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랑캐의 도의 (2)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전회통(大典會通)』이 나오자마자 증보되게 생겼다는 소식은 팔도 방방곡곡에 퍼졌다. 워낙 통리아문의 위세가 등등하여 매일같이 혁파되는 제도가 있다 보니, 전국의 이재에 밝은 이들이 뭉쳐 도성 소식을 각지 군현으로 퍼 나르는 장사를 시작한 덕이었다. 문장을 지을 것도 없이 통리아문에서 순보(旬報)로 직접 글을 써서 행인들이 널리 볼 수 있게 하였으니 그저 베껴서 발 빠른 사람들끼리 주고받으면 될 일이었다.
임금은 총리대신 박규수에게 하교하기를, ‘세력 있는 자들의 핍박 없이 견식 있는 선비들이 거리낌 없이 생각을 나누고 중의를 모아 간언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라 하였다. 박규수가 조금 더 서양 사정에 밝았더라면야 영국이나 법국 공사관에 찾아가 물어봤겠지만,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이미 명전법으로 자칫 곤욕을 치를 뻔한 처지에 또 서양식 기구를 만든다 하면 반응이 어떨지는 불문가지인즉, 결국 자신만의 고안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똑같았을 터이다.
이제는 오경석마저도 쉬이 믿을 수 없어 한 보름을 홀로 끙끙댄 끝에 차대(次對)할 적에 물어보았더니, 임금은 무언가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각 군현에서 유력한 사람을 한 사람씩 추천받아 참여하게 하면 언로가 트이고 좋지 않겠느냐고 일러주었다.
그 결과, 이른바 참의원(參議院)은 진사 이상의 사람으로 실직(實職)에 있지 않은 자를 각 군현에서 추천하여 종4품 참의대부(參議大夫)로 임명, 도성에서 정기적으로 회동하여 사안을 논의토록 하기로 하였다.
물론 제대로 된 선거제도를 만든다든지, 각 군현에서 어떻게 군말 안 나오도록 사람을 추천케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애초에 그런 점이 문제로 불거지리라는 데 생각이 닿지 않았으므로 따져보자면 엉성한 면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림은 학통과 당색을 불문하고 호응 일색이었다.
“현량과(賢良科)의 실질은 살리고 폐해는 끊어 없앴으니, 성총의 밝음이 일월과 성한(星漢, 은하수)에 뒤떨어지지 않소이다! 그대 나라도 마침내 국법을 크게 바꾸어 옛 잘못을 바로잡는다 하였는데, 이런 제도를 참고하면 틀림없이 이루어내는 바가 있을 것이외다.”
허리는 굽었지만 기세로 보나 몸가짐으로 보나 여전히 한창때 같아 바닷바람 맞고 자란 해송(海松)을 연상케 하는 기정진이, 왜국 공사 승해주(勝海舟, 카츠 카이슈)의 소개를 받고 왔다는 정상형(井上馨, 이노우에 카오루)이라는 젊은이 앞에서 신나게 제 나라 자랑을 늘어놓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현량과가 무엇인지 그대는 모를 수도 있겠구려. 이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삼백오십 년 전, 그러니까 정덕(正德) 연간의 일인데...”
그러잖아도 어찌 제도가 정해지든 선생만한 사람이 없다며 고을의 모든 선비들의 추대를 받아 미리 상경한 기정진은 한껏 기가 올라 있었다. 게다가 이 왜인 젊은이는 제 나라에서 경장의 실무를 맡고 있다지 않은가. 제멋대로 배움을 청하러 왔다고 단정한 기정진이 조란환 날아가듯 입을 놀리니 통역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었다.
“... 그리하여 천거된 이가 실무에 어두운 폐단은 아예 실무를 맡기지 않고 의론만 하게 함으로써 없애고, 그러면서도 천거의 아름다운 뜻은 오롯이 살렸으니 오히려 정암(靜庵. 조광조)의 창안보다도 나음이 있다 하겠소.”
마침내 숨 돌릴 틈을 타, 이노우에가 본론을 내놓았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가 될지 모른다며 빨리 말할 것을 채근하는 듯한 통역의 눈빛이 처량하였다.
“흠흠, 제가 선생을 찾아온 것도 실은 그 때문입니다. 선생의 명성은 바다 건너까지도 퍼진바, 선생의 뜻을 긴히 여쭐 일이 있어서지요.”
“바다 너머에서 배움을 청하러 온 젊은이의 물음을 어찌 내버려두겠소? 편하게 물어보시오.”
“제가 듣기로 조선국은 해동의 승지(勝地)로 예로부터 문헌을 고루 갖추어, 오늘날에는 중화의 빼어남을 홀로 갖추었다고 자부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청국을 북로(北虜. 북녘 오랑캐)의 무리로 보면서 숭정(崇禎) 연호를 지키는 나라가 중원을 수복하거나, 스스로 높여 칭제(稱帝)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니 무슨 연유입니까?”
해송의 껍질처럼 자글자글한 기정진의 잔주름살이 갑자기 한데 모여 내 천(川)을 이루었다.
“이는 나라의 중대지사니, 국외인과 더불어 말할 사안이 아니오. 그런 일은 내 알더라도 함부로 말할 수 없으니, 그리 알고 물러가도록 하시오.”
예상대로의 반응이 나왔다. 카츠가 일러준 두 번째 말을 내보일 차례였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이제 일대 경장을 이루어, 잘못된 구례를 바로잡고 새로운 법도로서 안으로는 백성을 고루 살피고 밖으로는 세계 만국과 통교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담아 새로이 연호를 제정해 명치(明治, 메이지)라 하였으며 국호도 그에 맞추어 일본제국을 칭하였으니, 저희 또한 귀국과 마찬가지로 바다 동쪽에서 문물과 인재로 중화와는 다른 경지를 이루어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제국이라는 칭호야 일전 가나가와(神奈川) 때부터 쓴 것이지만, 엄연히 서양과 수교할 때만 그리 자칭하였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실상이야 어쨌든 지금 공식적으로 일본은 겐큐(建久) 연간 이래 처음으로 조정이 직접 일본 전국을 다스리고 있지 않은가.
“이미 작년에 통교하면서 우리 두 나라는 형제의 나라이되 어느 한 쪽이 형도 아우도 아님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가 이제 자립하는 나라에서 자주(自主)하는 나라임을 천명하였으니, 마땅히 귀국도 함께 일어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허! 그만하시오. 그대의 말대로 우리가 안으로는 소중화(小中華)를 일컫는 것은 맞소. 하지만 그러니 더더욱 참람되게 스스로 높일 수는 없는 법이외다. 그대 나라도 국호와 건원의 문제를 재고함이 좋을 것이오.”
이쯤 되면 축객의 뜻이다. 어차피 카츠도 한 번에 성공하리라 여기지는 말라 하였지만, 눈앞의 이 노인이 지금 조선 팔도에서 가장 명망 높은 자라 하여 나름대로 기대가 있었는데, 이처럼 물정 모르는 얘기를 하니 다소 실망스러웠다. (물론 마음 한 구석으로는 여전히, 칼도 차지 않은 서생이 어떻게 명망을 떨칠 수 있는가 싶어 조선의 문약함을 비웃는 면도 있었다.)
물론 지금 도성에 모여드는 선비가 이 기 무어라 하는 노인뿐이 아니요, 필히 이보다 더 식견은 좁고 마음은 옹졸한 사람이 있을 테니 적당히 꼬드기면 안 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렇게 되었다. 영묘조때 칭제건원의 소를 올렸던 것으로 이름 – 또는 악명 – 높은 김약행(金若行)의 외증손 이면호(李沔鎬)가 마침내 선조의 예를 따라 상소를 올린 것이다.
“태백산에서 봉선(封禪)하고 오조에 휘호(徽號)를 소급해 올려야 한다니, 정녕 제정신으로 이런 망령된 글을 올렸단 말입니까?”
그렇잖아도 국서에 당당하게 칭제건원한 대로 정직한 국호와 연호를 써서 왔기에, 봉정한 국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놓고 머리가 아파오던 터였다. 그저 동래부 왜관을 통해 덜렁 글만 왔다면 모를까, 작년에 보낸 수신사의 예를 따라 직접 사절이 제물포로 찾아왔는데 돌려보낼 수도 없지 않은가.
박규수도 소식을 듣고 혼잣말로 탄식할 정도였으니, 운현궁에서는 더 격렬한 반응이 있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으리라. 오죽했으면 직접 본인이 찾아왔을까.
“참으로 답답한 일이지만, 익문사에서 이르기를 여항과 향촌의 무리들 중에도 이렇게 불온한 생각을 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다 하오. 이 상소에 비답을 내리든, 내리지 않든 조만간 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까 두렵구려.”
청국 흠차대신이 없을 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대국 귀에 들어갈까 노심초사해야 하는데, 떡하니 모화관에 마신이가 상주하고 있고, 심지어 지금도 국서의 접수를 놓고 일이 멈춘 틈을 타 직접 마 대신과 저쪽의 암창(岩倉. 이와쿠라 토모미)이 교섭을 벌이는 중이다.
그리하여 그렇잖아도 복잡다단한 상황인데, 이렇게 눈치 없이 칭제건원을 입에 담아버리니 마치 왜국이 맞먹으려 드는 데 덩달아 조선까지 청에 대드는 꼴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오. 국사를 도맡아보는 우리네야 나라가 처한 위중함을 알지만, 저자의 백성은 누구에게 물어보든 바야흐로 태평성세가 열리고 있다며 큰소리치고 있을 게요.”
기실 백성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나아졌는가, 하면 물론 세도가가 전횡하고 매일같이 민란이 일어나던 때보다야 낫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격양가(擊壤歌) 부를 때는 아니다. 그러나 근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나라의 사람들이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 것이다.
처음에 개혁을 한다며 설칠 때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천주쟁이들이 교첩을 받고서 활개치고 다닐 때 흘겨보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잘은 모르겠지만 나라가 바다 건너에서 왔다는 법국을 물리치고, 승전의 댓가로 엄청난 금은(차관)을 받아내고 삶을 편리하게 하는 기물까지 들여왔다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뒤이어 있는지도 몰랐던 나라의 대신들이 찾아와 입조하고, 심지어 북녘 땅에서는 국초 이래 잠자고 있던 금맥이 발견되기까지 했다. 도참(圖讖)을 숭상하던 무지렁이들 사이에서는 흥선군이 정 도령이 써야 할 묫자리를 훔쳐낸 덕에 국운이 활짝 폈다는 황당한 이야기까지 돌고 있지 않던가.
거기에 그런 헛소리를 막아주어야 할 산림들조차 반절은 대원군 자신이 뿌린 북벌 소리에 혹해버리고, 나머지 반절은 참의원을 만든다 하여 또 정신이 팔려버리니, 결국 뿌린 대로 거두는 셈이었다.
“양패구상입니다. 저들이 청국과 어찌 교섭하든, 우리로서는 국서를 받아도 문제, 받지 않아도 문제입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저들이 노리던 것인지도 모르겠소. 나를 도와주는 문객들이 말하기를, 사절단 따라온 정가라는 왜인이 참의원의 일로 상경한 시골 선비들을 따라다니며 불측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하더이다.”
박규수는 설마 나라의 이름을 걸고 사절로 온 자들이 그런 술수를 부릴까 싶어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권력을 위해 언제든 더러운 짓을 할 각오도, 실제로 그랬던 전적도 넘쳐났던 대원군은 슬슬 머릿속에서 일의 전모가 맞추어지는 느낌이었다.
“훈련대장(신헌)이 그때 상께 아뢰기를, 왜국도 민심이 극히 어지러워 온갖 난행이 벌어진다 했소. 망령된 이름으로 나라의 위세를 도로 갖추었지만, 대국의 간섭은 두려우니 우리를 끌어들여 대신 싸움을 붙이려는 것일지도 모르오. 오랑캐가 오랑캐를 막기 위해 우리를 오랑캐로 쓰는 격이지.”
이이제이(以夷制夷)란, 남들끼리 다투도록 만들 때야 음흉한 재미가 있지만 자신이 당하는 입장이 되면 당연히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뒤에서 일을 꾸미는 자가 진짜 오랑캐일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대국 조정에서 조선을 주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 나오게끔 할 방도는 없겠소?”
“마 대인이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다 한들 지금 도성 저자에 오가는 얘기를 귀로만 담고 내보내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어쨌든 대국의 입장에서 보기에 이는 영락없이 속방이 역심을 품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끼리 알아서 정숙케 하라는 예부 자문(咨文)이 내려온다던가 할 공산은 얼마나 되겠소?”
“아마 열에 아홉은 그렇게 할 것입니다. 듣기로는 아직도 대국에서는 교안(敎案. 종교 관련 사건사고)이 잦고, 새로 지은 기기창에서 화포가 나오고는 있지만 그 정교함이 양이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일전에 복멸(覆滅)한 관군의 빈자리도 크다고 들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아직 조선에 없겠지만, 적어도 매년 북경을 오가는 사신들에게 있어서는 맞는 말이었다. 막상 서양과 통교해보니, 하루아침에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이 아님을 적어도 제정신 박힌 고관이라면 어느 정도씩은 알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옛날 같았으면 보이기는커녕 추호도 있으리라 의심치 않았을 빈틈과 약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익문사 같은 조직이 아직 나라의 경계를 넘어가지는 못하므로 그 외에 전해지는 소식은 상인들이나 국외인들을 통해 들어올 뿐이지만, 딱히 청국이라고 자신의 사정을 감출 생각을 하지는 못하였기에 그 정도로도 아직까지는 충분하였다.
“하지만 합하, 그런 처분이 내려진다면 또 다른 진퇴양난의 형국이 될 것입니다. 나라에서 선비를 아끼는 뜻을 보여놓고, 막상 열어놓은 언로로 올라온 상소는 가납하기는커녕 글 쓴 자들을 색출해 처벌하게 된다면 어떤 뒷말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면 처벌하는 척만 하고 적당히 둘러댄다면 어떻겠소?”
“마 대인이 앓아누워 인사불성이 된다면 모를까, 보는 눈이 있거늘 어찌 그렇게 쉽게 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랬다가 대국의 성미를 건드려 더 큰 처분으로 이어지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진다. 개화라는 말로 뭇 사람의 기대를 끌어모아 여기까지 온 흥선군이다. 그런데 나라의 문을 열어 모두가 잘 먹고 잘 살게 되리라 믿고 있는데, 결과가 그 반대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옛날처럼 나라의 문을 걸어 잠갔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이미 나라의 빚은 많고 지금 당장 융통할 수 있는 곳은 없는 형국이다. 제물포에서 오가는 인삼, 의주에서 오가는 설탕과 소금. 이 정도만 끊어져도 타격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다. 여차하면 박규수도 누르고 홀로 권력을 누려보겠다며 야심차게 북벌 두 글자를 암암리에 떠들어댄 것이 누구였던가. 나라가 도리어 오랑캐 편으로 돌아섰다고 여기게 된다면 불어닥칠 파란은 앞의 경우에 비해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예 저 불란서 무관들이 가르치고 있는 별기군(別技軍)을 창끝 삼아 요동 벌판에 한 번 들이박아봄은 어떻겠소이까?”
돌아오는 것은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하는 눈초리였다. 아마 그 자리에서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넘어 사십불가론이라도 늘어놓을 수 있겠지만, 대원군의 체통을 생각해 참은 것이리라.
던지는 농과는 달리 속으로는 진지하게, 만약 자신이 아들 따라 찾아온 오경석을 내보내고 박규수 대신 산림의 선비들과 손을 잡았더라면 차라리 사정이 더 낫지 않았을까 고민하게 되는 대원군이었다.
박규수도 마찬가지로, 나라의 명운을 걸고 대업을 도맡느니 그저 재동 사랑방 터주대감이나 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그때 입궐하여 주상으로부터 개화의 대의를 전교받았을 때를 회상하며 과거를 되새김질하던 찰나였다.
마당 백송 사이로 북악산 산바람이 내려와, 창호 사이를 비집고서 외풍 되어 들어왔다.
“바깥에 찬 바람이 부는군요.”
“그야 곧 상강(霜降)이니 당연한 일 아니겠소이까.”
그리고 겨울에는 또 군밤만한 게 없다. 주상께서 구워주시는 군밤이라면 더더욱. 이 씁쓸한 오랑캐 세상에 어쩌면 달달한 구수함이야말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뾰족한 계책을 찾아 뇌리를 뒤지던 마음이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다.
“신하로서 감히 꺼내기 어려운 말이지만, 어제군밤의 비기(祕技)를 또 한 번 보여야 할 때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합하께서 혹시 잘 말씀 올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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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호(李沔鎬)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실제로 김약행의 외손으로 학문에 힘써 나름대로 이름을 남긴 이재의(李載毅)의 아들뻘 되는 사람이라는 설정입니다.
김약행은 영조 시기 급진적 소중화주의의 아이콘 격인 인물입니다. 외왕내제도 아니고 아예 대놓고 멸망한 명나라 대신 황제국이 되자는 주장을 펼쳤지요.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비슷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여럿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의외로 현실주의자들은 물론이요 정통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명분의 문제였습니다. 엄연한 제후국으로서 누가 시켜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스스로 황제국으로 자처할 수 있냐는 것이지요. 이는 후일 원 역사에서의 칭제건원 때도 최익현 등이 동일하게 반복한 주장이었습니다.
한편, 국정에서 세력이 부족해 밀린 쪽을 배려하려는 귀남 할아버지의 선의로 인해 어쩌다 보니 삼권분립 중 입법과 행정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단초가 생겨버렸습니다. 하필 ‘참의대부’가 종4품인 이유는 기존 품계의 체계에서 종4품부터 대부의 칭호를 붙이기 때문입니다.
원 역사에서 청일수호조규는 1870년 천진 교안으로 수십 명의 프랑스인이 살상당한 상황에서 체결됩니다. 이로 인해 최혜국 대우나 영사재판권 조항이 빠지고, 양국 군주의 도장 없이 전권대신들끼리 서명하는 등 여러모로 일본의 양보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양국의 대등한 지위 확인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역사에서는 (아직은) 그 정도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급한 건 어떻게든 막부의 외교적 실책을 만회하여 집권 정당성을 확보하여야 하는 일본 측이 되어버렸지요. 이를 위해 마침 솟아나는 조선의 여론을 이용하는 그럴듯한 계책을 펼쳤습니다만, 과연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요?