 서울살이가 수십 년이었으니, 광화문 뒤에 경복궁 있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광화문 앞을 새로 뒤엎은 이후로는 부담스러워 쉽게 드나들기도 뭐하였지만, 그래도 그가 터전으로 삼던 동네의 바로 옆 아니었던가.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그런 궁궐은 있기는 했으되 불타 터만 남은지가 벌써 이백 년이 넘었다 했다. 그렇다면 필경 자신의 대에 다시 지은 것일 테니, 아마도 언젠가 궁을 지어야 할 이유가 생기리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먼 길 다녀온 김병학이 저렇게 기특하게 나서서 사업을 벌일 것을 건의할 뿐 아니라 자신이 그 중책을 맡겠다 자임하고, 운현궁에서도 절절하게 궁을 중건할 것을 역설하는 글월이 전해오니, 지금이야말로 그때로구나, 일어날 일이 일어났구나 생각하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구려. 참의원에서도 그렇고 총리대신도 그렇고, 내가 궁궐만 새로 짓자 한 것도 아닌데 굳이 이 일만 걸고 넘어지는지 알 수가 없소이다.”
엉뚱한 첨언에 박규수도, 민치상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경들도 전 좌찬성이 바친 섭영 속의 모습을 보지 않았소이까? 가문의 위세를 동원하여 그런 웅장함을 이 나라도 갖추게끔 하겠다 진언하였으니 그저 기특할 뿐이고, 실로 궁의 이름만큼이나 경사스러운 운수(慶運)요 환히 아름다운 복(景福)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러면 궁궐 그림을 가져온 것을 보고 저대로 하자고 한 것이, 궁궐을 새로 짓겠다는 말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여전히 의혹 서린 좌중의 낯빛에, 자신보다 총명한 대신들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였음을 오히려 의아히 여기게 되는 귀남이었다.
“음, 아무래도 내 마음에 품은 뜻이 그대들에게 잘못 전해진 듯하구려. 경들에게 다시금 얘기해주도록 하겠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오히려 많이 알게 되면 너무 많은 것이 보이기에 놓치는 부분도 생기기 마련이다. 화려한 유럽 궁궐의 사진에 탄복하는 대신들도, 혹 사치하는 기풍이 생겨날까 우려하는 선비들도 그리하여 정작 귀남이 착안하였던 부분은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이다.
귀남이 보기에 건물이 고작 삼·사층인 것은 결코 놀랍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 오기 직전의 서울은 물론이요, 전쟁 끝나고 상경한 직후에도 그 정도는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았던가. 여러 사람의 눈을 홀린 화려한 실내 장식도, 애초에 그런 화려함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살았던 귀남에게는 그저 눈요기에 불과하였다. 물론 때가 된 듯하니 궁도 새로 짓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보다도 더 시급해보이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병학이 들고 온 사진에서 귀남이 눈여겨본 것은 무엇이었는가? 차근차근 설명해주니 임금의 심산에 탄복하고, 또 한 번 좌절을 겪을 운현궁 대원군과 김씨 형제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여 은근히 고소함을 느끼는 박규수였다.
대원군에게도 그간 사온 예물들을 올리려 운현궁으로 향하던 김병학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얼핏 보니 허리는 꼿꼿하게 세웠지만 행색은 남루하고, 분위기는 근엄하기는커녕 경망스러워 요새 저잣거리에 유명한 참의대부들 아닌가 싶었다.
설마 범한테 덤비는 하룻강아지마냥, 이제는 자기네 세상이 되었답시고 자신을 성토하러 온 것인가 싶었는데, 저들의 눈빛을 보니 또 그러지는 않았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감! 저희는 대감께서 그런 심모원려를 품고서 상감께 말씀 올리신 줄도 모르고, 그저 음해하기에 바빴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신하는 나라의 국운을 더욱 창성하게 만들고자 장구지계를 말씀하신 것인데 소생들의 식견이 짧아 그저 궁궐을 짓는 일로만 알았습니다. 과연 나라의 손꼽히는 명문거족다운 계책이요 마음가짐이라 아니 하겠습니까!”
대체 무슨 말을 늘어놓는 것이냐, 허튼소리는 관두고 얼른 비켜라. 이렇게 말하기에는 저들의 눈에 서린 동경의 마음이 너무나 명백하였다. 그저 허허 웃으며 공치사로 응대하였다.
겨우 저들을 돌려보낸 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고자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 수소문하였더니, 아뿔싸, 일을 그르친 것도, 무른 것도 아니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태가 커져 버렸음을 알았다.
제 의도가 아니었음을 속히 변명해야 할 듯하여, 길을 재촉해 운현궁으로 달려갔더니, 반가워하거나 들뜨기는커녕 허탈한 얼굴의 흥선대원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요 근래 내가 죽기 전에 경복궁을 보고 갈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다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지기는 하겠으되 정말로 세상 뜨기 직전에나 보게 되었으니, 사람 사는 일을 미리 알 수 없음이 이와 같구려.”
알고 보니 어전에서 임금이 자신을 치하하며 했던 말은 궁궐을 새로 지으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했다. 아예 한성 전체, 나아가 국토 전체의 길을 뜯어고치고, 그러고 난 뒤 화룡점정으로 궁궐을 완성하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당장 길바닥에서 장사하던 사람의 눈에 화려한 누각이 먼저 들어오겠는가, 그 앞의 잘 닦인 대로가 먼저 보이겠는가? 물론 이왕 있는 길이니 주변의 건물들도 그럴듯하면 금상첨화이리라 여기고서 옆의 궁궐까지 싸잡아 ‘이러한 성세를 갖추도록 하라’ 지시한 것이었다. 그런 사정까지 알 수 없는 김병학은 그저 당황할 뿐이었지만.
급히 생각해보니 자신도 섭영을 바치면서 ‘이 풍경대로’ 하자고 하였으니 임금이 자신의 뜻을 잘못 해석하였다 둘러댈 수도 없고, 또 이미 가산을 털겠다고 제의하였은즉 기군망상(欺君罔上)이라 탄핵받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 내뱉은 말을 물릴 수도 없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공사가 아니요, 저들의 재주를 익혀 능히 본래 알던 것처럼 할 수 있어야 이런 성대한 전각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니, 우선은 헌상한 그림 속의 너른 대로와 광장을 정비하는 일부터 시작하라고 하교하셨다 합니다.”
지금도 부담스러운데 차마 임금이 어리석게도 자신의 말뜻을 곡해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민치상이 참의원에 가서 이 내막을 전하였는지, 앞서 자신의 길을 막은 뜨내기들은 물론이요 기정진 같은 사람들까지도 고맙다며 글로써 자신들의 마음을 전해 왔다.
‘무릇 도로의 편리함이란 나라가 평온할 때는 농상(農桑)을 이롭게 하고 위급할 때는 병비(兵備)에 도움이 되는 법이오. 이제 양전과 명전법으로 나라의 전답이 마치 정전(井田)의 구획과 같이 되어 길을 막는 뙈기밭이 정리되고, 나라의 병비가 점차 갖추어지면 외란이 있을 때 적도가 쉽게 드나드는 폐단이 없어질 것이니, 길을 새로 닦아 만민의 이로움으로 삼을 법하오. 그러므로 공의 시무책은 시의적절하기 이를 데 없고, 가산을 털어 이를 돕겠다 하였으니 그 충의는 고금에 드물다 하겠소.’
사실 먼길 나서본 사람들이라면 나라에서 길을 좀 더 잘 닦았으면 좋겠다고 하나같이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길은 좁고, 여름에 물이 불어나면 좁은 개울이라도 건너기가 어렵기 그지없다. 수레는 언감생심이요, 지게꾼 삯도 헐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초야의 선비들은 왜 각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길을 닦게 하지 않느냐고 답답히 여기어 종종 글로 이를 성토하기도 했다. 옛적에 ‘허무맹랑한 글이지만 이런 얘기도 있음은 알아야 한다’며 어른들이 읽게 시킨 『북학의(北學議)』에도 나와 있을 만큼 유명한 얘기였다.
하지만 막상 위정(爲政)하게 되면 이를 실제로 옮기기는 어려운 법. 백성에게 부역을 지게 하기는 어렵고, 한 번 닦아놓은 길은 저자에서는 금방 가가(가건물)가 좀먹고 산야에서는 큰물이 닥칠 때마다 흐트러지니 지금껏 나서서 하려는 자가 없었다. 금방 폐단이 드러날 것이 명백한데 누가 나서겠는가?
“할 수는 있는 일이오? 내 소싯적 한미하던 때 나름대로 여기저기 발품을 팔며 유람해 보았는데, 그때 보니 관에서 도로를 정비한다고 하면 끽해야 이미 있는 대로를 쓸고 닦을 뿐, 이듬해에는 고스란히 원래대로 돌아갔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제가 구주 각국에서 보니 도로에 정교하게 포석을 깔아 수레가 오고 가기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석회로써 물이 못 들어오게 막으니, 여름마다 길이 망가지는 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전국의 도로가 작은 길까지 합하면 족히 수만 리는 될 텐데, 모두 석회를 깔기 위해서는 들어가야 할 석회만 해도 몇 관이나 될지 알 수 없소. 방도가 있겠소?”
“양이들은 무엇을 만들든 기계로써 한 번에 많이 만들기를 좋아하니 이것도 찾아보면 방도가 있을 법합니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풀어 대국에 건너온 자들 중 그런 재주를 아는 이를 구하여야 하겠지요.”
만약 예전에 누군가 병학에게 와서 전국의 도로에 석회를 깔자고 하였으면,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서 흰소리 하는 광인을 함부로 들여보낸 문객을 엄히 꾸짖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입에 맞지 않는 음식으로 요기하며 매일같이 배멀미에 시달린 보람은 있어, 인정하기는 싫어도 안목이 트이기는 한 듯하였다.
“그렇다니 다행이오. 그리고 궁궐의 일도 아예 재론치 말라는 식으로 끊어버리지는 않으셨으니 위안으로 삼아야겠지. 그대의 집안에도 해롭지만은 않을 게요.”
그렇다. 성가시기는 해도 한 번 참의대부들의 마음을 얻었으므로, 곧 저들이 제 고향으로 글을 써 소문을 퍼뜨리게 되면, ‘영초(김병학) 대감이 바깥 세상을 다녀오더니 사람이 바뀌었다’, ‘장동 김문이 주인이 바뀌더니 다시 나라의 동량이 되었다’ 운운하는 얘기가 가담항설(街談巷說)로 나돌 터.
그리고 비록 한 번에 목돈이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도성의 대로부터 시작해 족히 수십 년은 걸릴 대사업을 도맡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가세에 도움은 될 것이다. 단, 성공한다는 전제 하에.
“그렇지만 이제 이 일의 성패에 이 모자란 몸을 비롯해 문중 전체의 광영이 걸리게 되었으니 어찌 마음고생이 없겠습니까. 물론 이 일을 꾀함에 있어 조종의 위엄을 높이려는 충심만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 ‘충심’이라는 것이 대원군의 환심 겸 가문의 이익임을 알고 있는 대원군만이 동정하는 눈빛으로 위로해줄 뿐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오. 내 앞서도 말했지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세운(世運)의 차고 기움이외다. 혹시 아오? 이 일로 나중에 그대 문중이 크게 쓰일 일이 있을지?”
자신이 장동 김문을 위해 걱정해주는 현실이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풀 죽은 김병학을 막상 보니 또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어쨌든 자신이 경복궁 얘기를 한 것 때문에 스스로 코뚜레 꿰일 건을 만들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대 가문만 이런 짐을 짊어지라는 법이 있겠소? 이 일이 선례로 남게 되었으니, 훗날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다른 집안들도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게요. 속된 말로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소이까.”
그리고 그런 매 맞을 일을 김문이 나서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오랜 속담을 마음 한구석으로 새기게 되는 김병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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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열악한 도로 사정은 개화기 외국인들의 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지요.
우선 조선이 아예 도로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명색이 제대로 된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국가로서,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도로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았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도로의 ‘관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근대적 관념과 거리가 멀었을 듯합니다. 어쨌든 사람이 두 발로만 갈 수 있으면 도로다, 이렇게 생각했을 공산이 큽니다. (사신이 오가는 평안도와 황해도 쪽 대로는 제외하고요.)
그리고 중간에 잠깐 언급되듯, 여름철에 강우가 집중된 자연환경과, 소규모 토지가 복잡하게 얽힌 토지소유 구조, 그리고 도시의 경우 대로를 닦아놓으면 빈민들이 가건물을 임의로 세우는 문제 등의 사회적·경제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 정부가 도로 유지보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는가, 알아도 하지 못한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 애매하지만 둘 다 해당사항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넘어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