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48화 (48/320)

16. 경사스러운 복을 찾아서 (1)

“형님! 어흐흐흑!”

제물포 부둣가. 발아래로 찰랑거리는 진짜 바다 위에 명문가 사람들의 눈물바다가 펼쳐졌다.

나라가 열린 이후로, 어쩌면 삼한 땅에 처음 나라가 세워진 이후로 가장 멀리 갔다 돌아온 조선 사람들일 가족들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 사이에는 형 병학을 찾아온 김병국도 있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어디 유배 갔다 온 것도 아니고 나랏일로 해외 만국을 순방하고 오는 길이니, 입궐하기도 전에 사사로이 친족을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은 예에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마음고생하는 명문가 대신들을 안쓰럽게 여긴 주상이 조회에서, ‘사절단이 이미 상해(上海)에 기항하였다 하니 맞이하러 갈 자들은 먼저 만나도 좋다’ 하며 특별히 허여한 바 있어, 거창하게 환영하는 예를 갖추지는 못할지언정 거리낌 없이 떳떳하게 나와 기다릴 수 있었다.

“인석아, 학동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되어서 이리 눈물을 보인다는 말이더냐.”

가볍게 꾸짖는 시늉을 하는 김병학의 눈에도 물기가 그렁그렁하였다. 처음 배 타고 멀어지는 뭍을 보았을 때만 해도 속으로든 겉으로든 통곡하였던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그만큼 돌아와 친족의 무사함을 보았을 때 치밀어오르는 감동도 한량없었다.

“어서 돌아가자. 너도 할 얘기가 많을 테고 나도 흉중의 이야기를 모두 풀자면 사흘 밤낮도 부족할 터이니.”

짐 보따리도 풀리고 이야기 보따리도 슬슬 풀렸다. 멀리 인정 치는 소리 은은히 울릴 무렵이 되어서야 병학이 기념품으로 여기저기서 사 모은 신기한 기물들 소개가 거의 끝났다.

행장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병학이 또 무언가를 꺼냈다. 보니 종이 단자처럼 생겼는데, 검고 흰 색으로 정교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바로 섭영(攝影. 사진)이라는 물건인데, 사물의 그림자를 붙잡아서 그림으로 만드는 기물이 있어 거기서 뽑아낸 것이다. 양인들은 어느 나라에서든 이 섭영 찍기를 좋아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찍어대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영 께름칙함이 있어 사양하고 대신 그곳 건물들을 찍은 것만 추려 가져왔다.”

어렸을 적부터 패설 속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하던 아우다. 이국의 풍경이 눈앞에 놓이자 예상했던 대로 달려들어 바로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허, 정녕 도깨비 조화가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이런 것들을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웅장하기 이를 데 없군요.”

물론 그런 건물을 찍은 것들만 챙겨온 덕도 있겠지만, 병학도 처음 파리니 비특혁(比特革,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니 하는 서양 제국의 도성에 이르렀을 때는 눈이 돌아감을 금치 못하였으니 아우의 심정이 족히 이해는 되었다.

“조심히 다루거라. 우리 문중을 다시 일으킬 비책(祕策)이 바로 저 몇 장에 있다는 말이다.”

무릇 화(禍)가 극에 달하면 복(福)으로 돌아가는 문이 열리고, 운수가 막힘이 극에 달하면 또 통할 구멍이 생기는 법이다. 병학 본인도 그 상황에서 이런 계책을 떠올린 것이 대견하여 지금도 종종 스스로 기특하게 생각하고는 했다.

뭔가 비상한 생각이 나오리라 직감하였는지, 아우도 곧장 그림을 내려놓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네 말을 들어보니 그 사이 나라가 또 시끄러워, 아직 대원위 합하께서 큰 꿈을 모두 이루지는 못한 듯하구나. 일찍이 교우하던 우리나 알고 있지 아마 환재 대감은 물론이요 성상께서도 이 뜻은 모르실 것이다.”

지금껏 알던 고대광실들을 모두 시골집 외양간으로 보이게 하는 으리으리한 궁궐들 모습을 보고서 형의 말을 들으니 병국도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경복궁 중건 말씀이십니까?”

“어디 거기서 그칠까. 정동 공사관 옆 별궁도 원래는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이라 하여 꽤 성대한 궁궐이었다 하는데, 이제 그 주변에 국외인의 왕래가 잦으니 어찌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

“아우의 식견이 얕아 아직 형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책이 무엇인지 짐작되지 않습니다. 물론 금상께서 잠저에 계실 적 대원위께서 종종 농으로 경복궁 말씀을 하기야 하셨다지만, 그것과 문중의 가세는 무슨 맞닿음이 있는지요?”

“생각해보거라. 나라에서 거하게 토목(土木)의 역을 벌여 궁궐을 짓는다면 거기에 소모되는 국용이 적지 않을 터. 그렇다면 나라의 곳간을 헐어 잡인들에게 그대로 넘겨주느니 차라리 사직의 기둥이 될 법한 우리가 이를 받아서 낭비되는 것은 줄이고 새로이 짓는 것은 더욱 성대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 그리하면 나라와 우리 문중에 모두 이롭지 않겠느냐?

그 사이 너도 전답을 팔아 새로 문중 명의의 공장을 짓는다 하며 이것저것 판을 많이 벌린 모양이던데, 물론 이것도 훌륭하기는 하다만 다른 집안들은 물론 상고(商賈) 무리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것 아니더냐.”

토목사업을 대규모로 벌이도록 유도하고 그 사업권을 따내어, 이익을 챙기겠다는 심산. 요컨대, 현대인의 말을 쓰자면 정경유착이었다. 물론 김병학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외국인들이 나라의 법궁(法宮)에까지 손을 대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가문이 나서는 편이 낫다 여겼기에 아무런 문제를 못 느꼈지만.

“근자에 대국에도 양인들이 늘어 저들 방식대로 집과 전각을 짓는다고는 들었습니다. 그쪽을 수소문하면야 저들의 술기나 사용하는 기구를 들여옴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만...”

“이 형이 이런 얘기를 하니 해괴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으냐?”

그 말대로, 늘 근엄하고 정도(正道)를 툭하면 입에 답던 형이 이런 계획을 내어놓으니 병국은 적잖이 놀란 듯했다.

“내 바깥을 돌아다니며 느낀 바가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장차 사해 천지가 오랑캐의 손에 넘어갈 것은 어쩔 수 없음이야. 그러하면 우리가 아무리 옳은 길을 지킨다 한들 손에 쥔 위세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그리고 그 위세란 곧 병기의 예리함과 금은의 풍성함에 있는데, 전자는 우리 문중이 군권을 잃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후자는 지금이라도 언제든 얻을 수 있지 않으냐.”

문중의 흥성함이란 결국 나라의 주인 되는 임금의 마음을 얼마나 잘 움직이는지에 달려있다고, 가문을 이끌어갈 후진으로 자라난 병학과 병국은 소싯적부터 못이 박히도록 배워왔다. 그런데 서양 각국의 사정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한미한 집안의 사람도 어떻게든 치부(致富)하여 가세만 일으키면 나라의 명사로서 이름을 날리고, 심지어 국정에까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인품이라면 모를까 인재로는 다른 세족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장동 김문이라고 못할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금상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어언 여섯 해가 되었거늘 아직껏 대원위께서 법궁 중영(重營)의 뜻을 이루지 못함은 아마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내 입궐하여 서방 각국의 예를 따라 궁궐로써 군주의 위엄을 높여야 함을 아뢴다면 어찌 우리에게 힘이 다시 실리지 않겠느냐.”

김문의 두 형제는 이번에야말로 꾀하던 대로 일이 돌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엉뚱하게도 참의원에서 트집이 잡히고야 말았다.

그 사연을 살피자면, 두어 달 전, 그러니까 기사년(己巳, 1869) 초여름 대단한 난장판으로 끝난 첫 번째 참의원 모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할 것이다.

박규수도 그렇고, 참의원 소식을 들은 기정진 이하 유림도 그렇고, 처음에는 덕행과 학문으로 이름 높은 산림의 원로들이 모여 국정에 도움 되는 이야기를 하는 모임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은, 유수부든 일개 현이든 상관없이 진사 이상의 사람을 뽑아 올리게 하면서 생긴 파급효과였다.

나라에서 선비를 우대한 지 오래이므로, 삼남과 기호의 고을들은 비록 학통이나 당색이 다를지라도 적당히 이름 있는 유생들을 선발하여 명단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서원들끼리 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안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고을에서 모 선생의 문인이 참의대부로 이름을 올리게 해 주면 저 고을에서는 그 반대편에 있는 모 진사를 일괄적으로 지지하는 식으로 자발적인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그로부터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상황은 판이해졌다. 평소 왕학(王學. 양명학)을 즐겨 닦아 다른 유생들로부터 은근한 백안시를 당하는 강화도 선비 이시원(李是遠) 같은 경우는 그나마 나았다. 요 몇 년 사이 급히 학문을 닦아 이름만 진사라 할 수 있는 향리 겸 쌀장수 안인수(安麟壽)가 같은 향리들을 동원해 자신의 이름을 올리게끔 만들었던 해주부의 사례도 있었고, 송상 앞잡이 노릇하는 사람이 떡하니 대부 자리를 얻게 된 개성유수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예 선비가 없다시피한 북변 고을들의 사정은 더 심각했다. 심지어 경흥부에서는 벼슬을 사직하고 경흥 개시(開市)에서 아라사인들 상대로 장사판 벌이던 전 아오지 만호 이백능(李白能)이 당당하게 상경하기까지 했다.

만호(萬戶) 벼슬도 비록 무반이라지만 진사 이상의 자리는 맞았고, 하필 참의대부의 인선에 관이 일체 개입하지 말고 그저 선출된 자의 이름만을 올리라는 엄명이 있었기에 경흥부사나 관찰사가 이를 중간에 막지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평소 향회(鄕會)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을의 수령과 향리들이 제 고을 참의대부가 입을 놀릴까 두려워해 갑자기 미곡과 면필 떼어먹기를 중단하고 심지어 그간 축재한 데서 떼어 도로 반납하였으므로, 곳간에 쟁여둔 쌀이 갑자기 불어나고 섞어둔 겨와 자갈이 낱알로 둔갑하는 도술 같은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갑자기 나라의 재정은 풍족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으므로, 다들 자신이 생각한 계책대로 무언가 일을 벌려보자며 떠오르는 대로 마구 내어놓았던 것이다.

게다가 처음으로 갖추는 제도이므로 조정에서 의장 격으로 나온 참의원정(參議院正) 민치상도 이 난장판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손 놓고 방관하고 있으니, 결국 근엄한 선비들 대신 목소리 큰 잡인들이 설치게 되었다.

“이제 그간의 양전과 명전법의 시행으로 세수가 크게 늘었으니, 이제는 각 도의 명망 높은 서원들을 간추려 다시 면세의 은전을 내림이 가할 것입니다!”

“나라의 재보로 천하에 유명한 것은 오직 인삼입니다. 이제 나라의 재정이 튼튼해졌으니, 포삼에 물리는 세를 감면하여 더욱 그 융통을 권면하고 천하의 이로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뒤에 누가 있는지 뻔히 보이는 주장을 펼치는 자는 그나마 나았다.

“이제 신법으로 나라의 기강이 도로 섰고, 이어서 나라의 재정이 풍족해질 단초를 얻었으니, 마지막으로 병(兵)을 갖출 때입니다. 북변의 포수는 정예하기가 천하의 제일입니다. 그러나 땅이 척박하고 물산이 곤궁하여 평소에 생업으로 삼는 이들이 아니라면 그 재질을 갈고 닦지 못합니다, 삼남의 남는 재정을 북변으로 보내 오직 싸우는 술수에만 매진할 여건을 갖추게 해 준다면, 필히 나라를 평온케 할 법도가 될 것입니다.”

이백능이 이런 소리를 내어놓자 비슷하게 강계, 갑산 등지에서 올라온 무반들이 호응하였다.

“옳소! 거기에 더해 민보(民堡)의 논의에 맞추어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다시 싸우는 방도를 알도록 매달 하루씩 수령 방백의 통솔에 따라 훈련토록 합시다.”

“매달 하루는 너무 적소! 군포 낼 나이가 된 모든 사내들이 일 년간 종군하여 무비(武備)의 일을 배우고 익히게 한 뒤, 매년 한 달씩은 훈련케 해야 할 것이오!”

멋모르는 몇몇 남쪽 선비들이 무반들 말대로 하여 강병 수십만을 얻게 되면 중원을 되찾을 수 있게 되니 좋지 않겠느냐 하며 찬동의 뜻을 표했지만, 작년의 소동을 익히 알던 기정진의 눈총을 받고서 그나마 자중하였다.

“오늘날 오랑캐는 바다를 건너오므로, 그 선박이 참 빼어납니다. 그런데 바다는 배가 오가는 곳일뿐 아니라 한없는 수족(水族)이 산출되는 보배로운 터전이기도 합니다. 나라에서 농군들을 챙겨준 은혜를 바닷가 백성들에게도 베풀어, 서양 배를 어선으로 바꾸어 내어준다면 뭇 백성의 삶이 풍족해질 것입니다.”

제주도 대정과 정의에서 올라온 두 사람이 어색한 서울 말씨로 말했다.

딱히 나라에 급한 시무가 없어 끽해야 이(理)와 기(氣)의 관계라든지, 올바른 수신의 방도 같이 고상한 주제가 의론되리라 생각했던 기정진 이하 유생들은 그런 얘기는 온데간데없고 백성을 군사로 훈련해야 한다는 둥 나라에서 고기잡이를 진흥해야 한다는 둥 하는 소리가 오가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러던 중 귀국한 전 좌찬성 김병학이 어전에서 경복궁 중건을 논의하였다 하니, 이처럼 지리멸렬하였던 논의가 그로부터 두달 뒤에는 거국적으로 일치되게 되었다.

“기껏 나라의 수용(需用)이 부족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를 궁궐을 짓는 데 쓰게 되면, 우리가 어떤 정책을 상께 아뢰든 실행할 수 있는 여력이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반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느새 첫 모임 이후 삼남과 기호의 유생들이 한 무리를 짓고 그 외 사람들이 다른 무리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 중 ‘그 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좌장 비슷한 무언가로 올라선 이백능이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수로 따지면 유생 무리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세만은 높았다. 삼남 유생과 같은 편에 서기는 뭐하지만 그렇다고 차마 선비라 하기 어려운 자들과 함께 서기도 저어되었던 사람들도 애매하게 이백능의 편 근처를 서성였다.

그러자 삼남 유생들의 눈은 마찬가지로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어느새 자신들의 좌장격이 된 기정진에게 자연스레 향했다. 잠시 고민하던 기정진은 결국 지체 낮은 사람에게 찬동하는 격이 될지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무릇 인군의 위엄이란 덕에서 나오는 것이지, 궁궐의 화려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오. 비록 그대들이 지금껏 내어놓은 주장에 흠결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겨우 얻은 국용의 여유를 치세의 말단에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그 뜻은 취할 만하다고 여기오.”

애초에 호사스런 궁궐을 짓는다, 그것도 외국의 예를 따라 거창하게 짓는다는 말에 찬동하는 사람을 어찌 제대로 된 선비라 부르겠는가.

빠듯한 나라 사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인 박규수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맞은 격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운현궁에서 손을 쓰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탁지(度支)의 일을 맡아보는 젊은 신료들과 서리를 닦달해, 오늘 어전에서 김병학이 아뢴 대로 했을 때 발생할 지출을 계산케 하고 있던 박규수에게, 넌지시 다가온 오경석이 말했다.

정작 경복궁 짓기를 염원하는 사람은 전혀 손을 쓰지 않았는데 경복궁의 일이 다시 나라의 화두가 되어버렸으니 아마 당황스럽긴 했겠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서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답답하구려. 고작 한 해의 세수가 늘었다고 벌써 이런 얘기가 나온다니. 명전법으로 매입한 토지는 모두 대가를 어음으로 내어주었으니 따져보면 나라의 빚이요, 더구나 또 언제 천재지변이 닥쳐 작황이 바닥을 칠지 모르는 일이건만.”

물론 그도 어렸을 적 광화문 너머 빈 터는 왜 빈 대로 내버려두는지 궁금히 여기기는 했다. 그 내막을 들었을 때는 자못 안타깝게 여기기도 하였다. 종친인 대원군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라의 위신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휼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지금까지 국정의 쇄신이 지나치게 잘만 이루어졌기에 다들 깨닫지 못하는 듯했지만. 이를 알면서도 쾌재를 부르고 있을 대원군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여 절로 한숨이 나왔다.

--- *** ---

조선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것은 오경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나라로 사행 가 있는 동안 프랑스 공사관에 청탁을 넣어 초상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행사들이 들여온 서양 기물들이 늘 그러하듯, 아마 잠시 이야깃거리는 되었을지언정 진지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카메라의 전신인 바늘구멍상자(카메라 옵스쿠라) 정도는 정약용이 언급할 정도로 조선에서도 알고 있었으니, 카메라 자체라면 모를까 사진은 그렇게까지 신기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법도 합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대원군 집권 때까지 잊혔다고 흔히 생각하곤 하는데, 실제로는 공식적인 궁궐, 즉 법궁으로서의 기능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종종 임금이 나아가 사당 터를 참배하기도 했고요, 과거 응시자가 많을 때는 경복궁 터에서 시험을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예산 부족을 핑계로 숙종 시기 지방에서 연쇄적으로 올라온 경복궁 중건 상소가 무시되는 등 중건의 의지가 전반적으로 없었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이백능은 실존 인물입니다. 1869년 아오지에서 군사와 백성들이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했지요.

이시원은 정제두의 학풍을 이은 강화학파의 일원입니다. 원 역사에서는 강화유수부가 1866년 프랑스군에 함락되자 형제 이지원과 함께 자결하였습니다.

안인수는 아마 생소한 이름일 듯합니다. 하지만 그의 손자 안중근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안인수의 출신을 살피면 말이 많습니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해주 미곡상으로, 씀씀이가 인색하여 고을 전체에 악명이 높았다고 합니다만 출전이 출전인만큼 뒷부분은 당연히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치부에 성공한 사람은 맞는 듯하며, 1874년 기호 일대 유생들이 올린 연명 척사소 말단에 유학으로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아 향촌사회 내에서도 어느 정도 높은 지위까지 오른 듯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